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프롤로그, 임진각에서 1. 분단의 땅 위에 새긴 평화누리의 꿈 …………… 7 2. 녹슨 증기기관차 앞에서 …………… 13 철책선을 따라 길은 나뉘고 3. 그 길의 동행, 철책선과 철교 …………… 19 4. 길에서 만난 얼굴들 …………… 24 5. 통일대교에서 에코 뮤지엄까지 …………… 31 강과 바다, 그리고 섬이 하나가 되는 길 6. 오디가 익어가는 언덕 …………… 37 7. DMZ생태의 보고, 초평도와 마주 서다 …………… 45 8. 잊혀진 전설, 덕진산성 …………… 50 9. 하나의 길, 세 번의 역사 …………… 55 10. 철책선의 낭만, 임진강변의 오솔길 …………… 63 11. 천 년 전 배다리의 추억, 임진나루 …………… 69 임진나루에서 장산전망대까지 12. 보부상의 길, 장산재를 넘으며 …………… 81 13. 하늘을 이고 선 마루, 장산전망대에서 …………… 88 14. 매복로, 평화를 만나는 길 …………… 95 장단콩 익어가는 마을길 15. 장단콩 익어가는 장산리를 지나며 …………… 102 16. 마정리 마을의 정겨운 돌담길을 돌다 …………… 109

| 프롤로그 임진각에서 | 1. 평화누리의 꿈 2. 녹슨 증기기관차 앞에서

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7 아름다운 한강변을 따라 북으로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철 책선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즈음부터 길의 이름은 강북강변 로에서 자유로로 변한다. 분단의 상징인 철책선을 운명처럼 끼고 달리는 자유로. 그 길의 끝에 임진각이 있다. 파주 DMZ 길의 시작점이다.(길의 명칭은 추후에 정한 뒤 확정예정) 1 / 분단의 땅 위에 새긴 평화누리의 꿈

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9 오랜 세월, 한반도 남북대립의 긴장이 흐르는 분단의 상징 이자 냉전시대의 잔상으로 기억되어온 임진각.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던 이곳이 최근 평화누리(Imjingak Pyeonghoa- Nuri) 조성과 함께 국내외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변 했다. 임진각 안에 있는 약 100만m2의 광활한 벌판위에 들어선 평화누리. 분단의 상징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 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성되었다. 3천개의 바람개비 조형물이 서 있는 바람의 언덕을 비롯해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전시장과 북한을 위한 기부자들의 평화기원을 담은 돌무 지전시관,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과 수상카페,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파빌리온관에 등에 서 일 년 내내 교육적이고 유익한 전시와 공연이 펼쳐진다.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축제 미국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 서 가장 아름다운 곳 50선 중 하 나로 손꼽히는 임진각 평화누리 (Imjingak Pyeonghoa-Nuri). 5 월 임진각 어린이 축제, 10월 파주 개성인삼축제, 11월 파주 장단콩 축 제가 열리며 DMZ 체험프로그램과 DMZ자전거 투어 등 연중 다양한 프로그램과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1 평화누리의 등장이후 임진각은 단순히 분단의 상처만을 떠 올리게 하는 곳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향한 희망을 품게 하 는 의미 있는 곳으로 새롭게 다가가고 있다. 북에 두고 온 가 족을 향한 그리움과 아픔을 담은 망배단을 비롯해 2004년 등 록문화재로 지정된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이름도 생소 한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평화를 지키다 숨진 미국 병사들 을 기리는 참전비,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 환하여 ‘자유의 다리’라 이름 붙여진 오래된 다리와 그 다리 로 가는 길목에 진열된 수만 개의 평화기원 메시지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인 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Note

1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3 2 / 녹슨 증기기관차 앞에서 2007년에 이곳에 들어선 증기기관차는 2004년 등록문화 재 78호 지정됐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그해 12월 31일. 북상 하던 군인들을 위해 군수물자를 싣고 달리던 이 증기기관차 는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던 중 탈선했다. 당시 이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한준기옹(1927년생)의 증 언에 따르면, 탈선한 기차는 후퇴하던 연합군과 국군에게 발 견됐지만 북한군이 기차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던 연합군에 의해 다시 한번 폭파돼, 결국 지금의 머리 부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기차 표면에 남아있는 1,020여 개의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생생 하게 말해주고 있다. 증기기관차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5년 전. 아픈 역사도 역사이기에 교육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경기도의 적극적인 의지에 선두적인 문화재지킴이 기업인 포스코의 전문기술이 만나면서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포스코의 세계적인 복원기술로도 50년 세월의 녹은 다 벗 겨내지는 못했다. 전쟁1세대가 그러하듯 기관차도 나이를 먹 은 탓이리라. 하지만 마치 전쟁터의 노장처럼 기차는 지금도 분단의 강을 바라보고 굳건히 서 있다. 원래 평양역까지 달려

1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5 가야 했던 증기기관차. 이 기차가 달리지 못한 길을 언젠가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달려갈 그 날을 꿈꾸며, 반세기만에 우리 앞에 열린 파주 DMZ길을 걸어가 보자. 경의선을 타고 유럽을 가다 1927년 매섭게 추운 겨울 어느 날, 경 성(현재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한 달 만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기차 안에는 32세의 여성화가 나혜석(1896~1948년) 이 타고 있었다.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 가이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 었던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과 함께 세계 여행을 경험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여성이기도 하다. 예술적 안목을 한층 깊게 했던 여행, 나혜석이 파리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경 의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길이 518.5km의 복선철도, 1906년 개 통 이후 44년간 서해안의 남과 북을 있는 교통의 동맥이었다. Note

| 철책선을 따라 길은 나뉘고 | 3. 그 길의 동행, 철책선과 철교 4. 길에서 만난 얼굴들 5. 통일대교에서 에코 뮤지엄까지 6. 오디가 익어가는 언덕

1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9 3 / 그 길의 동행, 철책선과 철교 파주DMZ길로 들어서는 첫 관문은 망배단 오른쪽에 있는 묵직한 철문이다. 그 문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세월 의 흔적이 역력한 오래된 초소와 끝없이 이어지는 철책선이 얼굴을 내민다. 보안상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 까닭에 철책선 보다 높은 나무도 없고 무성한 덤불도 없다. 곧게 뻗은 약 3 킬로 남짓한 철책 길에 보이는 것이라곤 쉼표처럼 일정한 간 격으로 놓인 초소뿐이다.

2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21 이웃한 두 마을의 경계선이었던 이곳에 철책선이 들어선 것은 약 30여 년 전. 당시 이곳을 지키고 있던 미군이 철수하 고 국군이 들어서면서 임진나루까지 약 10킬로미터에 이르는 철책선이 등장했다. 그저 문 하나를 들어섰을 뿐인데 문 밖과 는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진 길. 그 길과 겨우 눈을 맞추고 발 걸음을 옮길 무렵, 또 하나의 정경이 발길을 붙든다. 동서로 가로 놓인 철책선 아래 남북으로 길게 놓인 오래된 철교. 바 로 조금 전 보았던 증기기관차가 달렸던 경의선 철교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철길을 경부선이라 부르듯 경의선 은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오가던 철로를 말한다. 서울을 출발 하여 개성—사리원—평양—신안주를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499킬로미터 길이의 서북종단철도. 오늘날엔 서울—문산 간 의 46㎞만을 운행하고 있고, 북한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 를 건너 만주로 운행 중이다. 경의선 철교는 1905년 경의선 완공과 함께 임진강 위에 모 습을 드러냈다. 원래 나무판을 덧댄 외나무다리 기찻길이었 던 경의선 철교는 한쪽에서 기차가 들어오면 마주 오던 기차 는 그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하는 단선철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의선은 한양을 반도의 북쪽과 연결하는 유일한 철로였기에 전쟁 당시 가장 먼저 폭파된 다리 중의 하나다. 그런데 정전협정과 함께 포로들이 돌아와야 하는데 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국군과 미군은 서둘로 부서진 경의

22 Self 가이드북 선 철교를 보수했고 포로들은 경의선 철교를 걸어서 건넌 뒤 자유의 다리를 통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반세기동안 버려져 있던 철길은 2000년 남북한의 역 사적인 합의를 거쳐 복구공사를 시작했으나 북한의 일방적인 계약이행 거부로 현재 중단된 상태다. 임진강 위에 놓인 아름 다운 철교를 바라보며, 하루속히 기차들이 이 철교를 지나 신 의주로 부지런히 오가는 그 날을 꿈꾼다. Note

2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25 4 / 길에서 만난 얼굴들 잠시 철책을 따라 걷노라면 그 너머로 그림처럼 펼쳐진 마 정리 들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세월이 가도 마정리 들 녘의 정취는 변함이 없다. 여름이면 싱그러운 초록빛이 눈부 시고, 가을이면 고개를 떨 군 이삭들이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들녘……. 겨울이면 북녘에서 날아온 새들이 한가로이 먹이를 찾는 어머니 품과 같은 들녘이다.

2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27 반세기 전, 이 길은 마정리 들녘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시 골길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내달리는 길 끝에선 노 인을 태운 소달구지가 느릿한 걸음으로 뒤따라오고, 논 위로 석양이 붉게 떨어지는 저녁 무렵이면 총각처녀들이 시원한 저녁바람을 맞으며 수줍게 사랑을 키우던 길……. 하지만 철책선이 들어서면서 이 길의 주인은 긴장된 눈빛 의 병사들로 바뀌었다. 24시간 내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아야 하는 철책선. 병사들에게 그것은 목숨이었다. 지 금도 철조망 위엔 순찰패와 경계용 돌이 남아 있다. 순찰을 돌 때마다 병사들은 손으로 순찰패를 뒤집는다. 철조망 사이 사이에 끼어져 있는 돌은 외부의 침투여부를 말해주는 중요 한 표식이다. 지난 30년간 이 작은 인식표에 얼마나 많은 병사의 손이 거쳐 갔을까. 적어도 아침 저녁 하루 두 번씩은 병사들이 이 철책 길을 오갔을 테고 그렇게 30년이면 인식표 하나에 이 만 번 이상의 손길이 거쳐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초소 마다 최소 두 명의 병사들이 경계근무를 섰다. 1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구간 안에 있는 초소는 모두 30개. 그 초소를 거쳐 갔을 병사의 수는 어림잠아 수천 명에 이른다. 갓 20대 초반 이었을 앳된 얼굴의 그 병사들이 꽃다운 청춘과 뜨거운 땀방 울을 이 길에 바치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었을까.

2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29 입구에서 통일대교까지 약 2.5킬로미터 남짓한 이 길엔 작 열하는 뙤약볕을 피할 그늘도, 얼음장 같은 추위를 피할 숲도 없다. 하지만 한번쯤 뜨거운 여름이나 칼바람 부는 영하의 날 씨에 이 길을 걷기를 권한다. 비바람이 부는 장마철에 걸어도 좋으리라. 그래야 평화와 생명을 지키는 일은 그리 말처럼 고 상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을 위해 누군가는 이 아름다운 길에 철책을 쳐야 했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 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남녘에 잠든 북한군인들 적군묘지를 아시나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름 모 를 병사들이 있는 곳, 적군 묘지는 적군이라도 묘지를 조성해 존중해야 한다는 제 네바 협정에 따라 한국전쟁 이후 전국에 산재한 유해를 모아 매장한 곳이다. 경기 도 파주시 파평면 들판 너 머에는 북한군 727구, 중 국군 329구 등 모두 1059구의 유해가 묻혀 있다. 이들의 묘는 고향인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동안 방치되다 시피 한 적군묘지에는 제3땅굴 등 안보관광지를 찾는 중국인 관 광객들이 몰리면서 추모하고 돌아가는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Note

3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31 5 / 통일대교에서 에코 뮤지엄까지 철책선을 따라 걷다보면 문득 눈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왕 복 4차선 규모의 큰 다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1998년 여름에 개통한 통일대교다. 개통 직후 정주영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 한을 방문한 것으로 더욱 유명해진 통일대교는 판문점으로 통하는 유일한 징검다리인 자유의 다리를 대체할 목적으로 건설됐다.

3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33 통일대교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이 다리가 국도1호선 상 에 놓였다는 점이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국도1호 는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도로였다. 한반도 동쪽에 자연이 빚 은 백두대간이 있었다면 서쪽에는 사람의 손으로 놓은 한반 도 물류의 동맥 국도 1호가 있었다. 통일대교는 바로 그 선상 에 놓여있는 것이다. 통일대교를 지나면서 길 양쪽으로 마치 원래 하나였던 듯 좌우로 넒은 논이 펼쳐지고 여름이면 온통 눈부신 초록 물결 로 뒤덮인다. 초록의 바다가 황금벌판으로 옷을 갈아입는 가 을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새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각종 오 리를 비롯해서 고니와 두루미도 볼 수 있다. 철책에 발이 묶 인 것은 사람뿐, 땅은 나뉘고 길은 끊겼지만 새들은 아랑곳 없다. 인적이 끊어지면서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변한 마정리 들녘은 사시사철 철새와 텃새들이 먹이를 찾아오는 풍성한 보금자리가 됐다.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새들 이 대신 마음껏 누리고 있는 셈이다. 비상하는 새들을 보 며 약 1킬로쯤 걸어가 면 에코 뮤지엄 앞에 이른다. 세계유일의 철 책선 야외 전시장. 경 기도 관광공사는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을 대

3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35 상으로 DMZ자연생태보호를 를 주제로 한 작품을 공모하고 있다. 그 때부터 철조망은 인식표와 외부침투확인용 돌 대신, 평화와 생태보호의 마음을 담은 젊은이들의 다양한 예술 작 품들로 장식됐다. <날으는 평화의 고무신>, <에코 필터>, <흐름> 등, 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상처를 기발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젊은이들. 평화의 시대가 키워낸 그들의 순수한 갈망과 확신 을 공감하며 서 있노라면 문득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 철조망을 무엇으로 장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Note

3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37 6 / 오디가 익어가는 언덕 에코 뮤지엄을 지나면 지루하게 이어지던 철책선 끝에 높 은 초소가 나타나면서 오르막 산길로 꺾어지고, 그제야 마정 리 들녘은 대신 임진강 줄기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잠시 철책선과는 안녕, 이제 길은 등에 배인 땀과 뻐근한 다 리를 쉬어갈 숲을 향한 오르막이다.

3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39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길옆에 늘어선 나뭇가지 끝에서 뭔가가 얼굴을 내민다. 바로 뽕나무 열매 오디다. 초여름이라 면 발밑으로 농익어 떨어진 오돌토돌 까무잡잡한 오디들이 밟히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지나가던 동네사람이 소쿠리에 하나 가득 딴 오디열매를 한 움큼 쥐어줄 지도 모른다. 목이 컬컬하던 차에 그 오디를 정신없이 먹다 보면, 순식간에 입안 과 손끝이 시커멓게 변해 서로 얼굴을 보며 웃음보를 터뜨리 곤 한다. 어린 시절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오디열매를 따 먹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닥다닥 달린 가지를 잡아당기면 우르르 땅으로 떨어지던 오디, 아이스크림이 흔하지 않던 시 절엔 오디열매에 설탕을 뿌려 냉장고에 재워 두었다가 먹으 면 달콤하고 시원한 최고의 별미였다. 이 길에서 만나는 오디 는 물 맑고 공기 맑은 청정지역에서 자란 오디이니 맛도 그만 이도 해갈에도 제격이다. 아마도 바로 앞에 있는 초소의 병사 나 순찰병에게 허전한 배를 채우고 해갈을 달래는 요긴한 먹 을거리였을 것이다. 오디는 달기도 하지만, 한 주먹만 먹어도 갈증이 사라지는 고마운 열매다. 철분이 다른 과일에 비해 4.5배, 칼슘은 딸기 의 2배, 칼륨은 사과의 2배 이상 함유돼 있는데다 마그네슘, 아연, 비타민B,C 등 미네랄 성분도 많아 해갈은 물론 력을 회복하는 데도 좋고 당뇨. 고혈압을 다스리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제 초소의 병사들이 없으니, 지천으로 익은 오디열매는 지나가는 행인 차지다. Note

Gallery 1 / 철책길 표정

42 Self 가이드북 | 강과 바다, 그리고 섬이 하나가 되는 길 | 7. DMZ 생태의 보고, 초평도와 마주 서다 8. 잊혀진 전설, 덕진산성 9. 하나의 길, 세 번의 역사 10. 철책선의 낭만, 임진강변의 오솔길 11. 천 년 전 배다리의 추억, 임진나루

4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45 7 / DMZ생태의 보고, 초평도와 마주 서다 뽕나무가 늘어선 구비를 지나면 작은 숲으로 접어든다. 약 100미터 남짓한 길이 온통 거목들로 덮여서 한여름 더위나 차가운 삭풍을 피하기엔 그만이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산바람을 천천히 음미하며 걷노라면 한 순 간, 시야가 탁 트인다. 다가서면 발 아래로 펼쳐진 기이한 풍 경에 숨이 멎는 듯한데, 발아래 신비의 섬 초평도가 눈에 들 어온다.

4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47 수변부를 포함한 면적이 4백만 제곱미터나 되는 거대한 섬 초평도는 풀들섬이란 뜻의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수목과 덤 불이 섬 전체를 뒤덮고 있다. 덕진산성에서 내려다보면 사시 나무숲이 울창하고 신나무와 조팝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물가엔 갯버들과 물억새 군락이 줄지어 있고 달뿌리풀도 눈 에 띈다. 임진강과 한강의 하구인 이곳엔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씩 서해에서 바닷물이 흘러든다. 민물과 바닷물이 적절하게 섞 이는 초평도 주변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 어 이를 먹으러 오는 새의 종류도 다양하다. 왜가리·기러기 는 물론 온갖 기러기와 오리들, 고니, 독수리, 도요와 원앙, 파랑새, 청호반새 등이 계절에 따라 들락거린다. 멸종 위기에 놓인 천연기념물 제243호 흰꼬리수리와 203호인 재두루미, 그리고 희귀 조류인 말똥가리도 발견된다. 이렇게 많은 새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물속에 서식하는 풍 부한 어종 때문이다. 도요새가 좋아하는 숭어를 비롯해 이 지 역의 대표어종인 황복과 장어, 참게, 잉어, 가물치가 이곳에 서 알을 낳는다. 현재 문산읍 장산리 216번지로 등재된 이 신비로운 섬은 개인 소유. 하지만 지뢰매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분단 이 후 60년간 인적이 끊겼다. 대신 수많은 새들과 생물들이 보금 자리를 차린 셈이다.

4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49 초평도 돌개바위의 전설 1592년, 주적주적 비가 오는 어느 밤. 임진강변을 지나던 선조의 피난행렬은 속이 탄다. 갈길은 바쁜데 눈앞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앞에는 강이요 뒤에는 왜군들이 바짝 따라붙어 추격해오고 있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어가 행렬이 임 진강 나루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나루에 도착한 왜군들은 서로 임금을 잡아 공 을 세우겠다며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카로운 짐승소리. 소스 라치게 놀란 왜군들이 돌아보니 임진강 절벽위에서 시뻘건 눈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엄청나게 덩치가 큰 개 였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짐승 앞에서 왜군들은 혼비백산해서 흩어지고 그 사이 선조는 무사히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다음 날, 날이 밝은 뒤 다시 임진나루를 찾은 왜군은 깜짝 놀랐다. 밤에 봤던 무시무시하게 큰 개가, 실은 커다란 개 모양의 돌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왜군들은 돌의 윗부분을 잘라 낸 뒤 강물 속에 던져 버렸고 나머지 반 은 훗날 경의선 철도공사를 할 때 공사자재로 잘려나갔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초평 도 옆에 있었다는 돌개 바위, 한갓 돌이지만 임금을 지키려던 그 충성스런 마음이 전해 온다. Note

5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51 8 / 잊혀진 전설, 덕진산성 ‘저건 뭘까?’ 초평도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무렵 옆에서 누군가가 이 런 말을 할 수도 있다. 맑은 날이면 초평도 너머 북쪽 산 끝 에 예상치 못한 그림 하나가 걸리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휴대 용 망원경이 있다면 이때 써야 한다. 초평도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시선을 던지면 완만한 산 능선이 끝나는 곳에 바다인지 호수인지 알 수 없는 수면위로 그림처럼 솟은 절벽이 보인다. 마을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른 새벽이나 안개가 끼는 날이 면 그 정취가 임진강 제일이라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덕진산 성이다. 90년대초 DMZ에 묻혀버린 역사유적을 찾아다니던 발굴 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진 덕진산성은, 신라, 고구려. 백제, 그리고 고려 때 성이 모두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 다. 알고 보니 이 성은 삼국시대로부터 서해 방어의 요충지로 치열한 영토다툼이 계속되어온 전략거점이었다. 실제로 올라 보면 동서남북 사방의 물길과 인근 십 수 킬로 거리의 움직임 이 한눈에 볼 수 있어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으로부터 덕진나 루를 보호하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보급선을 연결하는 요충지 였다. 이중으로 쌓은 성의 모양이 특이한데 해발 85m 봉우리와 임진강변 쪽의 해발 65m 봉우리를 가운데 두고 산 능선을 따 라 표주박 형태로 쌓았다. 내부 성곽 길이는 481m, 넓이는 축구장 1.5배 정도의 규모로 그리 크지 않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기와편이 다량 채집되었는데 특히 고구려의 토기편과 와편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덕진산성은 지금도 중요한 서해상의 방어거점일 뿐 아니 라 한국 전쟁 당시에도 참호를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5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53 덕진산성 이서 부인의 전설 조선 중엽 광해군 때인 1623년, 당시 장단부사로 있던 이서(1580~1637)는 김유, 이괄, 이귀, 김자겸, 최명길 등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한 반정을 계획하고 있었 다. 드디어 거사일자가 결정되고, 군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하기 전 이서는 아내에게 비장한 한마디를 남긴다. “거사가 성공하면 돌아오는 나룻배에 붉은 기를 달겠소. 그러나 실패하면 나룻배에 흰 기를 달고 올테니, 부인은 지체하지 말고 식솔들을 데리고 피하시오.” 그렇게 이서는 한양으로 향하고 아내는 날마다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가도 남편한테선 소식이 없었다. 매일 강에 나가 남편이 붉은 기 를 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내는 어느날 다가오는 배 한척을 보게 되는데 나룻배 에는 붉은 기가 아닌 백기가 달려 있었다. 상심한 아내는 그대로 임진강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 배에는 반정에 성공한 이서가 아내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고, 뱃사공 이 날씨가 더워 흰 저고리를 붉은 깃발에 위에 걸어 놓는 바람에 아내는 그것을 흰색깃 발로 착각하고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이후 아내의 죽음에 상심한 이서는 아내가 몸을 던진 언덕에 ‘덕진당’ 이라는 재각을 지어 아내의 넋을 위로하였고 이후 임진강을 지나 는 어부들은 덕진당에 들러 만선이나 수재예방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Note

5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55 9 / 하나의 길, 세 번의 역사 초평도 조망대를 내려오면 철책을 따라 임진강과 함께 걷 는 해안길이다. 철책 너머로 초평도를 감싸고 돌아온 여러 개 의 물길이 만나 작은 소를 이루며 휘도는 모습도 육안으로 확 인할 수 있다. 이곳에 철책이 들어선 것은 80년대 초. 그 이전 까지 토박이 주민들은 이 여울에서 헤엄도 치고 고기도 잡곤 했다. 그 땐 물속에서 노는 물고기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물이 맑았다고 한다.

5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57 초평도 뒤로 멀리 백학산이 있고 그 산 기슭을 따라 오른 쪽으로 더듬어가면 마치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듯한 그림같 은 마을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해마루촌, 옛 동파리다. 바닷 물이 들어오는 밀물 때는 동파리나루에서 연천 고랑포로 가 는 황포돗배가 떴다. 그 강줄기는 지금도 그림같은 여울을 이 루고 있는데 그 여울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고려 와 조선시대 왕실의 친척들이 모여 살았다는 왕촌이 보인다. 밀물 때는 여울이 되지만, 물이 빠지고 나면 땅이 드러난다.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은 동파리에서 문산까지 걸어나와 장을 보곤 했다. 천 여년 간 사람의 발길이 분주히 오갔던 그 길엔 유난히 사연이 많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경주에서 송악을 향해 길을 나서는데, 당시의 육로 사정을 볼 때 이 길 을 지나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 역사는 그 길을 비굴한 항복 의 길로 기록하고 있으나 왕건에게 항복함으로서 신라 천년 의 전통과 유물을 살리는 동시에 혼란한 후삼국을 통째 삼키 려고 기회를 엿보던 당나라를 보기 좋게 실망시킨 사건이었 다. 즉, 우리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 길을 통 해 이루어진 셈이다. 두 번째 주인공은 조선의 임금 선조다. 갑작스런 왜국의 침 략에 속수무책이던 조선, 급기야 왕이 궁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당시 선조 일행은 한양에서 임진 나루까지 가장 빠른 직선코스인 이 길을 거쳐 화석정에서 하 룻밤을 머물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5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59 조선 시대 왕의 피난길이었던 이 길의 세 번째 운명적인 주 인공은 바로 지금까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전쟁 피난민들 이다. 그 중에는 잠시 강을 건너가 있으라는 말에 맨 몸으로 강을 건넜다가 60년이 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소개민 도 상당수다. 그들 중 일부가 지금 해마루촌에 정착해 고향으 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무릅쓴 도벌 한국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초 반, 파주 운천리에 사는 사람들은 임진강이 얼기만 기다렸다.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면 울창한 갈대밭이 있었다. 동파리 쪽 강가였다. 사 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어른 키에 손가락만한 굵기의 갈대가 강변을 따라 빽빽 하게 자라 있었고 이 갈대는 추운 겨울 땔감으로 제격이었다. 야밤에 감시를 뚫고 도둑 나무를 하기 위해 사람들은 강을 건넜다. 한겨울에 쌀만큼 귀한 것이 땔감이었기에 위 험도 감수했다. 북한과 경계지역, 그러다 보니 안타까운 사건도 많이 발생했다. 1962년 1월 6일 파주군 운천리에서 나무하러 나선 40여 명의 마을사람들 중 2명이 미군 순찰 병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저 멀리 갈대밭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가 그때 죽은 사람 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듯 하다. Note

6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61 민통선마을 사람들 끊어진 철길, 사라진 마을, 이름 없는 무덤…. 떠나온 고향 은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흐르는 세월에 철부지 아이는 어 느덧 백발이 되었다. 파주시 민통선 안의 인구는 대성동 자유 의 마을과 동파리 해마루촌, 백연리 통일촌을 합쳐 약 260가 구 8백여 명인데 그중 약 60여 가구가 초평도 건너편 해마루 촌에 살고 있다. 주로 쌀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봄이 면 모판에 볍씨를 뿌려 4월에는 모내기를 준비하고 논에 모 를 낼 5월 하순에는 밭을 갈기에 바쁘다. 10여 년 전 부터는 임진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민통선 내 일대에서 20여 농가가 파주 평화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다. 남 부지방 복숭아 수확이 끝날 즘 8월 말에서 10월초까지 제철 을 맞는 파주평화복숭아는 민통선 청정지역의 따가운 햇살을 듬뿍 받고 자라 당도도 높아 인기를 얻고 있다. 통일촌은 1호집, 2호집, 3호집 식으로 분류한다. 초기 80 호집까지 그런 식으로 이름 지었다. 자녀들이 성장해 분가하 자 집 번호에 꼬리가 달렸다. 예를 들어, 30호집의 아들과 딸 이 결혼하고 분가해 이 마을에 살면 30-1호, 30-2호식으로 분류한다. 단, 외부로 출가해 사는 자녀와 사위, 며느리에게 는 자동적으로 민통선 출입증이 발급된다. 민통선의 농사는 들어와 사는 사람도 있지만 실향민으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민통선 밖에서 살면서 아침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저녁에 나가는 경우도 있다. 농사짓는 방법은 다 르지만 고향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염원과 평화를 기원하 는 마음만은 매 한가지다. 반갑습니 다!

6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63 10 / 철책선의 낭만, 임진강변의 오솔길 물길을 따라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길 왼편 철책 너머엔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오른 편 들녘에선 오디와 벼가 익어가는 들판. 그 길을 끝까지 걸어오면 양수장으로 통하는 수문에 이르는데 그때부터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철책길 이 펼쳐진다.

6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65 파른 능선 덕분에 이곳에 서면 걸어오는 동안 내내 시야를 가 리던 철책선도 나지막하게 주저앉는다. 비로소, 우리 눈이 아 무런 장애물 없이 강을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잠시 걸음을 멈 추고 북에서 사백리길을 달려 내려온 임진강의 물살을 음미 하기엔 가장 좋은 곳이다. 오늘날 우리가 단지 분단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는 임진 강은 강원도 두류산에서 발원해 강원도와 황해도, 개성을 거 쳐 약 140킬로를 달려 휴전선에 닿는다. 이후 다시 약 100킬 로미터의 강여울을 만들며 흐르다가 한강과 합류해 서해로 흘러간다. 수문을 열고 들어가는 내리막길은, 고즈넉한 오솔길. 발밑 에는 사시사철 풀과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감촉이 그만이다. 오르막인가 하면 이내 내리막이고 산으로 오르는가 싶으면 발 아래로 강이 다가와 있다. 딱딱한 돌길에 익숙해진 발밑으 로 부드러운 흙이 밟히는가 싶을 무렵, 여름철이라면 어디선 가 귀가 멍멍해지도록 세찬 물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쭉 뻗은 평지를 걷다가 가파른 바위 능선으로 이어지는 이 길이 걷자면 다소 숨도 차고 다리도 후들거린다. 하지만, 험 난한 바위길이기에, 불가능이 없다는 군부대 공병대조차도 손을 거의 대지 못했다. 철책선이 있을 뿐, 이 구간은 인위적 인 손이 거의 닿지 옛 해안 길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신탑을 막 지나고 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나게 되는 데, 바로 그 지점이 임진강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다. 가

6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67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는 임진강변 엔 수려한 계곡과 그림 같은 여울이 그 어느 유역보다도 많 다. 그래서 살아서는 장단이요, 죽어서는 파주라는 말이 말해 주듯 고려조 윤관과 조선조 황희, 이이의 산소가 자리 잡았고 공릉(恭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등 왕릉도 조성됐다. 강 하 류의 깨끗하고 완만한 물길은 한반도 최고의 옥토를 낳았고 서해와 한강마저 품어 수많은 생물들이 살 수 있는 천혜의 보 금자리를 제공했다. 60년 분단의 역사 의 땅 한가운데서도 변함없이 강의 생명 력으로 이 땅을 지켜온 임진강. 더 이상은 분단의 강이 아닌 평화와 생명의 강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임진강으로 개명한 사연 임진강의 이름은 원래 신지강이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때 이름을 바꾸게 됐는 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선조 26년 3월 명장 이여송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아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수군을 격파했고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자 왜군들은 한양을 버리고 부산으로 물러섰다. 1593년(선조 27) 피난을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 임진강을 다시 건너 는 감회는 남달랐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피를 흘린 군사들을 생각하며 강변 모래사장 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선조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폭풍우를 뚫고 경황없이 피난 갔던 일을 생각하니 그래도 ‘하늘의 도움으로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여 신지강(神智江)이 ’나루에 임했다‘는 뜻의 임진강(臨津江)으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그 런 감사의 마음에 하늘도 감복한 것일까. 1598년 (선조 32) 7년간의 전쟁이 끝난다. Note

6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69 11 / 천 년 전 배다리의 추억 - 임진나루에서 철책 길 10킬로,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임진나루가 있다. 지 금도 일부 허가를 받은 어부들이 배를 띄우고 임진강의 특산 물인 황복을 비롯해 싱싱한 물고기를 가득 잡아 돌아오는 임 진나루. 임진나루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기록 중의 하나는 고 려 의종 때 등장한다. 당시 임진나루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 로 통하는 지름길이자 하남도, 즉 남쪽에 있는 경상도, 양광 도, 전라도로 가는 관문이었다.

7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71 그래서 늘 사람과 물건을 나르는 말들로 붐볐는데 그 통에 배에 먼저 오르거나 내리려고 다투다가 사고가 빈번하게 발 생하곤 했다. 이보고를 들은 점부는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 해 임진나루와 배를 연결하는 배다리를 설치해서 사람과 말 이 안전하게 걸어서 오가도록 했고 이후 배다리는 임진나루 는 물론 고려의 자랑스러운 명물이 됐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가 그린 <임진서문>을 보면, 조선시 대에도 임진나루는 특별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나루 입구에 는 오늘날 시멘트로 높이 세운 군부대 방벽이 있는 곳에 거 의 같은 높이로 성벽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관사로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당시 임진나루는 한강마포나루 다음가는 2급 나루로서 최소 9척의 배가 상설 배치됐던 곳이다. 그것은 주 요 산업도로이자 군사도로였던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 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율곡 이이도 임진나루 근처에 화석정을 세워 선조의 피난길을 도운 것이었다. 김양기의 그 림에도 고깃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사신이나 관료로 보 김양기의 임진서문

7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73 화석정을 세운 까닭 1592(선조 25)년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어가행렬이 한밤중 동파나루 에 당도했다. 그러나 앞에는 천길 벼랑 물길이요 뒤에는 왜병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건 너갈 길이 막연하였다. 이때 병조판서 이항복(1556~1618) 머리에 번뜩 떠오른 생각, 율곡(1536~1584) 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밀 한쪽씩을 가져오라 하여 화석정 정자의 도리, 기둥, 석가래, 마루에 기름칠을 했다는 말이 기억났던 것이 다. 군사를 부른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지르니 비가 오는 날씨에도 대낮인 듯 주위가 밝아졌다. 화석정의 불빛은 마치 강을 잘 건너라는 듯 나루를 환하게 비췄고 사람들은 그 불빛을 보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나루를 건넌 선조는 지금 비포장으로 이 어지는 길을 따라 동파역으로 향했고 개성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왜구의 침공 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 하지만 일본의 현황을 보고 온 조선사들 은 붕당의 정치적 논리에 휩싸여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현실론과 일본의 풍신수길이 란 자는 원숭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조선을 침략해 올 위인이 못된다고 본 보고로 갈 리며 서로 맞섰다. 당리당략을 위해 싸우면서 이이의 상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앞을 내다 본 율곡은 임진나루에 화석정을 짓고 잔뜩 기름을 발라 놓았던 것이 다. 이이가 화석정을 세운 위치는 불을 질렀을 때 나루를 가장 환하게 밝힐 수 있는 명 당, 어떻게 그 자리를 알 수 있었을까? 이율곡의 고향은 바로 이곳, 어린 시절 이 일대 를 뛰놀며 자랐던 경험이 훗날 나라를 살리게 된 것이다. Note 이는 사람들을 태운 배 한 척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그림 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진나루는 정치 외교 군사적 목적으로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했던 나루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은 사람도 배도 자유롭지 못한 임진나루. 화려했던 임 진나루의 배다리와 중국으로 오가는 사신들을 태웠던 배를 기억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임진나루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뿐인 것일까.

7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75 임진강 어부를 아시나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임진나루 일대는 그야말로 물 반 고기반이다. 하지만, 분단 이후 임진강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임진강 어부’라는 허가를 받은 사람들 뿐이 다. 일반인은 두지나루에서 황포돛배를 탈 수는 있으나 낚시 를 하거나 고기잡이를 할 수는 없다. 강의 수심이 깊은 곳은 20m가 넘고 낮은 곳도 12미터가량 되기 때문에 어부들은 정 치망 또는 삼각망이라 하는 그물을 사용하는데 대개는 수심 4m 정도되는 강변에 쳐놓고 고기를 잡지만 참게를 잡을 때 는 강 한가운데에 그물을 드리운다. 이 그물에 걸리는 어종은 철에 따라 다른데 임진강 특산인 황복과 참게는 임금님 상에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80년대 이후 ‘임진강 어부’의 신규허가는 중지됐다. 단, 어 부의 자녀가 어업권을 물려받을 수는 있다. 현재 파주시로부 반갑습니 다! 터 허가를 받은 어부는 대략 80여 명. 이들이 갖고 있는 배는 겨우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0.5톤 미만의 작은 고깃배들이다. 임진강어부들의 평균 나이가 환갑을 넘었다. 자녀 중에 대를 이어 임진강 어부가 되겠다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 이른 새 벽, 임진강 어부가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이제 머 지않아 사라지게 되었다. 척 하면 삼천리, 임진나루 뱃사공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임진나루엔 늘 전국에서 온 사람들 이 북적거렸다. 그래서 이곳 뱃사공들은 옷차림과 거동만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보기로 유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른 지역의 뱃사공 한명이 임진강 뱃사공을 시험하러 나섰다. 신분을 속이기 위해 양반으로 의관을 갖추고 임진나루 뱃사공을 찾아 서는 ‘여보게 나를 좀 배로 건너 주게’ 하고 말을 건네자 부지런히 배를 대던 뱃사공이 그를 흘낏 보더니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누구보고 반말이냐’며 벌컥 화를 냈다. 양반 으로 변장한 백사공은 ‘이놈아! 감히 누구 안전에서 행패냐’ 하고 호통을 쳤지만 꿈쩍도 않는 임진강 뱃사공의 일갈. ‘ 뱃놈이 주제에 어디 양반행세냐!’ 깜짝 놀란 가짜 양반이 어떻게 맞췄느냐고 묻자 임진강 뱃사공 이 ‘네 수염이 한쪽으로 휜 것을 보면 노를 젓 느라 강바람에 한쪽으로 돌아간 것인데 내가 그걸 모를까봐?’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 가! 임진강 뱃사공의 탁월한 눈썰미에 가짜 양반이 할 말을 잃고 뱃사공이 감탄을 했다 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동파고역월당루(東坡古驛 月當樓) 처처인가간상구(處處人家 看上鉤) 일점규성간불원(一點圭星 看不遠) 영소응인광한유(令宵應人 廣漢遊) 동파옛역 마루에 달이 비쳐 명랑한데 이곳 저곳 인가에는 발을 걷어 올리누나 하나의 큰별만이 멀지않게 보이는데 오늘밤 맞이하여 광한(광한루)놀이 하여보세 남용익_경조선 숙종때의 관료. 시인

| 임진나루에서 장산전망대까지 | 12. 보부상의 길, 장산재를 넘으며 13. 하늘을 이고 선 마루, 장산전망대에서 14. 매복로, 평화를 만나는 길

8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81 12 / 보부상의 길 - 장산재 고개를 넘으며 임진나루에서 양식장을 지나 장산마루에 오르는 길은 하 늘 높이 자란 나무들이 줄지어선 그림 같은 산길이다. 대부분 의 구간이 비포장길이라 걷는 맛은 그만인데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고개정상까지 만만치 않은 가파른 오르막길. 걷는다기보다는 산을 탄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서야 마음이 어렵지 않은, 파주 DMZ길 최고의 난코스다.

8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83 가파른 경사에 비해서 폭이 꽤 넓은 것이 최근에 의도적으 로 도로 폭을 넓힌 흔적이 역력하다. 토박이 주민들에게 물어 보니 원래 보부상이 넘어 다니던 오솔길이 있었는데 아마도 군용 차량 출입을 위해 길을 확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전국의 물산이 집중되는 임진나루가 바로 코 앞. 보부상이 없을 리 없다. 보부상(褓負商)이란, 물건을 지고 다녔던 남자행상인 부상(負商)과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던 여자행상인 보상(褓商)을 합친 말이다. 우리나라 전통행상인 보부상은 한마디로 동쪽에서 아침밥을 먹고 서쪽에서 저녁잠 을 자는 사람들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이들이 신출귀몰하듯 동서 남북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통하는 지름 길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산재로 오르는 길 뿐 아니 라 전국의 수많은 오솔길이 그들의 발끝에서 만들어졌다. 그 길의 특징은 대부분 마을과 마을을 잇는 최단거리라는 점. 신 용이 생명이었던 보부상들은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가파른 산길도, 계곡의 거센 물살도 마 다하지 않는다. 소금 한가마니를 지고도 가파른 산길을 날아 다닌다는 보부상. 그들이 이 고갯길에 흘렸을 땀은 소금보다 더 짜지 않았을까.

8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85 결코 만만치 않은 코스지만 그들의 뺨을 스쳐갔을 시원한 산바람에 땀을 씻고, 새소리 풀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 천히 정상까지 오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단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큰 비가 온 뒤에는 노면의 상태를 잘 살펴 결정한다. 무거운 군용 차량이 오가던 길이 라 노면이 고르지 않은데다가 붉고 고운 흙이 길 표면을 덮고 있어 발이 쉽게 빠지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쉽다. Note

Gallery 2 / 장산전망대 가는 길

8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89 13 / 하늘을 이고 선 마루, 장산전망대에서 거칠 것 없는 하늘 아래 넓은 품을 활짝 펴고 있는 장산 전 망대. 약 3백 평 남짓한 장산전망대에 서면 오는 길 내내 마 음을 불편하게 했던 철책은 아스라이 멀고, 임진강 하구에 펼 쳐진 물길과 육로, 그리고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까지 파노 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9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91 전망대에서 보면 바로 정면 아래쪽 여울이 초평도를 돌아 들어온 한강과 임진강이 서해의 바닷물과 만나는 곳이다. 물 이 빠지면 서쪽 편으로 뭍이 드러나면서 해마루촌(동파리) 문 산장까지 육로로 변한다. 지금은 문산이니 장산이니 하는 이 름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분단 이전까지 이곳은 임진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하나의 마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옛 임진면은 북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 럼 둘러서 있고 동쪽도에서 시작된 강줄기가 서해로 흘러나 가는, 천하의 명당. 그래서일까. 정권에서 멀어진 왕족이나 은퇴한 고급관료이 약속이나 한 듯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작 은 바닷가마을 해마루촌은 고려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 지 무려 열 명의 장관급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사연 황진이라 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서 당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송도삼절 이라 함은, 송도 즉 개성에서 유명한 세 가지를 이르는 말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를 뜻한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 또한 뛰어났던 황진이가 기 녀가 된 사연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그녀를 누구나 보고 싶어 했고 특히 이웃에 사는 한 청년은 누구보다도 그녀를 연모했는데, 그러나 당시 외간 남 자와 만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됐던 터라 청년의 상사병은 깊어만 갔다. 결국 혼자 보 고 싶어 애태우던 청년은 병을 얻어 죽고 말았으니 다음 날, 북망산으로 매장을 하러 가 는 길. 상여가 마침 황진이의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상여꾼의 발이 땅 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꼼짝달싹 못하게 된 상여꾼, 이 사연을 들은 황진이가 상여를 안 고 위로하니 그제야 발길을 띠게 되었다. 이후 황진이는 미모 때문에 사람을 죽음에까 지 이르게 자신은 평범한 여인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하여 기생이 되기로 하였다 고 전한다. 황진이가 묻힌 그 땅 어디메쯤 장산리와 마정리에 사는 피난민들의 고향이 있다. 장 산전망대에서 바라보니 그 땅을 바라보면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소박한 망배단과 꽃밭을 만들어놓았다. 벽돌을 세워 울타리를 만들고 갖가지 들꽃을 가져다 정성껏 심고 가꾼 흔적이 역력한데, 잠시 꽃밭을 보고 있노라니, 인적이 뜸한 시 간이면 술 한 병을 들고 올라와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지었을 그 얼굴이 눈에 어른거리 는 듯하다. 해마루촌 뒤로 높이 솟은 산이 백학산. 그 너머에 판문점 이 있는데 그곳에서 마주 보이는 DMZ 안에 박연폭포와 황진 이 무덤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하늘이 낸 예인이자 한 시대 를 풍미했던 시인 황진이. 분단의 선 위에 잠든 그녀는 시대 를 잘못 타고 난 것처럼 죽어 묻힌 곳마저도 잘못 선택한 것 일까.

9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93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려면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개 성공단과 송악산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그곳이 전쟁 전까지 대한민국 땅이었다는 말에 늘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어디 그 땅뿐인가. 한반도 전체가 하나였다. 때로 싸우고 담을 쌓기 도 했지만 하나 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혈육이다. 최근 북 한 땅엔 지금 우리가 세운 공단을 비롯해 대학과 연구단체가 늘어나고 있고 남한에도 각 분야에 정착한 새터민들이 늘고 있다. 땅은 나뉘었어도 그렇게 우리들이 섞여 살다보면 언젠 가 통일이 되지 않을까. 장산 전망대에서 품어보는 희망이다. 북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소담스런 망배단. 갖가지 들꽃을 좋아했던 그 사람은 누구일 까. 꽃을 보며 그리운 이를 생각하는 민통선 사람들의 마음이 애잔하게 전해져온다. Note

9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95 14 / 매복로, 평화를 만나는 길 전망대에서 장산리 마을까지 가는 약 1.5킬로의 내리막길 은 하늘과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길. 잠시 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잊고 어린아이처럼 새소리 풀벌레소리 에 귀를 기울이며 걷기에는 그만이다. 이 길에도 뽕나무가 지 천이라 여름철엔 오디의 달콤한 맛으로 텁텁한 입안도 달래 고 갈증도 해결할 수 있다. 행인이라곤 거의 없는 길. 하늘과 나무, 그 아래 오롯이 사람뿐인 길이다.

9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97 장산리는 바로 이곳에서 임진나루까지 약 2km 가량의 산 능선이 마치 병풍처럼 길게 뻗어 있다 해서 장산이라고 부르 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장산은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외부 의 침입을 막는 내륙 보루의 역할을 해왔고 1755년(영조 31)에 는 진과 보루를 설치하고 별장을 두어 지켰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고즈넉한 숲길은 흙이 풀풀 날려야 제격이다. 그런데 이 길 은 전부 포장길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살펴보면 조용 히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듯 한 벙커와 마주치게 된다. 최 근까지 사용됐던 매복용 벙커들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 지형 이나 산의 높이로 보아 이곳은 전형적인 후방의 매복로다. 전 선을 뚫고 내륙 깊숙이 침투한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감시용 벙커를 만들고 그곳에 매복한다. 벙커 반대편 계곡에는 니 하 늘이나 길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상당한 규모의 진지 가 있었던 흔적도 있다. 실제로 진지나 벙커에서 내려다보면 숲이 울창한 한 여름 에도 산 아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벙커 옆에는 뜬눈으 로 밤을 새웠을 보초병이 잠시 몸을 기대고 쉬었을 진지도 남 아있다. 그 딱딱한 시멘트바닥에서도 병사의 잠은 얼마나 달 았을까. 어린 자녀들과 동행했다면 잠시 벙커 체험을 허락해도 좋 을 것이다. 군복무를 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라면 아내와 자녀

9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99 에게 군복무의 신성하고도 자랑스러운 의무를 전하는 기회로 삼아도 좋겠다. 문득 벙커 앞에 붙들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데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진난만한 아이 표정 같은 시골마을 이 보인다. 너무도 다른 두 개의 풍경 사이에서 평화엔 대가 가 따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Note

100 Self 가이드북 | 장단콩 익어가는 마을길 | 15. 장단콩 익어가는 장산리를 지나며 16. 마정리 마을의 정겨운 돌담길을 돌다

102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03 15 / 장단콩 익어가는 장산리를 지나며 숲을 빠져나가면, 이내 한가로운 시골마을 장산리에 닿는 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산기슭을 따라 집 들이 정답게 들어선 마을 한가운데로 신작로가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지나가노라면 뉘 집에선가 개짓는 소리가 들려오 고,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옆으로 털털거리는 시 골버스가 지나간다.

104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05 이 마을 사람 중 60% 피난민이다. 주로 임진강 건너편 장 단면에 살던 사람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잠시 강 건너 남쪽으 로 피해있으라는 국군의 말에 따라 맨몸으로 강을 건너왔다 가 주저앉은 사람들도 많다. 임진강만 건너면 고향이기에 통 일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지척인 이곳 장산리에 정착해 살고 있다. 장산리 사람들은 민통선 안에서 논농사를 짓거나 마을 주 변의 논과 밭에 사과, 옥수수 등 밭작물을 키운다. 여름철이 면 길가에 보랏빛 꽃을 틔우는 도라지 밭도 눈에 띈다. 하지 만 뭐니뭐니 해도 이 민통선 마을의 대표 농작물은 장단콩. 길가에 줄줄이 늘어선 비밀하우스 안에선 대개 장단콩이 익 어가고 있다 임진강 쌀, 개성인삼과 더불어 장단삼백이라고 불려온 장 단콩은 예로부터 맛과 영양이 높기로 유명해 임금의 수랏상 에 오르는 진상품이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콩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가장 잘 자라는 식물 중 하나다. 예로부터 장단 을 비롯한 파주 일대가 배수가 잘되고 석회질이 풍부한 미세 토양을 갖고 있어 콩알이 굵고 모양이 좋다. 뿐만 아니라 여 름 일교차가 크고 가뭄이 적어 콩에 영양축적이 잘되며 겨울 철 서리도 적어 수확기의 피해도 적다. 한마디로 콩재배를 하 기엔 천혜의 땅이다. 장단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전쟁이전까지만 해도 장단 군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큰 군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을 잃어 버린 이곳 농부들이기에, 고향의 이름이 붙은 콩 농사에 남다 른 애착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 그래서일까. 장단콩의 인기 는 날로 높아져서 최근에는 없어 못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사연을 알고 보면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콩밭의 농부들 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콩밭에 나와 물 을 주고 정성껏 모를 심는 손길에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 난다.

106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07 파주 개성인삼을 지킨 사람들 파주에서는 매년 10월, ‘파주인삼이 개성인삼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파주개성인 삼축제를 개최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 파주 인삼이 개성인삼인가 하는 의문이 있는데 여기엔 유래가 있다. 원래 개성 인삼은 개성에서만 재배되었던 게 아니라 개성 과 주변의 8개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어 왔다. 파주도 그 8개재배지 중 하나였다. 그런 데 한국전쟁 이후 그 중 대부분은 북한 쪽에 위치하고 있고, 한국에선 파주가 유일한 개성인삼재배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 때 남으로 피난 온 개성삼업인(인삼재배농부)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 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이들, 하지만 이후 남북분단 가능성이 짙어지면서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 끊기게 될 위기에 놓인다. 개성인삼의 맥을 잇자면 고향 땅에 묻 어둔 삼동자가 있어야만 했고 결국 결사대를 조직해 삼동자를 가질러 가기로 결정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해병대가 이들을 호위하기로 한다. 때는 마침 한겨울, 하지만 개성인 삼의 맥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은 목숨을 걸고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을 뚫고 북으로 들 어가고, 결국은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동이에 넣어 땅 속에 묻었던 삼동자를 파내 오는데 성공했다. Note

108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09 16 / 마정리 마을의 정겨운 돌담길을 돌다 파주 DMZ길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점인 마정리는 임 진각역 바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장산리에서 내려오는 길이라면 도라지, 사과,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넓은 밭을 지 나 마을로 들어설 것이고 임진각에서 출발해서 들어오는 길 이라면 마정초등학교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게 되는데, 어느 쪽에서 들어오건 마주치는 풍경은 다를 게 없다.

110 Self 가이드북 파주 DMZ 길 111 마정리라는 독특한 이름은 오래 전 전설에서 유래됐다. 지 금은 없어졌지만 이 마을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대대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준 우물이었기에 신성하게 여겨졌 는데,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새벽, 하늘에서 구름을 가르고 눈부신 햇살기둥이 마치 화살처럼 우물에 꽂혔다. 그러더니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용마가 뛰어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말의 우물’이 라 해서 마정이라 불렀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이름으 로 변했다. 요즘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보기 어려운 나지막한 지붕의 시골집들은 생김새가 제각각인데, 약속이나 한 듯 담장 옆에 온갖 꽃들이 만발한 작은 화단을 끼고 있다. 채송화, 들국화 등 키 작은 꽃들 위로 나리꽃, 맨드라미, 그 외 이름 모를 꽃 들이 가느다란 목으로 화려하고 큰 꽃을 아슬아슬하게 떠받 치고 있는데, 오랜 세월 탓에 제 색깔을 잃어버린 집들 사이 사이로 핀 꽃들이 얼마나 선명하고 생생한 지 마치 흑백영화 와 4D 영화가 뒤섞인 듯 이색적이다. 길은 마치 미로처럼 고 불고불하고 그나마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갈림길. 그때마다 마 치 그 골목의 수문장처럼 낯선 행인을 주시하는 개들과 마주 친다. 사람들이 들에 일을 나가 하루종일 빈 집을 개들이 굳 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몸집이 작다고 무시했다간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다. 성대수술을 당하는 도시의 개들과 는 달라서 몸집은 작아도 목소리는 엄청나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