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는 어떻게 남과 북의 경계가 되었을까요?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식을 선언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한반도는 잠시 해방의 기쁨을 맛봤을 뿐 더 복잡한 위기상황에 놓이게 됩니다.1945년 12월에 열린 미・영・소 3국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 한반도를 신탁통치하는 문제에 관해 협의합니다. 이로 인해 신탁통치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던 한반도는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북한은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은 남한을 해방시켜 통일을 성취한다는 명분으로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일으킵니다. 민족 간에 총부리를 겨눈 채 밀고밀리던 전쟁은 1951년 6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가 공산군 측에 정전회담을 제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회담 결렬과 재개를 반복한 끝에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대표와 북한・중국 대표 간에 정전협정이체결되면서 남과 북 사이에 DMZ가 만들어져 끝내 통일이 아닌 분단의 상황을 맞이하고 맙니다
DMZ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1960년대에 들어와 DMZ는 점차 중무장 지역으로 변했습니다. 북한은 북쪽 DMZ 안에 광범위한 요새진지를 구축하고 무장공비를 남파하는(1968년 1월 21일 일어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인 ‘1・21사태’) 무력 도발을 감행했으며 1976년 8월 18일에는 판문점에서 ‘도끼 만행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후로도 북한은 도발을 멈추지 않고 정전감시기구(중립국감독위원회※) 무력화마저시도해, 자국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속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감독관들을1993년 이후 차례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는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기관입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판문점에 중립국감독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전협정 체결 상대국 중 유엔군은 스위스·스웨덴감독관을, 북한·중국은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감독관을 파견했습니다.
DMZ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비무장지대인 DMZ를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노력들은 냉전・탈냉전 시기를 불문하고 다양하게 시도돼왔고 여전히 의미 있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냉전 시기에 있었던 대표적 제안으로는 1971년 6월 12일의 ‘DMZ의 평화적이용’ 최초 제안(군사정전위원회), 1988년의 ‘DMZ 내 평화시 건설’ 제안(노태우대통령)을 들 수 있습니다.이와 같은 제안들은 탈냉전 시기에 들어오면서 DMZ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과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1991년의 ‘DMZ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남북 최초 합의(남북기본합의서)’ 도출,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성사된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 2004년 12월개성공단에서의 첫 제품 생산 등이 그 결실입니다.
DMZ의 새로운 가치와 달라진 위상을 알아봅시다.
DMZ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천혜의 생태환경을 지닌 지역이자 통일의꿈을 품은 한반도 역사박물관입니다.(DMZ 서쪽 끝인 한강 하류와 그 주변 지역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한반도 역사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던곳이기도 합니다.) DMZ가 지닌 역사성은 물론이고 이 땅이 품은 자연 역시 이제는 어느 한쪽도 포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가치가 돼버렸습니다.지난 역사와 현재 역사, 그리고 천혜의 자연이 공존하는 DMZ를 평화로 통일된 땅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