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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인문 환경

민통선 마을은 1954년 민통선이 설정된 이후, 한국 정부가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 및 대북 심리전 효과 증진을 위해서 장병들과 영세민들을 이주시키며 조성된 지역이다. 민통선 마을은 파주 비무장지대 내 위치한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통제 보호구역에 위치한 파주 백연리 통일촌 외 8곳을 포함하여 총 10개 마을이 있다. 민통선 마을은 한때 112곳에 달했지만, 민통선이 3차례나 북상하면서 현재 10곳만이 남게 되었다. 민통선 마을에서는 주로 농업을 하며 DMZ 일원 천연기념물과 유적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민통선 마을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이주시키며 조성한 마을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문화적 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질 문화가 서로 동화되고 흡수되며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또한 주민들과 군인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초기에는 군인과 주민의 관계가 다소 수직적인 관계였지만 차츰 주민의 권리가 인정되면서 수평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

민통선 마을은 설립유형에 따라 자립안정촌, 재건촌, 통일촌, 전략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기와 위치, 구성원에 따라 설립목적이 조금씩 달랐으나 현재는 그 개념이 희석되었다.

1. 대성동 자유의 마을(경기도 파주시)

경제활동

현재 대성동 마을 주민의 생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논농사이다. 마을 전체의 논 면적은 약 52만㎡이고 쌀생산량은 연간 약 2,250톤이다. 이 외에도 콩, 팥, 고추 등을 재배하며 수입을 얻고 있다.

역사

남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DMZ) 내에 있는 마을이다.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500m 떨어져 있다. 6.25 전쟁 당시 피난 갔던 주민 일부가 귀향하며 마을이 만들어졌다. 국내 최고 높이 99.8m의 국기게양대가 설치돼 있고 가로 18m ‧ 세로 12m의 대형 태극기가 펄럭인다. 마을에서 2km가 채 되지 않은 곳에 북한의 ‘기정동 마을’이 있다. 기정동 마을 역시 대남선전 마을로 158m 게양대에 북한 인공기가 걸려있다. 전쟁 전 대성동 마을의 행정구역은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였다. 1962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현재는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다.

특징

대성동 마을은 정전협정 제10항에 의해 국제연합군사령관에서 관할했다. 2000년대 들어서며 판문점 경비 임무가 한국군으로 이양됐고 대성동 마을 관리 임무도 함께 넘어왔다. 하지만 대성동은 여전히 유엔사 민사규정이 우선한다. 따라서, 대성동 마을 주민은 대한민국 4대 의무 중 납세와 국방의 의무가 면제다.

2. 백연리 통일촌(경기도 파주시)

경제활동

예로부터 기름진 옥토와 깨끗한 물과 공기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 콩, 인삼은 장단 3백이라 하여 임금님께 진상되던 품목으로 파주시에서 특산품으로 지정하였다. 장단콩과 파주개성인삼을 지역 특산물로 재배하면서 안보 관광 마을로 거듭났다. 매년 11월에 ‘장단콩 축제’를 개최하고 파주개성인삼 축제가 열린다.

역사

1972년 5월 대통령의 적십자 전방사무소 순찰 시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농촌을 건설하라.”는 특별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를 모델로 하여 1973년 8월 건립되었다. 제대군인 40세대와 실향민 40세대 총 80세대가 입주했다. 입주 당시, 약 200㏊ 경지가 제공됐으나 1982년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 등록과 보존 등기에 관란 특별 조치법’이 시행되면서 경작자인 백연리 주민과 원토지 소유자 간에 소유권 분쟁이 일기도 했다.

특징

마을의 주변부에 도라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 등 안보ㄱ 관광지가 존재하며 덕진산성, 덕진당, 서곡리 고분벽화, 동파리마애불, 허준선생묘 등 유적지가 산재하고 있어서 관광객의 출입이 많다.

3. 동파리 해마루촌(경기도 파주시)

경제활동

밭농사를 주로 하며 인삼과 콩을 재배한다. 이외에도 오이, 호박, 약초 등을 재배하여 수입을 얻고 있다.

역사

고(故) 김대중 대통령 때인 1998년 햇볕정책에 따라 다른 마을에 비해 뒤늦게 조성되었다. 실향민 1세대와 이 지역 연고자, 총 60가구가 입주했다. 6․25 당시 민간인 소개(疏開, 이리저리 분산시키는 것) 작전으로 고향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해 뜨는 마을이란 뜻의 지명 ‘동파리’를 우리말로 풀이해 마을 이름을 지었다. 장단군 진동면 동파리였으나 분단 이후 파주시에 편입됐다.

특징

1세대 실향민을 대상으로 조상한 마을이어서 현재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다. 동파리 인근에는 허준선생의 묘역, 신라 경순왕릉, 덕진산성, 마애사면석불 등 유적과 사적이 있어 고적 탐방에 적격인 장소다.

4. 횡산리 마을(경기도 연천군)

경제활동

우리나라 전체 율무생산의 70%를 생산하는 대표 율무생산지이다. 주로 임진강 주변의 산비탈을 개간하며 율무농사를 짓는다.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개간하여 율무, 콩, 고추 같은 농사를 짓고 있다.

역사

횡산리는 임진강 지류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횡산리라는 이름은 마을 북쪽에 있는 비끼산의 명칭을 따서 만들었다. 본래 연천현 북면 지역이였으나 1914년 중면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후 수복되었고 남방한계선에 인접한 지역이라 처음엔 출입영농만 허락되어 1977년 10세대가 입주해 농사를 짓고 살았다. 토지 원 소유자들이 돌아오지 않아 갈 곳 없는 사람들과 제대군인들이 주로 들어와 살았다. 1986년 행정리로 승인되면서 41가구가 입주해 살기 시작했다.

특징

안보관광의 명소인 태풍전망대가 인근에 있다. 북한 황강댐 무단 방류에 맞서기 위해 2006년 공사를 시작한 군남댐이 2010년 완공됐다. 마을 일부가 수몰되는 과정에서 주민이 이주하기도 했다.

횡산리 마을

5. 양지리 마을(강원도 철원군)

경제활동

오리 농법, 우렁이 농법과 같은 친환경 농법을 이용하여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벼 이외의 기타 작물들은 소비할 만큼의 양만 소규모로 생산한다.

역사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을 위해 조성된 마을로 초기에는 본인 소유의 땅이 3천 평 이상인 사람만 입주 가능했다. 입주 뒤 척박했던 땅을 개간해야 했던 것은 동일하나, 입주자 대부분이 자신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민통선 마을에서 보여지는 심각한 토지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남쪽에는 한탄강이 흐르고, 마을 주변에는 광활한 철원평야가 펼쳐져 있어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독수리, 두루미 등이 매년 이 지역에서 월동 한다. 지역 주민들은 철새마을 자원봉사대를 결성하여 철새 보호 운동에 앞장서고 있어 외부로부터 ‘철새마을’로 불리고 있다.

특징

양지리는 해마다 겨울이면 철새들이 찾아오는 주요 철새도래지다. 먹이주기 행사 등 주민들이 앞장서 철새를 보호하며 철새마을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민통선이 해제된 곳에 축사가 들어서며 수질오염과 악취를 유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철새도래지는 물론 양지리 마을까지 위협받고 있다. 제2땅굴, 평화전망대, 노동당사가 주변에 있어 안보 관광이 활발하다.

양지리 마을

6. 이길리 마을(강원도 철원군)

경제활동

철원평야에서 철원오대쌀을 생산하며 배추, 버들골 오이, 태양초 고추, 버들골 찰옥수수 등을 생산하고 판매하며 수입을 얻는다.

역사

이길리 마을은 정연리 마을에서 분리되어 나온 마을이다. 한국전쟁 이전 정연리 마을은 평강군에 속해 있었으나 1954년 10월 21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철원군에 이양되었다. 그 뒤 1972년 갈말읍에 편입되었고 1979년에 60여 가구가 분가해서 만든 마을이 이길리 마을이다. 버들골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6년 홍수로 마을이 모두 수몰되는 참사를 겪은 뒤 정연리 1, 2반이 기존 마을에서 북쪽 산기슭으로 이주하여 신정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특징

휴전선 트레킹, 농촌체험, 철새 탐조 등 마을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강원도가 공동으로 주관해 2013년 1년 동안 마을 조사가 이뤄졌다. 마을역사, 생활상과 전통 등을 사진과 글로 기록해 마을박물관을 꾸몄다. 양지리와 더불어 두루미가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두루미 자는 마을’로 불린다. 마을 곳곳에는 두루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7. 정연리 마을(강원도 철원군)

경제활동

청정 고추와 쌀(오대벼)을 주로 생산하고 이를 통해 수입을 얻는다. 마을 자생조직으로 정연 고추작목반, 정연 오대쌀 작목반이 존재한다.

역사

6.25전에 평강군 남면이었던 곳으로 다른 민북마을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된 마을이 아니라 고향주민들이 직접 세운 마을이다. 전쟁 후 동송읍 화지리, 이평리, 갈말읍 지경리, 토성리 등에 살던 주민들이 출입 영농을 통해 단계적으로 이곳에 들어오다 1971년 12월 10일 재건촌을 건립했다. 한탄강 상류인 화강과 한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주택 60동을 건립하고 120세대가 입주하였다. 출입 영농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졌었고 1979년 68세대가 이길리로 분가하였다.

특징

1996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수해로 피해를 입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철길이 남아 있다. 고령인구가 많아 2014년부터 건강장수마을 사업을 하고 있다.

8. 유곡리 마을(강원도 철원군)

경제활동

주로 벼농사와 고추 농사를 짓는다. 고추 마을로 불릴 정도로 고추를 많이 재배하고 그 상품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이 외에도 토마토, 피망 등을 재배하기도 하며 콩, 들기름, 배추 등을 택배를 이용하여 판매한다.

역사

1973년 정부가 체제 강화 목적으로 통일촌이라는 이름 하에 민간인 30세대와 군인 30세대를 입주시켰다. 철원 군청에 입주신청을 하고 심사를 통해 입주했는데 경쟁률이 15:1 정도였다. 입주 초기 논 3천 평, 밭 3천 평, 소 한 마리를 나누어 주었다. 1983년 특별조치법 이후로 토지분쟁이 시작되어 주민들 대부분(자기 땅을 갖고있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된다)이 임대료를 지불하고 농사를 지었다. 소유자가 없는 땅은 국유지 상태로 되어있다.

9. 생창리 마을(강원도 철원군)

경제활동

벼농사와 고추 농사도로 주로 수입을 얻는다. 또한 간간히 소를 키우는 곳도 볼 수 있다.

역사

생창리는 1970년 103가구가 입주하였다. 생창리 출신의 원주민 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대한 군인 출신으로, 예비군의 성격이 강한 마을이었다. 입주 초기에는 예비군의 역할과 농사일을 병행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은 여느 민통선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생창리의 토지분쟁은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특별조치법이 시행되고 나서 주민들이 개인이나 국가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러나 2000년 들어와서 원소유자가 일제시대 등기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들이 벌어졌다. 특별조치법 시행 초기에 국가와 개인이 미복구땅에 대해 임의로 등기를 내고, 그것을 다시 주민들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렇게 토지 분쟁을 겪기도 했다. 대부분 주민들이 임대료를 내고 농사를 짓고있다.

특징

2016년 5월 철원 DMZ평화생태공원이 개장했다. DMZ를 조망할 수 있는 13km 십자탑 코스와 9km의 생창리~용양보 코스 2곳의 생태탐방 코스를 조성 운영 중이다.

생창리 마을

10. 마현리_1,2리 (강원도 철원군)

경제활동

마현 1, 2리는 남으로 대성산 북으로는 천불산, 비조봉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일조량이 풍부하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다. 이러한 이유로 당도 높은 과채류가 생산된다. 90년대 후반부터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2000년대부터 파프리카, 토마토, 고추 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역사

마현 1리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집을 잃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당시는 강원도) 주민이 1960년 이주해 정착한 마을로 ‘철원 속의 울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울진 근남면을 따 이름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마현 1리와 달리 마현 2리는 민통선 북방 전략촌을 만들고, 유휴농경지를 개발해 식량을 증산할 목적으로 1968년 8월 조성됐다. 연립주택 30동을 지어 60가구가 입주했다. 입주민은 인근 군부대 제대 군인 출신이었다.

특징

2003년 당시 마현리는 전체 884명 중 20명가량의 지뢰 사고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산 천불산 자락에는 남북 분단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승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에서 금강산 철도, 아침마을 등 북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민통선 마을 가구수 인구수 표

※ 자료:평화와 생명의 DMZ, 국립수목원/녹색연합,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