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촌마을조사보고서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013 2012. DMZ지방브랜드세계화시범사업 : 경기도 파주 통일촌브랜드마을

이 마을지는 안전행정부ㆍ경기도ㆍ 파주시의 ‘2012. DMZ 지방브랜드 세계화시범사업’ - 『통일촌브랜드 마을육성사업』으로 진행한 통일촌 마을민속조사보고서이다. 『통일촌 에코뮤지엄』 조성을 위한 실행 사업의 기초자료 확보를 목적으로 진행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통일촌마을 박물관’을 조성하였다. 조사는 2012. 8. ~ 2013. 5. 까지 진행하였으며,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제보자에 대한 정보는 비공개로 하였다. 따라서 본지의 내용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차례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1. 통일촌의 자연환경 ································································································ 6 2. 통일촌의 역사 ········································································································· 9 3. 민간인 통제구역에 생겨난 마을, 통일촌 ················································ 19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1. 통일촌의 사회조직 ····························································································· 40 2. 통일촌 사람들의 생업 ······················································································ 54 3. 통일촌의 일년살이와 연중행사 ·································································· 82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1. 통일촌 사람들 - 개인생애사 ······································································· 92 2. 통일촌 사람들의 신앙과 민간의료 ·························································· 136 3. 통일촌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주거생활 ················································· 171 4. 통일촌에 전해오는 이야기 ·········································································· 199 부 록 :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08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 258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1장

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1. 통일촌의 자연환경 (1) ‘죽어서 장단, 살아 파주’ 통일촌이 위치한 장단군은 마식령산맥의 줄기가 뻗어내려 대체로 산지가 많다. 북부에는 수룡산(水龍山)ㆍ대둔산(大屯山) 등이 솟아있어 높지만 남부 는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어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진다. 북동부에서는 사 미천(沙尾川)이 장남면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고 남부 에서는 사천(砂川)이 장단면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들어 그 주변지역에는 평야가 발달되었다. 임진강은 물이 굽 이쳐 흘러가기 때문에 장단면의 강기슭은 가파른 절벽 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문에 좁은 하안평야가 발달되 어 있다. (2) 통일촌과 그 주변의 생태환경 파주DMZ 민통선지역의 생태연구를 통해 밝혀진바 수생식물 99종ㆍ육상식물 361종이 조사되었고 곤충 114종ㆍ양서/파충류 20종ㆍ포유류 11종ㆍ어류 24종ㆍ조류 58종이 확인되었 다. 특히 덤불해오라기ㆍ검은댕기해오라기ㆍ쇠뜸부기사촌ㆍ뜸부기ㆍ쇠제비 통일촌 마을 전경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7 1) 서울대 환경생태계획연 구실, 「경기도 파주 일대 의 비무장 지대와 민통선 지역의 생태조사 보고서」, 1996 갈매기ㆍ쏙독새ㆍ청딱다구리ㆍ오색딱다구리ㆍ쇠딱다구리ㆍ물까치ㆍ청호반 새 등 11종의 희귀종과 천연기념물 제203호로 지정된 재두루미를 비롯해 두 루미ㆍ붉은배새매ㆍ참매ㆍ알락개구리매ㆍ잿빛개구리매ㆍ황조롱이ㆍ소쩍 새ㆍ솔부엉이ㆍ흰꼬리수리ㆍ개리ㆍ고니ㆍ큰고니 등 13종의 천연기념물이 조사되었다. 또한 고라니ㆍ삵 등 국제적 보호종과 얼룩동사리ㆍ몰개와 같은 한국고유종, 남생이ㆍ구렁이ㆍ맹꽁이 등 환경부지정 특정야생동물로 지정된 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1) 통일촌 주변지역은 한강하류의 동사하안과 중주 그리고 임진강과 한강하 구가 교차되는 삼각주 일원에 광활한 초지와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어 매년 대규모의 철새들이 도래하고 있다. 철새는 겨울철새와 여름철새로 나뉘는데, 이곳은 겨울철새의 주 이동로 중 한곳으로 가을철 시베리아 등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한반도로 이동하는 철새들이 많이 모인다. 이곳을 통해 이동하는 새들은 천수만, 주남저수지, 한강하구 및 임진강 등지에 주로 자리를 잡는다. 특히, 이곳에 재두루미 대집단이 도래한다는 사실은 1961년 11월 약 2,000마리의 재두루미 무리가 이곳에서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학계에 알려 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해마다 10월 하순경부터 이듬해 3월 중순경까지 재두 루미 약 1,500~2,000마리가 규칙적으로 도래하여 일부의 무리는 이곳을 거 쳐가거나 이곳에서 월동하고 있다. 재두루미 이외에도 이곳에서 겨울을 나 는 새는 큰기러기를 비롯한 청둥오리, 쇠오리, 가창오리 등의 오리류, 원앙, 두루미 등이 모여든다. 독수리, 검독수리, 흰꼬리수리, 매와 같은 맹금류도 도래하는 오리류를 따라 날아든다. 특히 주 이동시기인 10월말경과 3월경에 철새들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체력을 회복하는데, 겨울철새 수십만 마리 가 모여 연출하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통일촌은 천혜 의 고장이다. 지난 50년 동안 마을주변에는 공장 및 오염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무공해 청정자연 그 자체이다. 가. 판문점 부근 생태현황 군사분계선 너머로 덤불이 형성되어 있어 여름에 조류나 곤충이 서식하기 에 적합하며, 묵논의 뒤쪽으로 산림이 연결되어 있고, 앞쪽으로 사천으로 흐

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르는 소하천이 흐르고 있다. 고사목이 많은 산림지역의 서식처로 초화류와 관목이 어우러져 넓은 덤불을 형성하고 있어, 다양한 생물 서식공간으로 기 능하고 있다. 나. 사천 및 주변습지 생태현황 사천과 인근의 습지는 그 자연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유지되고 있어 다양 한 수생식물이 존재하며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하여 자연적 과정을 거치므로 자연의 원시성을 잘 보유하고 있다. 전반적인 육상식물은 구릉지의 상수리 군락과 길옆으로의 아까시 군락과 은사시 군락으로 대표된다. 사천은 남북 의 접경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이 지역이 나뉘어진 별도의 생태계가 아니라 하나의 생태적 단위이며 이러한 이유로 남북의 공동노력이 필요하고, 국제 적인 관심과 협력을 위하여 람사습지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 대성동 어룡 저수지 생태현황 어룡천에 댐을 막아서 형성된 농업용 저수지로 수변부가 잘 보존되어 있 으며, 중도가 형성되어 있다. 다양한 어류와 양서류 및 조류가 서식하는 대 규모의 호소생태계로 매우 안정적인 생물서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흰뺨검둥오리가 다수 발견되고 있다. 매우 양호한 서식환경이 조성되어 있 는 서식처로 도시지역에서 인공습지나 대규모 인공호수의 조성에 폭넓은 활 용이 기대된다. 라. 군내면 점원리 생태현황 경작지가 휴경지로 변하여 습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수생식물과 육상 초화류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과 연계된 부분에 인간의 영향으로 교란이 일어나 달뿌리풀, 억새풀 등의 초지가 형성되어 고라니의 서식처가 되 고 있다. 다양한 생물서식공간이 조성되어 곤충류와 조류의 매우 양호한 서식 처를 형성하고 있다. 도심이나 공원 내 인공습지의 조성에 활용이 가능하다.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9 마. 장단면 장단반도 생태현황 이곳의 대단위 갈대밭을 중심으로 많은 조류상이 관찰되는데, 겨울의 경 우 개리, 재두루미가, 여름의 경우 개개비, 검은딱새, 파랑새 등을 볼 수 있 다. 특히, 장단반도 근처에 파랑새의 집단 거주지가 존재하는데, 이는 먹이 가 되는 곤충이 풍부한 영향인 것으로 판단되며, 둥지는 까치집을 빼앗아 사 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 장단면 노상리 생태현황 주변의 토지는 경작지이고, 산림과 연결된 넓은 휴경지로 이루어진 습 지로 수생생태계, 습지생태계, 초지생태계, 덤불, 산림생태계 등이 연계되 어 다양하고 풍부한 생물서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습지지역 물의 깊이는 40-50㎝ 정도로 비교적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다양 한 수생식물과 풍부한 서식공간은 곤충류를 비롯하여 매우 다양한 종류의 생 물들의 서식처가 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 통일촌의 역사 (1) 파주시 연혁 파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다. 이곳은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 를 차지한 것은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움으로 475년에는 파 주 땅 전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신라 진흥왕 때 고구려를 몰아 내고 신라가 차지했으며 삼국통일 과정에서 파주는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싸 우는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조사지역은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평화와 화합의 상징을 띠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을 주ㆍ부ㆍ군ㆍ현(州

1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府郡縣)으로 지명을 고치는데 이때 지금의 파주시인 적성지역을 적성현이라 불렀다. 그 뒤 장단 · 적성 · 파평 지역이 개성부 관할의 기현에 속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파주는 모두 5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교하ㆍ파 평ㆍ파주ㆍ적성ㆍ장단지역이다. 1398년에 파평현과 서원현(파주지역)이 합 해 원평군이 되었다. 1414년에는 중앙관제와 지방군현제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교하현이 원평군에 소속되고 장단현은 임단현이 되었다. 이듬해 1415 년에 원평군이 원평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59년(세조 5) 원평도호부가 세 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목(牧)으로 승격되고 파주로 고치 게 되었다. 바로 이때 파주라는 지명이 처음 만들어졌다. 일제시대인 1912년 당시 파주의 행정구역은 교하군ㆍ파주군ㆍ장단군ㆍ적 성군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적 성군이 연천군에 흡수되었고 교하군 전역이 파주군에 폐합되었으며, 양주 군ㆍ고양군ㆍ적성군의 일부가 파주군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자 종래 연천군 관할이던 적성면과 남면이 파주군에 편입되었고 이듬해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는 장단군 군내면에 속했던 백연리ㆍ정자리ㆍ조산리ㆍ읍내리ㆍ송 산리ㆍ공덕리ㆍ방축리ㆍ방목리가 임진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에는 장단 군의 장단면ㆍ군내면ㆍ진서면ㆍ진동면이 파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해동지도 장단 파주 해동지도 파주목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11 에는 아동면이 금촌읍으로, 임진면이 문산읍으로 승격되어 2읍 9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80년에 주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다시 주내읍 이 파주읍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89년에는 천현면이 법원읍으로 승격하 였다. 1996년에 파주군은 도농복합의 파주시로 승격하였으며 2002년 조리 면과 교하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현재 5읍 4면 2동 1출장소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2) 군내면 연혁 통일촌이 입지한 군내면은 경기도 파주시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 으로 진동면(津東面), 남쪽으로 파주시 문산읍과 장단면(長湍面)ㆍ서쪽은 개 풍군ㆍ북쪽은 연천군과 진서면(津西面)에 접한다. 임진강(臨津江) 북쪽의 휴 전선과 인접한 이곳은 대부분의 지역이 고도가 낮은 구릉성 지형으로 가장 높은 산은 북쪽 면 경계에 있는 백학산(白鶴山:229m)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한다. 6·25전쟁 이후 휴전선에 인접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 되었다. 교통은 문산읍과는 임진강을 지나 국도로 연결된다. 이 지역은 원래 삼한시대의 습천군(濕川郡)에, 백제 근초고왕 시기에는 백 제의 야아현(夜牙縣)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 뒤 475년(장수왕 63) 고구려 가 이곳을 복속, 장천성현(長淺城縣)으로 하였고,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장단군으로 개칭, 우봉현(牛峯縣)에 소속되었다. 고려 전기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 관할의 기현에 속하게 되었고, 1001년(목종 4)에는 시중 한 언공의 본관이라 하여 단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었 던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장단현으로 되어 적성 · 파평 등 7개현을 관할하 면서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직속이 되었다. 이후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 좌도에 소속되었다. 조선 건국 후 1414년(태종 14)에 임강현을 병합하여 장 임현으로 되었다가, 다시 장단현으로 되고, 1435년에는 원평부에 이속되었 다가 1469년(예종 1)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혁파와 격하, 복구가 거듭 되다가 1895년(고종 32) 부군제 실시와 함께 군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단군은 전체 10면 67리의 체제가 되었는데, 여기에 현재의 지명인 군내·진동·진서의 명칭이 나타나며 장단면 지역은 진

1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남면 지역으로 편제되고 있다. 그런데 1945년 국토의 분단과 함께 5개면이 북한 영토로 편입되고, 5개 면, 41개 리만 남게 되었다. 그 후 군내면은 1963 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에 의하여 파주군 임진면(현 문산읍)에 편입되었다. 2010년 기준 군내면에는 207세대 623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3) 한국 전쟁과 분단 그리고 통일촌의 형성 가. 전쟁과 분단의 상황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미ㆍ소 양국은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 에 각각 주둔함으로써 국토는 분단되고 그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따라 분단이 더욱 고착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한에서는 미군정하 에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워 정국은 어수선해 져 갔다. “만약에 우리 동포들이 양 극단의 길로만 돌진한다면 앞으로 남북의 동 포는 국제적 압력과 도발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 이 발생할 위험이 없지 않으며, 재무장한 일본군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 서 세력을 펴게 될지도 모른다. (… 중략…)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 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연 별 및 읍 면 동 별 세 대 인 구 65세이상 고령자 총 수 한 국 인 외 국 인 합 계 한 국 인 외 국 인 남 M 여 F 남 M 여 F 남 M 여 F 여 F 여 F 여 F 군 내 면 207 623 313 310 620 312 308 3 1 2 133 66 133 66 표 1. 2010년 군내면 인구비율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13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3천만 동포에게 泣告 함 1948. 2. 10〉 상황이 점차 단독정부 수립에 이르자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48년 2월, 이들은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 이 하나 된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회의를 제안하였고 남한 단독으로 이뤄졌 던 총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전격적인 평양 방문이 이루어졌다. 이 연석회의 에서 김구 일행과 북한 정치 지도자들은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 미군과 소 련군이 동시에 물러난 이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합의한다. 그러나 당시 한민당과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가 북한에 이용당한 것이라 비 판,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하였다. ① “남과 북,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다.” 1947년 5월 두 번째 미ㆍ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회의는 결렬되었고 이후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연합(United Nations)으로 넘겼다. 당 시 미국의 영향력이 컸던 국제연합은 “1947년 11월 인구를 기준으로 남북한 주민들이 자유롭게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 정부를 구성한 다.”라는 안을 결정하였다. 1948년 1월 국제연합(United Nations)은 한국 임시 위원단을 구성하여 서 울에 들어왔으나 소련과 북한은 이들이 북한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였 다. 결국 국제연합(United Nations) 소총회는 남한만의 선거를 통해 단독정 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결정하였다. ② “헌법제정과 대한민국의 수립” 1948년 5월 10일,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되고 헌법이 정한 절 차에 따라 간접 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건국을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러자 북한 은 1948년 8월 25일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을 선출, 1948년 9월 9일 헌법 에 정한 대로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

1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 1950년 7월 13일, 당시 대 통령 이승만은 미국 CBS 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 의 행동은 38선을 제거 시켜 주었고, 38선에 의 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 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 다.",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포하였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 결국 분단국가로 시작하기에 이 른다. 나. 남북의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의 발발” 남과 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 그 갈등이 점점 심화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부터 지속적으로 남침 의사를 소련에 타진하였고 이러한 남 북 갈등의 고조는 무력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에 1949년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으며 김일성은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철수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 나 북한의 김일성은 미국과 소련이 철수한 이후에도 소련과 비밀 협상을 통 해 소련 무기를 북한 영토에 들어오게 하는 등 적화통일을 위한 작전을 펴고 있었다. ① “1950년 6월 25일 04:00 한국전쟁이 발발하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운데 벌 어진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조선인민군에 의해 대대적인 남한 침략 이 시작되었다. 한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후퇴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국제연합(United Nations)과 불리하던 전쟁의 전세를 역 전시킨다. 한국정부는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결코 한반도의 평화 와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는 의지와 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전쟁에 임했다.2)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며 1950년 9월 27일 에 서울을 다시 되찾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일성은 1950년 10월 9일 주요적인 정부ㆍ단체ㆍ기관ㆍ부대ㆍ수 뇌부 등을 평양에서 철수시켰다. 1950년 10월 12일에는 김일성 역시 평양에 서 철수, 다시 대한민국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덕천에서 희천 을 거쳐 강계로 이동하여 중국의 펑더화이를 만난다. 이로 인해 한국군과 미 군이 압록강까지 수복했지만 1950년 10월 25일 중국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2월 4일 한국군과 미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여 1 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고 되찾는(1950년 3월 15일) 등 치열한 전투가 지속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15 되었다. 1951년 이후 휴전이 될 때까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소모 전은 계속되었다. ② 정전협정의 체결과 군사분계선 책정 기나긴 소모전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에 따라 한 반도는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Demilitarized Zone)이 책정되었 다. 이 군사분계선은 155마일(248km)에 달하며 DMZ는 군사적 완충지로서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적인 실체이다. 이는 지난 60년간 남 과 북이 이 경계를 사이로 긴장과 화합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이 대변한다. 예컨대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될 때 경의선의 복원 과 남북연결로 완공이라는 큰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현재 남과 북은 또다시 긴장상태에 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군사분계선을 포함한 임진강 유역은 비무장지대, 민간인통제구역, 군사보호구역 등 군사 적 목적과 안전 등의 문제로 인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28km 에 달하는 휴전선과 접해 있어 우리나라 통일안보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지구촌에 유일한 민족분단의 현장이다. 정전협정 이후 남북관계 일지를 소략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일 시 내 용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 1956년 4월 08일 북한노동당, '남북조선 정권 당국 간 무력 불행 사 선포' 제의 1958년 10월 26일 북한ㆍ중공군 철수 19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7월 04일 남북 공동성명 발표 1984년 9월 29일 북한, 한국의 수해이재민을 위한 구호물자 인도 1984년 11월 남북 경제회담 1985년 5월 남북 적십자회담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 7.7선언 1990년 9월 남북 고위급회담 1990년 9월 남북(북남)통일축구대회(평양과 서울) 1991년 4월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출전 표 2. 정전협정 이후 남북관계 일지

1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다. 통일촌의 형성 민간인 통제구역은 대체로 군사분계선과 평행을 이룬다. 이 민간인 통제 구역은 군사작전을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민통선 거주민의 영농을 통제하기 위해 설정된 선으로 파주시내의 임진강 이북지역의 군내면ㆍ진동 면ㆍ장단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지역에 민간인이 거주하게 된 것은 1972년 4월 육군 제1사단 제대장병 14명이 영농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73년 3월 종합개발에 착수하여 80여 세대가 입주하여 통일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5월 1일 군 조례 제610호에 의하 여 군내출장소가 설치되어 현재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백연리와 조산리를 포 함하여 4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4개 면 모두 면사무소가 없고 군내면 7개 리, 장단면 8개 리, 진동면 5개 리, 진서면 2개 리로 되어 있다. 일 시 내 용 1991년 6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단일팀 출전 1991년 9월 17일 남북 동시 유엔(UN) 가입 1992년 2월 남북 기본합의서 합의ㆍ발효 1994년 6월 남북 정상회담 합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10월 21일 북미 제네바 기본 합의문 채택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햇볕정책 발표 1998년 4월 남북 비료회담(베이징)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 첫 출항 1999년 12월 남북 통일농구대회 개최(서울) 2000년 4월 10일 남북 정상회담 공동 발표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회담 6.15 남북공동선언, 제1차 이산가 족방문(2000년 8월 15~18일) 2000년 9월 15일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 동시입장 2002년 9월 5~8일 남북통일축구대회(서울) 2002년 9월 18일 경의선ㆍ동해선 철도ㆍ도로 연결 착공식 2002년 9월 29일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북측 선수단 참가 (~2002년 10월 14일) 2003년 6월 14일 군사분계선(MDL) 남북 경의선-동해선 연결 행사 2003년 8월 27~29일 제1차 북핵 6자회담 개최 2004년 2월 25~28일 제2차 북핵 6자회담 개최(베이징) 2004년 6월 23~26일 제3차 북핵 6자회담 개최(베이징)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17 2001년까지 통일촌의 연혁은 아래의 표와 같다. 라. 통일촌이 입지한 군내면의 옛 지명들 ⓛ 방목리(芳木里) 방목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현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현내면의 방목리ㆍ동하리ㆍ서하리 일부와 진동면의 동파리ㆍ서곡리의 일 부 지역을 병합하여 방목리라 해서 군내면에 소속되었다. 1963년 파주군 임 진면(현 문산읍)에 폐합되었다가 1972년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방모기ㆍ방 무기라고도 한다. ② 백연리(白蓮里) 백연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현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현내면의 백연리ㆍ서상리ㆍ서하리의 일부와 중서면의 도라산리 일부 지역 을 병합하여 백연리라 해서 군내면에 소속되었다. 1963년 파주군 임진면(현 문산읍)에 편입되었다가 1972년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③ 송산리(松山里) 송산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북면 지역으로, 소나무가 울창했던 산 밑에 자리하고 있어 송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북면의 송산 일 시 내 용 1972년 4월 제1사단 하사관 14명 영농 1972년 5월 박정희 전 대통령 정착촌 개발 지시 1972년 11월 통일촌 건립 기본계획 확정 1972년 12월 28일 장단면 · 진동면 · 진서면 파주군에 편입(법률 제 2395호) 1973년 8월 준공 및 입주(80세대) 1979년 5월 21일 군내 출장소 설치 관할 2001년 8월 15일 사랑의 집(주택) 3동 12호 건축 2001년 9월 1일 통일촌 시범 정보화마을 지정(행정자치부) 2001년 12월 15일 장단주민자치센터 개소 표 3. 통일촌 연혁

1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리ㆍ중서면의 서장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송산리라 하여 군내면에 소속되 었다. ④ 읍내리(邑內里) 읍내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현내면 지역으로, 장단 고을이 있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현내면의 동하리ㆍ서하리ㆍ서상리ㆍ방목 리ㆍ정자포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읍내리라 하여 군내면에 소속되었 다. 1963년 파주군 임진면(현 문산읍)에 폐합되었다가 1972년 군내면에 편 입되었다. ⑤ 점원리(點元里) 점원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현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현내면의 점희릉리 전부와 원당리 일부, 중서면의 도라산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점희릉(點希陵)의 ‘점’자와 원당(元堂)의 ‘원’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 다. 1963년 파주군 임진면(현 문산읍)에 폐합되었다가 1972년 군내면에 편 입되었다. ⑥ 정자리(亭子里) 정자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현내면 지역으로, 정자포가에 자리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현내면의 정자포리ㆍ서하 리ㆍ백연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정자리라 하였다. 1963년 파주군 임 진면(현 문산읍)에 폐합되었다가 1972년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장자포리라 고도 한다. ⑦ 조산리(造山里) 조산리는 조선시대 장단군 진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진 북면 조산리ㆍ송산리 일부와 개성군 동면 백동음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군 내면 조산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에 의거하여 파주군 임 진면(현 문산읍)에 편입되었다가 1972년 12월 28일 법률 제2395호에 의거하 여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조산동이라고도 불린다.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19 3. 민간인 통제구역에 생겨난 마을, 통일촌 (1)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통일촌을 구상하다” 키부츠의 구성원은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토지는 국유(國 有), 생산 및 생활재(生活財)는 공동소유이다. 구성원의 전 수입 은 키부츠에 귀속된다. 키부츠의 재정에 의해서 부부단위로 주 거(住居)가 할당되는데,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조리ㆍ제공되며, 의류는 계획적인 공동구입과 평등한 배포 등의 관리로 이루어진 다. 아이들은 18세까지 부모와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며, 자치적 으로 결정된 방침에 따라서 집단 교육된다. 아랍과의 긴장관계 하에서 민병적(民兵的)인 군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도 특징이다. “1970년대의 세대에게 키부츠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 였다. ‘전쟁이 터지면 아랍 학생들은 외국으로 달아나지만, 이스라엘 유학생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외국에서 돌아온다.’ 옛 지명 유 래 강청굴ㆍ강청골 공디기 북서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골미 마위 북쪽 산 밑에 있던 마을 공디기ㆍ공덕이ㆍ공덕동ㆍ공덕리 조천말 북쪽에 있던 마을 구생골 방굴 북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 긴사릿등 긴사릿등 밑에 있던 마을 돌고개 돌고개 밑에 있던 마을 마위 통일촌 남서쪽에 있던 마을, 마위답이 있었다고 함 방굴ㆍ율곡ㆍ율골 마위 북서쪽에 위치, 밤나무가 많았다고 전함 방축굴ㆍ독개방축골ㆍ독개방축굴 백연리에 있던 마을 새능말 구생골 서쪽에 있던 마을 새텃말 통일촌 북쪽에 있던 마을 수내ㆍ수천 방굴 북동쪽에 있던 마을, 수렁이 많았다고 전함 조촌말ㆍ조천말 돌고개 북쪽에 있던 마을, 조씨들이 살았다고 전함 통일촌ㆍ골밋등 골밋등 위에 있는 마을 표 4. 군내면의 옛 지명들 통일촌 표지석

2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 50명에서 1,000명이나 그 이상의 구성원이 키부 츠에 소속된다. 는 말은 ‘강한 이스라엘’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문화일보 2012. 12. 2일 “다시 키부츠에서 배운다.” 키부츠는 현대 이스라엘에서 인습적인 '가족'의 대안을 얻어 내려는 목적 으로 설립된 소규모의 농업공동체3)이다. 키부츠에서는 가족생활을 확대한 공동체생활을 하며 공동소유ㆍ공동소비를 한다. 이 키부츠는 농업뿐만 아니 라 식품가공ㆍ기계부품제조 등의 경공업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오 늘날 농업만이 키부츠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기존 경지(耕地)의 집단화가 아니라 계획적인 입식사업(入植事業), 철저한 자치조직에 기초를 둔 생활공 동체를 기반으로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스스로 이뤄가는 것이 목적인 것이 다. 키부츠는 척박한 모래사막에서 선진농업국으로 발전한 이스라엘 경쟁력 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가. 대한민국의 통일촌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농촌 을 건설하라” 키부츠의 기원이 집단노동과 공동분배ㆍ공동취사ㆍ공동육아와 같은 사회 주의적 가치에서 출발했기에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예컨대 통일촌 마을 전경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21 수많은 키부츠들이 사유재산 불인정ㆍ무료급식ㆍ공동육아를 폐지했고 협동 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70여 년간 유지해온 그들의 삶의 방식은 변화했고 체험관광과 리조트 사업으로 전환했다. 마을주민은 이곳의 맑은 공기와 호 수 자연환경을 축제와 연계, 슬로푸드 등 마을자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재탄 생시켰다. 통일촌은 1972년 5월 대통령의 적십자 전방사무소 순찰시 "재건촌의 미 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농촌을 건설하라"는 특별지시에 따라 1973년 8월 건립되었다. 당시의 재건촌은 구체적인 종합개발계획 없이 제대군인과 고향 민, 그리고 영세민을 입주ㆍ정착시켰다. 이로 인한 낙후성ㆍ단결력 및 애향 심 결핍ㆍ토지 및 주택 사유 불인정 등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통일촌은 이러한 재건촌의 미비했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통일촌이다~ 이렇게 정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그 때 당시에 는 우리나라 식량형편이 어려웠을 때니깐 에, 그 때 미군이 주둔해 있던 지역을 한국군이 인수하면서 이런 황무지들이 많았다구. 그래서 그 때는 우리나라 식량이 좋지 않아서 저런 황무지를 정산해서 그 때 국가지적 통일촌 마을 전경과 논밭

2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 김О혹(남, 72세) 도 식량증산에 힘쓰고 그렇게 하면 국가에 보탬이 될 것이다 하고 군인 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것인데, 군인이 그런 일까지 맡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해서, 그런 문제가 있어서 제대를 했지. 제대를 한 군인들이 한 해 농사를 지었는데 그게 72년도야. 그 때 남북적십자 회담을 했는데 처음 엔 평양해서 열리고, 두 번째 서울에서 열렸는데 그 때 이북사람 사절이 내려오게 되면 이런 황량한 벌판을 보여주는 것보다 농사를 지은 모습을 보여주면은 좋잖아요? 그래서 처음 시작한 것을 정부 쪽에서 긍정적으 로 본 거라. 그 때 5월 달 대통령이 박정희였는데, 그 통일촌이라는 마을 을 조성해서 그 때 이스라엘의 키부츠 마을을 따서 낮에는 일을 하고, 유 사시에는 전투에 임하겠다는 각오로 했던 것이 통일촌 마을이었어요.”4) 당시 파주군 군내면 백연리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가 통일촌의 건설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입주자의 선정은 군복무를 필한 사람ㆍ5인 가족 이내로 노동력 2인 이상인 기혼남자ㆍ새마을 정신이 투철하고 국가관이 확 고한 사람ㆍ신체 건강하고 영농능력이 있는 사람ㆍ사상이 건전하고 전과사 실이 없는 사람ㆍ주벽 및 도벽이 없고 채무가 없는 사람 중에서 선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통일촌(백연리)에는 제대를 앞둔 장교 및 하사관 40세대와 예 비군 자격을 가진 원주민(원 고향인 주민) 40세대 총 80세대가 입주하게 되 었다. 이 중 입주 제대 군인들에 대해서는 가족 교육비 50%, 교통비 50%를 지원해 주었다. 이 곳 통일촌 입주 80세대에는 논과 밭을 합하여 200ha의 경지가 제공되었 는데, 이곳은 외부인의 입주가 허용되지 않는 민통선이다. 통일촌의 주민들은 북방지역의 넓은 토지를 경작함으로 인해 호당 평균 경지면적이 2.7ha에 이르 고 있다. 또한 경지면적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한 까닭에 영농의 보다 효율적인 방식이 요구됨으로써 농기계 보유정도도 여타지역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2)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개척하다” 전쟁 전 통일촌 부근에는 수내나루가 있어 황해에서부터 배가 올라왔고 파시장이 성행했다. 동네에는 마찻길이 있어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했고, 쉬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23 5) 최О수(남, 74세) 6) 최О수(남, 74세) 어갈 수 있는 주막도 있었다. 당시 이곳의 원주민으로 있었 던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나루 터를 중심으로 한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원래 산이었어요, 집이 요기 몇 채 있었고, 강 가로 집이 많았지. 수내나루라고. 지금 백연리인데, 실연동이던가 수내나 루터야, 바로. 배가 들어오고. 황해도 연평도에서 조기 잡으면 여기 들어 와서 개성으로 가고. 나루터 컸죠. 주막도 있어서 사람들 북적북적댔지. 근데 여긴 집결지는 아니었고, 거쳐 가는 곳이었지. 배가 마포로도 들어 가고, 개성으로 가고 도시로 나가지…그땐 차도 아니고 달구지로 다녔고 했지…여기 강을 수냇강이라고 불렀어.…”5) “길이나 집 모습만 바뀌었지 마을 전체 형태라든지 그런 건 그대로예요. 내가 51년도에 나갔으니깐. 그때는 나루터에 댕기는 길만 마찻길이 있었 는데. 지금 JSA 가는 길인데. 지금 이 길이 아니라 미군부대로 해서 나 가는 길 있었어요. 51년도에 나갔다가 73년도 들어왔는데 미국애들이 다 보수했더라고. 다리도 없었는데…여기 옛날 수냇벌이 요즘 전진농장이 란 말이야. 왜 전진 농장이라고 하냐면 여기 최전방 사단이름이 전진부 대잖아? 그래서 전진을 따와서 전진 농장이다 이런 거지.”6) 조선일보 1973년 8월 22일 기사자료 1972년 전진농장 개간 당시 전진농장 최초의 못자리

2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 박О희(여, 70세) 8) 박О희(여, 70세) 하지만 전쟁 후 통일촌 일대는 적군 감시를 위한 가시거리 확보 차원에서 실시된 벌목 작업으로 인해 경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 제보자의 표현 에 따르면, 그는 당시 공영방송에서 방영되던 ‘동물의 세계’에 나오는 밀림 지대의 황무지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의 산 역시 무장공비의 식별 을 목적으로 가시거리 확보를 위해 벌목 작업을 한 터라 마을은 그야말로 허 허벌판이었고 산은 민둥산과 다름없었다. 정부에서 1차적으로 대지 평탄화 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농사를 짓기에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 었다. 주민들은 이러한 애로사항들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아가면서 통일촌 을 일구고 발전시켜 나갔다. 1973년 통일촌 입주 당시, 10가구씩 1조가 되어 군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 는 제비뽑기로 결정하였다. 입주 초기 대남 방송이 매우 크게 들려 주민들은 위압감을 느꼈고, 수시로 전쟁대비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이곳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주민들의 노력과 함께 대민지원(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이 이루어졌다. 논과 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지뢰 피해를 입는 사례도 적지 않았 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주민들의 제보가 이를 말해준다. “그 때 누가 지뢰가 어디있다 그런거 알기나 했어? 그냥 뭣도 모르고 멀리 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발목지뢰 밟아서 크게 다친 사람 있었어. 그 사람 다치고는 아마 다른 데로 이사갔을 거야. 도라산 자락에서도 누가 발목지뢰 밟아서 온몸에 피투성이 돼서 내려오고 그랬을거야 그 때. 그 다음부터 사 람들이 산 쪽 깊숙이로는 잘 안가더라구. 지금도 산은 다들 잘 안 올라가.”7) “예전에는 지금처럼 농기계가 없었잖아. 벼 다 베면 또 그걸 탈곡기에 넣어서 일일이 훑어 내야 된다구. 아 근데 자기 일도 아니고 친구네 농사 도와주러 갔다가 글쎄 탈곡하는 그 길목에서 대형지뢰 그거 뭐라고 하 지? 크레모아, 그게 터진거야. 아주 중상을 입어서 그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했었다구.”8) “우리 바깥 양반이 예전에 꼴 베러 갔다가 깊숙이 들어갔다가 거기 예전 에 파놓은 참호가 있었나봐. 거기 빠져서는 다리가 부러진거야. 알고보니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25 9) 박О희(여, 70세) 10) 박О희(여, 70세) 거기가 죄다 지뢰밭이고 그랬던 거지. 가까스로 기어 나와서는 병원에서 몇 달은 누워있었나봐. 그나마 지뢰 그게 안터졌으니 그게 다행이지. 그 담부터는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라고 서로들 얘기해주고 그랬지.”9) “옛날엔 그저 비만 주룩주룩 오면 논이고 밭이고 고랑 이런데로 지뢰가 둥둥 떠내려 오고 그랬다구. 비 오는 날엔 그래서 특히 조심을 해야 돼요. 그냥 저기 물 흘러가는데 큼지막한 지뢰도 나왔다고 그러고. 처음에 아주 무서웠지 그럼. 군인들이 와서 다 제거해줬다고 했는데도 아직 몰라. 그래 서 사람들이 깊숙한데는 웬만하면 잘 안가려고 그래. 가면 안 되지.”10) 지뢰에 대한 주민들의 피해사례를 통해 통일촌이 얼마나 군사학적, 지정 학적으로 이북과 대치하는 전략지점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통일촌은 판문 점과 155마일 비무장지대ㆍ민통선 등 대표적인 적가시 지역이다. 적가시 지 역은 육안으로 북쪽의 적군이 식별되는 지역을 뜻한다. 분단 이후 통일촌을 비롯해 대성동ㆍ해마루촌에는 현재 8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농사를 짓 고 있다. 현재 조사지역은 개성공단과 경의선의 복원으로 인해 남북 교류의 길목의 하나로서 주목받고 있다. 통일촌은 분단의 상징이었던 비무장지대의 깨끗한 자연환경처럼 분단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집 형태는 거의, 지붕은 내가 새로 했고, 뼈다귀는 살아있어요. 원래 처 음 집을 받았을 때가 14평, 창고는 8평 이렇게 지어졌어요. 다 똑같이 분 집 앞의 벙커 학교 앞 벙커

2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1) 최О수(남, 74세) 양 받았지.” “육, 해, 공군 다 들어왔는데 육군이 많았고. 해병대가 둘인 가 하나가 지원했는데 안 들어왔어요. 장교가 상당히 많았어요, 소령, 중 령들이.”11) 통일촌은 앞서 언급한 바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모델로 삼아 1973년 민통 선 내 황무지를 개간해 조성되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는 구호 아래 50~60대 여성들도 사격 훈련과 각개전투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같이. 여기서 예비군 중대장이 있어가지고. 훈련은 총쏘고, 방어 훈련, 공격 훈련하고 다 똑같지.” “총은 도라산 맞은짝에 남북통일 개성 공단 들어가는 거기서 있었어요.” “칼빈, 난 칼빈 못 쐈어 그전엔. 해병댄 다 M1이에요” “여자들도 했죠. 다 교육받았지.” “대피훈련, 1년에 한번씩. 전진교 글로 나가서 파주에서 광탄에서 끝나지.” “방공호에 숨고. 출장 소 옆에는 새로 진거고, 원래 입주할 때 대피소가 아니라 방공호인데. 벙 커였지. 지금 위에 아마 하나 두 군데 남아있을걸 아마. 여기는 없어졌어 출장소 부근 대피소(방공호)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27 12) 최О수(남, 74세) 13) 최О수(남, 74세) 요. 집에 지하실이 하나 다 있어요. 새로 진 집은 밑에 다 지하실이에요. 일종의 대피소 그런 거죠. 지금도 있어요. 집집마다 다 있어요.”12) 모두 80가구가 입주했는데 절반은 30대 미만의 실향민이었고 나머지 절 반은 민통선 지역에서 군복무 경력이 있는 50대 미만의 민간인이었다. 정부 는 입주하는 가구에 집과 농지를 제공했다. 입주민들이 모두 예비군훈련을 받으며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개간해야 했으니, 초기 통일촌은 단단한 공동 체로 출발했다. 80가구가 10가구씩 나누어 8개 단지를 만들었다. 통일촌은 공동생활을 기반으로 자율과 자치를 더하여 발전해 오고 있다. “6~7개월을 숙영을 해가지고 남자들만 들어와서 밥을 해가면서 일하고. 그 10개조에서. 그 다음에 가족 불러들이고…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 그때는 장화도 없어. 맨발로 들어가는 거야. 개간할 때 낭구도 그냥 쓰러 뜨려갔고. 참 그 끄내기도 힘들고. 도저가 밀어놔도, 풀뿌리 같은 거. 산 이니깐. 밍크담요 말아 놓은 거 같아. 삽이 안 들어가. 돌도 말할 수 없이 많고. 내 발도 내 발이 아냐. 말도 못 해요.”13) 1990년대 후반, 해마루촌의 부지 선정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마찰이 있었 던 것처럼 통일촌 역시 1980년대에 수복 지구 부동산특별조치법이 시행되면 서 민통선 일대 실제 토지 소유자들이 나타나 옛 등기문서와 인후보증을 통 해 자기 땅을 찾아갔다. 그러자 정부가 발 빠르게 주민들이 융자를 받아 땅 을 매입할 수 있도록 평당 2000원씩을 지원해주었다. 현재 통일촌은 지역적 특수성을 마을의 특성화 사업과 연계시키고 있다. 통일촌이 민통선 관광 코 스에 포함되어 수입을 올리고 있는 데다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서 마을도 활 기를 찾고 있다. 마을 안에 주민들이 공동 운영하는 직판장과 식당 그리고 장단콩 영농법인이 개설한 매장도 있다. 관광객 이외에 남북교류 사업과 관 련된 사람들도 출입하고 있다. 통일촌에서 바라보면 도라산 출입사무소 너머로 대성동 마을에서 게양한 태극기와 북쪽 기정동에서 달아놓은 인공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여정부 시절,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제법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새 정부 들

2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4) 파주군,『파주시지』권 1, 2007, 169-171쪽. 15) 파주군,『파주군지』下, 1995, 315쪽. 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두 깃발 사이는 예전 같아 보이지 않는다. 통일촌 과 해마루촌 그리고 대성동 마을 사람들은 남과 북을 통틀어 분단의 상처가 가장 깊은 사람들이다. 민통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만큼 평화와 통일 에 대한 염원이 누구보다 크다. 인적이 끊긴 도라산 출입사무소나 또다시 철 마가 멈춰선 경의선 철길을 이들보다 더 아픈 가슴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14) 가. “통일촌 주민들, 논과 밭을 일구다” 조사 지역의 주요 생업은 농업으로,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밀접한 연관 이 있다. 동쪽은 높은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남북으로 길게 둘러 있고 서쪽으 로 갈수록 매우 낮은 구릉지대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북쪽에는 임진 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서쪽에는 임진강과 한강이 서로 만나 서해로 빠지 는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비옥하고 풍요로운 농업 지역의 조건을 잘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15) 이러한 조건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도시권역과 동떨어져 있어 근대적 개념 의 산업화로의 진입이 상대적으로 늦어져 근래까지도 이 지역민들은 재래식 벼농사를 주생업으로 삼았다. 실제로 조사지역의 대다수 주민들은 평생 동 안 농업에 종사해 온 분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 히 밭농사를 근근이 이어가며 생활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서울과 신도시 개발에 따른 영향으로 우유생산을 위한 젖소 목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성세대들보다는 젊은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기 존의 농업을 탈피하여 젖소 사육에 관심을 갖고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비교 적 큰 규모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생업활동이 고소득을 보장해줄 수 있고, 수입상 안정성을 기할 수 있었다는 장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젖소 목장을 운 영하는 가구가 많다. 이 밖에도 주민들은 맥류, 채소류, 두류, 특용작물 등 여러 작물을 재배하 고 있다. 이러한 밭작물의 경우, 벼농사와 같이 수입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한 가정에서 필요한 양만큼 취하여 자급자족의 형태에 머 무르는 경우가 많다.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29 ① 맥류 조사 지역에서 재배되는 주요 맥류는 보리다. 이들 맥류의 재배량은 현재 매우 미미한 형편이지만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의 주요 작물로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리는 겨울보리로서, 벼의 추수가 끝난 후 쉬는 땅에 보리를 심어 이듬해 봄 즉, 모내기 전에 수확을 한다. 밭과 논에서 보리를 심기 전에는 흙을 갈아주거나 복토를 자주 해주어야 한다. 이듬해 봄 이 되면 수확한 보리를 탈곡한다. 과거에는 발을 이용한 탈곡기를 많이 사용 하였는데, 이렇게 수확, 탈곡한 보리는 가난한 시절 쌀의 대체양식으로서 중 요한 식량으로 소비되었고, 싹이 튼 맥아의 경우는 엿기름이라 하여 감주 등 을 만들 때 사용하였다. ② 채소류 조사 지역에서 재배되는 채소는 무, 배추, 고추를 들 수 있다. 배추의 파종 시기는 비닐하우스와 재배법이 발달하면서 그 품종에 따라 재배시기 역시 제 각기 달라졌지만 보통 배추의 파종 시기는 5-6월경으로 잡는다. 최근에는 추운 겨울에도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 개발되면서 파종시기가 7-8월경까지 늦어지기도 했다. 여름철에 심은 배추는 김장철이 다가오기 전에 재배를 하 였다. 배추를 심기 위해서는 종자를 먼저 구해놓아야 하며, 파종을 하기 전에는 밭에 이랑을 내야 한다. 조사지역에서 배추를 심을 때에는 이랑과 이랑 사이 거리를 60-70cm 정도로 한다. 배추는 특별히 병충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연 별 및 읍 면 동 별 합 계 미 곡 맥 류 잡 곡 두 류 서 류 Total Rice Wheat & Barley Miscellaneosgrains Beans Potatoes 면 적 생산량 면 적 생산량 면 적 생산량 면 적 생산량 면 적 생산량 면 적 생산량 군 내 927. 56 4,285. 06 612. 00 3,157. 00 1.20 2.50 8.50 21. 80 276. 70 507. 50 29. 16 596. 26 표 5. 2010년 군내면의 식량작물 총 생산량 식량작물 생산량(정곡) PRODUCTION OF FOOD GRAIN(POLISHED) 단위 ㏊ M/T

3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없어 작물을 기르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 때때로 비료를 뿌려주면서 지속적 인 관리만 해주면 된다. 조사지역의 경우, 배추를 수확하기 약 열흘 전에 배 추 하단 부위를 볏짚으로 묶어주는데, 이렇게 하면 추운 날씨에 배추가 얼어 버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무의 파종과 수확 시기 역시 배추와 비슷하다. 무는 배추에 비해 밑거름 사용이 많은 편이다. 퇴비는 잘 썩은 것만 골라 사용하는데, 이렇게 해야 무 의 뿌리가 곧게 자라기 때문이다. 무는 다른 채소에 비해 온도에 민감하여 파종한 이후 2-3주 동안 온도 유지관리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 주어야 한다. 그리고 수확기에는 무에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고추는 주거지 옆 텃밭에서 재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재배량이 많지 않 은 편이다. 파종 시기는 5월경이며, 수확 시기는 10월경이다. 품종에 따라 시 기의 차이가 조금씩 나긴 하지만 대략 이 기간 사이에 서너 차례 수확을 한다. 고추 모종을 심기 위해서는 먼저 밭을 간 후에 둔덕을 만들고, 그 후에 모종을 심고 어느 정도 자라게 한 뒤에 고추가 곧바로 자랄 수 있도록 고추 받침대를 박고 끈으로 묶는다. 받침대의 경우 양쪽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 땅에 잘 박힐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해 사용된 나무는 잘 모아 두 었다가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창고에 보관해 둔다. 고추는 탄저병과 같은 병 충해에 걸리면 작물 전체에 번져나갈 위험성이 있어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으 면 안 된다. 따라서 다른 채소에 비해 농약 관리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고추는 양력 6월 중순부터 수확이 가능한 풋고추와 9월 말에 수확하는 홍 고추로 나눌 수 있다. 9월 말에 수확하는 홍고추는 고춧가루를 얻을 목적으 로 재배한다. 풋고추는 여름철 반찬용으로, 홍고추는 김장용으로 사용한다. 홍고추는 재배뿐만 아니라 수확 이후에 건조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주로 햇 볕에 말리는데, 날이 궂은 경우에는 집안 거실이나 부엌, 빈 방에 펼쳐두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③ 두류(콩) 콩은 그 크기와 색깔에 따라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조사 지역에서 재배 되던 콩 역시 쥐눈이콩에서부터 메주를 만드는 콩까지 다양한 콩이 재배되 었다. 콩은 6월 초쯤 심는다. 옥수수, 고구마 등 여러 작물과 혼합해서 심기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31 도 하고 넓지 않은 밭에 둔덕을 만들어 심기도 한다. 콩을 심을 때에는 한 구 덩이에 3개 정도의 좋은 콩을 심은 후 흙으로 덮어 주고 물을 조금 준다. 수 확은 추수 무렵이다. 주로 낫을 이용하거나 맨손으로 줄기를 뽑는 방식이다. 수확된 콩은 밭두렁이나 집안 담 근처에 세워둔 후, 타작을 하여 콩을 털어 내면 된다. 콩은 한 번 재배하고 나면 지력이 매우 약해지기 때문에 윤작의 형태를 취한다. 최근에는 ‘장단콩’이라는 지역 브랜드 상품을 개발하고, 파주 시와 협력하에 대대적인 시판에 나서고 있다. ④ 특용작물 조사지역의 들깨와 참깨의 파종은 5월경이고, 수확은 추수 무렵에 한다. 참깨와 들깨 모두 땅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심을 수 있다. 또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병충해에 강해 농약을 치지 않아도 돼서 관리가 매우 수월하다. 추수 무렵에 수확한 참깨와 들깨는 마당에 멍석이나 비닐 등을 깔고 건조시킨다. 깨를 타작할 때는 그 크기를 고려하여 소형 도 리깨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사용한다. 수확한 참깨와 들깨는 방앗간 등에 가져가 기름으로 만든다. 나. “통일촌 주민들 장단콩으로 결실을 맺다” 정부는 농촌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방 안으로 ‘휴가철 농어촌에서 보내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곳 통일촌 역시 정부가 펼 치고 있는 ‘휴가철 농어촌에서 보내기 운 동’의 최적합지에 해당된다. 이곳은 다양 한 체험을 즐길 수 있고 깔끔하게 정돈 된 마을 풍경, 청정 먹을거리, 생태, 농사체험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장단콩은 파주의 대표적인 특산물 중 하 나이다. 민통선 안쪽의 기후와 토질은 콩 을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군내면 대 파주장단콩축제 포스터

3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6) 파주시,『파주시지』권 1, 2007, 174-175쪽. 성리 마을과 대연리 통일촌 사 람들은 1996년부터 작목반을 결 성하고 콩 농사를 짓기 시작했 다. 된장과 간장의 원료로 쓰이 는 백태와 밥에 넣어 먹는 서리 태를 주로 생산하는데, 매년 파 주 개성인삼축제가 끝난 직후인 11월 초순 장단콩축제를 열어 장 단콩의 우수성을 홍보하며 수익 을 올리고 있다.16) 예로부터 파주시 장단면(長 湍面) 지역에서 생산되는 콩은 그 품질로 인해 명성이 높았다. 1913년 콩 장려품종으로 결정된 품종인 ‘장단백목’은 장단 지역의 토종콩이 며,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작물시험장에서 인공교배를 통해 육성 보급된 품종인 광교(光敎)는 장단백목과 일본에서 도입한 육우3호 품종을 교배한 것 이다. 1970년대 초부터 민통선 북방지역 개발로 통일촌마을이 조성되었는데 이 지역에 1백만m²의 재배면적을 확보하여 콩 농사를 짓고, 전통장류 가공 시설을 운영하면서 장단콩을 지역 특산물로 육성하고 있다. 해마다 11월에는 임진각관광지 일원에서 ‘파주장단콩축제’를 연다. (3) 통일촌의 시설물들 가. 군내초등학교 통일촌 내에 위치한 군내초등학교는 1973년 당시 마을의 명칭을 따서 백 련(白蓮)국민학교로 개교되었다. 여름철이 되면 주변에 흰 연꽃이 가득 피어 마을 이름을 ‘백연리’라고 불렀다. 한국전쟁(1950. 6. 25) 발발 이전 군내국 민학교는 그 행정구역상 군내면 읍내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 쟁으로 인해 학교는 자동 폐교 조치되었다. 그 후 1982년 3월 1 일 학교의 맥 콩 말리기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33 을 잇고자 하는 군내국민학교 졸업생들과 지역 주민들 의 바람대로 현재의 ‘군내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어 지 금에 이르고 있다. 통일촌 내 군내초등학교는 아래의 9가지 교육이념과 목표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미래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다. ● 나라를 사랑하고 예절 바른 어린이 ● 스스로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어린이 ● 협동 봉사하고 부지런한 어린이 ●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인내심이 강한 어린이 ● 노력 중점 및 특색사업 ● 특기적성교육의 강화 ● 기본학력의 책임관리 철저 ● 바른 생활습관 지도 ● 환경오염방지교육 강화 군내초등학교의 교육이념 중 특이할 만한 점은 나라사랑과 협동봉사ㆍ생 태환경 중요성 강조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통일촌의 모든 주민은 통일된 안 보의식과 협동ㆍ단결로써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온 바 있다. 이러한 통일촌 주민들의 바람과 의식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한 전쟁과 안보에 대한 철저한 교육으로 나라사랑하는 마음 즉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다. 비록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후에 다가 올 통일에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나라를 가꾸어 나가기를 원하는 이곳 통일 촌 주민과 선생님의 교육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2012년에는 유엔기구의 사무총장이 통일촌 군내초교를 방문했다. 이는 유 엔기구 수장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파리에 위치한 유네스 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본부의 이리나 보코바(60) 사무총장이 유엔기구 처음으로 이 곳 북단 통일촌을 찾은 것이다. 학생 대표들은 멀리서 온 손님에게 부채와 붉은 장미 한 다발을 선물로 주었다. 유엔기구 사무총장 군내초등학교 정문

3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의 모국 불가리아의 국화(國花)인 장미ㆍ부채 앞면에 영문 환영사와 태극마 크ㆍ유네스코 상징 문양ㆍ뒷면엔 전교생의 이름을 적은 의미 있는 선물을 한 것이다. 나. 보건소 1981년에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된 백연보 건진료소는 관할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서 건강에 대한 상담과 건강관리 및 증진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특수지 역 및 응급상황을 위해서 진료소에 상주하 고 있다. 현재는 98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와 삼 성제일병원과 연계하여 연 1회 자궁암 검 진을 실시하고 있으며, 골다공증에 대한 검 사 및 관리와 요실금에 대한 관리가 지속적 으로 실시되고 있다. 연 4회에 걸친 골다공조선일보 2012년 8월 9일 보도기사 군내초등학교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35 증 검사와 각 계절에 맞는 예방접종 실시 및 각 마을의 노인정을 중심으로 필요에 맞는 진료와 상담, 교육도 실시 중이다. 주요업무는 다음과 같다. ● 일차진료와 그에 따른 기본적인 약물투여 및 주사 실시 ● 응급사항시 응급조치 실시 ● 고혈압 및 당뇨 등에 대한 만성질환 관리 ● 각종질병에 대한 문의 및 심리적인 문제 상담 ● 기본적인 검사 실시 ● 보건교육 실시 ● 거동불편자 및 독거노인 가정방문 다. 교회 강남 충령교회 김창인 목사가 북한 선교를 위해 이 곳 통일촌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이 현재 통일촌 교회의 모체이다. 1973년에 9월 18일에 현재 부지에 교회 건 물을 짓고 의료봉사ㆍ농촌일손 돕기 등 다양한 방면에 서 선교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라. 장단출장소 1972년 12월 28일 장단군의 4개면(군내면ㆍ장단 면ㆍ진동면ㆍ진서면)을 현재 파주시에 편입하고 1979 년 5월 군내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그 후 이름을 장단출 장소로 바꾸어 4개면의 일반행정업무, 사회복지업무, 민방위업무, 주민등록업무, 산업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 통일촌 교회 장단출장소 백연보건진료소

3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다. 정보화시범마을 조성을 계기로 출장소 2층을 개조하여 주민자치센터로 운영함으로써 주민들의 휴식공간과 문화여가선용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 망향제단 통일촌은 휴전선과 직선거리 4km 안팎에 위치한 마을이다. 망향제단은 북녘을 바라보면 남북의 태극기와 인공기가 게양된 것을 관측할 수 있는 곳 으로 항상 긴장 속에 있다. 이곳 통일촌에 세워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비 와 망향제단은 분단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망향제단 망향제단에 제를 올리는 모습 망향루

1장 1973, 통일촌에 정착하다 | 37 바. 기타 시설물들 ■통일촌구판장 ■통일마을 야생화 농원 ■파주명품 장단콩 가공체험장 ■통일촌농산물직판장/식당 ■DMZ 체험농장 ■DMZ 체험농장 내 DMZ 동물농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2장

4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1. 통일촌의 사회조직 한 지역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예부터 집단을 이루며 공동으로 주어진 상황에 대처 해왔다. 민속은 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특수한 습관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 들이 공감하는 고유의 지식이며 풍속을 말한다. 따라서 개인보다는 공동체 집단에 의하여 향유되는 전승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마을공 동체는 자연환경ㆍ생업 등의 영향을 크게 받는 바, 그 집단의 성격과 기능, 역할을 알아보는 작업은 해당 지역의 환경, 생업, 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기 초적인 자료가 된다. 민속학에서의 사회조직으로는 농경 작업을 함께 하는 두레나 품앗이, 주로 크고 작은 단위로 구성되며 일종의 상부상조하는 모임인 계(契, 대표적으로 상 여계가 있다), 청년회ㆍ부녀회ㆍ노인회 등의 공적 조직 등을 가리킨다. 물론 이들 조직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활동 및 영향력이 부침을 거듭하기도 하였 으나, 여전히 주민들의 화합과 마을 발전을 위해서 존속되고 있다. 하지만 사 회가 도시화되고 개인화되면서 사회조직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기능과 특징 등이 약화되고 마을 구성원들의 결속력도 많이 약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생업환경의 다양한 변화, 인구의 감소, 노년인구의 증가, 개발지역으로 의 수용 등 최근의 변화는 사회조직을 약화시키는 계기로써 작용하고 있다.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41 17) 최ОО(남, 74세) 18) 통일촌 지역민이 부르 던 명칭이 없어 임의로 공동노동조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마을이 형성되는 요건을 보면, 자연환경에 맞게 이루 어진 자연부락에서부터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단부락, 한두 성씨만이 모여 사는 집성촌, 과거에 양반들만 모여 살았던 반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 가 다양하다. 그러나 조사지역 통일촌은 1973년 새롭게 행정구역상으로 조 성된 마을이다. 따라서 친족이나 혈연집단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의미의 사 회조직으로 구성된 마을이 아니다. 또한 생업환경의 다양한 변화, 인구의 감 소, 노년인구의 증가, 개발지역으로의 수용 등의 이유가 사회조직의 약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초부터 이곳 통일촌에서는 과거 두레와 품앗이 형 태의 공동노동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특유의 방식으로 공동노동을 통해 마을주민 서로는 협동 단결하고 있다. 이것은 마을에 이주한 이주민의 성격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육, 해, 공군 다 들어왔는데 육군이 많았고. 해병대가 둘인가 하나가 지 원했는데 안 들어왔어요. 장교가 상당히 많았어요, 소령, 중령들이. (중 략) 지금 영관급들이 하나, 둘. 두 사람 살았네. 고향이라고 들어온 사람 이 14인가 15밖에 없었어요. 군내면 사람들 나머지는 장단에 살던 사람 들인데 들어왔지. 35명 아마 들어왔는데, 15명이 백연리, 정자리, 읍내리 사람들이 있더라구요.17) 1970년대 정부의 정착촌 개발전략에 따라 조성된 통일촌에 입주한 80가 구 중 15가구를 제외한 대부분은 신청을 통해 입주한 외지인이었다. 또한 이 들은 모두 전역 예비군 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 입주당시의 마을은 마을공 동체 조직의 구체적인 계획 없이 외래인과 연고인을 혼합 입주시킴으로써, 단결력 및 향토애의 결핍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마을 구성의 단점을 보완하 기 위하여 주민들이 노력해온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공동노동조18) 통일촌은 10명이 1조 단위로 편성되어 공동노동을 했다. 조는 근거리의 10 개 가구를 묶어 구성했고, 4개 조가 묶여 한 개의 반으로 이루어졌다. 통일

4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9) 최ОО(남, 74세) 촌에는 총 2개의 반이 있는데, 초기 이주민 80여 가구가 8개 조로 구성되어 논밭의 개간이나 마을 경조사 등을 함께 했다. 이 마을의 품앗이, 두레는 모 두 조단위로 이루어진 셈이다. 8개반에, 아냐. 10명씩 조를 짰어요. 가끔 했지 회의를 아마. 예비군에 한 해서 조를 짜고. 84호에 20호(주택, 나중에). 8조로 나눠서. 반이 2개반 이지 아마. 아주 군대식이야.19) 처음 이주했을 당시 마을은 생활할 수 있 는 시설이 미비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공동노동조가 번갈아가며 척박한 땅을 농사 지을 수 있는 농토로 개간하였고, 땅의 터 를 다지는 일을 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는 지뢰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산 에 나물 캐러 갔다가 발목지뢰에 다친 사 건, 농사를 도와주러 갔다가 탈곡하는 길목 에서 대형지뢰가 터져 중상을 입은 사건, 도라산 자락에서 발목지뢰에 다친 사건, 과 거에 만들어 놓은 참호에 빠져 다리가 부러 지는 중상을 입는 사건, 빗물에 지뢰가 쓸 려 내려오는 사건 등이 있었다. 따라서 이 를 대비하기 위해서 공동노동조를 중심으로 주의해야 할 장소(수풀, 산 일대)에 가지 않 도록 주민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공동노동조는 당시의 마을 개간 작업 뿐 아니라, 향토 예비군 편성 조직으로 대피훈 련 및 국방의 일면을 담당하는 기본 조직이었다. 1970년대 당시에는 여성들 도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을 개간 작업은 모든 통일촌으로 이주 해 온 주민들에게 가장 큰 과제이자 시련, 그리고 보람이었던 것이다. 마을 조 재배(2007년)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43 20) 박О희(여, 70세) 그냥 그게 몇 십년 묶은 땅이야? 순 개간만하다 보니 늙었지. 지금까지 그래. 39년이 됐는데 뭐.20) (2) 노인회 통일촌의 노인회는 1996년에 입주민들의 부모 세대 6명으로 정식으로 조직이 되었다. 입주 초기부터 노인 회를 조직하지 않은 것은 당시 ‘노인’이라는 용어도 생 소할 만큼 여건이 되지 않아서였다. 조사지역에서는 노 인회가 마을 내에서 중요한 사회조직의 하나로서 기능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노인회에 소속된 회원들이 과거 마을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있겠으나, 현재 조사지역 내의 주민이 60 대 이상의 노인이라는 점과 청ㆍ장년의 이주로 인해 실 질적으로 마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주민과 노인회의 회원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노인회는 통일촌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 남녀를 가입대상으로 한다. 이 는 전통문화의 승계와 창달, 지역사회 봉사, 오랜 세월 축적된 지식과 경륜 의 전수, 노인회원 간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조사지역 의 주민들이 대부분 60세를 넘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의 거의 전부가 노인회 에 가입되어 있다. 제보자에 따르면 비교적 나이가 적은 60대 주민들은 노인 축에도 못 끼고, 경로당도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노인회의 임원은 회장ㆍ총무ㆍ이사ㆍ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회장의 임기 는 3년으로 정해져 있으며,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다. 만약 회의에서 회장의 선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전 회장이 연임을 하게 되는데, 9년 동안 회장 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무ㆍ이사ㆍ감사의 임기도 또한 3년으 로 되어 있다. 임원은 노인회의 활동을 위하여 회의에 참석할 의무를 갖고 있다. 노인회의 정기 회의는 두 달에 한 차례씩 열린다. 회의에서는 노인회의 활 동에 대한 평가와 새로운 활동에 대한 논의가 주로 다루어지며, 정기회의 후 노인회 장부

4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1) 노인회의 연말 결산은 12월에 이루어지며 노인 회의 수입과 지출에 대 한 정리를 하는 자리이 다. 연말결산에서 다루 어지는 내용으로는 시 에서 받은 연료비 등의 예산안 등이 있다 에는 함께 회식을 하며 친목을 다진다. 최근에는 노 인회의 활동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 정기회의는 친목을 다지는 자리로 주로 이용된다. 노인회의 운영에 필요한 돈은 시에서 나오는 보 조금과 회비로 충당한다. 경로당 관리비와 노인회 지원금으로 시에서 매월 일정금액이 지원되고 있는 데, 이 금액으로 노인회를 운영한다. 지원금만으로 부족한 경우, 모자라는 금액은 그때그때 회원들에 게 회비를 걷어서 충당한다. 노인회는 연말 결산21), 관광, 봉사활동, 부조 활동 등을 주도하고 있다. 노 인회는 시에서 지원되는 경로당운영비를 활용하여 경로당을 관리한다. 전기ㆍ수도ㆍ가스 등을 관리하 며 특히, 겨울에는 난방을 위한 보일러 가동, 기름 구입 등으로 적지 않은 노고를 들이고 있다. 마을의 환경미화도 노인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회의를 통해서 대청소하는 날 을 정하여 실시한다. 대청소일이 되면 전체 노인회 회원이 모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한다. 이는 단합과 함께 마을을 내 손으로 가꾸어 나간다는 애 향심을 기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마을 내의 분리수거도 노인회에서 담당한다. 관광은 일상의 피로를 풀고 회원 및 마을 주민의 친목을 위해서 연 1회 실시하고 있다. 회원들이 고령 인 관계로 가까운 거리의 장소를 선정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2011년도의 경우 에는 인천으로 관광을 갔다. 노인회에서 준비하는 관광은 노인회의 회원뿐 아 니라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로 발전하였다. 이것도 지역주민의 감소 와 주민의 노령화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마을의 부조활동도 노인회의 몫이다. 마을의 노인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노인회에서 부조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마을의 공동 상여를 활용하였다. 최근에는 문산 시내의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을 지내고 화장하 마을대청소(1997년)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45 경로당 입구(현재) 제주도 관광(2012년) 초복놀이 철다리에서 1997년 (상), 중복놀이 1998년 (하) 대한노인회통일촌경로당(연도미상)

4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는 경우가 많아서, 노인회에서는 근조화환을 구입하기 위해 10만원씩을 지 원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근래에 들어 바뀐 상장례 문화가 노인회의 부조활 동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3) 부녀회 일반적으로 부녀회는 새마을운동과 관련 이 깊지만, 통일촌의 부녀회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부녀회는 통일촌에 초기 거주했던 여성 전원이 가입하여 1974년 설립되었다. 처음 이주당시 부녀회 전원이 500원씩 혹 은 절미 한줌씩과 폐품수집 운동으로 구판 장을 차렸다. 구판장은 통일촌을 찾는 관광 객에게 물품을 판매하여 부녀회를 운영하 는 역할을 하였다. 구판장은 통일촌 부녀회에서 슈퍼마켓으로 아직 운영되 고 있으나, 그 수익은 개인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로당에서 여성노인회원들의 활동 마을 제설작업(1997년)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47 22) 박О희(여, 70세) 마을정비 부녀회가 다 하는 거예요. 처음에 500원, 절미 한움쿰씩 모아 가지고, 처음에 구판장을 했어. 그거 하다가 안 되니깐 개인한테 넘겼지. 그게 안 되더라고.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하다가. 지금도 개인이 해 요. 부녀회식당 옆에.22) 그 후 1987년 관광객을 위해 부녀회의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식당의 수 익은 부녀회에서 관리하였고, 수익의 일부는 부녀회 사업을 운용하는 데 사 용되었다. 당시에는 통일촌 관광객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식당이어서 수입 이 좋았고, 그에 따라 부녀회는 마을을 가꾸거나 불우이웃을 돕는 등의 활동 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부녀회는 새마을대청소ㆍ재활용품 수집운동ㆍ쓰레기줄이기운동ㆍ재생용 품 쓰기운동 등 생활환경 운동도 전개하고 있고, 이웃사랑 실천 운동을 위한 불우이웃 돕기ㆍ소년소녀 가장 돕기ㆍ군경 교도소 위문 등의 행사도 한다. 90년대에는 파주 탄현의 햇빛고아원에 봉사활동 및 지원을 했었다. 최근에 는 고아원에 봉사활동단체가 많아져 독거노인 방문사업이나 이웃을 위한 김 장담그기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과거 부녀회의 활동이 활발했을 때에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회의를 마 을회관에서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부녀회의 활동에 대하여 부녀회원들과 논의 를 하게 된다. 주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행사와 관련하여 음식장만, 진행 등의 수행절차와 과정에 대하여 논의되었다. 또한 파주시에서 나오는 각종 행정정보 와 생활정보를 회원들에게 전파하여 각 가정이 생활에 불편을 겪지 않도록 하 는 역할을 한다. 부녀회원들은 이러한 회의에 마을과 자신의 가정을 위하여 이 러한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현재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회의를 가진다. 특히 초상이 났을 경우에도 부녀회원들은 초상집에서 일손을 도와서 무사 히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지역 내 환경정리 및 분리수거 등 담당 하는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승고사와 같은 마 을제사에 재정적인 지원도 한다. 이외에도 부녀회장은 파주시부녀회에서 담 당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한다. 부녀회장의 이러한 활동 은 마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대체로 빠지지 않고 적극 적으로 참여한다.

4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 상조계 전통사회에서 초상이 났을 경우, 마을 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초상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초상이 났을 경우를 대비하여 상조계ㆍ상여계ㆍ상포 계라고 부르는 조직을 마련하여 서로 도왔다. 통일촌에도 상조계가 있었다. 이 러한 마을내의 협동조직은 1990년대까지도 잘 유지되어 오고 있었으나 장례 일체를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치르는 것으로 변하게 되면서 상조계의 역할이 점 차로 약화되다가 현재는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집단적 성격이 소멸 된 것일 뿐 여전히 마을 내에 초상이 나면 자신의 일처럼 일손을 거들고 있다. 상조계에는 마을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속하게 된다. 강제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이 나면 자연스럽게 초상집에 가서 도와주게 되기 때문이 다. 또한 조사지역에서 살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간 상조계원의 집에 초 상이 나도 조사지역의 마을사람들이 가서 도와주기도 하였다. 초상이 나면 상조계원은 초상집에 모이게 된다. 이때에 각 상조계원은 보 통 쌀을 가지고 가게 된다. 평소 회비는 따로 걷지 않고 초상이 났을 때 가져 가는 쌀이 회비의 역할을 대신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술을 가져가기도 하는 데, 특별히 정해진 품목이나 양은 없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가져가면 되었 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시절에는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것 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상조계를 운영하는 이유이다. 상조계원들이 초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이웃 마을에 부고를 돌리는 일이다. 과거에는 직접 부고를 전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부고를 돌리 는 일을 나누어 했다. 부고는 초상집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부고를 전하는데, 마을 청년들이 주로 부고를 돌렸다. 친분이 있는 사람이 먼 지역 에 살 경우에도 반드시 직접 찾아가서 부고장을 전해주었다. 부고는 남자계원이 하는 역할이고, 여자는 초상집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것 을 도와주게 된다. 초상집에는 많은 사람이 방문하기 때문에 음식 장만도 중 요한데 여자계원의 이러한 역할은 초상집에 큰 힘이 된다. 초상집에서는 처 리해야 될 일이 많아서 음식 장만까지 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조계원들은 상여조립, 묘 자리 다듬기, 상여운반 등의 작업에 있어서도 주도적으로 초상집을 도와주었다. 조사지역에서 상주는 무사히 장례를 치를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49 수 있도록 도와준 상조계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거나 약간을 수고비를 주기 도 했다. 이러한 상조계ㆍ상포계는 상부상조의 대표적인 사례로 조사지역의 주민 간의 화합에 큰 작용을 하였다. 현재에도 초상이 났을 경우, 마을 주민들이 일손을 돕기도 하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약화된 상태이다. 대신 노인회 에서는 근조화환을 만들어 올린다. (5) 기타 조사지역에서는 이외에도 크고 작은, 혹은 비공식적인 다양한 사회조직이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친목과 유용성 두 가지의 목적으로 조직되는데, 대부 분 두 가지의 목적을 모두 지향하고 있다. 가. 민통선 장단콩 영농조합법인 민통선 장단콩 영농조합법인은 지역특산물인 콩과 인삼의 재배를 위해, 특히 콩의 경우 대면적 재배와 파종에서 수확ㆍ조제까지 기계화에 의한 경 영비(생산비) 절감과 노동력 부족의 해소를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가입 조건은 통일촌에 거주하며 콩과 인삼(6년근 홍삼)을 재배하는 농가를 그 대 상으로 삼고 있다. 주 생산품목은 콩과 인삼으로, 통일촌 내에서 진행하고 있는 장단콩 관련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민통선 장단콩 영농조합법인에서 재배하는 주 작물 의 경작면적은 콩 30,000평(10ha), 인삼 2,000평(6.7ha)이며, 재배면적별 생산량은 콩 20(ton), 인삼 8,000(kg)이다. 회원 수는 6명으로, 수시로 모여 장단콩과 관련한 정보 공유, 작황 등에 대해 논의를 한다. 민통선 장단콩 영농조합 법인 대표는 30여 년 전 부터 축적된 영농기술로 종사하다 1999년에 법인을 설립하였다. 주요활동은 지역특산물인 콩을 널리 알리고자 매년 개최되는 장단콩 축제에 참여하는 것으로, 2012년 파주 장단 콩 축제에도 참여하였다.

5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나. 파주장단콩영농조합 통일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영농조합이 민통선 장단콩 영농조합이라면, 파주시 내에서 장단콩을 브랜드로 활동하는 영농조합은 파주장단콩영농조합 이다. 이 영농조합은 장단지역의 콩 자급률 향상, 농가소득증대에 그 목적이 있다. 가입대상은 우리콩 자급률 향상에 뜻을 가진 자, 장단지역에서 거주하 며 장단콩생산에 뜻을 가진 자이며, 현재 회원은 6명이다. 주 생산품은 백태 와 서리태이며, 월 2회 주기적으로 모여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한다. 파주장단콩영농조합은 1996년 겨울철 일감 사업으로 출범하였다. 겨울에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작물로 백태를 선택한 사업단체는 1997년 장단콩 작 목반을 결성하였고, 1997년 제1회 장단콩축제를 개최하여 매년 파주 장단콩 축제를 주최하고 있다. 이후 1998년 8월 장단콩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여 현 재에 이르고 있다. 파주장단콩영농조합은 최초의 농촌진흥청 일감 갖기 사업으로 시작하여 농외소득과 농가소득증대에 뜻을 갖고 사업을 하며 현재에는 우리콩자급률 향상과 장단콩을 이용한 전통장류 사업을 하고 있다. 다. 통일촌양봉작목반 통일촌양봉작목반은 회원 상호간에 기술전수에 의한 생산량증대, 품질향 상 및 소비자들의 인식제고를 위하여 구성되었다. 가입조건은 백연리에 거 주하며 양봉을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처음으로 6명이 가입했으나, 시 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작목반 대표는 30여 년간 양봉업에 종사하며 파주지역 작목반원으로 활동 하던 중 1995년부터 통일촌(민통선) 주민으로 별도의 작목반을 구성하였다. 이후 코엑스몰 특산물 브랜드행사에 출품하였고, SBS 방송에 방영, 장단콩 축제 출품 등의 활동을 하였다. 현재 통일촌 농산물직판장, 제3땅굴 판매장 에 꿀을 납품하고 있다. 작목반원의 고령화로 인하여 현재 사양하는 봉군의 수는 500여통이며 연 간 아카시아 꿀은 약 8,000ℓ, 잡화꿀 2,000ℓ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꿀의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51 시판 단위는 2.4kg,1.2kg,600g을 단위로 병에 넣어 판매중이다. 그 외 생 산품은 프로폴리스(100cc), 화분 등이며 로열젤리(50g)의 경우는 현재 연간 300여병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라. 통일촌배작목반 통일촌배작목반은 배 작목반원 상호간에 친목도모, 재배기술 전수, 충분 한 물량확보로 소비자와의 직거래 등으로 소득제고를 위해 구성되었으며 민 통선 지역인 군내, 진동, 진서, 장단면 일대에서 배를 재배하는 농가를 가입 대상으로 한다. 회원 수는 6명이고, 수시로 모임을 가지고 작황에 대한 논의 나 작법 공유 등을 하고 있다. 재배초기에 면적의 협소로 인해 타 지역 작목반으로 활동하다 2000년 통 일촌배작목반 결성 후 초생재배, 퇴비위주의 유기생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재배면적은 17,000평이고, 생산량은 50톤인데 15kg상자로 3,330상자 정도 가 생산된다. 마. 통일촌조기축구회 통일촌 조기축구회는 회원들의 체력증진과 상호친목을 위해 통일촌에 거 주하는 청·장년을 가입대상으로 2001년 1월에 결성되었다. 회원은 15명이 고, 월 1회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을 가지고 있다. 통일촌 내에 유일하게 존재 하는 학교인 군내초등학교에 테니스장을 건립하였으며 여러 지역행사에 참 여하고 있다. 또한 타 지역 조기 축구회와 상호 방문 경기를 통한 통일촌 알 리기와 농산물 판매 촉진을 위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바. 군내초등학교운영위원회 군내초등학교운영위원회는 백연리 초등학교 자녀를 둔 학부모, 군내초등 학교 교사,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처음 군내초등학교육성회로 시 작하여 체육진흥회로 개명하였다가, 1998년 학교운영위원회로 설립되었다.

5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명의 회원이 3개월에 한 번씩 모여 학교 교육활동에 대한 논의를 한다. 군내초등학교운영위원회는 학교 공동목표 구현을 위한 심의 자문기구로서 역 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 교육활동 전반을 지원 및 심의한다. 군내초등학교 는 주민의 의견을 교육에 반영한 예로써, 주민자치 실현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운영위원회에서는 학교 발전기금 조성에도 힘쓰고 있다. 주요활동은 학교 교육과정 운영 방법 협의, 학교 행사실시 및 방법협의, 학교 예ㆍ결산 심의, 학 교 주요물품 구입심의, 학교 발전기금 조성 및 관리, 학교 중요사안협의 등이다. 사. 군내면농촌지도자회 군내면 농촌지도자회는 농업에 종사할 의욕이 있는 청·장년을 적극 발굴 지도하여 유능한 농업 전문 인력의 체계적인 확보를 위하여 1980년 구성하 였고, 군내면에 거주하며 영농기술이 뛰어나거나 선도할 수 있는 선진농가 를 가입대상으로 한다. 현재 회원 수는 14명이고, 월 1회 모임을 가진다. 군내면농촌지도자회는 면내 연합회 주최행사인 하계 수련대회, 동계 등산 대회의 두 행사를 통해 군내면 농업관련 단체와의 친선 도모를 하고 있다. 시단위행사인 3월 등산대회 및 풍년기원제, 하계수련대회, 고양시와의 체육 대회 행사, 파주 시민 체육대회, 한 마음 대회 (파주시 농업 관련 단체 모두 참여)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으며, 가을철 각 읍 ·면별로 모 금을 통해 소년·소녀 가장에게 쌀을 전달하고 있다. 또한 농민회관(파주시 농촌 지도자회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 등으로 타 시·군·구에는 없는 농민회관 건물을 건립하여 이곳에서 각종 회의 등을 개최하고 시연합회 운영 경비 등을 조달하고 있다. 군내면 농촌지도자회에서 는 영농기술과 관련 농업기술 센터와 연계하여 선도적으로 농촌활동을 전파하 고 농가소득과 관련한 모든 사항을 통일마을을 통하여 보급, 홍보할 계획이다. 아. 파주비무장지대영농조합 파주비무장지대영농조합은 지역특산물인 콩의 재배노동력에 비해 재배 면 적이 한정되었으나, 기계화를 통해 작업의 일관화와 생력화로 면적의 확대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53 와 생산증가를 위해 구성되었다. 지역특산품인 장단콩 축제의 활성화에 기 여하고 있다. 가입대상은 통일촌에서 거주하며 콩을 경작하는 사람으로 한 다. 현재 회원 수는 10명이다. 파주비무장지대영농조합은 콩 재배를 위한 노하우를 공유하기 위해 1995년 집단재배 작목반을 결성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2001년 11월 법인체로 등록하 였다. 당시 재배면적은 60,000평 (20ha), 생산량은 40톤에 달했다. 장단콩 외 에 고추, 참깨 등을 생산하고 있고, 앞으로 된장, 고추장 등을 전통 기법으로 생산, 판매할 예정이다. 또한, 해들녘 콩나물 공장에 콩나물콩을 생산, 납품할 예정이며, 장단콩의 품질 향상을 위해 장단콩 연구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자. 통일위탁영농회사 통일위탁영농회사는 농촌인구 노령화에 따른 위탁 및 임대농 위주의 농지 확보와 소규모에서 대규모농지로 확대시켜 기계로 영농하여 소득증대에 기 여하고자 구성되었다. 가입대상은 통일촌에서 영농에 종사하며 자가 소유 농지를 보유한 자이다. 회사의 성격상 위탁사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영농기 계를 빌려주거나 인력을 동원하여 농업을 도와주고 있다. 현재 회원수는 5명 이고, 월 1회 모임을 가진다. 통일위탁영농(유한)회사는 1996년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위탁 및 임대농 지규모는 28ha였으나, 지속적인 가입과 경지면적 확대로 2001년 농지규모 는 38ha까지 늘어났다. 2002년에는 농지규모의 적절한 이용으로 수도작 외 에 대체작목으로 일부 변형하여 이용하고 있다. 회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영농기계 트랙터 65hp 1대, 콤바인 4조식 2대, 승용이앙기 6조식 3대, 벼순환식건조기 4대, 트랙터 43hp 1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사지역의 성립환경에 따라 사회조직도 함께 변화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농업이 주 생업이던 통일촌 사회에 서는 마을 주민들 간의 협동이 필수였다. 따라서 두레나 상조계와 같은 사회 조직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전통사회의 농촌 성립과는 다 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신청을 통한 전역군인 이주 및 그에 따른 경작지 및

5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주거지 개간은 통일촌의 마을 주민들을 특수한 방법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다. 특히 북한과 맞닿아 있는 통일촌 환경의 특성상 전시에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군대와 마을노동조의 편성이 유사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존의 전통사회 농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노인 회나 부녀회를 결성하여 마을사업을 이끌어갔다. 여타의 농촌은 기술의 발 전에 따라서 모내기와 김매기 등에 사람의 손이 덜 가게 되기 시작하면서 두 레의 역할은 감소하게 되었고 상조계 또한 병원의 장례식장에 그 역할을 넘 겨주게 되면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촌은 노인회와 부 녀회를 두 축으로 하여 마을의 크고 작은 사업들을 진행하며 합심하였다. 현 재까지 통일촌 내 이주인구가 다른 농촌마을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이 러한 원인이 작용한 결과이다. 아직도 마을 내에서 노인회와 부녀회가 차지 하는 비중은 막대하며, 특히 부녀회는 마을 내 주요사업에 밀접하게 관여하 고 있다. 따라서 청년회나 새마을협회와 같은 사회조직은 없지만, 통일촌의 사회조직은 어느 곳보다 단결력과 협동심이 강하다. 마지막으로 화합과 친목을 위하여 다양한 사회조직들을 형성한 주민들의 상부상조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을 내의 초등학교를 주민 자치로 운영하 기 위해 운영위원회를 설립하고, 조기축구회 등을 만들어 통일촌의 생산품을 홍보하는데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농조합 및 작목반은 통일촌의 환경 특성을 살린 농산품을 개발하였고, 마을을 위해 위탁회사도 지어졌다. 사회 조직 중 마을과 연관성 없는 사업을 하고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 촌에는 이상적인 사회조직이 형성되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2. 통일촌 사람들의 생업 생업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생활비는 의식 주를 포함한 교육, 문화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벌어들이는 것까 지 포함한다. 농경을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는 입고ㆍ먹고ㆍ자는 것만을 해결 하기 위한 생업활동이었다면,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입고ㆍ먹고ㆍ자는 것 외 에도 교육과 문화 활동 같은 2차적 활동에 필요한 경비도 해결하기 위한 생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55 23) 최О순(남, 74) 2012년 11월 21일 면담. 업활동이 되었다. 통일촌에 거주하는 대다수 주민들의 생업은 논농사와 밭농사, 그리고 인 삼재배이며, 소수의 주민들은 축산업, 양봉, 배농사, 콩을 이용한 식품 판매 등을 생업으로 갖고 있다. 이외에도 조합이나 부녀회와 같은 조직을 구성하 여 통일촌 내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판매하거나, 관광객을 위한 식당을 운 영하는 주민들도 있다. 통일촌은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정착촌 재건 지시에 의해 이스라엘 의 ‘키부츠농장’을 모델로 삼아 건설되었다. 당시 통일촌에는 1사단 군제대 자 40가구, 백연리 인근 지역 연고자 40가구 등 총 80세대가 입주하였다. 통 일촌 입촌 자격은 예비군 활동이 가능한 신체건강한 자로 한 가구당 5인까지 가능했다. 그래서 통일촌에 들어오는 입주자의 구성은 부부와 자녀를 중심 으로 한 2세대가 주를 이뤘다. 그때는 예비군 35살 미만. 그 조건이. 첫째는 예비군. 두 번째는 여기 살 던 사람, 고향인 사람, 세 번째는 여기 땅 가진 사람. 군인 제대한 사람이 반이 들어왔어. 상사고, 중사고 뭐고. 박정희때 예비군인 사람. 80세대가 들어왔는데, 40세대가 군인이고, 40세대가 민간인이고. 그때는 예비군. 5사람 외에는. 그때는 농사짓는 사람. 자식도 5사람 넘으면 못 데리고 들 어왔어. 두고 와야지.23) 정부에서는 통일촌에 입주한 80세대에게 각 세대별로 논과 밭, 주택, 농사 용 소 1마리 등을 지급하였다. 통일촌 형성 초기에 입주한 사람들은 지급받 은 논과 밭을 활용하여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업으로 삼게 되었다. 통일촌에 입주한 주민들 중에는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농 사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농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적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농사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당시 교육은 주민들 중에 농 사경험이 있는 사람과 파주시농촌지도소에서 파견된 새마을지도자였다. 밭작물을 지었어요. 논도 있고. 여기는 밭작물이라고 해야 콩 정도이죠.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논농사, 밭농사 지었죠. 세 사람이 같이 들어왔죠.

5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4) 송О식(남, 81) 2012년 11월 8일 면담. 25) 박О식(남, 83) 2012년 11월 21일 면담. 26) 한О남(남, 77) 2012년 11월 15일 면담. 27) 한О남(남, 77) 2012년 11월 15일 면담. 아들이랑. 할머니가 농사 다 지었죠. 그러니 고생했죠. 낯설고 한참 힘 들고.24) 땅하고 집하고 소 한 마리, 소는 농사지으라고 준거죠. 소는 남들이 하는 대로 했어요...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어요. 처음에 다 배워서 이제는 다 해요. 하라는 대로 하는 거죠. 뭐. 소도 그렇고. 가는 방법이 다 있어요. 남 들 하는 대로 하는 거죠. 뭐.25) 군대 가기 전에 농사지었다가 제대하고 들어와서 농사지었죠. 농사는 처 음에 군인들 중사급들 다 교육받아서 했지. 경운기도 내가 가르쳤어. 아 들이 저거로 되어있는데, 처음에는 내가 새마을지도자로 교육도 시키고 했지. 소 끄는 거 가르치고, 경운기 끄는 거 가르쳤죠. 해 본 사람이 소를 모는데, 소는 모는 법이 다 다르잖아. 여기는 소 가지고 이북서 나온 사 람이라. 소에다 멍에 씌우고, 쟁기 씌우고.26) 통일촌에 입주한 2년 동안은 소를 이용한 밭농사를 지었다. 1973년 입주 초기에는 농지정리가 덜되어, 밭작물 위주의 농사를 짓다가 농지정리가 끝 난 1974년부터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때 정부에서 40대의 경운기를 보조 받아 2가구당 1대씩 경운기를 가지고 논농사를 시작하였다. 경운기 들어왔죠. 8만원짜리 일제로. 40대. 74년도에 경운기 들어왔어요. 경운기는 내가 파주시청에서 내가 경운기 40대 받아서 왔지. 처음에는 2집에 하나씩. 그때부터 경운기로 농사지었지. 처음에는 소 가지고 2년 지었어요. 나중에 경운기로 지었지. 75년부터 경운기로 농사지었죠. 하 루는 내가 하고, 하루는 저기가 쓰고, 관리는 같이 하고. 기름은 각자 채 우고, 농사는 각자 짓고, 경운기는 2집이 같이 써도 기름은 각자 쓰고. 기 름을 더 부어주기도 하고. 경운기로다 농사를 이 트랙터 나오기 전에 15 년 되었나.27) 정부에서 배급받은 경운기로 10여 년 동안 농사를 짓다, 정부에서 농기계 구입을 위한 자금보조가 있어 대농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당시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57 28) 한О남(남, 77) 2012년 11월 15일 면담. 29)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30) 최О순(남, 74) 2012년 11월 21일 면담. 4,600만원의 돈을 주고 트랙터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트랙터가 없는 사람은 트랙터가 있는 사람에게 품삯을 주고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통일 촌에서는 기계를 이용한 농사가 시작되었다. 경운기로 한 10년 짓다가 트랙터 나오면서 트랙터도 구입하고. 트랙터는 개인 돈으로 샀죠. 처음에 저거 정부 보조 좀 받고. 이거 사천. 그때 당시 에 4600인데 보조 받고, 농사 많은 사람이나 샀죠. 없는 사람은 경운기 짓고, 돈 주면 내가 가서 해주고. 하루 가서 해주면. 지금은 기름값이 비 싸지만, 그때는 기름이 싸잖아요. 처음에 받은 경운기는 다 없애고, 나중 에 각자 구입했죠.28) 1980년대가 되자, 전두환 대통령이 수복 지구 부동산특별조치법을 시행하 여 1973년 입주할 당시 불하받은 논과 밭에 대해 원주인에게 반납하라는 지 시가 내려왔다. 이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정부에서 저금리로 대출 을 받은 사람은 토지를 구입하였고,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대출을 받지 못 한 사람은 개간했던 논과 밭을 원주인에게 반납해야 했다. 처음에 박정희가 들여보낸 거고, 전두환이 되면서 땅 찾으라 하면서 땅 있는 사람들 땅 찾고 했지. 논 4500평에다가 밭 1200평 이렇게 줬는데, 다 뺏겼지. 주인한테. 뺏고, 샀지. 돈 내고 샀지. 땅 임자한테. 처음에 온 사람들은 고생 무척 했지. 땅만 밀어준 거 개간하느라 고생 많이 했지.29) 땅도 그냥 준 거 아니야. 나중에 다 샀잖아. 땅은 남의 땅을 막 개간해서 준거고. 나중에 우리가 돈을 준거고. 돈을 받아가지고 우리가 갚은 거지. 반환하라고 하기 전까지는 이자를 내지 않았는데, 나중에 쌈 나고 하니 깐 정부에서 돈 주면서 사라고 했지. 그때 판 사람도 있고, 안 산 사람도 있고. 그때 정부에서 사서 우리에게 빌려준 거지. 그게 이자가 0.3%인가 그랬어. 땅값이 싸니깐 돈이 얼마 안 됐지. 정부에서 돈을 줬는데, 이자 를 해서 줬지.30)

5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1) 김О민(여, 77) 2012년 10월 19일 면담. 다 뺐겼어. 땅 임자 찾으라는 대통령 명령으로 자기 땅이라고 내놓으라 고 하니깐 다 내놨지. 조금 샀는데, 다 뺏겼지 뭐. 땅 임자니깐 내놔라 하 니깐 내놨지. 지금은 얼마 안 돼.31) 이 때 토지 반납이나 토지 재구입으로 인해 통일촌 주민들의 토지 소유량 이 증가하거나, 축소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생활의 여유가 있거나, 정부 에서 대출을 받은 주민은 토지 소유량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생활의 여유가 없거나, 혹은 가짜 토지 주인에게 사기를 당함으로써 토지 소유량이 축소되 기도 하였다. 통일촌에 입주한 사람들은 쌀 재배를 위한 논농사와 콩이나 고추를 재배 하기 위한 밭농사, 그리고 인삼재배를 주업으로 삼았다. ‘통일촌 특미’, ‘장단 콩’, ‘개성인삼’ 등의 지역 이름과 생산품의 이름이 접목된 쌀, 콩, 인삼을 재 배하고 있다. 통일촌 주민들은 쌀농사, 밭농사, 인삼재배 외에도 젖소를 키우는 축산업 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소 파동이 일어나, 젖소를 키우던 주민들은 소를 처분하면서 축산업은 쇠퇴하였고, 현재 3가구만이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축산업이 쇠퇴하고, 벌을 키워 꿀을 채집하는 양봉업을 하는 주민들이 생 겨났다. 그러나 이도 곧 쇠퇴하여 현재는 1가구만이 양봉업에 종사하고 있다. 양봉업이 쇠퇴하자, 쌀농사와 콩농사, 인삼 재배에서 큰 수익을 못 얻는 주민들 중에 배농사를 짓는 주민도 생겨났다. 배농사는 현재 1가구가 생업으 로 삼고 있다. 통일촌의 밭작물 중에는 콩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 때문에 콩을 이용 한 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주민들도 생겨났다. 현재 통일촌 내에서 콩을 이용한 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주민은 3가구 정도이다. 이렇게 통일촌 주민들은 논농사, 밭농사, 인삼재배, 축산업, 양봉업, 배농 사, 콩을 이용한 식품 판매 등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59 32)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33)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1) 논농사 논농사는 통일촌 주민들이 입주 초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생업으로 삼 고 있다. 1973년 입주 당시 각 세대별로 논 5,000평을 불하받았고, 주민들은 이곳에 논농사를 지었다. 통일촌에서는 올벼와 늦벼를 함께 재배한다. 올벼는 추석 전에 생산하는 벼로 햅쌀용으로 판매하는 품종이다. 늦벼는 추석 이후에 생산하는 벼로 맛 이 좋아 수매가를 더 받을 수 있어 주민들이 선호하는 품종이다. 통일촌에서 는 올벼와 늦벼를 한 논에 심어 수확시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올벼는 일찍 베지. 추석 아래 햅쌀이 나오니깐. 그거 얘기야. 품종도 다 르지. 빨리 나오는 볍씨지. 늦벼는 추석 지나고 나오는 거고. 맛은 늦벼 가 좋지. 올벼는 8월 추석에 나는데, 8월달에 햅쌀에 먹는다는 거지. 맛 이 없어. 같은 논에 나눠서 심는 거지. 올벼 따로 심고, 늦벼 심고, 올벼 따로 심어야지. 일찍 베니깐. 늦은 거랑 한데 섞으면 늦는 거는 늦게 여 무니깐 안 되잖아. 그러니깐 따로 심는거지. 종류가 여러 가지야. 심는 시기는 같은데, 여무는 시기가 다른거지. 올벼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심 는데, 우리는 올벼 안 심어. 늦벼만 심어. 늦벼가 맛있지. 올벼는 추석 때 팔아야지. 그때 지나면 맛이 없어. 보면 농사 짓는 사람은 알지.32) 여기는 보통 10월 말서부터 수확을 해. 올벼는 9월 10월에 하는데, 여 기는 대부분 올벼를 많이 안 해. 늦벼를 해. 왜냐하면 아끼바리 같은 거 많이 심기 때문에. 아끼바리는 밥맛이 좋고. 그러니깐 심지. 지역 날씨 하고 상관없이 비싸게 팔려서. 밥맛이 좋기 때문에 대부분 그거 선택해 서 심는 거야. 빨리 심어도 뭐 수확은 거의 같이 해야 돼. 빨리 심는다 고 빨리 나는게 아니야. 빨리 심는다고 별로 빨리 나지도 않아. 차이가 없어.33)

6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4)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35)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가. 농사법 ① 볍씨 소독하기 통일촌에서는 3월 20일경이나 4월이 되면 볍씨를 소독하는 일을 한다. 볍 씨 소독은 모가병 방지약과 소독약을 넣은 물에 볍씨를 담그는 것이다. 약을 탄 물에 담근 볍씨는 24시간이 지나면 물을 갈아주고, 약 1주일간 물에 더 담가뒀다가 채반에 걸러 볍씨를 받쳐둔다. 볍씨를 소독하는 일이 그 해 농사 의 첫 시작이다. 볍씨를 물에 불려 놨다가 해. 요즘에는 모를 대번에 영농회사라고 있어 가지고 사가지고 하는데. 그 전에는 미리 담가놔야지. 보통 1주일 이상 담가놔야 해. 물에 담가놓은 후에 일주일 후에 볍씨를 뿌리는 거야. 3월 한 20일경이 되어야 해. 물에 불리는 거야. 주일 있다가 그 볍씨를 건져 서 밭에다 뿌리는 거야. 볍씨 불리는 물은 아무 물이나 되는데, 거기다 약을 타야 하는데, 수돗물에 약을 타는거야. 저 뭐야 모가병 들지 말라 고. 1주일 정도 그냥 밖에다 두는 거야. 3월이라도 별로 안 얼어. 조금씩 어는데, 조금 얼어도 괜찮아. 볍씨는. 도라무에다, 아니면 프라스틱 통에 다가 씨를 불려놨다가 밭에다 뿌리는 거야.34) 볍씨 담그는 건 4월 달에 양력 4월. 물에다 며칠 담가뒀다 건져서 논에 다 뿌리는거지. 집에서 다라에다 담아. 담가놔. 껍질 안 깐거지. 그걸 물 에 불리는 거지. 까면 싹이 안 나오지. 볍씨 하는 거 소독하는 거야. 담글 때 그 약이 있어. 모가병 방지도 되고, 소독 겸해서 모가병 방지하는 거 야. 그 약이야. 약 이름은 생각이 안 나. 그거 탄 물에다 담그지. 24시간 만에 물을 갈아. 갈아가지고 그 물에 계속 담가놓는 거지. 물을 갈아줘야 지. 물에서 건져서 이런 자루에다가 담아놓지.35) ② 못자리 내기 소독한 볍씨를 모판에 심어 모종을 만든다. 이때 모판을 보관할 장소를 못 자리라고 하며, 못자리는 논의 한 쪽에 만들기도 하고, 집에 통풍이 잘 되는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61 모판 만들기 36)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곳에 만들기도 한다. 모판에 모종 심는 것은 농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과 어울려 만들었으며, 모판에 모종을 심기 전에는 논에 못자리를 벼를 바로 뿌리는 방식으로 모종 을 키웠다. 모판에 심은 모종은 약 1달간 키워야 모내기를 할 수 있다. 모판에 모종 하는 거는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 람들하고 어울려서 했어. 모판에 직접 볍씨 넣어서 모 종 키우는 건. 처음에는 모판이라는 게 없었지. 그전 에 그냥 논 이렇게 못자리판 만들어 가지고 그냥 뿌렸 지. 사각형으로 만드는 건 없었고, 차차 발달이 되면 서 시방 모판이니 뭐니 있는 거지. 논에다가 모 심는 자리를 만들었어. 모판에다가 씨를 뿌리는 기계가 있 어. 우리 때 기계가 있어. 나중에 다 사가지고 기계로. 모판에 씨 심는 거는 5월 달에. 모심는 거지. 볍씨 뿌 리는 거 보통 그 전에. 하여튼 볍씨 뿌려가지고 40일 돼가지고 모내는 거기 때문에. 40일 전. 3월 중순쯤. 농사일은 3월에 시 작하는 거야.36) ③ 논 물대기 못자리를 만들고 나면, 논에 물을 댄다. 논에 물을 대는 것은 논에 모를 심 기 위해 물을 보충하는 것이다. ④ 논갈이와 써레질 하기 모종이 자라는 동안에 물 댄 논에 논갈이와 써레질을 한다. 논갈이는 쌀 농사를 지을 땅을 파서 뒤집는 일이고, 써레질은 논갈이로 뒤집혀 뭉친 흙을 다져서 평평하게 하는 일이다. 논갈이와 써레질은 모심기에 적당한 땅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다. 기계농이 발전하기 이전의 다른 지역에서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쟁기 를 걸어 1차로 논을 간 후에 쟁기를 떼고, 써레를 걸어 뭉친 흙을 써는 2차

6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7)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38)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39)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논갈이를 하였다. 그러나 통일촌은 소를 이용한 논갈이는 많이 하지 않았고, 1975년에 정부에서 보급한 경운기에 쟁기와 써레를 달아 논갈이를 하였다. 경운기를 이용한 논갈이를 이О태씨는 ‘놋다리 친다.’라고 표현을 하였다. 1990년대가 되면서 트랙터를 이용한 논갈이로 발전하였다. 모판 자리 만드는 건 아저씨가 하지. 그 전에는 기계가 없으니깐 소로 했 지. 썰고 갈고 했지. 쟁기가 있잖아. 쟁기로 갈고, 써는 건 나무로 만든 걸로 판판하게 다지고. 볍씨 불리면서 미리 갈아서 해놓는 거지. 볍씨 건 지기 전에 미리 해놔야지. 그거 같이 하려면 힘들지.37) 모종 클 동안에 논도 갈아야 하고. 썰어서 맨바닥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 고. 그 전에 다 해야 해. 모 심기 전에 하는 거야. 그때 경운기가 있었어. ‘놋다리 친다’고 해서 경운기 뒤에 달고 흙을 뒤집는 거야. 놋다리라고 하는데, 흙을 파. 그리고 판판하게 만들어야 해. 하여튼 모심기 전에 아 무 때고 빨리 해놔야 돼.38) ⑤ 모내기 모종 낸 지 한 달에서 45일 정도 지나면 모내기를 하는데, 대략 5월 15일 에서 20일쯤이 된다. 모내기는 논에다 벼 모종을 옮겨 심는 것이다. 지금처 럼 기계로 모내기를 하기 전에는 ‘도급모’라는 사람이 모내기 일손을 모아서 왔는데, 통일촌에는 전라도 사람이 많이 왔다고 한다. 밭에 모판 만드는 거는 40일 지나면 모 심기 하고. 모심기 할 때 사람을 사오는 거야... 모가 45일 지나면 한 뼘 정도 자라. 그거 자라면 논에 모 심기 하는거야... 모 심는 거는 사람 사서 했지. 옛날에는 사람이 사서 했 기 때문에 몰라. 왜냐하면 전라도 아줌마들이 와서 모 많이 냈어. 모도 내고, 단체로 올라와서 모 하는데, 몇 평 값 받아가고. 평당 주는 거야. 일품이 아니야. 평당 얼마야. 당시에 얼마 줬는지 기억은 안 나고, 단체 로 여러 패들이 나눠서 오니깐 몇 사람이 사서하고. 당시에 중개해주는 사람이 있지. 그거 사방에서 연락이 되고, 그 사람들이 저거 해주면.39)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63 40)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41)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5월 15일이나 20일경 되면. 못자리 한 지 한 달 후 한다고 생각하면 돼. 지금도 그렇게 해. 기계로 해도. 못자리에 잘 안자라면 영양제 주고 하 지. 사람 손으로 다 뽑고, 다 매고 그랬지. 사람 사서 하지. 품앗이도 하 고, 사람 사서하고. 지금 기계로 하니깐 사람이 얼마 안 들지. 밖에서 사 왔지. 안에 사람이 있나. 밖에서 사왔지. 주로 저기 전라도서 얻어 왔어. 전라도서 도급모라고 맡아서 사람을 데려와. 도급으로 자기네가 맡아가 지고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그 사람들이 여기 오면 재워줘야지.40) ⑥ 김매기 김매기는 논에 난 잡초를 제거하는 일로 모내기를 마친 15일에서 1달 정도 후에 한다. 통일촌에서는 2번 정도 하는데, 제초제가 나오면서부터는 김매기 는 하지 않는다. 김매기를 마치고 나면 장마철을 대비하여 논의 물을 빼고, 논두렁을 터주는데, 이를 ‘물꼬 튼다’라고 한다. 그리고 장마철이 지나고 나 면 논둑에 난 잡초를 깎아주는 일을 하는데, 이를 ‘논두렁 풀 깎기’라고 한다. 피뽑기는 모심고 나서. 그건 그 다음에. 모심기 한 다음에 논매기. 논매 기는 모심고 난 다음에 그거 보통 뭐 한 거의 한달 걸려야 될거야. 근데 그때부터는 제초제를 썼기 때문에. 논매기를 그래도 했지. 논매기도 하 는데, 제초제를 뿌려서 정리했어. 모내고 나서 제초제를 2차 뿌리는 거 지. 그리고 한 달 후에 김매기를 하는 거지. 김매기는 시시때때로. 그게 크게 되면 하는 거고. 아무 때나. 김매기 할 때 되면 6월, 7월. 장마 대비 해서 그건 뭐 그때 당시에 때때로 봐가지고... 장마 지나면 논두렁에 풀 난 거 깎아야 하고. 논두렁 풀깎기.41) 밭 김매는 거지. 그 전에는 맵는데, 잡초 뽑고, 여러 가지 풀 뽑고 했지. 거의 2번하고 말지. 모 심고 보름 지나야 풀이 나니깐. 지금은 약이 있으 니깐, 제초제를 뿌리니깐 안 뽑아. 손으로 다 매지... 농사꾼은 노상 일해 야지. 논에 물 넣으러 다니고, 논두렁 깎으러 다니고, 시기가 정해진 건 아니고, 수시로 왔다갔다 하고. 논둑 깎고 하지 뭐. 장마철이 되면 논에 물이 많으면 물을 빼는 거지. 물 빼는 건 논두렁을 틔어놓지. 처음에는

6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2)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43)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44)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논두렁을 높게 세웠다가 장마 때 틔어 놓고, 장마 지나고도 물이 빠져나 갈 수 있게 터 놔야 해. 옆에 한군데 물 빠져나가게 해놓지. 부르는 이름 은 없어. 논두렁을 떠 놓는 거지. 물꼬를 틔어놓는다고 하지.42) ⑦ 추수 통일촌에는 8월에서 10월까지 쌀 수확을 한다. 8월에 수확하는 쌀은 올벼 로 추석에 먹을 햅쌀용이고, 10월에 수확하는 쌀은 늦벼로 1년 내내 먹는 쌀 이다. 늦벼는 맛이 좋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 선호한다. 논에서 벼를 베면 바로 탈곡하는 게 아니다. 벤 벼를 논에 널어두거나, 건 조기에 넣어 건조한 후에 탈곡한다. 통일촌엔 도둑이 들지 않아, 논에 벼를 널어놔도 걱정이 안 되었다고 한다. 벼를 논에 널어서 말리거나, 건조기에 넣어서 건조하는 이유는 바로 벤 벼는 축축하여 탈곡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는 보통 10월 말서부터 수확을 해. 올벼는 9월 10월에 하는데, 여기 는 대부분 올벼를 많이 안 해. 늦벼를 해. 왜냐하면 아끼바리 같은 거 많 이 심기 때문에. 아끼바리는 밥맛이 좋고. 그러니깐 심지. 지역 날씨하고 상관없이 비싸게 팔려서. 밥맛이 좋기 때문에 대부분 그거 선택해서 심 는 거야. 빨리 심어도 뭐 수확은 거의 같이 해야 돼. 빨리 심는다고 빨리 나는 게 아니야. 빨리 심는다고 별로 빨리 나지도 않아. 차이가 없어.43) 철 따라서 수확을 하는데, 가을철이 이르면 8월달부터 하고, 늦으면 9, 10월도 하고, 가을이 일찍이다 하면 일찍 하고, 느리다 하면 늦게 하고. 올벼는 일찍 베지. 추석 아래 햅쌀이 나오니깐. 품종도 다르지. 빨리 나 오는 볍씨지. 늦벼는 추석 지나고 나오는 거고. 맛은 늦벼가 좋지. 올벼 는 8월 추석에 나는데, 8월달에 햅쌀을 먹는다는 거지. 맛이 없어. 같은 논에 나눠서 심는 거지. 올벼 따로 심고, 늦벼 심고. 심는 시기는 같은데, 여무는 시기가 다른거지. 올벼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심는데, 우리는 올 벼 안 심어. 늦벼만 심어. 늦벼가 맛있지. 올벼는 추석 때 팔아야지. 그때 지나면 맛이 없어.44)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65 45)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나. 판매 ① 농협 수매하기 탈곡까지 마친 쌀은 통일촌 내에 있는 농협에서 수매한다. 수매한 쌀은 통 일촌 정미소에 수합이 되어 도정을 마친 후에 20kg 정량 봉투에 담아 각 지 역으로 판매하기도 하고, 정부 비축용으로 보관하기도 한다. 수확하면 정부에서 받잖아. 농협도 받고, 비축용 쌀. 정부에서 받잖아. 옛 날에는 시장에 들고 나가서 팔았지. 지금은 다 농협에서 사고, 정부에서 사고. 두 군데에서 사기 때문에 지금은 대부분 다 수매하고 말지.45) 통일촌 정미소 사진을 보면 통일촌 정미소 오른쪽으로 도정기가 있어, 도 정 전의 쌀을 받아다 도정을 한 후에 흰 자루에 담아 쌓아놓는다. 이렇게 쌓 통일촌 정미소 통일촌 정미소에 쌓여있는 쌀 통일촌 특미 포장 통일촌직판장에서 판매하는 쌀

6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6) 이О태(남, 83) 2012년 11월 20일 면담. 47) 송О식(남, 81) 2012년 11월 8일 면담. 48) 김О조(남, 70) 2012년 11월 25일 면담. 아둔 쌀을 통일촌 직판장 앞에 있는 분류장으로 가져가 20kg, 10kg, 5kg 단 위로 포장을 한다. 포장을 마친 쌀은 ‘통일촌 특미’란 상표가 붙어 외부로 판 매되기도 하고, 통일촌 직판장 내에서 판매되기도 한다. ② 재래시장 판매 농협이 생기기 이전에는 각 개인이 생산한 쌀을 가지고 문산이나 법원리 에 있는 재래시장에 나가 직접 판매하기도 하였다. 시장 외에도 개인적으로 쌀 매입을 원하는 사람에게 판매하기도 하였다. 직접 판매할 때는 문산. 문산에서 파는 거나, 농협에서 수매하는 거랑 거 의 같아. 거기 시세대로 맞춰서 하기 때문에 뭐 비슷비슷해.46) (2) 콩농사 통일촌에서는 ‘장단백목’이라 불리는 장단콩을 재배한다. 장단콩은 파주 장단지역에서 생산되는 콩으로 1913년 대한민국 최초의 콩 장려품종으로 선 발되기도 하였다. 장단콩은 장단지역의 큰 일교차와 마사토로 이루어진 토 양을 특징으로 재배된다. 장단콩이라는 거 알아주잖아. 전국에서 옛날에 임금님 밥상에 올라갔다고 하잖아. 그래서 장단콩이 유명하잖아. 그래서 축제가 되었잖아. 맛도 좋고. 두부를 해도 좋고.47) 장단에는 콩이 아주. 파주 하면 파주시 하면 흰콩하고, 인삼하고, 그 다 음이 쌀이에요. 파주시 3덕이라고 해요. 여기 장단백목이라는 것은 흰콩 인데, 눈이 싹 트는 눈이 흰 눈처럼 하얗게 나와서 장단백목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도 장단콩이 유명하지요. 콩이 아주 유명하지요. 여기 콩을 보면은 땅이 좋고, 배수가 잘되고, 서해 바람이 잘 되고, 통풍이 잘되고, 아주 콩 심을 때는 삼하고 여건이 아주 좋대요.48)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67 49) 송О식(남, 81) 2012년 11월 8일 면담. 통일촌에서 재배되는 콩은 밥에 넣어먹는 서리태와 두부를 제조하는데 사 용하는 메주콩이다. 가. 농사법 ① 종자준비 통일촌에서는 콩농사를 짓기 위해 매년 1월이 되면 농업인상담실에서 콩 농사를 위한 종자를 신청한다. ② 종자소독 3월 중순이 되면 농업인상담실에 신청해서 받은 콩 종자를 소독약과 영양 제를 탄 물에 담가 소독한다. ③ 밭갈이와 써레질하기 4월쯤 되면 콩을 심을 밭을 쟁기와 써레를 이용해서 깊게 갈아 놓는다. 통 일촌이 다른 지역보다 추운 곳이라 좀 늦게 밭갈이와 써레질을 시작한다. 트 랙터가 도입되기 전에는 경운기의 수레부분을 떼어내고 쟁기를 달아서 밭갈 이를 한 후에 써레로 교체하여 써레질을 하였다. 밭갈이는 쟁기로 밭을 깊게 가는 일이고, 써레질은 써레로 갈린 뭉친 흙을 다지는 일이다. 4월 달부터 시작하지. 여기가 약간 춥다고 할 수 있지. 추워서 늦게 심 어. 밭을 갈고, 갈고, 계속 갈아야지. 경운기로 밭갈이를 했어. 경운기 뒤 를 떼고, 써는 걸 달고 썰고. 지금은 트랙터로 하지. 썰고, 갈고. 수레부분 을 떼고 쟁기를 달아서 논도 갈고, 밭도 갈고. 4월부터 시작을 하지. 밭 갈이는 많은 사람은 며칠 걸리고, 적은 사람은 금방 하고. 갈고. 또 쓸고, 여러 가지야. 트랙터처럼. 쟁기를 갈아키우고 직진하는 건 갈고.49) ④ 토양 개량 콩을 심을 밭에 석회 또는 규산질 비료를 섞어 콩농사에 적당한 토양으로 개량한다.

6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0) 송О식(남, 81) 2012년 11월 8일 면담. ⑤ 파종 4월이 되면 소독한 콩을 모판을 만들어 파종한다. 파종하고 3일 이내에 토 양을 좋게 하기 위해 비료를 뿌려준다. ⑥ 모종 옮겨심기 5월 초순 정도가 되면 콩을 심을 밭에 추가적으로 비료를 뿌려 콩나무 뿌리 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한 후에 콩 모종을 옮겨 심는다. 콩 모종을 옮겨 심으려 면 밭두둑을 만든다. 밭두둑은 약 한 뼘 이상으로 높이고, 로타리를 이용하여 검정 비닐을 씌운 곳에 약 30cm 간격으로 구멍을 내어 콩 모종을 심는다. 지금은 콩 모종을 심는 것을 기계로 하지만, 기계가 없을 때는 사람이 일 일이 밭두둑에 쪼그려 앉아 밭두둑에 씌운 비닐에 구멍을 내어 심었다. 그래 서 콩 모종을 심고 나면 허리와 다리가 많이 아팠다고 한다. 콩 심으면 허리 아프고, 다리 관절이 아프고. 씨와 씨 사이 간격은 30cm 정도이지. 뿌리고 나면, 비료도 줘야 하고, 약도 줘야 하고. 비료는 심기 전에. 심기 전에 비료를 치고, 울타리를 치고, 씨를 뿌리거나 심고. 심기 전에 뿌리는 비료가 있고. 복합이라고. 심은 후에 주는 요소라는 게 있 고. 비료는 농사 안 되면 또 줘야 하고. 많이 줘도 안 되고, 적게 줘도 안 되고, 적당히 봐서.50) ⑦ 김매기 5월 중순이나 하순이 되면 콩밭 김매기를 한다. 콩밭 김매기는 모종을 밭 으로 옮겨 심은 후 모종들이 밀집되어 있거나, 거름기가 많아 과하게 자란 콩나무를 솎아주는 일이다. 이때 잡초도 같이 뽑아 준다. 콩밭 김매기는 보 통 3번에 걸쳐 이뤄지는데, 5월 중순이나 하순에 1번, 6월에 1번, 7월 초순에 1번 한다. 피 뽑기도 하는 사람은 하고, 않는 사람은 안 하고. 이제 물 같은 거 조절 하고. 풀 베야지. 풀 벤다는 거는 뭐라고 해야 하나. 잡초를 매는 거지. 뽑 아낸다는 거지. 콩에도 잡초가 많지. 잡초 안 매주면 콩이 안 돼. 뭔 곡식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69 이고, 풀을 뽑아줘야 해. 보통 3번까지 해야지. 이제 콩을 심는다 하면 4 월 달이면 콩을 심는다고 하면 5월달에 심는다고. 그럼 한 5월 중순 하순 지나서 풀 한 번 매주고, 그때 한 번 뽑아주고. 또 이제 풀이 많으면 뽑아 주고. 7월 초순이지. 7월달에 하면 끝이야. 6월달쯤에 한 번 더 뽑지.51) ⑧ 병충해 방지 7월부터 9월까지는 병충해를 막기 위해 3회 정도의 농약을 친다. 병에는 점무늬병이 있고, 해충에는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 등의 노린재류, 콩나방 등이 있다. ⑨ 수확 10월이 되면 콩은 수확을 한다. 수확은 콤바인 같은 농기계를 이용한다. ⑩ 탈곡 수확한 콩은 밭이나 하우스에 널어서 건조한 후에 알갱이를 터는 탈곡을 한다. 기계식 탈곡기가 없을 때는 도리깨를 이용하여 콩 알갱이를 수확한 후 에 그물형 선별기에 넣어 콩을 크기나 품질별로 선별을 하였다. 사진은 수확한 콩을 길에 널어서 말리는 모습과 건조된 콩을 탈곡기에 넣 어 탈곡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⑪ 건조, 선별 및 저장 탈곡한 콩은 볕에 널어서 건조한 후에 콩의 상태에 따라 선별하여 저장한 수확한 콩 건조하기 콩 탈곡하기 51) 송О식(남, 81) 2012년 11월 8일 면담.

7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2) 송О식(남, 81) 2012년 11월 8일 면담. 다. 사진은 철로 된 그물 망형 선별기에 탈곡한 콩 을 부어 돌을 골라내고, 품질 상태가 안 좋은 콩 을 골라내는 장면을 촬영 한 것이다. 선별을 마친 콩은 자루에 담아 창고에 보관한다. 나. 판매 통일촌에서는 장단콩이 생산되면 11월에 개최되는 장단콩축제에 내다 판 다. 장단콩 축제는 1997년부터 개최되어 2012년에 16회가 되었다. 장단콩축 제 이전에는 문산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장단콩축제 이전에는 문산ㆍ금 촌ㆍ법원리ㆍ샘내 등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판매하였다. 여기는 서리태. 그 다음에 메주콩이라고 두부콩. 딴 종류도 있는데, 주로 서리태, 메주콩을 해. 장단콩 축제에 가서 다 팔잖아. 딴 사람이 달라고 하면 한두 말씩 주고. 많이 팔려고 하면 축제 때 팔고. 축제 때 한 가격으 로 받아서 팔아야지. 시세가 있잖아. 축제 때 갖다 팔아야 사람들이 많이 오니깐, 한꺼번에 다 팔 수 있잖아. 장단콩이 벌써 10년이 넘지. 축제하 기 전에는 이제 달라는 사람 있으면 주고. 개인적인 매매. 농협에서 매수 하기도 하지. 개인적으로 팔려면 힘들고.52) 사진은 2012년 11월에 개최된 제16회 장단콩축제에서 콩을 판매하는 모습 을 촬영한 것이다. 장단콩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파주시에 콩판매를 위 한 신청을 해야 한다. 그러면 신청자별로 판매장을 배정하고 그 곳에서 콩을 판매하는 것이다. 탈곡한 콩 선별하기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71 53) 홍О태(남, 83) 2012년 10월 19일 면담. (3) 고추농사 고추는 통일촌에서 장단콩과 더불어 많이 재배되는 밭작물이다. 가. 농사법 콩의 재배형태를 표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① 씨뿌리기(파종) 통일촌은 1월 중순이 되면 모판에 고추씨를 심는 파종을 한다. 이 일이 통 일촌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농사일이다. 고추 모종을 하우스에 만든 후에 낮에는 열어두고, 밤에는 덮어두는 식으로 고추 모종에 신경을 많이 쓴다. 매년 1월 20일 넘으면 하우스에 고추모종이 나가. 고추 모종을 하우스에 해야 돼. 그래야 밭에 심어야 하니깐. 그러니깐 아침에는 열고, 하우스 안에서 봉했던 거 열고, 밤에 덮고 해야 돼.53) 고추 모도 붓는 거지. 흙에다 깔아서 준비하는 거 2월에 해. 하우스에 심 을 거를 그때 하는 거야. 거의 그때 해. 모종하는 흙이 있지. 사다가 해. 장단콩 판매장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 씨뿌리기 / █ 모 기르기 / █ 밭에 심기 / █ 가꾸기 / █ 수확

7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4) 최О순의 부인(여, 73) 2012년 11월 21일 면담. 씨를 틔워가지고, 또 심고, 모내고... 씨에서 싹을 틔워서 모를 부어. 모를 뒀다가 모종을 이종을 하지. 키워서.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고, 힘 들어.54) ② 이랑 만들기 5월이 되면 파종한 모종을 밭에 내다 심는다. 이때 모종을 심기 1~2주 전 에 밭에 거름을 주고 밭을 깊이 갈아줘야 한다. 밭을 갈아준 후 고추 모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이랑을 만든다. 이랑은 고추를 심었을 때 물 빠짐이 좋게 하는 역할을 하며, 이랑의 높이는 약 두 뼘 정도가 좋다. 이랑을 높인 후에는 검정 비닐을 씌워 모종을 심을 땅의 온도를 높여준다. ③ 모종심기 이랑 만들기가 끝나면 고추 모종을 옮겨 심는다. 모종을 옮겨 심는 시기는 대략 서리가 끝나는 입하 전후인 5월 상순이 된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을 때 고추 모종과 고추 모종의 간격은 50cm 간격이 좋다. 고추 모종을 심을 때 너 무 깊이 심지 않아야 하는데, 모종의 흙이 약간 보일 정도로 흙을 덮고 물을 충분히 준다. ④ 받침대 세우기 고추모종을 밭에 심은 지 10일이 지나면 받침대를 세워 고추모종이 쓰러 지지 않게 한다. ⑤ 잡초 제거 검정 비닐을 씌운 고추밭에는 잡초가 자라지 않지만, 검정 비닐을 씌우지 않은 고추밭에는 잡초가 자라므로 뽑아준다. ⑥ 물주기 비가 오지 않아 가물 때는 4~5일 간격으로 고추밭에 물을 주어 고추가 타 죽지 않게 관리한다.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73 ⑦ 웃거름 주기 고추 모종을 심은 지 35~40일이 되면 3회 정도의 거름을 준다. 이때 거름 을 주는 것은 고추나무의 뿌리가 잘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⑧ 병해충 방제 고추는 역병과 탄저병 발생률이 높다. 6월 이후 장마가 시작되면 습기가 높고, 거름기가 부족하여 역병이나 시듦병, 진딧물, 담배나방 등이 발생하기 쉽다. 그리고 여름철과 장마철에는 탄저병이 심하므로 비오기 전후 15일 간 격으로 약을 뿌려줘야 한다. ⑨ 수확 고추는 보통 7월 하순부터 7~10일 간격으로 수확한다. 이때 풋고추는 꽃 이 핀 다음 20~25일 된 것을 따고, 붉은 고추는 꽃이 핀 다음 45~50일 정 도 지난 후에 딴다. ⑩ 건조 수확한 고추는 그늘에서 2~3일간 후숙 을 시킨 후에 병이 들거나 미숙하여 상품성 이 떨어지는 것을 골라 제거한다. 골라낸 고추는 세척한 후에 건조시킨다. 건조방법은 하우스 내에 널어서 하거나, 아 스팔트와 같은 길에 널어서 하거나, 건조기 를 이용하거나 한다. 나. 판매 수확한 고추는 농협에서 수매를 하기도 하고, 문산시장 같은 재래시장에 가서 판매하기도 한다. 하우스에서 건조 중인 고추

7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5) 무명씨(남, -) 2012년 11월 30일 면담. 56) 경기도박물관, 『경기민 속지』, 2003, (4) 기타 작물 가. 인삼 인삼은 통일촌에서 주력품목으로 재배되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쇠퇴하는 분 위기다. 재배기간에 비해 수확량이나 소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인삼은 한 번 파종을 하면 약 6년을 돌봐야 하는데, 6년 동안에 자연재해나 병이 퍼지면 인삼재배는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 인삼 재배하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돼요. 처음에 하다가 중단하다가 다시 조금 했어요. 정확한 연도는 모르고, 조금 있다가 하다가, 한 2년 하다가 관뒀고. 한 70년대 후반쯤 하다가. 형편이 안 되죠. 인삼이라는 건 모든 게 그렇지만, 내 자본이 쉬운 말로 돈 있어야 돈 번다고. 그런 상황에서 빚내서 융자해줘서 해가지고 캐서 다 주고 나면 내 인건비 간신히 남는 데 왜 해. 그걸 힘들게 왜 해. 안 했다가 다른 벼농사, 콩농사 짓다가 마 땅치 않다가 다시 인삼해보니깐 그것도 마찬가지야.55) 인삼을 재배하기 좋은 땅은 모래와 자갈이 적당하게 섞인 비탈진 땅으로, 예전에 인삼을 재배했던 땅이나 채소, 마늘을 심었던 밭은 피한다. 인삼을 심기 전에 여러 번 쟁기질을 해서 흙을 깊게 파고, 잡초를 없앤다. 인삼씨는 하지 때 4근(4년생) 인삼에서 따서 시루에 모래와 씨를 켜켜로 섞어 앉혀서 100일 동안 두면 싹이 난다. 이를 인삼밭에 뿌리는데, ‘종삼포 (인삼씨송곳)’로 찍어서 낸 구멍에 씨를 하나씩 일일이 넣고 백토로 복토하여 1년 동안 재배하면 종삼이 된다. 한식 때쯤 종삼을 캐서 선별한 다음 본포에 옮겨 심는다. 종삼은 송판을 마름모 모양으로 손바닥 만하게 잘라 만든 ‘조막 손’을 이용하여 흙에 골을 내고 종삼을 비스듬히 뉘어서 복토하여 심는데, 한 자 간격의 눈금이 있는 잣대에 맞추어 4줄로 심는다.56) 인삼포에는 햇볕을 막고 빗물이 직접 닿지 않게 칸별로 밤나무 가지로 기 둥을 박고 짚으로 이영을 엮어 지붕을 덮는다. 겨울이 되면 새로 이영을 덮 고 헌 이영은 바닥에 깔아 인삼이 얼지 않도록 보온한다. 봄이 되면 인삼을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75 57) 이О호(남, 68) 2012년 11월 25일 면담. 덮었던 짚을 걷어낸다. 통일촌 인삼은 6년근을 주로 재배한다. 이렇게 재배한 인삼은 10월 말에 열리는 개성인삼축제에서 팔거나, 계약을 맺은 인삼조합에 판매한다. 나. 양봉 양봉은 통일촌에서 한때 성행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쇠퇴하였다. 최О영 씨만이 통일촌에서 양봉업을 하는데, 꿀을 채취하는 것보다는 벌치기를 주 로 하고 있다. 다. 배농사 통일촌에서 배농사는 이О호씨네만 하고 있어서 파주, 양주, 연천지역 사 람들과 작목반을 꾸렸다. 통일촌에서 생산된 배는 파주시배연구회를 통해 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배농사는 1년 내내 가지치기를 통해 배가 많이 열 리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가지 친 후에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잡아줘야 가 지가 부러지지 않고 배가 많이 열리게 된다. 판매는 수출을 많이 해요. 국내서 조금 나가기도 하는데, 수출을 많이 하 지. 수출은 파주하고 양주하고 연천하고 작목반을 맺어서 수출을 하지. 파주시배연구회. 거기에 들어있지. 일손이 맨날 딸려서 힘들어요.57) 통일촌 내 인삼밭 개성인삼축제

7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8) 최О순(남, 74) 2012년 11월 21일 면담. 라. 콩을 이용한 식품 판매 통일촌에서는 장단콩을 이용한 식품 판매도 이뤄지고 있다. 약 16년 전에 마 을 부녀회 회원 중에 4명이 장단콩영농조합을 설립하여 된장, 청국장을 생산하 여 판매하였다. 그러다 2사람이 개별적으로 독립하였다. 현재 통일촌 내에는 3 개의 업체에서 장단콩을 이용하여 된장, 청국장을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다. 마. 축산 축산업은 통일촌 입촌 초기부터 있었던 생업이었다. 정부에서 대출을 해 줘서 소를 구입하였다. 소는 1년 정도 키우면 새끼를 낳을 수 있어서 새끼를 낳으면 판매하여 정부 대출금을 갚는 방식으로 축산업에 종사하였다. 그러 나 1980년대 소파동으로 인해 축산업이 쇠퇴하여 현재는 3가구 정도가 생업 으로 삼고 있다. 소도 길렀는데 뭐. 소 키우는 사람이 많았지. 다 키웠지. 한 가구에 대여 섯 마리씩 키웠는데, 소 파동 나는 바람에 팔았지. 젖소 파동. 농사용 소 도 키웠지만, 소도 사줬잖아. 소 이자하고 주고, 나머지는 우리가 돈 주 고 샀지. 정부에서 보조를 한 거지. 소가 새끼를 낳잖아. 돈만 갚으면 되 니깐. 1년에 한 마리씩 낳잖아. 맘대로야. 갚으면 되니깐. 이자로 주는 거지.58) 장단콩영농조합 전경 통일촌직판장에서 판매되는 장류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77 소파동이 있기 전까지는 통일촌에 있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적든 많든 소 를 키우는 축산업을 했다. 지금은 축산업을 하는 가구가 3가구뿐이지만, 통 일촌 마을 내를 다녀보면 폐사된 축사들이 꽤 많이 남아있다. 폐사된 축사들 을 보면 통일촌에서의 축산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5) 농기구 가. 수작업용 농기구 통일촌은 입촌 초기부터 기계화된 농업방식을 택했다. 입촌 당시에 농사 용 소를 지급하기는 했지만, 2년 후 경운기가 2가구당 1대씩 지급됨으로써 경운기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정부 보조를 받은 트랙터가 보급되기도 하였다. 기계화된 농사를 지었지만, 기계로 할 수 없는 부분 에 대해서는 수작업용 농기구들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① 도리깨 도리깨는 수확한 콩의 알맹이를 탈곡할 때 사용하 는 농기구이다. 지금은 기계화된 탈곡기로 콩을 탈 곡하지만, 적은 양의 콩을 수확했을 때는 지금도 도 리깨를 사용해서 콩 알맹이를 털고 있다. 축사 폐사된 축사 도리깨로 콩 털기

7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② 철망형 콩선별기 철망형 콩선별기는 철로 된 그물망 형태의 콩 선별기로 탈곡된 콩 알맹이를 이곳에 부어 돌이나 콩 찌꺼기와 분리하는 농기구이다. 철 망형 콩선별기는 개인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 으며, 지금은 탈곡과 선별이 한 번에 이뤄지 는 탈곡기를 사용하고 있다. ③ 삼태기 삼태기는 곡식, 두엄, 모래, 자갈 등의 흐 트러지기 쉬운 물건을 모아서 옮길 때 사용하 는 농기구이다. 사진에 보이는 삼태기는 수확 한 콩을 건조하거나 탈곡기에서 받아 옮길 때 주로 사용한다. 재질은 플라스틱이다. ④ 소쿠리 소쿠리는 곡식을 옮길 때 담아서 옮기는 농 기구이다. 콩을 탈곡하고 선별할 때 담아서 옮길 때 사용하며, 재질은 플라스틱이다. ⑤ 저울 곡식의 무게를 재거나, 정량별로 나눠서 포 장할 때 사용한다. 사진에 보이는 저울은 통 일촌 정미소에 보관되어 있는 저울로 도정한 쌀의 무게를 잴 때 사용하고 있다. ⑥ 비닐피복기 비닐피복기는 콩이나 고추 같은 밭작물을 농사지을 때 밭이랑을 높인 후에 검정 비닐을 씌울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밭이랑의 한쪽 플라스틱 삼태기 그물망을 이용한 콩 선별 소쿠리 저울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79 끝에서 한 사람이 서서 검정 비닐을 잡고 있 으면 다른 한 사람이 비닐피복기를 끌고 밭이 랑의 다른 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면 가로 로 설치된 판에서 검정비닐이 풀리면서 밭이 랑을 덮게 된다. ⑦ 모판 모판은 쌀농사를 지을 때 벼 모종을 키워내 는 농기구이다. 저 모판에 흙을 담고 물에 불 린 볍씨를 심어 논의 못자리나 집의 하우스에 두어 벼 모종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⑧ 괭이 괭이는 단단한 땅을 파고 고르는데 사용하 는 농기구이다. 콩이나 고추 같은 밭농사에서 쓰인다. ⑨ 호미 호미는 콩이나 고추 농사 같은 밭농사에서 쓰이는 농기구이다. 긁는 호미는 밭을 긁을 때 사용하고, 캐는 호미는 땅 속의 무언가를 캘 때 사용한다. 모판 비닐피복기 괭이 긁는 호미 캐는 호미

8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⑩ 쇠스랑 쇠스랑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 다. 괭이와 비슷한 구조이지만, 끝이 갈라져 있어 땅을 일굴 때 흙을 잘게 부수고 고를 수 가 있다. ⑪ 갈퀴 갈퀴는 수확한 곡식들을 모을 때 사용하는 농기구다. 사진의 갈퀴는 플라스틱으로 만들 어졌으며, 탈곡한 콩을 볕에 널어 건조할 때 콩을 흩뿌리거나 모을 때 사용한다. 나. 기계화 농기구 통일촌은 입촌 2년 후부터는 경운기를 가 지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트랙터나 이앙기를 이용한 농사가 이뤄졌다. 통일촌의 주작물인 콩 재배에 서도 기계화가 이뤄졌는데, 콩 터는 것이 주기능이었던 탈곡기도 후에는 콩 선별기능도 추가된 탈곡기로 발전했다. 그리고 수확한 벼, 콩, 고추를 건조 하는 건조기도 각 가정에 비치되어 있었다. ① 경운기 통일촌은 1975년에 정부에 의해 2가구당 1대의 경운기가 보급되었다. 경 쇠스랑 플라스틱 갈퀴 경운기 경운기 수레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81 운기의 수레부분은 탈부착 가능하였다. 그래서 짐을 옮겨야 할 때는 수레를 달고, 논밭을 갈 때는 쟁기나 써레를 달아서 사용하였다. ② 콩 탈곡기 통일촌은 콩 농사를 많이 지어 콩을 탈곡하는데 사용하는 기계가 다양하 게 있다. 철망이 달린 콩 탈곡기는 콩 알맹이가 탈곡되어 나오는 곳에 소쿠 리와 같은 농기구를 두어 콩 알맹이를 받은 후에 위의 철망에 부어 콩 탈곡 과정에서 나오는 먼지나 돌을 선별하는 기능을 가진 탈곡기다. 종합탈곡기 는 콩 알맹이 탈곡과 선별이 한 번에 이뤄지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종합탈 곡기는 수확한 콩을 넣으면 꽁 껍데기와 콩대는 뒤로 빠져나오고, 콩 알맹이 는 앞으로 나온다. ③ 로타리 로타리는 논을 썰 때 사용하는 농기계로 트랙터에 탈부착이 가능 하다. 로타리는 쟁기질한 땅의 뭉 친 흙을 부수는 역할을 한다. 로타리 콩 탈곡 및 선별기콩 탈곡기

8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④ 쟁기 쟁기는 땅을 갈아서 뒤집는 역할을 하는 농기구로 트랙터에 탈부착이 가 능하다. 오른쪽의 사진은 콤바인과 쟁기가 결합된 농기구이다. ⑤ 자동건조기 밭에서 수확한 콩이나 고추 등을 전기를 이용하여 건조 하는 농기구이다. 밭에서 금방 수확한 작물들은 습기가 남 아 있어, 탈곡이나 저장이 용이하지 않다. 자동건조기에 넣어 건조를 시키면 빠른 시간 내에 습기가 제거되어 탈곡 이나 저장이 가능하다. 3. 통일촌의 일년살이와 연중행사 (1) 일년살이 통일촌의 일년살이는 농사와 관계되어 있다. 다른 지역 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조성된 마을이 아닌 정착사업을 위 해 마을이 구성되었기에 공통적으로 치르는 세시풍속이나 의례는 찾아볼 수 가 없고, 생업을 위한 농사나 마을행사를 통해 통일촌의 일년살이를 살펴보 고자 한다. 쟁기 콤바인에 결합된 쟁기 자동건조기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83 가. 봄 봄이 되면 통일촌은 1년 농사짓기를 위한 준비를 한다. 통일촌이 다른 지 역에 비해 춥기 때문에 농사준비는 조금 늦다고 할 수 있다. 3월이 되면 콩 농사를 위한 콩 모종심기 준비를 한다. 4월이 되면 쌀농사를 위한 볍씨 소독 을 한다. 5월이 되면 쌀농사를 위한 모내기와 고추농사를 위한 모종 옮겨심 기, 콩농사를 위한 모종 옮겨심기를 한다. 나. 여름 여름이 되면 통일촌에서 본격적인 농사짓기에 들어간다. 논이나 밭에 옮 겨 심은 모종들이 자라 잡초가 생겨날쯤이라 김매기를 통한 잡초제거와 병충 해 예방을 위한 농약 살포를 실시한다. 그리고 8월 끝이 되면 고추와 올벼 수 확을 한다. 6월이 되면 쌀농사를 위한 김매기와 고추농사, 콩농사를 위한 잡초 뽑기를 한다. 7월이 되면 풋고추를 수확하기 시작하고, 쌀농사를 위한 장마대비를 한다. 8월이 되면 붉은 고추를 수확하기 시작하고, 쌀농사에서는 올벼를 수 확한다. 다. 가을 가을이 되면 통일촌에서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늦벼 를 수확하고, 콩을 수확한다. 수확한 늦벼는 농협에 수매를 맡기고, 장단콩 축제를 위해 콩을 수확하고 건조한다. 그리고 가을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 는 의미에서 개인별 고사나 장승제를 지내기도 한다. 9월이 되면 붉은고추를 수확하여 말리거나 수매를 하고, 쌀농사에서는 수 확한 올벼를 건조하여 농협에 수매한다. 10월이 되면 장단콩을 수확하여 탈 곡 후 건조하고, 쌀농사에서는 늦벼를 수확한다. 개성인삼축제에 참여하여 인삼을 판매한다. 11월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김장을 담근다. 통일촌은 북쪽 지역이라 김장담그기와 같은 월동준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다. 11월 중

8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에 군내초등학교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학생들이 학예회를 한다. 11월 말이 되면 장단콩을 수확하며, 이때 수확한 장단콩은 장단콩축제에 참 여하여 판매한다. 11월 중에는 통일촌 입구에 세워진 장승에서 장승제를 지 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가정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라. 겨울 겨울이 되면 통일촌에도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온다. 장단콩축제까지 마치 고 나면, 경로당에 모여 함께 놀거나, 노인회에서 주최하는 관광을 가기도 한다. 고추모종을 심기 전까지는 휴식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장을 만들기 위한 메주를 만들어 띄우기도 한다. 정월 대보름에는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있는 백연리, 대성리, 동패리 등의 세 마을이 돌아가면서 윷놀이 및 노래자랑대회를 한다. 2012년에는 대성동 에서 개최되었다. 마을 주민들끼리 모여서 윷놀이와 노래자랑대회를 통해 마을주민들 간의 유대감과 협동심을 키우고 있다. 2월이 되면 고추 농사를 위한 고추모종심기 준비를 한다. (2) 연중행사 가. 척사놀이 한마음 축제 한마음 축제 전경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85 척사놀이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민간인 통제구역 내에 있는 백연리, 대성 리, 동패리 세 마을이 모여 마을별, 개인별 척사대회를 한다. 이 대회는 세 개 마을이 돌아가면서 하므로 3년에 한 번 개최순서가 돌아온다. 정월대보름 한마음축제로 진행된다. 나. 개성인삼축제 개성인삼축제는 파주시에서 개최하는 특산품축제이다. 매년 10월 3째주에 임진각 통일동산에서 개최된다. 개성인삼축제에서는 인삼 판매 뿐만이 아니 라 인삼을 활용한 음식이나 제품들을 홍보하고 판매한다. 그리고 인삼 외에 도 파주시에서 생산되는 다른 농작물에 대한 홍보와 판매도 겸하고 있다. 다. 파주장단콩축제 파주장단콩축제는 파주시에서 생산되는 콩을 특화한 축제로 우리나라 유 일의 콩축제이다. 매년 11월 2째주에 임진각 통일동산에서 개최되고 있다. 처음에는 통일촌 내에서 개최되었으나, 출입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 여할 수 없어서 임진각 통일동산으로 장소를 옮겼다. 파주장단콩축제에서는 장단콩 작목반별로 판매장을 설치하여 콩을 판매하고, 작목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행사장 내에 농산물장터를 설치하여 개인적으로 판매하고 있 다. 장단콩축제에서는 콩 외에도 콩을 활용한 음식이나 제품을 판매하고, 메 장단콩 축제장 장단콩 축제장 내 농산물장터

8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9) 조О환(남, 68), 홍О덕 (여, 65) 2012년 12월 8일 면담. 주 만들기나 콩을 이용한 음식을 먹어볼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도 함께 운영 하고 있다. 2012년에는 비가 많이 와서 콩재배를 하지 못해 콩 판매에 어려움이 있었다. 라. 김장 담그기 통일촌은 다른 지역에 비해 춥기 때문에 김장을 담그는 시기가 타 지역에 비해 보름이상 빠르게 진행된다. 통일촌 주민들은 김장을 담그기 위해 8월부 터 배추, 무, 쑥갓, 파, 마늘 등의 김장재료를 직접 파종하고 키운다. 김장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 소금, 젓갈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통일촌 내에서 생산 하고 있다. 여기가 김장이 빨라. 우리 마을은 거의 다 했어. 통일촌에서는 90%는 하 고. 여기가 추워서. 다 얼어버려. 무고 배추고 밭에 두면 얼어버려. 그러 면 안되니깐. 다른 집은 열흘전부터 시작했어. 11월 초부터 김장을 해. 10 월 말에서 11월 초에 김장을 해. 배추, 무, 고춧가루 다 우리가 한 거지.59) 김장을 담그기 위해서는 8월에 종묘사에서 배추, 무, 쑥갓 등의 김장 재료 모종을 사다가 밭에 심는다. 10월 말이나 11월 초순이 되면 김장 재료들을 수 확한다. 수확한 김장 재료 중에 배추는 소금을 푼 물에 약 18시간에서 20시 간 정도 절여 숨을 죽인다. 숨이 죽은 배추는 3회 정도 헹구어 물이 빠지게 건져놓고, 이때 배춧속양념을 만든다. 배춧속양념은 무를 채 썰고, 쑥갓, 마 배추 버무리기 김장용 재료 모종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87 60) 조О환(남, 68) 2012년 11월 8일 면담. 61) 경О봉(여, 78) 2012년 11월 30일 면담. 늘, 고춧가루, 젓갈 등을 넣고 버무려 놓는다. 물기가 웬만큼 빠진 배추에 배 춧속양념을 묻히고, 통에 넣는다. 양념을 묻힌 배추를 넣은 곳에 고춧가루를 섞은 소금을 더 넣어 간을 맞춘다. 이렇게 완성이 된 김장배추는 김치냉장고 에 넣어 보관한다. 예전에는 마당에 땅을 파고 장독을 묻었지만, 요즘에는 김치냉장고가 있어서 이곳에 보관한다. 김장을 할 때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 이는 김장을 하면 자기네 가족만 먹는 게 아니고, 외지 에 나가 있는 자녀들과 친인척에게도 보내기 때문에 많은 양을 하기 때문이다. 김장을 품앗이로 만들고 하다 보니 김장을 담그는 법도 거의 비슷하게 통일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각자 자기 고향식대로 만들었지만, 서로 도와주고 하 면서 방법이 통일되어 이제는 ‘통일촌식 김장 담그기’를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다 경기도야. 지방에서 들어와도 전부 다 통일됐어. 다시 여기 통 일촌 형식대로 됐어. 거의 다 따라가는 거야. 함경도 사람이라고 함경도 식이 아니고, 그냥 여기가 고향이 되어서 비슷해지는 거야.60) 마. 메주와 장 만들기 메주 만들기는 김장 담그기도 끝나고 파리가 없는 겨울에 한다. 통일촌에 서 생산되는 장단콩으로 메주를 만드는데, 보통 한 솥을 끓이면 네 덩이 정 도의 메주가 나온다고 한다. 콩은 은근한 불에 5시간 이상 삶아서 콩이 잘 뭉개지도록 해야 한다. 뭉글 하게 오래 삶아야 콩이 잘 뭉개지고 맛도 좋다고 한다. 5시간 이상 삶은 콩을 자루에 넣고 비닐을 덮은 후에 발로 밟아서 으깬다. 예전에는 절구에 넣어서 으깼으나, 지금은 힘이 들어 발로 밟는다. 그런데 발로 밟는 것이 절구로 한 것보다 더 잘 으깨져 좋다고 한다. 메주는 파리 안 낄 때. 콩을 삶아서 말려서 띄워야지. 덩어리를 만들어. 그냥 밟아. 다 익으면 자루에 넣어가지고 비니루 덮고 밟으면 곱게 밟혀 져. 옛날에는 찧었는데, 너무 힘들어. 찧는 거는. 찧어서는 못 해.61)

8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2) 경О봉(여, 78) 2012년 11월 30일 면담. 63) 경О봉(여, 78) 2012년 11월 30일 면담. 발로 밟아 으깬 콩을 꺼내서 개인 취향에 따라 사각형의 모양이나 동그란 모양의 메주를 만들어 짚을 깔고 그 위에 올려놓고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메주가 꾸둑꾸둑하게 마르면 짚으로 엮어서 천장이나 공중에 매단다. 천장이나 공중에 매달아 정월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을 보통 ‘메주 띄운 다.’고 표현한다. 메주를 띄우는 시간은 약 한두 달이다. 음력 정월이 될 때 까지 방에서 띄우다 말날에 장을 담근다. 방에다 널어놓으면 마르거든. 마른 다음에 달아매놨다가 정월달에 음력 정월달에 그때 띄워서 씻어서 말려가지고 장 담그지.62) 정월이 되면 잘 띄워진 메주를 물에 씻어 건져 놓는다. 항아리에 씻어 건 져놓은 메주와 소금과 물을 넣는다. 그리고 그 안에 숯과 고추도 넣어 놓는 다. 그리고 약 45일 동안 두면 메주와 물과 소금이 어울려 간장이 된다. 그러 면 간장에서 메주만 건져내어 된장을 만든다. 음력 정월에 이젠 장을 담아놓으면 장 담아놓고 한 45일 되면 갈라. 45 일 되면 간장하고 된장하고 갈라가지고 이제 숙성되면 먹어야지. 그러니 깐 이제 한 3월이 되면 한 6개월은 되어야 숙성이 되거든. 된장은. 갈라 놓고 6개월은 되어야 숙성이 되니깐. 메주 넣고, 물 넣고, 소금. 그렇게 45일 띄우는 거지. 45일 지나면 갈라. 메주만 들어내고, 간장은 간장대로 먹고.63) 메주콩 삶기 삶은 메주콩 다지는 용품들

2장 통일촌 사람들, 마을을 일구다 | 89 64) 경О봉(여, 78) 2012년 11월 30일 면담. 이렇게 숙성된 간장과 된장은 6개월이 지나면 먹을 수 있다. 개인의 취향 에 따라 간장을 만들 때 한 번 끓이기도 한다. 메주를 만들어 띄워놨다가 장을 담그는 시기는 정월 말날이 좋다고 하는 데,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제보자는 날짜를 따지지 않고, 본인이 좋은 날을 택해서 장을 담근다고 한다. 메주 끓여. 간장하고 된장 담글 때 고추하고 뭐 숯하고 넣어놓지. 나는 장 담그고 고사 안 지내. 나는 교회 다니니깐 안 해. 나는 날짜도 안 따 져. 딴 사람들은 무슨 날이 좋으니깐 간장 담근다 어쩐다 하는데, 나는 안 해. 예수 믿는 사람이 뭘 따져. 말날. 말날에 담가야 좋대. 나는 그런 거 안 따져.64) 장단콩으로 만든 간장과 된장은 다른 콩으로 담근 된장이나 간장보다 맛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장단콩으로 만든 간장과 된장을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 메주 덩어리 만들기 메주 띄우기

통일촌 사람들의 삶 3장

9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통일촌 사람들의 삶 1. 통일촌 사람들 - 개인생애사 (1) 박О옥 생애사 올해 86세인 박О옥은 1927년 파주 장단면에서 태어나 1942년 16세에 장 단면 초리의 이씨 종가로 시집을 왔다. 전쟁 후 교하면 당하리에서 살다가 1974년 통일촌의 첫 입주자를 받을 때 아들이 지역 주민의 자격으로 신청을 하여 들어왔다. 박О옥은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종갓집의 종부로서 부족함 없는 살림을 꾸려왔 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등의 민족적 수난은 그녀의 일 생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시련들이었다. ‘너무 고생 을 하면 안 잊어 먹어져...’라며 말을 띄우는 박О옥은 86세의 생애 가운데서도 6.25 전쟁 기간 중 1.4후퇴 무 렵의 피란 생활을 생생히 묘사한다. 일제 강점기 말 무 렵에 올린 전통혼례부터, 네 아이의 출생과 육아 그리 고, 6.25와 그 피란사를 중심으로 박О옥의 일생을 기 록하였다.박О옥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93 65)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66)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난생 처음 보는 ‘양복쟁이’ 파주 장단면에서 태어난 박О옥은 어려서부터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딸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다. 그 덕에 박О옥도 어려서 부터 집안 어른들을 통해 한자나 한글 등을 배우며 자랐다. 어느 정도 학교 갈 나이가 되었을 무렵 박О옥은 소학교 입학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학교를 찾아 갔다. 그러나 입학시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난생 처음 ‘양복쟁이’들을 봤고 놀라는 바람에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시험이고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 내 이름을 한문으로 석자만 쓰 면돼. 그래 집에서는 베란빡에다 이름을 써 놓고는 좋다고 춤을 덩실덩 실 추고 아무 철 없이 춤을 덩실덩실 추고 그랬다고. (중략)... 아 그렇게 하고 아버지 앞세워 시험을 보러 가니까 양복쟁이 셋이 앉았지 뭐야. 그 때 양복쟁이를 봤어? 양복쟁이 셋이 앉았어. 그래. 이런거 할줄 아냐고... 그래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 무서워서. 아효... 양복쟁이를 보니까 무섭지 뭐야. 다 모른다고 했지.65) 그렇게 면접시험을 망친 후, 그 뒤로는 학교를 다시 다니지 않았다. 그래 도 글은 언니나 집안 어른들을 통해 더 배울 수 있었다. 박О옥의 언니는 그 무렵 학교에 다니며 반장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세상을 먼저 떠난 언니와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출을 피해 서둘러 올린 혼례 왜정때 일찍 갔어요. 일본 놈들이 와서 나라 살림을 한다고 해서. 여자들 공출 뽑는다고 해서 일찍 시집을 보냈어요. 나를...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 거든.66) 1940년대 초, 마을에 처녀들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갔다. 혼인을 올 리면 이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부모님은 서둘러 혼례를 준비하셨다. 상대

9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7)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68)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는 같은 장단면 내에서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집안이었다. 경주 이씨 종가인 시댁은 아들형제 셋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 큰아들과 큰며느리 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신랑이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그렇게 박О옥은 종갓집의 종부가 되는 혼례를 치렀다. 경주 이씨라고 하면 은 알아주는 세력의 집안이었다. 그 덕에 ‘아랫마을 이씨가 장가를 보내려면 경주 이씨 팔고 장가를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옛날에 경주 이씨를 양반으로는 이렇게(최고로) 쳤어. 옛날에 아랫마을 이 씨가 아들 장가보내려면은 우리 이씨 팔고 장가를 보냈데. 옛날엔 세력이 쎘잖어. 지금은 무난하게 이렇게 살지만은 옛날에는 쎘잖아. 양반 상놈 가 렸잖아요. 그럼... 그때는...67) 1942년 음력 9월 25일 그렇게 경주이씨 집안의 종손과 혼례를 치렀다. 그 리고 시댁을 향해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섰다. 70여년이 지난 오랜 이야기이지 만, 새 신부의 가마 안으로 스며들던 따뜻한 햇살의 느낌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무 어려서 몰라. 오늘이 스무 하룬가. 내가 이달 스무 닷샛날 시집을 왔어. 가마타고. 가마 안에 앉았는데 어떻게 날이 따뜻해 갖고. 그래 그 렇게 따뜻해...68) 은가락지와 청실홍실을 담은 함 함을 받고, 친정에서 대례를 올리고, 시댁으로 신행을 떠나기까지가 모두 9월 25일 하루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시댁 어른들을 모시고 폐백 을 올리는 것으로 혼례가 끝났다. 대례를 치르는 날 신랑이 말을 타고 마부 와 하인을 데리고 와서는 함을 직접 전하였다. 함 속에는 청실홍실이 하얀 종이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유일한 패물인 은으로 된 쌍가락지가 함 속에 들어 있었다.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95 69)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70)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71)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72)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빨간 실 남실, 그거 청실, 홍실. 신랑 집에서 오는 거야. 함에 담에서. 그 건 함에다 담아가주고 시댁에서 보내더라고. 이런 하얀 깨끗한 종이에 싸가지고. 깨끗한 종이에 뭐라고 글이 써있더라고. 뭐라고 썼는지는 내 가 아나... 옛날에는 패물이라고는 없어요. 은가락지 하나지. 쌍가락지.69) 청실홍실은 대례상에 올려 혼례를 치른 후 다시 신부의 신행길에 다시 시 댁으로 보내졌다. 패물로 받은 쌍가락지는 전쟁통에 집에 두고 떠났나가 모 두 잃어 버렸다. 난리 통에 다 없어지고, 없지. 사람이 죽냐 사냐하는데...그걸 챙길 길이 있나...70) 혼례 시중을 드는 하인과 한님 혼례의 과정에서 신랑과 신부를 돕는 사람은 하인과 한님이었다. 하인은 ‘쌍사람’이고, 한님은 ‘쌍사람의 마누라’ 이다. 한님은 예전으로다가 뭐라고 하냐면은 쌍사람의 마누라야. 쌍사람의 마누 라가 한님을 하는 거야. ‘샌님’, ‘마나님’, ‘아씨’, ‘서방님’ 이러고 부르면서, 한 님 노릇하는 거야.71) 신부의 가마는 시댁에서 보내왔고, 가마와 함께 시중을 드는 한님도 보내 왔다.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는 길에 가마 끝에 서서 한님이 따라왔다. 한 님은 혼례 내내 신부의 곁에서 신부의 시중을 들며 혼례를 도왔다. 가마가 오고... 그때는 한님이 있어요. 양반들 딸은 한님이 있어. ‘아씨... 어쩌고 저쩌고’ 지금으로 보면 통역관들 하듯이 한님이 있어요. 한님이 통역관 노릇을 하는거야. 내 옆에 앉아서. ‘아씨 물 잡숫고 싶으세요?’, ‘아씨 방바닥 뜨겁지 않아요?’ 이런 거 다 여탐하는 거야. 내한테다가 한 님이. 내 곁에 앉아서...72)

9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3)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74)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연지곤지 찍고 올린 대례 신랑이 말을 타고 처가로 오면, 신부는 아랫방에서 혼례복을 차려입고 대 례를 기다린다. 신부는 빨강치마에 반회장 노랑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활옷 을 입었다. 얼굴에는 연지 곤지를 찍고, 머리에는 족두리와 낭자, ‘비나(비 녀)’ 등을 장식했다. 한복은 친정어머니가 해주셨고, 활옷과 장신구 등은 모 두 빌려다 사용하였다. 그때는 그걸 세내 오나봐. 그때나 이때나 그런 거 세내 주는 데가 있나봐.73) 대례는 친정 앞마당에서 치러졌다. 대례상에는 밤, 대추, 쌀, 팥, 산적, 과일, 술 등을 차리고, 촛불을 밝히고, 청실홍실을 걸어 놓는다. 신랑과 신부 옆에서는 수탉과 암탉을 잡고 서 있는 사람이 각각 한명씩 있었다. 혼례 내내 닭을 잡고 서 있다가 예가 끝나면 지붕위로 닭을 날려 보냈다. 대례의 시중도 한님이 모두 도맡 아 했다. 절하는 것을 돕고, 술을 따라 건네는 등의 일이 모두 한님의 몫이었다. 한님이 술을 따라서 서방님 한번 따라서 대접하고, 다시 나도 한잔 따라 주고...74) 바가지 깨고 들어가는 시댁 대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그날 바로 시댁으로 향했다. 신랑의 말이 앞섰 고, 신부를 태운 가마가 뒤따라갔다. 도착한 시댁의 대문 앞에는 바가지가 엎 어져 있었다. 신부가 시댁에 첫 발을 들일 때 바가지를 깨고 들어가야 부정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바가지를 깨고 시댁의 마당으로 들어서니, 시아버 님을 비롯한 시댁의 어른들이 모두 나와 반갑게 신부를 맞이해 주셨다. 그래 그냥 내가 큰집에 들어가니까. 아이고 우리 사촌동서가 그래...우리 시아버지가 그래 앞마당에서 듬성듬성 덩실덩실 춤을 추더래. 이제 쓸 만한 며느리 들어왔다고. 그 우리 시아버지가 큰아들이 돌아가고, 큰며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97 75)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76)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느리가 돌아가고 그랬어요. 그냥 쓸 만한 규수감 들어왔다고 춤을 덩실 덩실 추더래.75) ‘거름방(건넌방)’으로 안내를 받고 그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거름방’에 쪽을 지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한님이 곁에서 시중을 도왔다. ‘아이들 많이 낳고 자손 번창하라’ 그렇게 시댁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폐백을 올렸다. 폐백 상에 는 밤과 대추, 그리고 삶은 닭 한 마리 등이 차려져 있었다. 시댁 어른들이 밤과 대추는 자손을 나타내서, 아이들을 많이 낳고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 라고 말씀해 주셨다. 폐백에는 시댁의 어른들과 친척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경주 이씨 종가의 종손을 장가드린다고 하여, 많은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폐백을 끝으로 혼례의 절차가 모두 끝이 났다. 그 뒤로 신혼부부는 ‘거름방’ 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럼 밤, 대추는 많이 쓰지. 밤대추는 씨가 있잖아. 씨가 있으니까 열매 많이 열려서 자손 번성하고 집안 번성하라는 그런 의미지. 그 뜻이 있더 라고. 폐백 드리면 끝나고, 한님은 이제 저희 집으로 아주 가는 거지.76) 열아홉 살에 얻은 첫 아들 열여덟살 겨울에 임신을 한 박О옥은 1945년 열아홉 음력 8월 10일에 큰 아들 О형을 출산하였다. 당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랫동서네가 시댁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던 터라, 출산을 앞두고 음력 10일에 분가를 계획하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9일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동서네도 그 때문에 서둘 러 9일에 분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출산을 앞두고는 친정어머니가 시댁에 와 계셨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9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7)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78)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는 출산 후에, 산모에게 먹이기 위해 쌀을 새로 빻아두시고, 미역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진통을 시작한 박О옥에게는 순산을 돕는 한약을 달여다 주셨다. 철이 없던 시절 쓰기만한 한약은 어른들 몰래 문밖에 내다 버리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는 순산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니 몸이 가 벼워져서 바로 다음 날부터 밖에 나가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애를 나니까 몸이 어찌나 가뿐하던지 그 이튿날 일어나서 일을 했어 내가. 오늘 낳았으면 그 이튿날... 근데 그때 옛날엔 짚을 이렇게 깔 아서 애를 낳으면 깔아 놓더라고. 근데 피가 어떻게나 많이 나던지. 그러 고 나니까 몸이 가뿐해. 삼칠일은 바람쐬면 몸이 붓고 바람든다고 하는 데 이 철부지가 그것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래도 여태까지 건강 하게 살아. 아직까지는 건강해.77) 미역은 시아버지가 출산 전에 준비해 놓으셨다. 큰 줄기 세 개를 사다가 대청에 묶어놓아 두셨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시어머니가 그 미역으로 국을 끓여 하루 일곱끼를 차려 주셨다. 그때 미역국이 어찌나 맛이 있든지 하루 일곱끼를 모두 맛있게 먹었다. 그 덕에 젖도 흔해지고, 아이도 건강히 무럭 무럭 자랄 수 있었다. 조반 전에 먹는 거는 자릿조반, 조반, 곁들이, 곈숨, 저녁 곁들이, 저녁, 밤 참 암튼 일곱 번을 먹었어. 일곱 번을 해주시는 거야 시어머니가. 그걸 다 맛있게 먹었어. 애도 젖이 잘나오니까 벌컥벌컥 먹고. 아침에 벌컥벌컥 먹고는 저녁까지 자는 거야. 그래 안 움직이고 있길래 이게 죽었나 하고 발길로 이렇게 해보니까 ‘끼~익’해. 그러고 또 밤에 벌컥벌컥 먹고... 78) 연잎주발을 건져오는 종손의 태몽 박О옥은 세 아들과 두 딸의 태몽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큰아들 태몽은 연잎주발을 행주치마에 담아오는 꿈과 시어머니로부터 놋숟가락 10개 받는 꿈으로 두 번을 꾸었다. 큰딸의 태몽은 다락 탁자에서 은단추 은주머니를 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99 79)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80)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져오는 꿈이었다. 막내딸은 들광주리에서 파란 고추를 가득 담고, 새파란 비 녀를 머리에 꽂고 오는 꿈이었다. 둘째아들은 돌 벽돌이 길고 탄탄하게 쌓여 진 길에 열린 크고 붉은 고추를 30개 얻어 오는 꿈이었다. 그리고 셋째아들 은 커다란 돼지 입으로 박О옥의 두 손이 쑥 들어가는 꿈이었다. 태몽? 아휴... 그런 건 안 잊어버리지. 우리 장단에 요렇게 가면 뚝이 있 어요. 뚝이 넓은데 옆에다 미루나무가 있어요. 옛날에는 댕기치마(행주 치마) 하얀 댕기치마를 쳤잖아. 그러고 가는데 연잎발, 연잎 주발 두벌 번쩍번쩍. 제사지내는데 쓰는 연잎주발. 그걸 건져왔는데... 그러니 제사 모시잖아요. 장남이. 큰아들이...79) 막내딸은 갓난 아이 때 가운데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만을 빨았다. 어른들 이 가운데 손가락을 빨면 동생이 남자아이가 태어난다고 하였는데, 정말로 그 뒤로 남동생 둘을 연달아 보았다. 아이를 가지면 태어날 아이에게 처음으 로 입힐 배냇저고리를 손수 만들었다. 큰 아들의 배냇저고리는 솜을 넣고 면 을 두 겹으로 대어 누빔 바느질을 한 누비옷이었다. 귀하게 여겨 간직해 두 었는데 아쉽게도 전쟁 통에 모두 없어져 버렸다. 동짓달 아침의 갑작스러운 총성소리 음력 동짓달 아침, 아침상을 차려 놓고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멀리서 총성 이 들려왔다. 시아버지는 아들며느리에게 피란을 떠나야 한다고 서두르셨 다. 박О옥은 추운 날씨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피란길을 떠난다는 게 두려 웠다. 아침상을... 조발 하려다 말고 있는데 ‘딸딸딸딸...’ 소리가 나. 어서... 인 민군들이 온거야 벌써. 우리집 뒤 산인데 거기서 그만 ‘딸딸딸딸...’ 그 냥...우리 시아버지가 나가야 한다고... 동짓달이잖아 얼마나 추워. 나는 안 나간다고. 애들 데리고 추운데 얼어 죽는데 어디를 나가냐고.80)

10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1)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82)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83)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동짓달 추위에 어린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피란길을 떠난다는 것이 자신 이 없었다. 남편과 큰 아들, 그리고 일꾼 한명의 피란 보따리만을 꾸려 놓자, 시아버님이 큰소리를 치시며 성화를 내셨다. ‘너도 떠나야 한다’며 신을 신은 발로 대청과 방안을 뛰어다니시며 급히 짐을 꾸려 떠나보내셨다. 결국 박О 옥과 남편, 세 아이 그리고 일꾼 한명이 함께 떠났다. 시부모님은 고향집에 남아 계셨다. 그렇게 남으로 피란길을 떠났다. 남으로 피란을 가기 위해서는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강가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부터 며칠 전부터 피란을 나온 인파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임진강을 갔지. 갔더니 어제 먼저 떠난 사람들이 그냥 있어. 배를 타고 나가야 되는데...그 사람들이 다 건너? 배를 기다리니 다들 먼 저 못가고 기다리고 있더라고.81) ‘비향기는 썅썅... 총알이 주룩주룩...’ 비행기는 그냥 썅썅... 이런 총알이 그냥 주룩주룩... 비행기가 쌱...쌱... 빗방울처럼, 이런 총알이 그냥 바가지로 쏟아 붓는 것처럼 썅썅 쏟아지 는 거야. 조기서 사람이 나가 자빠지고, 저기서 죽어 자빠지고... 너무 고 생을 하면 안잊어 먹어져...82) 험난했던 피란길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며 총알을 쏟아 부었고, 피란을 떠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갔다. 박О옥은 두 아이를 양손에 데리고, 남편은 지개 위에 아들 하나를 올리고 길을 재촉했 다. 그때 한순간에 쏟아지는 총알이 남편의 다리로 떨어졌다. 다행히 총알은 솜바지만을 스치고 지나가 깊은 상처는 피할 수 있었다. 우리 영감은 솜바지에 두루메기를 입었지 뭐야. 허벅지 여기를 총알이 불총을 맞은거야. 그냥 불을 끄고...살이... 뼈는 안 다쳤어. 불이 나서 살 만...83)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01 84)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85)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산길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산 밑으로는 피란민을 가득 태운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폭탄이 떨어졌고 기차 안에 있던 피란민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보였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저 산길로만 갔지. 기차 탄 사람은 우리가 요렇게 산길로다 내려다보 면 켜켜이 탔는데... 죄 죽었어요. 폭탄이 떨어져서... 기차 안에 사람이 새까맣게 있었는데 다 죽었어. 84)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피란생활 피란을 가는 길에 밥을 얻어먹을까 해서 민가를 찾아 들어가 봐도, 이미 모두가 피란을 떠난 빈집들이었다. 어렵게 충청도 인근에 ‘피난골’이라 부르 는 마을에 도착했다. 산골 마을에서 방을 하나 얻어 그곳에서 얼마간을 지낼 수 있었다. 끼니는 매일이 죽이었다. 한줌 쌀로 밥을 해서 남편과 아들의 끼 니를 챙기고 나머지는 죽을 쑤어 박О옥과 남은 식구들의 허기를 달래야 했 다. 그것도 없을 때는 굶기가 일쑤였다. 방을 하나 얻었는데 감토화로에다가 쌀을 한줌을 밥을 해서 먹는거야. 아들 아버지 퍼다 드리고 그리고는 죽을 써서... 하루 두 번 죽을 먹고 없 으면 또 못 먹고 그렇게 살았지 뭐,85)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피란길을 떠나며 챙겨온 물건들을 하나 둘 내다 팔 기 시작했다. 치마와 저고리, 아들을 업고 온 포대기, 그리고 시어머니가 챙 겨주신 시어머니 한복 치마까지 모두 내다 팔아 끼니를 마련하였다. 저고리 와 치마는 각각 5홉을 쳐 주었고, 포대기와 시어머니의 ‘주세로 치마’는 쌀 1 말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가 헐값이었다. 치마, 저고리, 그리고 우리 아들 낳았을 적에 처녀 포대기. 그 처녀포대기를 내가 우리 아들 낳았을 적에 쌀 일곱말 받아가지고 산거야. 그걸 내가 난리 통에 쌀 한말을 받고 팔아먹었어. 먹을 게 없으니 어떡해. 우리 시어머니

10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6)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87)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주세로치마. 옛날에 주세로 치마 하면은 이거야(최고야). 양반집 마나님들 입는 거. 우리 시어머니 주세로치마 가져다가 내가 그것도 난리통에 팔아 먹었지. 회색이야. 천 이름이 주세로고, 회색이야. 이렇게 수수하게 생겼어. 그것도 쌀 한말 받고 팔아서 죽 쑤어 먹었어. 저고리는 5홉 푼어치 받고, 치 마도 5홉 푼어치 받고. 어떻게 해. 먹을 게 없는데. 먹고 살아야 되는데.86) 다시 찾은 고향집에서... 피난골에서 얼마가 지난 후에, 상황이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О 옥 일행은 바로 짐을 꾸려 다시 고향집이 있는 북으로 향했다. 어린 아들도 집 을 찾아간다는 말에 신이 나서 허기진 줄도 모르고 한달음에 뛰기 시작했다. 여기 유수가 좋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또 올라왔지. 올라오는데 우리 큰 아들이 일곱 살짜리 큰아들이 좋다고 이러고 뛰어가는 거야. 우리 영 감이 ‘아.. 신발 해진다 가만가만히 뛰어가라’ 하니까. 우리 영감 친구가 ‘아...가는 것만도 신통하지 가만 둬’ 하고 가는데 양쪽에 길에 먹을 게 좀 많아. 우리 아들이 아침에 죽 한 공기 먹고도 사달라는 소리도 안 해요. 그리 오다오다 걸어 올라왔지 뭐. 올 때는 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산 덮은 나루를 건너야만 간데요. 거 기서 그냥 밤을 새우고. 배를 타고, 시어머니랑 다 여기 있으니까 또 왔 지. 에휴... 그 얘기를 어떻게 다해.87) 다시 찾은 장단과 고향집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을은 모두 폭탄을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난리통에 마을에 사시던 작은집의 작은어 머니 두 분은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나셨다. 시어머니는 폭탄과 총이 쏟아지던 순간 우물 속으로 몸을 피해 간신히 목숨을 구하셨다고 한다. 아효... 우리 작은 시어머니 둘은 돌아가시고. 우리 시어머니는 우물에 들 어가셨데. 사시려고, 그렇게 우리 시어머니는 안 돌아가셨어요. 우물에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03 88)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89) 박О옥(여, 86) 2012년 11월 4일 면담 들어가셔서. 그냥 우리 집서 이만한 드럼통만한 폭탄이 떨어져서...우리 집 뒷산이 넓어요. 넓은데 거기 폭탄이 떨어져서. 작은 시어머닌 손자 데 리고 나오는데 맞았데. 사람이 나오는 거를 보고 폭탄을 때린 거야. 때린 건지 총을 쏜 건지. 그래서 우리 시아버지랑 작은 시아버지랑 가서 묻었 데. 지금도 산소에 가면 있지.88) 지대가 높은 곳에 크게 위치하고 있었던 박О옥의 집은 군인들의 처소가 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집을 점령하고 마을에 남은 곡식과 소 등의 가축을 잡아 끼니를 해결하였다. 그 와중에도 시어머니는 피란 간 손자가 오면 준다 고, 소고기 일부를 가져다 장조림을 하여 땅에 묻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장단집이 커요. 안밭채가 커요, 사랑도 이칸사랑. 크고. 앞마당도 넓고. 마루도 사칸마루 넒고. 아래 윗방, 거름방 모두 그렇게 있었는데 안밭채 그냥...사랑에는 의사가 들고, 안에는 수사관, 군인들 밥해 먹이는 사람이 부엌에서 밥해 주고...이칸 사랑에는 병원이 들고. 그랬더라고. 우 리 집은 워낙 크고 지대가 넓고 좋아요,89) 그렇게 파주 장단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루 이틀 망가진 곳들 을 손보고 다시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4년 큰 아들이 이곳 통일 촌의 입주를 신청하고, 선발되면서 통일촌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통 일촌에서도 농사일은 계속 되었다. 쌀농사를 비롯해 콩과 참깨 등의 밭농사 를 지었다. 박О옥은 이제 집안일과 농사일에서 모두 손을 떼고 고요한 노후 를 보내고 있다. 2012년 11월 25일 박О옥의 마당에서는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이 시작되었다. 딸과 며느리들이 모여 족히 수백포기가 되는 김 치에 소를 넣으며 분주한 사이, 마당 한 쪽에서는 이들의 바쁜 손을 지켜보 는 하얀 머리의 박О옥이 앉아있다.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고 잘되어 화목하 게 지내니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박О옥은, 자식자랑과 자식사랑으 로 지난 86년의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10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 남О규 생애사 송산리 도련님에서 피란민으로 남О규는 1939년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남О규의 집안은 논농사를 지으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5대째 거주하던 부농집안이 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통일촌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남О규는 어린 시절, 마당이라도 쓸어보려고 빗자루를 들면 아버지가 그것을 보고 집에서 부리던 일꾼을 나무랐던 일을 기억한다. 커다란 가옥의 사랑채에는 가객들 이 넘쳐났다.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집안일을 돕던 일꾼들도 집안에 몇을 두었다. 이 이야기 하나 해줄게 나는 고향에서 잘 살았어. 머슴을 둘씩 두고 나는 이 그전에는 옛날에는 눈이 오면은 바깥마루 마당에는 안마당, 바깥마당 이 있었다고 바깥이 컸는데 거기서 탈곡하고 행사하고 내가 빗자루 들 고 눈 쓸고 있으니깐 “아 김서방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 “네” 이러는 거 가옥 내 거실에서 인터뷰 중인 남О규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05 90)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91)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92)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야 “어떻게 눈을 쓸게 놔두나 이 사람아” 방에다 데려 다 놓고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그렇게 사랑받고 살다 가 먹을 게 없으니깐.90)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또 아부지. 5대가 살았지. 거기서도 논농사, 밭농사 다 지 었었어. 주로 많이 하는 게 논농사지. 옛날엔 주로 생 활권이 농촌에서는 논농사지. 전남지방이나 있으니 까.. 지금은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더 수익이 많아. 옛 날에는 여기도 다 논농사였는데.. 91) 남О규는 집에서 5리 떨어진 장단초등학교를 다녔다. 제 나이에 학교에 입 학하던 친구들이 거의 없던 상황이었다. 남ㅇ규도 2년 늦게 입학하였지만 더 늦은 친구들도 많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하는 친구들도 있 었다. 그래서 남О규는 동창들 사이에서도 꽤나 어리고 작은 축에 속했다. 나는 육이오 나는 해에 내가 13살이었어. 50년도 내가 피란을 나갔으니 깐 그때 초등학교 5학년 다닐 때 피란을 갔어. 13때 그때 지금은 늦게 내 가 입학을 했어 농촌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내 동창도 초등학교 6학 년 다닐 때 그때 결혼한 애들도 있었어. 그래서 작았었지 그렇게.92)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개성군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것이 학교의 전통이 었다. 남О규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개성군으로 가던 기차 시 간에 늦어 허겁지겁 서두르는 바람에 친구들은 모두 부모님과 함께 왔지만 남О규는 혼자 수학여행을 갔어야 했다. 부모님의 금지옥엽 아들이었던 남 О규는 서러워서 몰래 숨어서 울기만 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장단초등학교에서 전통이 초등학교 5학년 때는 개 성으로 수학여행을 가. 그때 내가. 이 기막힌 얘기를 해주께. 우리 집이 서, 집이서 우리 학교까지 5리, 한 2키로 돼. 4키로를 10리라 그랬거든? 마늘 손질 중인 남О규의 부인

10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93)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2키로는 5리라 그랬어. 5리밖에 안되는데 그 장단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 학여행을 갔는데.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 그 생각을 하면.. 원 칙은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나를 따라 갈라 그랬는데, 아침에 늦었어. 그러 니까 그래서 나를.. 그 옛날에는 이야기하잖아. 옛날에는 부모님들이 배 운 게 있어 뭐 있어, 하 겁이 많아 가지고 동작도 느리고 그랬어, 지금 생 각해보면. 얼마 앉지도 못하고, 날 일찍 보내야 했는데 아침에 늦었다고. 난 막 뛰어가서 일단 어떻게든지 그 가는 그 열차를 탔어. 그래서 개성 까지 갔는데 개성까지 가서 어... 다른 친구들은 다 부모, 형제 친척들 다 모여 점심을 먹는데 나는 가족이 하나도 못 따라왔으니까 갈 곳이 없는 거야. 저쪽 가서 울구 앉았었다구.93) 1951년, 남О규의 가족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피란을 떠났다. 초등학교 5 학년이던 남О규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남О규 가족이 피란을 떠 난 고양 대화리에는 피란민들을 위한 난민수용소가 있었다. 남О규의 가족 은 그곳에서 1년간 생활했다. 하지만 피란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수용소 생활 은 점차 피폐해졌다. 식량이 모자라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수용소 를 나와 수색과 고양시 신도읍,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등을 거쳐 통일촌에 정착했다. 통일촌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생계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니느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한창 전기가 들어올 1960년대에는 전봇대를 세우 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이사를 다니다가 통일 촌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결국 고향은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처음에는 일산 대화에서 피란 나가니깐 대화에다가 천막을 쳐주고 피란 민들을 난민 수용에서 살았어. 그때 가서 1년 살았지 한 1년 살다가 거기 서 피란민은 수십명, 수백명 모이니깐 배급을 주는데 먹고살기 너무 힘 들더라고 그러다가 수색으로 갔었다고 거기서 먹고 살다가 수색에서 몇 년도 갔다가 몇 년도에 나왔는지 기억은 안 나고 얼로 갔다가 얼로 갔는 지 알지 일산서 피란 나왔다가 수색으로 갔다가 고양시 신도읍 고양시 이사갔어. 거기서 몇 년 살았나. 1년 그러다가 봉일천으로 이사와서 일로 들어왔지. 거기서는 한 3년 살았지, 삼사년 산 것 같아. 이사 댕기느라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07 94)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95)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96)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오래 안 살았어. 그때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밥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밥 을 찾아 댕기는거야. 밥을 찾아 댕겼어, 돈도 벌지도 못하겠고.94)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내가 할 일이 없고 그때 밥 먹고 사는 게 힘들었어. 그때 공사판 가서 실컷 받고 그때는 60년대 초에는 한국 에, 내가 기억이 나기로는, 그때 한국에 전기가 첨으로 들어올 때야. 지 금은 전기를 세울려면 기계로 파고 기계로 세우고 다하는데, 그때는 전 기를 세우려고 오십 명이 딱딱딱파서 전기를 판다고. 재수가 좋으면 흙 만 나오는데, 그러면은 몇 개씩 파는데 재수가 나쁘면 돌이 많은데 몇 개 파지도 못해 그거 하나 파는데 보리쌀 한말씩 줬다고 그거 하루에 재수 가 좋으면 몇 개씩 파 세 개 네 개씩 파 그러면 보리쌀 네말 닷말 주는거 야. 그러면 큰 부자지 그러다가 돌 많은데 걸리면 하루 종일 했어. 어떨 땐 이틀 걸렸어, 그러면 망한 거야.95) 고된 생활을 하다가 통일촌에 입주하였지만, 정착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매일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통일촌에 입주한 직 후, 남О규 가족은 통일촌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대포소리가 시시 때때로 사방에서 들렸고, 북한에서 방송하는 대남방송이 생생하게 들렸다. 주로 남한을 조롱하고 북한으로 회유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포소 리가 간간이 들리지만 당시에 비하면 매우 조용한 편이라고 했다. 지뢰를 밟 아서 부상당하거나 사망하는 이웃도 있었다. 입주 초기에는 매일이 고되고 불안한 나날들이었다. 고향에 한 번도 못가보고 들어와서 살았어. 여기 맨땅 개간해가지고. 또 전쟁이나 밥해 먹는 것 기운은 없지 철조망 있지 철조망 다 걷어냈지 나 무뿌리 캐니고 그래가지고 늙었어. 그때가 내 이팔 청춘 좋았는데 내가 이렇게 늙었지.96) 우리가 그때 처음 입주했을 때에는 막 포소리가 났어, 여기. 지금은 안 나지만. 지금 나는건 안 나는 거야, 그거는. 그 전에는 무서웠어, 막 이북

10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97)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98)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99)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방송 들렸어. 방송이 들리고 남한사람한테 욕하는 소리도 다 들리고 그 랬는데 지금은 욕 안하지. 무서웠어. 포소리 났으니까. 무서웠지. 못 살겠 더라니까. 일하다가 지뢰 밟아서 죽은 사람도 있고. 발목 다쳤어. 그때는 못 사는 데였지.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97) 그전에 포소리 날 때는 헌 저집에 살 때이니까 집이 너무 엉성해져가지 고 벌컹했으면 우다다다 하니까. 누가 겁이 안 나겠어. 그런 소리 안 듣 다 들리니까. 전방이지, 최전방이거든. 저 사람이 이사 가자고 나가자고 그랬다고.98) 1976년부터 상일꾼을 둘 정도로 대규모의 농사를 지었다. 머슴은 3년간 남О규의 가옥에서 함께 살면서 숙식을 함께 했다. 상일꾼 외에도 일하는 사 람들을 밖에서 데려왔다. 통일촌의 특성상 오후 5시만 되면 나가야 했기 때 문에 아침 8시부터 일했다. 7시에 아침식사 후 밭일을 나가 10시에는 일꾼들 에게 곁들이를 제공했다, 점심식사는 12시에, 오후 3시에는 오후참을 챙겨줬 다. 멸치국물에 삶은 국수를 말아 계란 지단과 파를 썰어 고명을 얹었다. 부 침개 등 다양한 밑반찬을 곁들여 식사가 아닌 새참에도 밥을 제공했다. 여기 모든 사람들이 일꾼을 두고 살았어. 밖에서. 밖에서 소개해서 안에 서 소개를 하든 데려오지. 똑같이 밥 다 먹이지. 일을 그렇게 하니까. 아 침밥 먹고, 점심에 10시에 먹고. 곁들이. 아침은 일찍 먹지. 여덟시 일곱 시에 먹어야지. 그리고 또 열두시에 점심 먹고, 세시경에 오후참 먹고 그 리고 저녁은 안 먹고 나갔지 못 먹고 나가잖아 다섯시까지 나가라고 하 니까. 다섯시까지 나가라고 하니까. 밖에서 일꾼을 사와도 일할 시간이 별로 없어. 일찍 나가라고 하니까. 여덟시에 들어와서 아침은 마을에서 밥 먹여서 나가고 저녁은 그냥 나갔던 거 같애. 밥을 먹을 시간도 없지. 곁들이 먹으면 쪼끔 있으면 나가야 되니까.99) 참으로 국수도 삶아주고, 밥도 해주고. 이것저것 해주지. 고구마, 감자 그 런 걸로 끼니가 되나.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밥을 먹어야지. 그런거 먹고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09 100)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101)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02)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는 일을 못해, 농사는. 농사일이 힘들어. 멸치국물에 국수해서 말아주는 거지. 고명도 얹지. 계란 지단 부쳐서도 썰고, 파도 송송 썰어 넣고 그런 거지 뭐. 부침개, 전? 그런 것도 해주고 그러지. 한 가지만 해주지 않고 이것저것해주지. 바꿔가면서.100) 대규모의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남О규의 매형 덕분이었다. 매형은 미8군에서 근무하였는데, 남О규에게 미8군이 관리하는 땅에 개간허가를 내 주었다. 총 47,000평의 경작지에서 논농사를 지었고 통일촌에서 지급된 논 4,500평과 밭 2,000평을 함께 경작했다. 나는 우리 매부가. 힘들어서 못했어. 일꾼을 두고 머슴을 두고 했었어. 그땐 내가 돈이 많아서 머슴둔 게 아니고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이 많아서 일을 하기 위해서 머슴을 두었어.101) 고된 일을 하며 삼남매를 키워낸 부부 1969년에 남О규는 결혼을 했다. 여섯 살이 어린 부인을 만나 금촌 예식장 에서 서양식 혼례를 올렸다. 신혼살림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서 차렸다. 남О규는 그 당시에 드물었던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에 골인했다. (부인이) 나하고 여섯 살 차이나. 우리는 그때만 해도 내가 70년도에 결 혼을 했는데 어... 그 전에 이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 자유연애를... 연애 결혼을 했어. 연애결혼을 했는데 그때나 나나 아무것도 없고, 얼마나 또 흘러흘러 가다가 저 사람하고 동거생활을 했다가 어디 가서 사는데 거기 서 동거생활을 했다고.102) 남О규에게 결혼기념일은 큰 아들의 생일날이기도 하다. ‘자유연애’를 했 던 부부가 결혼 전에 임신을 했는데 결혼식 당일에 출산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연애도 쉬쉬하던 부인은 임신사실마저 남편인 남 О규에게 숨겼다고 한다. 하도 부끄러워 결혼 전에 임신한 사실을 남편에게

11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03)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04)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105)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알리지도 못하고 결혼식을 준비했다. 본인도 언제 임신했는지 헷갈려 결국 결혼식 당일 날 산통을 느끼게 되었고, 부랴부랴 식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 아와 큰아들을 출산했다. 남О규의 부친은 당시 투병 중이었는데, 결혼식 후 1주일 만에 사망했다. 56세의 젊은 나이였다. 결혼식 당일에 출산한 덕분에 손자 얼굴은 보여드릴 수 있었다고 남О규는 회상했다. 이제 결혼을 시키잖아 엄마, 아부지가. 결혼을 시켰는데 그래서 결혼 날짜 를 잡았어. 결혼을 하고 했는데, 금촌에서 00리까지 한 20리? 한 8키로 돼. 20리. 거기서 나와서.. 그때에는 금촌역에만 금촌 시내에만 결혼식을 하는 게 있었다고. 예식장이. 서울에 다 있어. 그래서 금촌에서 했는데 예식장에 서 예식이 끝나고 들어가면서 들어가서 애를 낳은거야. 내가 결혼해가지고 처음 들어갈 때 애가 있는지도 말도 안했어. 결혼하고 나니까 첫날 낳으니 까 황당하니까. 부부가 같이 살면서 그것도 모르고 얘기도 안하고 사는거 야. 그니까 몰랐던 거야. 난 그때 전혀 몰랐어. 보니까 애를 낳은거야.103) 그래가지고 예식장에서 애를 낳은 게 아니라 집에 겨우 왔지. 애 날라고. 진통이 왔지. 예식하면서. 날짜를 잘못 짚었지. 잘못짚었어. 그때는 배가 많이 안 나왔으니까. 배 많이 안 나왔어. 숨기지. 부끄러워서. 아들을 낳 았어, 그래도. 부끄러웠지, 뭐. 나이도 어린 학생들한테. 연애해서 애를 낳다니. 결혼식 날에. 부끄러운 얘기지. 요즘에는 그런 사람 있지만 예전 에는 없었지.104) 그 날짜에 애를 낳고, 또 그렇게 애를 낳고, 또 우리 아부지가 몸이 안 좋 으셨는데 우리 아부지가 애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우리 아부지가 돌아가 셨어. 우리 아부지는 자식 결혼을 시킨 지 일주일 만에 손주를 보고 돌아 가셨어. 우리아버지는 내가 30살에 우리 아버지가 지금은 칠팔십들 사 는데 그때 우리아버지가 56세에 돌아가셨어. 105) 1972년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그 다음해 1973년에 막내딸이 태어났다. 통일촌에 들어오자마자 딸을 낳은 것이다. 당시 남О규는 29살이었다. 첫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11 106)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107)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째 아들 때와 같이 임신 사실은 될 수 있는 한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일이었 다고 했다.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출산할 때가 다 되어서야 가족들이 알 정 도였다. 하물며 병원에 가서 출산하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통일촌에는 당 시 아이를 낳을 때, 출산을 돕던 산파역할을 해주던 이웃이 있었다. 가위와 실 등을 준비하고 물을 데워 출산을 준비해 주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기운 이 없는 산모에게는 미역국을 먹였다고 했다. 그 후에도 오랜 기간 미역국 을 먹었다. 다 집에서 낳았어. 나 스물아홉에 여기를 들어왔는데 딸은 뱃속에 들고, 둘째 아들은 걸리고. 큰 아들은 다섯살, 둘째 아들은 두 살. 걸리고, 뱃속 에 데리고. 만삭이 돼가지고 와서 막내딸은 여기서 낳았지. 73년생이지. 걔가 지금 마흔 살이니까 여기 들어온 지 사십년 됐어.106) (아이는) 그냥 집에서 낳고, 동네에 나이 드신 분이 받아줬어요. 옛날에 는 다 그랬잖아. 애 셋 낳을 동안 병원에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다 그렇 게 집에서 낳았어. 가위하고, 실하고 옆에다 놓고. 물 데워서 물 받고 손 씻고, 소독하고. 소독약이나 있어? 따뜻한 물로. 애 씻기고, 그렇게 해주 드라고. 미역국을 그 할머니가 끓여주셨지. 애 낳자마자 먹어야 하니까. 속이 비었으니까. 그 때도 그렇게 오래 먹었어요. 저쪽 집(1973년에 지은 집)에서 낳았지. 그때 이 집은 없었지. 옛날 엄마들은 애 낳는 거 힘들었 어. 병원을 가? 지금은 벌써 애 며칠 된 거를 다 시어머니한테 말하잖아. 그 때는 부끄러워서 애 가진 것도 말도 안하고, 그냥 숨기면서 애 가져가 지고 낳았어.107) 그러나 살림이 넉넉지는 않았다. 3남매가 공부를 하도 잘해 모두 서울 4년 제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이었다. 남О규의 부인은 서울 경동시장, 모래내 시 장까지 가서 장사를 했다. 통일촌에서 키운 호박과 고구마 등을 팔기도 하고 날이 추워지면 번데기 장사도 했다. 큰아들은 금속공학을, 둘째 아들은 컴퓨 터 공학을 전공했다가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현재 교사로 재직 중이다. 막내 딸은 현재 미국 시민권자와 혼인하여 미국에서 거주 중이다.

11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08)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109)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10)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농사지으면서 애 셋 낳으면서 공부가르치기가 힘들더라고. 농사지으면 서 나는 서울로 장사를 다니면서 돈을 벌어서 애들 삼남매 다 대학 가르 쳤어. 여기 살면서 여기서 심은 거 이고, 지고 가지고 가서 팔고, 돈이 없 으니까 길바닥에서 저기 뭐야 청량리 시장에. 경동시장에 그러니까 가 서. 거기도 가고, 모래내시장도 가고. 길바닥 장사를 해서 애들을 가르친 거야. 집에서 호박, 고구마 뭐든지 심는 거 가지고 가서 팔고, 번데기 장 사고 하고 내가 그랬어. 얘네 아빠는 집에서 다 뒷바라지 해댔지. 딸내 미가 여기 초등학교 다녔는데 애가 3,4학년 때 엄마 오늘은 안가면 안돼 요? 안돼요? 엄마 집에 없으니까, 집에 없으니까. 외로웠으니까. 맨날 그 러면서 울고 그랬어. 애들 떼어놓고 돈 벌고. 나다니고, 고생 엄청 했어, 우리. 농사지으면서 농사 가지고는 애들을 도저히 못 가르치니까. 그랬 었어. 셋 다 이과를 나왔어. 셋 다. 등록금도 더 비쌌어.108) 근데 그때는 수입과 지출이 전혀 맞지가 않아.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일 년 수익이 사람들 먹을 것도 안 돼. 하나 더 얘기하께. 우리 막내딸이 대 학을 입학하는데 입학해 시험보고 났는데 신문에 나오드라고. 입학할 때, 그 뭐야. 예를 들어서, 어느 학교에 무슨 학과는 몇 대 일이었다. 근데 이 십오 대 일로 나오더라고. 그래서 저기..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붙 었어. 힘드니까. 컴퓨터공학과. 걔가 인제 이십오대 일이니까 신문에 나 오더라고. 속으로 그랬어. 에이 저거..떨어졌다고, 떨어졌다고. 그래서 준 비를 안 해 놓은거야. 이제 공지를 받아왔더라고. 학교에서, 학기를. 그러 니까 갑자기 준비를 할려니까. 그때도 그랬어. 취소가 된다고. 합격취소 가 된다고. 그러고 나서 납부시킨다고 그러고 그랬어. 그렇게 갔었어.109) 힘드니까. 오빠들 대학다니고 얘도 붙으면 한꺼번에 어떻게 가르치냐고. 셋이 들어갔으니까. 하나는 군대를 간다고 보냈어도. 근데 붙었어. 공부를 너무 잘해. 떨어지길 바랬는데. 힘들었어. 농사지어서 애들 대학 서울에서 가르친다는 게 쉽지가 않아. 길바닥을 헤매면서 내가 가르쳤어. 애들 다 대학 졸업한 다음에 그만뒀지. 힘들었어. 그렇게 셋이라. 그래서 인제 아 들이 둘이니까 하나는 군대 보내고, 맨날 이렇게 교대로 그렇게 했지.110)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13 111)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12)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셋이 딱 일 년에 셋이 딱 겹쳤는데 진짜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지원시켜 서 군대를 내보내버렸지. 또 둘째를 큰애가 제대 왔으니까. 둘째를 바로 또 군대를 내보내고.111) 남О규와 사람들 통일촌에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76년에 함께 입주했던 남О규의 어 머니가 사망했다. 3일장을 치렀고 봉일천리에 장지를 썼다. 장례는 통일촌에 서 치렀지만 봉일천리까지 영구차로 운구하고 마을 입구에서부터 봉일천리 의 마을 공동 상여를 빌려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장지까지 운구했다. 우리 아버지는 칠십년, 1970년에 돌아가셨고, 우리 어머니는..여기 오셔 서 조금 사시다 돌아가시고. 1976년도에 돌아가셨어. 여기서 상여 없었 고, 그때만 해도 없었고, 내가 어머니 아버지랑 살던 봉일촌에서 모셨다 고. 거기 살다가 우리가 여기를 들어왔는데 글루 모셨어요. 차로 그 마을 에 가서 영구차로 모셨다가.. 거기서 또 상여를 메고. 그 마을에 오래 사 셨으니까. 마을에서 또 해줘가지고, 상여를 모시고 갔어.112) 집에서 했어, 병원으로 안가고 여기서 했어. 그때는 의리가 좋았어. 무슨 일 나면 온 동네 사람이 하던 일 다 미뤄두고 와서 다 도와주고 다 해. 근데 지금은 안 그래. 달러. 여기도 있었는데 그 분이 워낙 거기서 살았 둘째아들 결혼식 때, 가족사진큰아들 대학 졸업사진

11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13)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114)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15) 남О규의 부인(여, 68) 2012년 11월 23일 면담 으니까 거기서 동네에서 매줬지. 머니까. 워낙 머니까. 꽃상여는 아니고, 일반 상여 알아요? 거기서 빌려줬으니까 안태웠지. 그 동네에서, 마을에 서 빌려줘서 거기서 해줘가지고. 우리가 살던 데니까 도와주지. 옛날에 살던 동네사람이니까.113) 통일촌 마을사람들이 사자상을 차려주었다. 상에 밥을 세 그릇에 나눠담 고 채 썰어 양념을 하지 않고 희게 무친 무나물을 올렸다. 밥그릇에는 십원 짜리를 한 개씩 꽂았다. 문 밖에 상을 두었다가 상여가 나가고 난 뒤 뒤꼍에 밥과 나물 등을 뿌렸다. 3일. 옛날에는 잘사는 집은 5일장을 치르고 그랬지만 거의가 거의 90% 가 삼일장 지냈어. 사자님들한테 상 차려드리지. 밥하고, 거기는 간단히 밥하고 콩나물에 무를 이렇게 송송송송 채를 쓸어서 흰 양념을 안 하고 희게 채나물을 담아서 딱 두 공기 놓고, 사자님한테. 내가 기억하기로는 밥하고, 흰 밥하고 나물 한 공긴인가 두 공기 놓고.114) 사자상 집 밖에 차려놨다가 밖에 버리는 거지. 어디다 쏟아 놓구선 문 밖 에. 상여 다하고 나서 버리는 거지. 상을 하나 차려서 십원짜리 동전을 꽂아뒀다고 밥을 세 접시 퍼 놓는데 하나에 하나씩 꽂아놓더라고 나물하 고. 접시에다가 조금씩 세 개. 그렇게 하나봐.115) 남О규는 통일촌에 입주한 후 ‘장단이칠회’를 창설했다. 초대 회장직을 10 년간 맡기도 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진 동창들이 남О규에게 찾아왔고 그들을 모아 동창회 를 만들었다. 장단초등학교 27회 입학생이라는 의미였다. 생업이 고된 일상 이었지만 동창들을 모아 10년이나 모임을 이끌어갈 정도로 남О규는 사람을 좋아하고 매사에 주도적인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저 그거는 장단이칠회는.... 그거는 내가 피란 나와서 여기 살면서 여기를 들어왔다고, 군대 갔다 와서. 내가 여기를 사서 들어왔는데 내가 여기 장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15 116)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17)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18)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단 사람들에 내가 여기 사니까 많이 찾아오드라고. 그 래서 여기 초등학교 동창을 내가 여기서 살면서 모집 을 했어, 4,50명 모집을 해가지고 우리 집에서 장단 초등학교.. 내가 장단 초등학교 27회야. 27회 회장을 내가 한 10년 더 봤어.116) 그러던 어느 날, 남О규에게 큰일이 닥쳤다. 소위 중 풍이라고 불리는 뇌경색이었다. 평생을 일만 하면서도 몸관리를 열심히 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운이 좋지 않았 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원활한 대화가 힘들 정도 이다. 남О규는 혹시나 실수할까봐 최대한 생각을 빨리 하고 말하는 연습을 자주 한다. 처음에는 말하는 도중에 혀가 굳어 전혀 말을 못하게 되는 때도 있었다. 잠시 후에 혀가 풀리더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힘 들었다. 다른 말이 나오고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남О규는 크게 고통스러워 했다. 나는 많이 나아진거야. 내가 며칠 전만 해도 말도 하기 싫고 그랬어. 내 가 농사꾼인데 73키로로 35년을 살아왔어. 근데 이 병 걸리고, 51키로로 확 줄었어. 체중이 줄으니까 체력도 딸리는거야. 꼼짝도 싫고 힘이 없어. 긴병 걸렸어. 뇌경색 옛날에 중풍이라는 거야. 노인들이 많이 걸렸어. 불 행히도 그 병에 걸렸어. 이거는 고치질 못해. 병원에 지금. 내가 서울대 학교 병원에 이 병을 고치질 못하니까 죽을 때까지 약을 먹으라고 지시 를 받았다고.117) 혹시나 실수할까봐. 빨리빨리 생각하잖아. 연습해야 나온다고. 근데 처음 에는 말을 하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처음에는 말하다가 혀가 이 상 태로 딱 굳어. 그럼 말을 못해. 앞에 그러는 거를 조금 있다가 혀가 풀어 지면 거기에 대해서 맹글어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잘못하니까 다른 말이 나오니 실수를 하잖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118) 남О규에게 장단이칠회에서 수여한 감사패

11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19)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120)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남О규가 앞으로 바라는 것은 지금처럼만이라도 몸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 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운신하며, 어려우나마 대외활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로 내가 갖는 바람은 더 악화되지 말고 최소한 이 상태라도 죽을 때까 지 끌고 갔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거여. 더는 피해주기 싫어. 난 지금 할 일 다 해. 일도 하고, 문산, 금촌 서울까지 갔다오고. 다한다고, 할 일. 단, 몸이 부자연스럽지. 부자연스러워 움직이고 하다보면 어지럽고 그래. 그래도 더 안 바라고, 안 나빠지고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 그래서 하늘에 기도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하고.119) (3) 민О현 생애사 민О현은 통일촌의 가장 고령인 주민 중 한명이다. 현재 통일촌 안에 많은 가족을 이루고 있는 주민이기도 하다. 민О현은 현재 16호의 민О승 가옥 뒤 채에 거주 중이다. 민О승은 큰 아들이며, 16-1호에는 넷째 아들 민О민이 세대주로 거주중이다. 77호에는 셋째 아들 민О명이 역시 세대주로 거주 중이다. 개성을 내 집 드나들듯이 민О현은 1921년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에서 태어났 다. ‘신촌동’이라는 자연부락명을 지닌 동네였다. 워낙 민씨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으므로 초기 통일촌 입주자 중 원주민 출신 민간인 세대주 40세대 중에는 민О현 가족 말고도 민씨가 꽤 많았다. 정자리라고 정자리. 거기서 개울있는데, 거기 가봤어? 임진강 내려오는 데 이렇게 올라오는데 가운데 있지 올라가다가 정자리 참아리라고 신촌 변이라고 옛날에 신촌변이라고 불렀어. 거기 나서 자란거야.120) 민О현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17 121)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22)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23)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민О현의 할아버지는 ‘글방’ 선생님이었다. 민О현은 가정환경 덕분에 어 릴 때부터 글방에 다니면서 한자를 배웠다. 현재까지도 서예를 즐기고 있다. 어렸을 때 배웠지 글방 10살 미만 때. 그때 배운다고 해도 다 까먹는지.. 우리 할아버지가 글방선생이지 옛날에 천자문서부터 명심보감 뭐 이 런 거 쭉 나중에는 크게 보면 맹자 공자 뭐 이런 책 다 배웠지 그런거는 뭐... 서예도 쓰고 그랬지121) 글방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배우느라 남 들보다 늦은 13살에 군내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습과목은 역사, 체 육, 국어, 산수, 수신, 역사, 미술 등이었다. 음악시간에는 창가도 배워서 불 렀다. 보통학교 재학 당시, 선생님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군민복’이라고 불리 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든 과목은 담임선생님이 가르쳤지만, 역사과목의 경우 왜곡을 염려하여 교장선생님이 직접 수업했다고 한다. 늦게 댕겼어. 보통학교 댕기는 거 옛날에는 보통학교 다니는 거, 장가가 서도 다니고, 어른이 되니깐. 난 늦게 댕겼어. 난 서당에 댕기다가 13살 에, 13살에 들어갔어.122) 옛날에는 군내 국민학교 군내 보통학교지 처음에는. 일본사람도 있고 교 장은 일본사람 선생은 일본사람 더러 있었고. 그때는 이제 한글이 있었 는데 한글이 수업시간엔 표현이 드물고 그저 뭐냐 선생이 가르치고 뭐 보통 양복도 입고 군민복이라고 제복이야 보통사람이라면 군민복이라 그랬지 여기 이렇게 다 채우고.123) 그때는 국어랑... 그게 주고 또 한글시간이 있는데 그거는 극소지. 그리 고 뭐 서예 같은 거 또 그림 그리는 거 또 산수 국어 산수 역사. 역산데 한국역사도 가르치지만 그때는 주로 교장이 가르쳐 일본교장이 이런 뭐 한 역사 그 뭐 왜곡해서 가르칠까봐 한일 선생이 가르치는데 우린 주로 일본 교장이 가르치고 역사랑 체조 응..체육 그것도 있고 국어 산수 역사

11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24)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25)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26)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뭐 서예 미술 서예 미술 그렇게 수신 같은 것도. 수신은 뭐 자기 몸 닦는 거지 성실히 잘하는 거지 뭐 수신 닦을 수자, 몸을 닦으라 얘기야. 창가 도 있고. 창가 뭐 일본 창가 한국창가도 있지만 다 잊어버렸지 다 어려서 배운 거야 다.124) 민О현이 살던 신촌동은 개성과도 멀지 않았지만, 평양에도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보통학교 수학여행으로 기차를 타고 평양에도 가보았다. 기차를 타고 간 수학여행에서 개성보다 더 큰 도시를 경 험했다. 당시에는 그저 사람 많은 큰 도시일 뿐이었지만, 다시 가 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북 뭐 그때 개성에 물론 뭐 38선 이남이었으니깐 평양까지 가봤지 어 려서야 한 열대여섯살땐가. 그거는 이자 그거 뭐야 이제 그 보통학교 수 학여행. 하루를 잤나 이틀을 잤나 잤지. 뭐 그때야 한나란데 왕래 맘대로 하고 그때는 한민족으로 살 땐데 뭐 해방돼가지고 그럴 땐데 그때는 뭐 한나라지 뭐 대한민국이지 그때.125) 개성은 신촌동에서도 40리밖에 되지 않았다. 민О현은 학창시절에 자주 개성에 놀러가곤 했다. 버스타고 놀러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 었다. 개성은 평양보다는 작은 도시였다. 층이 높지 않은 한옥이 많았고 김 치와 깍두기가 유명했다. 민О현의 기억에는, 그저 똑같은 김치였지만 특히 맛있어서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개성이야 뭐 맨날 댕겼지 40린데. 그때는 버스도 그때는 댕기는 게 없었 지. 좀 댕기면 그때는 20리고 30리고, 50리도 걸어 댕겼어. 도시 이런 데 나 버스 좀 댕겨야지. 버스 댕겨야 일정 말 때 기름이 없으니깐 목탄으로 다가. 목탄으로 피어다가 그 가스로 가니깐 힘이 없어. 조그만 언덕도 잘 올라가지 못하고 그랬어. 그때는 그때야 뭐. 일정 때는 그 사람 통친데 뭐 남북이 따로 없었지 뭐. 해방 돼가지고 막힌거지. 놀러도 가고, 일이 있어도 가고. 자전거 타고 그냥도 다니고.126)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19 127)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28)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저..개성이야 그때야 벌써 옛날이니깐 뭐..지금처럼 빌딩이 이런 게 별로 없고 한 것 해야 2-3층이지 그게 한옥이 많고 그렇지. 사람도 지금보다 적지, 물론. 시장 같은 게 옛날서부터 있는 거지. 옛날서부터 시장 다 있 지. 개성이 지금 개성, 그냥 문산같아 문산. 문산에는 지금 뭐 4-5층도 있고 그때는 4-5층도 별로 없었어. 개성엔, 그때 개성 특별한 거는 김치 깍두기 그런 거는 개성이. 그게 뭐 김치맛이지만 하여튼 맛이 특별하게 잘 담아.127) 가장이 되고, 해방을 맞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민О현의 형님이 자손이 없어서 집안에서 이른 결혼을 재촉했기 때문에 18살의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부인은 한 동네지만 자연부락으로 건넌 마을이었던 정자포동에 사는 구О순이었다. 광복.. 해방되기 전에 결혼 일찍했으니깐 우리 형님이 있었는데 형님이 잘생기셨어. 옛날에 그 뭐 자손 끊기면 큰일나는 형님자손이 없으니깐 날 일찍 보낼라고 그랬지. 18살인가. (부인은) 나하고 동갑이야. 한동네 거긴 정자포라 그러고, 나 사는데 신촌동, 거긴 정자포동. 옛날에는 왕래 가 있어? 남자 여자 뭐, 학교나 댕기면 여자들 같이 댕기지. 그때는 남자 들하고 만나지나?128) 스무살에 큰 아들 О승을 낳았다. 둘째 아들 О호, 셋째 아들 О명, 넷째 아 들 О민, 다섯째 아들 О일, 막내아들 О웅에 딸 О숙까지 총 6남 1녀를 두었 다. 이 중 О승, О명, О민 세 아들은 현재 통일촌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다. 1943년, 일본의 강제징용이 갈수록 심해졌다. 민О현은 누이가 한명 있었 는데, 개풍군으로 시집갔다. 민О현은 강제징용을 피해 개풍군으로 시집 간 누이의 집에서 2년 이상 피해있었다. 다행히 징용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 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동네 처녀들도 많았다. 만주정도로

12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29)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30)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31)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나 가면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러시아나 일본 북해도로도 많이 끌려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부인과 아들들을 두고 숨어 지내며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제의 강제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누이 집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해방 됐을 때? 그럼 주로 라디오, 그땐 라디오로 들었어. 라디오도 아이 뭐 여 도시에서 도시 같은 데 라디오 있으니깐 그런 거 듣고 그런 거 금 방 터지지, (소문이) 그날로 금방 퍼지기 나름이야 왔다갔다. 그때는 집 에서 들었어. 해방 될 때는 집에 안 있고 내가 좀 나가 있었더랬어. 왜 나 가있었냐면 붙잡아 가니깐. 징용 . 징용 아니면 징집? 이 누이가 개풍공 장서 거기 시집가서 사셨는데.129) 개성 있는 그쪽인가? 서쪽으로 바닷 쪽 개풍군이라고 있어. 거기 가서 2 년 이상. 거기서 해방 돼서 그래서 (돌아왔지.) 그래서 안 끌려갔지. 바라 는 대로 회피했지. 간사람 많지. 아이고, 만주로 가면 재수있는 사람이야. 아니, 거기 뭐야 홋카이도, 그때는 러시아. 그 연해주 말고 북해도 아... 뭐뭐 잊어버렸네 일본 아이머 여러 군데로 댕겼어. 섬 하나 그 뭐야 거기 그때는 일본 놈이 일본저기가 뺏어서 있었으니깐. 한국사람 뭐야 징용돼 서 데려가지. 많이 데려가지. 동네에 처녀들도 그때 위안부로 많이 갔지. 그때 뭐 위안부라 해? 아~ 많이 뺏어갔지.130) 해방됐을 때? 해방 됐을 때 기억하지. 아 처음에는 뭐...일본...일본 흐음 아이 항복 방송...어 방송 들으니깐 음.. 45년 8월 15일 해방 돼 있잖아 그 일본이 항복한 거지. 일본사람들은, 만주로 한국으로 이렇게 살던 사 람들은, 말도 안 되지 뭐. 난리 났을 때나 마찬가지지. 거서 그냥 부산까 지 가서 건너가고. 그때 뭐 차가 있어 뭐가 있어 어...저... 그 사람들(북쪽 에 살던 일본인들)도 참 위도 위에 38선 넘어오면 다 오는 걸로 생각했 대. 38선 이북서는 아주 심하기가... 중국 만주 같은 데서 좀 못한 사람들 이 일본 놈 보면 막 찍어내는 책상으로 찍고. 막 그런 말이 있다고. 38선 만 넘어오면. 여기서 신사적으로 보냈었으니깐.131)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21 132)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33)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민О현은 부인과 아들들이 있는 군내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민О현이 30세가 되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또 가족과 이별하게 되었다. 방 위군으로 징집되어 경북 경산시에 있는 경산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가 족들은 교하면으로 피란을 갔다. 잠시 피란을 위해 피해있던 것이었지만 전 쟁이 끝난 후에도 군내면이 민통선 안으로 갇혀버리는 바람에 통일촌에 입주 하기 전까지도 교하에서 거주했다. 전쟁 났을 때? 그때가 내가 30. 피란 다닐 새가 있었나. 나 파주까지 갔 다가 1.4후퇴 때 나 병장 내려가 있었지. 처음에는 저 근데 젊어서 방위 군이라고 있었어. 방위군. 예비 소위 교육대에 가서 있다가, 아 그래서 경산교육대에 있었구나. 경상도에. 경상도 저 경산이라고 대구 있는데 거 가까운데. 여기다 소개시켜서 파주 강 건너 교화라고, 걸로 대피하고 교화. 거기서 교화면 지금. 지금 그쪽으로 신도시 있는데 아냐. 말도마 라...아주 거기서 늙은 거지 뭐.132) 방위군은 그 해에 해산되었지만 민О현은 소위로 자원입대하였다. 면사무 소, 시청 등 지역자치단체의 재무계, 산업계, 총무계, 호적계 등의 부서에서 일했다. 당시에는 파주가 시 단위 지자체가 아니라 군 단위였기 때문에 많은 직원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역단체에서 일하던 민О현은 47세에 퇴직했다. 방위는 그전에 그만둔 거고 있다가 들어온 거지 .농사는 뭐 난 별로 농사 에.. 뭐 면에도 댕기고 시청에도 댕기고. 그때는 뭐 재무계 산업계 뭐 총 무계니 호적계니 회계 몇 개 뭐 그때는.. 지금은 국장이 몇인지 모르지만 그때는 파주시가 아니고 군이지. 과장 둘밖에 없어. 지금은 국장이 몇인 지.. 아주 친구는 내무과장하고, 사무과장하고.133) 통일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다 피란 갔다가 정착하게 된 교하면에서 계속 살던 민О현의 가족은 통일촌 에 1973년 초기 입주자 80세대 중 한 세대로 입주하였다. 시에서 통일촌 입

12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34)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35)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36)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주자를 뽑는다는 정보를 들었다. 당시에도 시청에서 일 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정보취득이 가능했다. 면 접을 거쳐 통일촌에 입주했다. 시청에서 공무직을 퇴직 하고 통일촌에 들어온 민О현은 농사를 짓는 대신 동네 양수장 일을 도왔다. 여기? 자원해서. 이거 뭐 시에서 뽑는다고 광고 뭐 이 런 통지 내보내니깐. 그때는 내가 그때는 나이가, 내 가 이제 면접 봤지. 뭐. 형식적이지. 농사짓는 데 뭐, 농사지으러 들어온 사람들이, 농사일 한번 만져보지 도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저거 뭐 많이 들어와.134) 통일촌은 이게 저 박정희대통령이 이 군민들 제대하 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사용하게끔 해주느라고 여 기 땅이 임자가 없을 때 아냐. 경산에서 그거 먹고 살 라고 여기 원주민 여기 사는 사람들 40호 또 군인 제 대한 사람들 40호 여기 80호가 처음에는 들어와서. 지금은 120호가.135) 농사도. 농사한 2년 짓다가 양수장 동생이 양수장 생 겨가지고 일하는 거 좀 보고 그렇게 지낸 거지. 물 푸 는 거 농사짓는데 물 푸는 거, 논에.136) 1973년 입주 당시 정부에서 지어줬던 가옥은 1986년 에 개조하여 현재는 큰아들 민О승이 거주하고 있다. 1997년 뒤채(바깥채)를 신축하여 민О현은 따로 나와 살고 있다. 1993년 혈압으로 아내 구О순이 사 망하기 전까지도 민О현 부부는 안채에서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민О현이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절절하다. 민О현이 주로 거주하는 뒤채 거실 가장 잘 보이는 벽면에는 아내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있다. 구О순이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갔다가 정착한 교하에서 52세 때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벽에 걸어둔 구О순의 사진 민О현의 서예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23 137)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38) 민О근(남, 76) 2012년 11월 3일 면담 139) 민О근(남, 76) 2012년 11월 3일 면담 이 건물은 내가 있으려고 지은 거고. 저거 저 한 채(안채) 저것도 다시 지 은거야. 처음에는 이렇게(뒤채) 못 지었어. 도로법이 싸서 이렇게 지은 집이. 그 후로 발전이 되니깐 이게 또 다시 이렇게 지은거지. 요거(뒤채) 는 음....... 97년돈가.137) 군내면에서 대대로 살던 민О현의 집안은 여흥 민씨 문인공파의 후손이 다. 현재까지도 매년 음력 9월 20일 정오에는 문인공에 대한 시제를 지낸다. 여흥 민씨 시조로부터 8대 후손인 문인공 민지의 묘가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 비무장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통일촌의 망향제단에서 시제를 지낸다. 원래 여흥 민씨의 시조는 4대조 문경공을 모시는데, 문인공파는 그 아래 후손으 로, ‘문인공파종회’에서 시제를 모신다. 문경공의 시제는 음력 9월 15일로 문 인공보다 선조이므로 시제의 날짜도 앞서있다. 문경공의 시향은 충북 음성 군 금왕읍 사창리에서 모신다고 했다. 문인공 이하 후손의 시제는 음력 10월 이후에 행해진다. 민자 지(池)자. 그 분이 1대가 아니라 그분이 8대조. 그분을 문인공이라 그래요. 그분이 고려 시대 때 사신으로도 많이 다니시고. 그 분의 자손들 만 모인 거예요. 전국에 모이는 사람들은 사창, 음성 사창에, 금왕면 사 창리에, 그 양반은 4대조요. 4대조는 문경공이니까 4대가 위라고. 그 위 에는 1대 2대 3대는 우리가 묘를 못 찾고 있어. 우리 자손들이 대한민국 에 있는 민씨 자손들은 모두 다 이 양반(문경공)의 자손이고, 우리는 그 양반(문경공)의 자손이기도 하지만 이 양반(문인공)의 자손인거지.138) 장단에 이 양반 산소가 있다고 그랴. 그런데 거기는 북한 아니여. 그래도 가까운데가 여기라고 해서 자손들이 시향을 모시는 거지. 근데 사창 거기 그 양반은 음력으로 9월 15일날, 이 양반은 9월 20일. 원래 10월 달에 하 는 게 시향인데 선대니까 그 후손들이 수도 없이 또 시향을 지내잖아. 그 러니까 10월 초하루날부터는 그 아래 조상 방방곡곡 전부 시향을 모시는 거야. 거기는 대종회에서 주관해서 하는 거야.139)

12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40) 민О근(남, 76) 2012년 11월 3일 면담 141)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142) 민О선(남, 나이미상) 2012년 11월 3일 면담 우리는 그 때 몰랐지. 다행히도 와 보니까 파주에 아까 민О화, 민О승이 가 여기 헌금을 했으니까, 우리도 이걸 사용하는데 좀 떳떳하기는 하지, 뭘. 그때는 여기 주민들이 이걸 만들었으니까.140) 망향제단을 건립할 당시, 여О민씨 대종회에서는 이 를 알지 못했지만, 다행히 통일촌의 주민으로서 민О 승, 민О화 등 민씨 일가에서 기부를 한 덕에 제단을 빌 리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2012년에는 음력 9월 20 일, 양력 11월 3일에 시제가 열렸다. 사변 나가지고 몇 년 못 지냈거든. 시작한 게 한 7, 8년 됐나? 비무장지대 너머에 있어서 가지 못하니까 여기 서 인제 시제를 지내는 거지. 여기 대덕산이라고 개성 놈들 대덕산이라고 불러.141) 정오가 30분 지난 후, 시제가 시작되었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은 매 년 참석자의 연배에 따라 적절히 분배한다. 초헌관의 분향, 재배, 헌작이 이 어지고 축문 낭독이 이어졌다. 아헌관과 종헌관의 의례가 이어졌고 모든 의 식이 끝날 즈음 제단 한 쪽에서는 산신제가 행하여졌다. 문인공의 묘가 있는 산의 산신에게 행하는 의례라고 했다. 모든 의례 후에는 축문 소지와 음복이 이어졌다. 할아버지 산소를 잘 보호해 주십쇼 라고 해서 산신, 땅에 있는 신에게 제 사를 지내는 것이야, 할아버지 산소 좀 잘 보호해 주십쇼 하고. 진설도 약하게, 몇 가지만 놓고 약하게 해.142) 시제가 진행된 2012년 11월 3일 밤 10시에는 민О현의 부친 제사가 있었 다. 민О현의 칠남매 중 막내아들 О웅만 인천에 거주하여 오지 못했고 딸은 제사 전에 잠시 다녀갔다. 다섯 아들과 며느리들이 모두 모여 담소를 나누며 제사를 준비하였다. 민О현의 동생 민О현도 참석했다. 민О현 집안의 시제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25 143) 민О현(남, 92) 2012년 11월 4일 면담 잠깐 왔다 간 애 한명 있어. 아 저 그 식당에서 일하는 며느리 하나 있어. 딸 이 한번 잠깐 왔다가고 친구들이랑 같 이 오고. 밤에 제사 때 말고. 밤에는 딸 없고, 그 나이 많으면 내 동생이 왔어. 그 저 머야 당뇨 때문에 부작용 때문 에 잘 앉지도 못하고 의자 놓고 앉고 그러지 않았어? 동생이지 당뇨 때문 에. О현이,143) 나물은 고사리와 도라지, 숙주나물 을 준비하여 삼색을 맞추었다. 어적으 로는 조기를, 육적으로는 돼지고기를 준비했다. 제사상차림 중 특이한 것은 부침개와 ‘갈납’이었다. 민О현의 큰며느리인 민О승의 부인이 시어머니로부 터 배웠다는 갈납은 녹두가루로 동그랗게 모양을 내어 중앙에 소고기를 얹는 것이다. 부침개는 김치 한 장, 다시마 한 장, 파 한 장을 올려 부침개 한 장을 부치는데, 이것은 상에 반드시 석장 혹은 다섯 장으로 홀수를 맞추어 올린 다. 제사가 아닌 차례 때에는 민О현의 조부모, 부모, 민О현의 부인까지 총 다섯 개의 상을 차린다고 했다. 민О현 집안의 시제상차림 민О현 집안의 시제모습

12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민О현 부친의 제사상 민О현 부친의 제사모습 민О현 부친의 제사모습 민О현 부친 제사 후 음복 음복상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27 가옥 내 마당 창고에서 인터뷰 중인 홍О태 144)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4) 홍О태 생애사 청도의 아들에서 대한민국의 아들로 2012년 현재, 통일촌의 노인회장직을 맡고 있는 홍О태는 1930년 경상북 도 청도군에서 태어났다. 전쟁 전까지 홍О태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논농사 를 지었다. 부모님은 평범한 농부였고, 홍О태는 그 일 을 도우며 살았다. 제과점에서 보조 일도 했다. 경상북도 청도. 6,25전에 거기서 농사짓고 그랬어. 부 모님 다 고향에 계셔. 군대 생활할 때, 부모님이 다 돌 아가셨어. 나는 고등학교 못나오고, 저기 조그마한 직 장에 다녔어. 뭐, 그때는 시시비리한 직장이야. 제과 점에 읍내에서 시다발.144) 홍О태가 21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경북 청도에 살던 홍О태의 집안은 딱히 피란을 갈 만큼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절정에 이르던 1952년 초, 홍О태는 방위군으로 강제 징용되었다. 국군이 북으로 한창 올라가고 있던 형국이었다. 대구에서 방위군으로 전쟁에 동원되기 위한 간단한 기초 훈련을 대략 일주일 간 받았다. 고작해야 총을 쓰는 법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홍О태가 속한 군대 는 서울까지 올라갔다.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급하게 결성한 탓에 대우는 열 악했다. 임시로 결성된 부대에 과도하게 많은 군인이 소속되다 보니, 식사를 잘 챙겨먹을 수도 없었고 군번도 없었다. 오로지 전쟁을 위한 군인이었다. 피란 안가고, 바로 뭐 복잡해. 바로 그 방위 뭐 바로 소집돼가지고 방위 군으로 한 1년 근무했어. 그래가지고 재차 인자 훈련소 가고, 훈련받고 다시 입대한그야. 52년도지. 인제 그거는 조금 아군이 밀고 올라갈 때야. 압록강까지 밀 때. 방위군 훈련이야 전투훈련 참가 할라고 서울로 올라 온 거야 총 쏘는거나 한 일주일 배우고 올라 오는거야. 대구에서 배우고,

12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45)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46)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그냥 올라온 거야. 그래서 서울 와서 해산됐지. 해산돼가지고는 그 사령 관 커가지고, 사령관이 너무 커서 밥을 안 매겼어. 봉급도 없고, 군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방위군은. 강제지. 누구든지 전쟁나면 다 가는 거잖 아. 학도병도 가는데 다 강제로 가는 거지. 장제로 막 젊은 놈들 죽 싣고 가는거야. 그래서 방위군에 가는 거야.145) 홍О태가 속한 방위군은 1여년 후 서울에서 해산되었다. 홍О태는 고향인 청도로 다시 내려갔지만 22살이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입대통지서가 날아왔 다. 전쟁 전에도 부모님의 농사를 돕거나 제과점에서 보조 일을 했던 홍О태 는 전쟁이 끝나도 적절한 생업수단이 미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직업 군인으로 종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끝나고 그럼 다시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서 정식으로 통지서 받고, 정식으로 입대했지. 그것이 인자 53년도 될끼야. 53년도. (정식으로) 군 인생활은 1953년. 그때가 60년 전이면.. 23살인가.. 스물 둘. 6.25 나고 들어갔으니까. 6.25직후. 직업군인 인자 6.25하고 나서 군대에 들어가서 뭐 그 당시야 사회에 나와 봐야 할 일도 없고, 내가 고등학교도 못나오고 그래서 대학을 나왔으면 모르지만 못 나와서 직업 구하기도 그렇고, 시 골에 농토 있어도 부모님들이 사람 두고 일하고, 그래서. 에이, 군대에서 는 그냥 편안하게 산다고.146) 1952년 7월, 홍О태는 하사관 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가장 처음으 로 배치된 부대가 강원도 양양의 12사단이었다. 아직 전쟁은 휴전이 되기 전이 었고 홍О태가 군대에 입대한 후에도 6개월간 더 전쟁이 지속되었다. 전쟁 중이 라 부대는 계속 이동했다. 홍О태가 가장 북단까지 올라가본 것이 경기도 연천 군 전곡리였다. 휴전이 될 때까지 홍О태의 부대는 전곡에서 전투를 지속했다. 정식으로 입대하지. 군대 와가지고. 전쟁 안 끝났지. 7월 달에 54년도. 7 월 27일날 휴전됐잖아. 고전까지 한 몇 달간 했지. 그러니까 53년이 휴전 이 54년도에 됐잖아. 잠깐만. 54년도에 됐을꺼야, 아마. 54년도 됐나, 53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29 홍О태의 군 시절 147)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년도 됐나? 아, 그니까 52년도에 입대했구나. 52년도 1월달에 입대하가지고 훈련받고 와가지고 하사관 해 서 와가지고, 그때부터 7월달부터. 훈련 끝나니까. 7 월달이야, 7월 초야. 그러니까 육개월간 훈련받았으니 까. 하사관할 때까지. 와가지고 7월달부터 근 1년 동 안 전투했지. 저기 훈련 받으면 저기 강원도, 강원도 로 배치돼가지고 있다가 그때 인자 신설사단이야 12 사단이, 12사단이 인자 연천. 연천 전곡리. 전곡. 고기 까지. 전투할 때는 고까지 갔었더랬어. 전투는 주로 강원도에서 양양 뚝방에 거기서 전쟁하고. 그래서 계 속 휴전 될 때까지 양양에 있었어.147) 홍О태가 정식으로 국군 군복을 입고 전쟁에 참여한 지 1여 년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되었다. 이후 여태까지 있던 전방 부대와 강원도 화천군의 후방 부대 등 전국 각지로 이동이 되었다.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잦은 이동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고 인자 휴전되고 나서 전곡. 그 다음에 하도 많이 부대를 이동해서 잘 모르겠다. 이도 가고, 자도 가고 하니까. 그래가지고 인자 여기 물론 12사단 있다가 화천와가지고 후방으로 명령이 났어. 후방으로 가서 7,8년 있다가 1965년도에 1사단으로 왔지. 홍О태가 강원도 화천의 부대에서 머무를 때, 고향 마을 사람의 중매로 지 금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1960년 당시 홍О태는 29살이었고, 부인은 22 살이었다. 중매결혼이다 보니 홍О태는 선도 안보고 혼례 직전에나 연지곤지 찍은 부인을 처음 보았다. 화천에서 결혼하였지만 처음부터 함께 살지는 못 했다. 워낙 전방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만나기는 화천 있을 때 내려가서 결혼하고, 화천와가지고 한 6개월 마누 라가 6개월 같이 근무하고 파주로 왔어. 내가 근무를 6개월 근무를 내가

13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48)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49)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50)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마누라 데리고 와서 한 6개월 근무를 하고 내려갔어, 대구로. 뭐, 그랬 어. 그래서 내랑 결혼을 했는가 몰라도 후회가 많지. 이거 하도 자꾸 이 사를 다니니까. 중매는 거 마을 사람이 섰겠지. 마을에 누가 중매를 했겠 지. 그래서 선도 안보고 봐서 그냥 결혼했어. 그 때가 내가 스물아홉. 29 살. 상사 되고나서 하니까 (좀 늦은 편이었지.) 전방에 가서 결혼을 해가 지고, 집에 가도 한 3,4개월 있었나? 3개월 있었을꺼야.148) 홍О태의 부인이 첫 아이를 임신한 것은 홍О태가 양구에서 근무할 적이 었다. 워낙 이동이 잦은 직업의 특성상 결혼 초기에는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첫 아이를 출산할 때는 홍О태가 대구의 부대에서 근 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고되더라도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처럼 이동이 잦은 군인을 위한 정부의 혜택이 없었기 때문에 근무처를 이동하면 적절한 민가를 찾아 세를 사는 방법밖에 없었다. ‘솥단지 하나 놓고’ 살림을 차리는 것이었다. 양구에서 임신을 해가지고, 대구 가서 낳았어. 양구에서 석 달 근무할 때 떨어져서 살았어, 3개월. 달이 왔지. 석 달이 지나서 있다가 또. 몰라, 하 여간 그때는 군인이지 이사 때문에 요새는 군인 아파트도 주고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어. 한데로 그냥 사람 살 수 있으면 세 얹어가 들어 가서 솥단지 하나 놓고 밥해먹고 그랬어.149) 통일촌 20호에 정착하다 1970년, 홍О태는 1사단으로 전출되어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의 용주골로 부대가 이동하여 따라왔다. 홍О태는 그곳에서 1973년 7월 31일에 제대할 때까지 의무중대 선임하사로 근무했다. 요기, 여,요기. 용주골이라고. 광탄. 사단이 광탄에 있었잖아. 그래, 거기 야. 나는 저기 사단 의무중대. 군의관 모시고 있는 의무중대. 선임하사. 용 주골.. 용주골 들어온 지가 1970년도, 1970년도에 용주골에 들어왔지.150)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31 홍О태는 1973년 4월에 통일촌에 입주하였다. 통일촌에 거주하도록 허가 된 20명의 군인 세대주 중 한 명이었다. 홍О태에 따르면, 통일촌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스라엘 키부츠촌’을 본따 조성한 마을이다. 원래 휴전선을 경계 로 8km의 비무장지대를 가지고 있다가 4km로 줄이면서 공휴지가 생겼고, 민간인 통제선 내에 마을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낮에는 생계를 위한 농사일 을 하지만 전시에는 언제든 동원할 수 있도록 군인 출신의 세대주를 선출했 다. 원주민 출신의 민간인 세대주도 40명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도 모두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1973년에 본격적으로 주민들이 입주하기 전에는 1 사단의 군인으로 구성된 전진농장에서 황무지였던 토지를 개간했다. 제대를 눈앞에 두고 있던 1사단 소속 홍О태는 이 소식을 듣고 자원하여 입주신청을 했다. 통일촌 입주 당시 개인별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마을주민이 합동 으로 ‘내무국방합의각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1973년도에 내가 1사단에 근무했어. 1사단에 근무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 령이 그니까 이스라엘 키부츠촌을 보고, 여기 비무장지대에다가 옛날에 는 그니까 삼팔선이 경계해서 양쪽으로 4키로씩 고거를 뒀다 이거야. 그 니까 우리 한반도에 8키로로 폴을 함 재봐라 그게 얼마가? 그래서 그걸 당기자. 그래서 쫌 좁혔지. 말하자면, 경계선을 삼팔선에 복판에 경계선 을 놔두고, 휴전선을 놔두고 좁혀가지고 요기 생겼다 이거야. 공휴지가 생겼을 거 아니야. 그때 인자 박정희 대통령이 인자 그 이스라엘 키부츠 촌 그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남녀 할 것 없이 여자들까지 이스라엘이 아 랍 민족분쟁때 그렇게 했대요. 그거를 모델로 해서 키부츠촌을 만든다. 고 전에 1사단에서 한 20명 정도의 인원을 착출해 가지고 영농에 소질있 는 사람을 착출해 가지고 배추, 무 같은거 심어가지고 인제 휴전 됐으니 까. 자급자족. 사단 인저 자급자족하기 위해서 요서 전진농장이라고 한 72년도에 생겼어. 전진농장이, 72년도에 생겨가지고, 고한 20일 있었어. 정부에서 국방내무합의 좋다. 민간인은 피란가기 전에 연고자, 연고자잉, 여기 살던 사람. 그러면 그 사람들만 하믄 안되니까 군인계통의 희망자 들하고 해서 일단 80세대를 넣자. 해서 80세대를 넣게 됐는데 40명, 40 명. 이래서 희망자 그래서 군대생활하는데 상사서 군대생활하면서 옛날

13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51)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52)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에 해봐야 그렇고 그래서 땅을 많이 배당해준다니까 농사지면 한 2,3년 농사지면 부자될 거 같아서 들어왔다. 들어온 동기는 그거야. 내가 뭐 특 별한 그게 없으니까 .나는 그냥 가서 희망하겠다 하니까 무조건 오케이 했으니까.151) 당시 통일촌에 입주한 군인 세대주 중 현직 군인은 드물었다. 군인 중에는 1972년 전진농장 출신도 있었다. 전진농장은 본격적으로 주민들이 입주하기 전에 황무지였던 통일촌을 개간하고 땅을 골라 운영된 것으로 마을에 처음 으로 터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전진농장에 소속되었다가 부대로 복귀한 사 람도 있었고 통일촌에 정착한 사람도 있었다. 군인 출신의 세대주 40명 중에 는 제대하고 들어온 군인이 대부분이었고 홍О태처럼 들어와서 곧 제대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하사관부터 장교까지 계급도 다양했다. 홍О태가 입주한 1973년 그 해 7월, 홍О태도 상사 제대하였다. 그거(전진농장)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그거 한 사람 포함해서 전진농장 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원대복귀할 사람 원대복귀하고, 여기 입주할 사람 여기 입주하고 그래서 뽑은 것이 40명이 인자 중사, 상사, 중위, 대위, 소 령, 중령, 대령까지. 초창기는 이장이 부사단장이었고, 대령이었고. 부사 단장이 여기를 왔고. 부사단장이 이쪽에서 왔어. 그 사람이 이 마을에 부 사단장이 통일촌 촌장으로 온거야. 모두다 제대를 해갖고 들어오니까 계 급도 없어지잖아, 자연적으로. 그렇게 돼서 이 마을이 인자 이루어진거 야. 여기 73년도 7월 31일. 73년도 4월 달에 들어오고, 입주해가지고. 재 대는 73년도 7월 달에 제대했어. 31일. 여기 와서 석 달 계급장 달고 근 무했지. 대부분 제대하지. 내같은 케이스는 윗사람한테 여기 와서 민간 인 복을 입고 일을 했지만은 계급이 군인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몇 사람 안 돼. 1사단에서 들어온 몇 사람이야.152) 전진농장이다, 무슨 농장이다 해가지는 최초로 우리나라 그 농기 인자 뭐라할꼬 여기 모델로 이래서 했을거야. 딱 900평 하나는 1200평 이렇 게 해서 1000평이야. 1헥타르 나오잖아, 그런 식으로 인자 여기는 전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33 153)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54)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55)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156)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한 범위가 900평 아니면 1200평. 응, 하나가 900평 아니면 1200 했어 그렇게 딱딱 잘라가지고 논을 줬어. 논농사도 짓고, 밭도 짓고. 처음에 논이 4500평. 밭이 2000평? 2500평? 한 그 정도 됐어.153) 주민들이 입주한 1973년 4월에는, 아직 거주할 가옥이 다 지어지지 않은 때였다. 정부에서 모든 가옥을 일괄적으로 건설회사에 의뢰하여 건축하였는 데 가을이 되어서야 완공되어 주민들이 입주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4개 월이 넘도록 근처 미군 사단 앞마당에 천막을 쳐두고 80세대가 모두 함께 단 체생활을 했다. 이 가옥은 1986년 재건축하였다. 마을 전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괄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홍О태의 재건축에 총 1,200만원이 들었 는데, 정부에서 800만원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우리 하사관들이 7월 31일 날 제대명령 받고 인제 그 당시에는 우리가 저기 그게(집이) 없었었어. 없는데 가을인가? 돼서 집을 지어가 분배를 했지. 그 전에는 앞에 산 밑에 저기에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거기다 천막 을 치고, 인자 우리 여기 들어와서부터 집짓기 시작했으니까 증여하고. 그러고 인자 천막에서 단체생활을 한 4개월 했어.154) 그때(가옥 개축할 때)도 정부에서 한 세대당 800만원인가? 800만원 써 있 었을 거야. 우리가 1200 썼어. 이거 할 때. 나머지는 우리가 돈 내고, 정부에 서 800내주고.155) 입주 당시 홍О태는 3남1녀를 두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큰아들과 3학년이던 둘째아들, 1학년이던 막내아들은 모두 통일촌 내의 군 내초등학교에 다녔다. 막내딸도 군내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에 다니다가 역시 군내초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중고등학교는 문산으로 다녔다. 내가 아들 셋에 딸 하나인데, 어,,, 큰 놈이 큰 놈이 중학교 아니지 초등 학교 6학년이고, 그 다음에 둘째가 초등학교 삼학년 셋째가 초등학교 1 학년. 맨 마지막에 딸은 유치원생... 전부 군내초등학교 다녔지.156)

13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57)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입주 직후 3-4년간은 방위훈련 과 사격훈련을 지속적으로 했다. 군인 출신의 세대주 40명과 원주 민이었던 민간인 세대주 80명이 모두 세대별로 조를 이루어 훈련 을 받았다. 각 세대에는 ‘호’가 붙 어 통일촌 전체에 80호까지의 가 옥이 있었다. 입주하기 전에 제비 뽑기를 통해 가옥의 위치를 선정 한 것이다. 1호부터 10호까지 1조, 11호부터 20호까지가 2조였고 총 8개조로 구성되었다. 1조와 2조는 합쳐서 1반이었고 총 4반까지 구 성되어 있었다. 각 조에는 조장이 있었고 반에는 반장이 있었다. 20호였던 홍О태는 1반 2조였던 셈이다. 2조 의 조장은 소령출신의 이웃 ‘윤석산’이었고, 1반 반장은 중령출신의 ‘김동길’ 이었다. 법칙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장교출신이 주로 조장과 반장을 맡아 훈련을 주도하여 마을순찰 및 안보훈련을 받았다. 여자들은 안하고, 남자들만 하지. 여자들도 일부는 했어. 왜냐하면 저 인 자 뭐 방공호 연습할 때 하고 그런 거 하는 거. 우리는 인자 정기적으로 일 년에 방위훈련 사격훈련 다 받았어. 영 오래 돼서 기억이.. 1,2년 했는 가 3,4년 했는가.. 지금도 현재도 1반, 2반. 이렇게 나와. 1반은 1호부터 10까지 있지, 집이? 거기 1조야. 그 다음에 2반은 11호부터 20호. 이게 2 조거든? 고래 묶어서 1반이야. 1,2조 합쳐서 1반. 총 4반. 제비를, 민간인 이고 뭐고 다 제비 뽑아가지고, 집 제비 이렇게 제비 놓고 제비 뽑았잖 아? 전부 인자 옛날 이런 거를 정해놓은 다음에 정해 놓은거야. 분대별 로. 그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 그 사람이 우리 여기 2조에 조장이야. 그 사람이 소령 출신이야. 윤석산이. 바로 요 뒷집이야. 2반 반장이 여기 김 동길이. 그 사람이 중위인데 1반 반장이다.157) 입주 초창기 집 앞에서 딸과 함께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35 158)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통일촌에서는 1배미가 900평에서 1200평정도 된다. 입주 당시 홍О태는 논 4,500평과 밭 1,500평을 받았다. 그러나 1988년 전두환 정부의 특별조 치법으로 토지의 원소유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통일촌 주민들이 황무지였던 땅을 개간하여 경작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던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 했다. 홍О태가 경작하던 논의 원주인은 홍О태에게 땅을 팔았지만 원주인 이 땅을 팔지 않으려는 경우에는 꼼짝없이 도지세를 내며 소작을 지어야 했 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 홍О태는 논 3,000평을 소유하고 있으며 밭 500평 을 임대하여 경작하고 있다. 이 밭에는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콩과 고추 를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인자 88년도에 특별 전두환 대통령이 인자 수복되니까 원래 여기 살던 사람들이 다 땅을 볼 수가 있잖아. 있으니까 민원이 자꾸 올라오고 하니 까. 환원하라, 이리돼가지고 특별 조치법이라 해가지고, 인제 법이 특별 조치법이 발효돼가지고 민간인들이 모든 주민들이 싹 다해가지고 하게 된 거야. 그래서 인제 안파는 사람은 못하고, 내같이 파는 사람한테 빌린 사람은 사고. 못 파는 사람은 안 팔겠다는 사람한테는 못 사고. 집터도 그래. 내가 살고 있지만은 땅은 안파니까 못 사고 있는 거야, 딴 사람들 은 다 산 사람 있는데 한 몇 집 땅은 안 파니까 못 사고 있는겨. 어, 원주 인이 안 파는 거야, 땅을. 그럼 세를 내야지. 그런 거지. 그리 돼 있어. 나 도 한 1500평 논하고, 밭 전부 다 뺏기고. 그래서 논만 3000평. 밭은 지 금 도지주고 한 거 있을 거야. 500평158) 고추밭을 만들고 있는 홍О태 가옥 마당에서 수확한 콩 낟알을 털어내고 있는 홍О태

13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현재 홍О태는 힘에 부쳐 논농사는 짓지 않고 있다. 논은 모두 소작을 줘 서 소득량의 2%를 소작료로 받고 있다. 다만 콩과 고추로 밭농사는 조금씩 짓고 있다. 통일촌에서 거주하며 학창시절을 보낸 3남 1녀의 자녀들은 현재 모두 울산 및 일산 등으로 분가한 상태이다. 홍О태는 현재 부인과 단 둘이 통일촌에서 거주하고 있다. 홍О태는 ‘통일촌’의 주민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 지고 있다. 이웃마을인 대성동처럼 민통선 내의 다른 마을은 면세지역이지 만, 통일촌은 국민으로서의 의무인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에 엄연히 다르다 고 했다. ‘일하면서 싸우는’ 마을인 것이다. 2. 통일촌 사람들의 신앙과 민간의료 (1) 종교 생활 가. 김О식 부인의 종교생활 김О식의 부인은 강원도 양양이 고향이다. 남편의 고향은 전라도이다. 남 편이 1960년대에 결혼하여 양구에서 신혼살림을 하다가, 1973년 막내아들을 낳던 해에 통일촌에 입주하였다. 막내 위로 아들 둘이 더 있다. 현재는 모두 혼인하여 출가하였다. 남편은 군인으로 상사제대하였다. 친정어머니는 종교 생활을 하지 않으셨으며, 본인도 시집오기 전에도 종교가 없었다. 현재는 내 포리에 있는 보덕사에 다니고 있다. 아들의 병치료를 위해 다니기 시작한 절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는 살기 힘들어서 종교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러 다 20여년 전 어느 날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이 갑자기 교련수업 도중에 선생님에게 맞아 다리를 다치게 된다. 문산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나가 병 원치료를 받았으나 병에는 차도가 없었다. 그때 절에 다녀보라는 권유를 처 음으로 받았다.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37 159) 김О식의 부인(여, 70 대 중반) 2012년 11월 3 일 면담 160) 김О식의 부인(여, 70 대 중반) 2012년 11월 3 일 면담 여기 와서 살면서 큰아들이 아팠어. 고등학교 댕길 때. 그 때만 해도 교련이. 교련시간이 있어서. 교련선생이 애를 그때만 해도... 애를 워커발로 찼데. 잘못한다고. 그기 어 떻게 화근이 돼갖고. 난중에 다리가 치뻗쳐갔고 병이 난 거야 애가. 그래갔고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 애가 아파갖 고 병원에 있다고. 그래 그때 애가 아파 병원에 가도 안 났고 어디 매달릴 데도 없고 그러니까 누가 절에 가보라 고... 그때부터 댕긴거야.159) 권유를 한 사람은 동네 아주머니였다. 아픈 아들과 병 원을 가기 위해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데, 스님 한분과 동네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함 께 있는 스님을 소개하며, 이 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유 했다. 함께 있던 아들이 그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화를 냈다. 아픈데 병원을 가야지 왜 스님은 찾아가냐며 짜증 섞인 말을 했다. 스님과 아주머니 보기에 죄송스러워 어린 것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니 이해해 달라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바로 아들을 데리고 병 원으로 갔다. 아들은 수원의 큰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보았으 나 정확한 원인도 알 수 없었고, 때문에 치료도 진전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 만 쌓여갈 때 며칠 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아주머니와 스님의 이야기가 머 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는 바로 그 스님이 계시는 경기도 광주의 절로 찾아 갔다. 그때는 병원에 있어도 안 나으니까 애가 병신되는 줄 알고 그래서 절에 갔지.160) 광주의 절에서 만난 스님은 아들의 병을 낫기 위해 기도를 올릴 것을 권했 다. 스님의 말을 따라 며칠이고 절에서 머물며 기도를 이어갔다. 아들은 병 원에 입원해 있는 채, 엄마는 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밤낮으로 기도를 올린 가을 김장을 하는 김О식의 부인

13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것이다. 그러다 기적과 같이 아들이 병이 낫게 되었다. 그때 스 님의 도움과 부처님께 올린 기도의 덕이라고 믿고 있다. 얼마 후 광주에 계시던 스님은 내포리의 보덕사로 절 을 옮기게 되셨다. 스님과의 인연을 따라 그때부터 보 덕사로 절을 옮기게 되었다. 현재 아들의 병을 낫게 해 주신 주지스님은 돌아가시고 새로운 주지스님이 보덕 사를 이끌어 가고 계신다. 불교식 주요 행사 김О식의 부인은 매달 보름과 초하루, 정월 초사흗날, 부처님 오신 날, 칠 석 등의 날에 절에 찾아가 불공을 드린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음식은 매번 같다. 다만 동지에만 팥죽을 쑤어서 올린다. 동지 가운데서도 아동지에는 팥 죽을 안 먹고 노동지에만 팥죽을 쑤어 올린다. 동지에는 절에서 다음 연도의 달력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정월 초사흗날 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적은 입춘첩을 나누어 준다. 입춘첩은 입춘 날 하루 중에 스님이 미리 일러준 시간에 붙여야 한다. 금년에도 입춘첩을 받아 와 붙여 놓았는데, 바깥 대문에 붙여 비바람에 떨어져 나가고 없다. 나. 통일촌 교회와 김О조 장로의 종교생활 동자승에서 통일촌 교회의 장로로 김О조 장로는 올해 68세이다. 경북 월성군 현곡면 소현2리 108번지에서 8남매 중에 4째 아들이다. 경주상고 시절에는 ‘주먹 좀 쓴다’며 이름을 알렸 다. 월남 파병 생활을 하다가 1사단에 발령이 났다. 마포구청의 공무원으로 27년 정도 공직생활을 했다. 벼, 콩, 고추 등을 재배한다. 부인은 장공장을 운영 중에 있다. 김О조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불교신자였다.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고 신점을 보며 남의 미래를 보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하여, 어머니가 김О조를 절에 팔게 되었다. 덕분에 어려서는 독경을 꽤 잘하는 동 통일촌 마을의 버스정거장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39 자승 노릇도 하였다. 그 후 어느 정도 자라서는 천도교에 심취하기도 하였 다. 그러면서 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는 별다른 종교생활을 하지 않은 채 통일촌에 입주하였다. 통일촌에 입주한 후 마을에서 종종 시끄럽게 사고를 치고 다니던 김О조 에게 1사단 조О환 군목과 처제가 찾아와 교회에 다닐 것을 권했다. 부인과 처제는 고향 논산에서 처녀시절부터 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처제는 통일촌 주일학교의 교사를 하고 있었다, 처제의 권유에 못 이겨 교회를 다니게 된 이후로 30여 년째 통일촌 교회를 다니고 있다. 통일촌 교회의 역사 강남 충령교회 김창인 목사님이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로 무장하자’라고 하며 통일촌 마을의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이 지금 통일촌 교회의 모체이다. 통일촌에 처음 입주하였을 때 교회는 없었다. 마을에 기독교인들이 몇 명 있어 박О일 장로의 집에 모여 예 배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가정예배를 볼 때 열두명 정 도의 신도가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는 교인 숫자가 늘어나면서 군내면 출장소에서 공간을 빌려 예 배를 보았다. 그러다가 1973년에 9월 18일에 현재 교회 의 건물을 짓게 되었다.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많을 때는 40~50명씩이 나올 정도로 번성하였다. 당시 초등학교의 학생이 90명 정도 였다. 학교가 지성적인 교육의 장소라면, 교회는 영적인 통일촌 교회에서 김О조 장로 통일촌 교회의 일요 오후 예배

14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61) 김О조(남, 68) 2012년 11월 25일 면담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교회는 마을의 문화적인 모체였다. 그 러나 근래에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다. 대부분 노인들이 중심 이며 주일 예배에도 10명이 넘기 힘들 정도로 적은 수의 신도들이 모인다. 요즘은 예배당이라고 안하고 경로당이라고 하잖아요. 신앙적으로야 연 로하신 분들의 신앙이야 대단하지만 외적인 면에 여러 가지로 많이 쇠퇴 하고...161) 통일촌 교회는 이제 설립 40년이 다되어 간다.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는 김О환 목사님이 1년간 계시다가, 1사단 군종 참모 로 있었던 최병도 목사님이 통일촌 교회의 목사로 33년을 지켜오셨다. 초창기에는 강 남 충령교회와 서울 많은 교회들로부터 원 조를 많이 받았다. 이제는 예산이 어느 정 도 자리 잡혀서 자체적인 운영이 가능한 상 태이다. 통일촌 교회에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 로 하는 선교와 봉사 활동은 다양하다. 우선 지역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관광 을 보내주기도 하며, 서울의 온누리 교회와 연계하여 의료 봉사나, 농사일 돕기 등을 하기도 하다. 지역 주민들이 교회를 찾는 계기 중에 가장 대표적 인 것은 ‘자녀를 따라’ 오는 것이다. 교회 주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나오는 부모들이 종종 있다. 더불어 마을 주민들 가운데 배우 자의 초상이 났을 때 기독교 신자가 아님에도 교회식 장례를 부탁하는 경우 가 있다. 이들의 장례를 도와주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다시 찾는 것을 많이 보고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에 더욱 관심을 갖고 노력 중 에 있다. 추수감사절 예배때 나누어 주는 시루떡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41 통일촌 교회 [북한 선교비 건립 취지문] 1973년 김창인 목사를 비롯하여 북한 선교의 뜻을 함께한 신도들이 북녘을 바라보며 6.25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통일촌 교회를 북한 선교의 전초 기지로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그해 11월 20일 창립 예배를 드렸다. 그 후 24년 동안 ‘북녘땅에 잃은 형제 복음으로 다시 찾자’는 표어를 외치며 북한선교의 선구역을 담당하던 우리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11장 44 절)고 재촉 하셨다. 이 선교비는 세 덩어리의 돌들이 하늘을 향하여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특히 왼쪽의 돌이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북녘을 향한 선교의 열의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돌들이 증거가 되어 꿈에도 소원하는 통일과 북한 선교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서 역사하시기를 확신하며 이 비를 역사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존전에 드립니다. 1997년 6월 한선교위원회 위원장 길자연 목사 최병도 목사 제작 김상곤 조형연구소 글씨 신두영 표 9. 통일촌 교회에 남아있는 ‘북한 선교비 건립 취지문’

14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다. 이О욱과 부인의 종교생활 이О욱과 이О욱 부인은 1973년 통일촌에 들어왔다. 콩과 약초 등의 벼농 사를 주로 한다. 본래는 종교가 없었으나 6년 전 아들 하나를 잃은 후로 절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6년 전 아들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이후부터 종교를 갖게 되 었다. 죽은 아들의 넋을 절에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도드리고 있다. 이О욱은 수 십여년 전부터 통일촌의 유명한 소리꾼이고 이야기꾼이었다. 특히나 상 여소리, ‘달구 닫는 소리’ 등에 재능이 뛰어나서 이О욱이 없으면 상을 못 치 른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충격은 컸다. 30여년간 상여소리를 하며 수 없이 많은 영 가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 하였는데도, 젊은 아들을 데려간 신이 미웠다. 그 리고는 다시는 소리나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하여 입을 닫게 되었다. 지금은 아들의 넋이 있는 보광사에 다니며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돌아가신 사람들이고 다 내가 도와 줬는데, 근 30년을 다 도와줬는 데... 내 자식 하나 못 지켜 준다면 잘못된 거 아니여. 귀신이 있다면 자 기들도 내 자식 하나는 지켜 줘야 할 거 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렇게 하면서 내가 보광사에 있는 주지 스님하고 대화를 했어요, 같이 통일촌 교회의 머릿돌 그림 통일촌 교회의 북한 선교비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43 162)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얘기를 했는데... 그게 맞는 얘기냐 안 맞는 얘기냐 하는데... 자기도 스님 은 스님이지만 답변은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하는거야. 그게 사람이 힘 으로 하는 거는 아니니까......162) 아들은 화장을 했다. 산에 묻으려고 했는데 큰아들이 ‘엄마 매일 거기 가서 운다’고 묻지 말라고 하여 화장을 했다. 멋 모르고 화장을 했는데 이제는 아 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허무한 마음이 든다. 이О욱의 며느리는 결혼 전에 교회에 다녔다. 결혼 전에 며느리는 아들에 게 본인은 결혼을 하여도 교회에 계속 다니겠다라고 이야기 했었다. 그때 아 들은 ‘나한테 가자는 소리만 말아라. 너는 애들 데리고 다니든 말든 상관은 안하겠다.’ 라고 했다. 그러나 시집을 온 이후로는 차츰 교회에 안 나가고 있 다. 그리고 근래에는 시댁 어른들을 따라 종종 절에도 함께 나가고 있다. 이 О욱과 부인은 이러한 며느리가 착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서른 살이고 어린 나이인데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며느리가 고맙다. 라. 이О원 할아버지의 신앙 체험담 군내초등학교의 학생인 이О원(여, 12세)은 현재 통일촌 교회에 다니고 있 다. 아버지는 파주 출생이고 통일촌에서 부모님과 유년시절을 보냈다. 현재 친가가 통일촌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경북 상주 출생이다. 외할아버지는 목 사님이시고 이О원도 교회에 다니고 있다. 이О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살다 가 몇 해 전에 할머니 가까이 이곳 마을로 들어왔다. 이О원은 외할아버지를 통해서 할아버지의 종교적 체험담을 종종 듣는다. 이О원이 할아버지를 통 해 들은 체험담들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믿고 구원받으세요, 안 그러면 죽습니다’ 할아버지가 해주신 얘기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지금 경북에 살고 계신데 할아버지 옆집에 무당이 살고 있었대요. 할아버지가 전도하려고 ‘예수믿 고 구원받으세요’ 그랬는데 그 할머니가 자꾸 도망가시는 거예요. 그래

14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63) 이О원(여, 12) 2012년 11월 4일 면담 164) 이О원(여, 12) 2012년 11월 4일 면담 가지고 어 왜 그러시지 하고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 아들이 나왔 어요. 그래서 아저씨는 왜 저희 어머니한테 죽는다는 소리를 했냐고 그 랬냐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고 나는 예수믿고 구원받으라 그랬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랬는데. 할머니가 다시 나와서는 할아버지한테 아저씨가 ‘예 수믿고 구원받으세요, 안 그러면 죽습니다’ 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할 아버지가요 하나님이 할아버지한테 말씀해주신 게 딱 두 번이래요. 근데 그때 예수님이 ‘그래 내가 그랬다’ 그러셨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성령의 역사라고 하셨어요.163) ‘네 아들 안 죽었다.’ 저희 막내 외삼촌이 차에 치여서 사고가 난거예요. 그래가지고 할아버지 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화받고 어떤 아줌마한테 아저씨 아들이 차에 치 여서 죽었다고 들었대요. 그래서 일하다 말고 할아버지가 기도를 하셨대 요. ‘저희 아들이 정말 죽었나요?’ 하고 기도 딱 한마디만 했는데 ‘네 아 들 안 죽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렸대요. 그래가지고 할아버지가 안심을 하고 공장 아저씨한테 나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간다고 하고는 가본 거예요. 그랬더니 삼촌이 차에 치여 몸이 붕 떴는데도 다리만 다치고 다 른 데는 안 다쳤대요.164) (2) 마을공동체신앙 - 장승제 2012년 11월 29일 통일촌 마을 입구에서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린다. 송О 만을 비롯한 부인 몇 명이 마을 입구 장승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스님의 뒤 에서 비손을 하고 있다.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건강을 비는 통일촌의 ‘장 승제’이다. 현재 장승제는 ‘송О만’을 중심으로 몇몇 부인들에 의해 전승된 다. 장승제는 70년대 중반 시작되어 계속되어 오던 것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최근 3년 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45 통일촌 노인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1997년의 장승제 사진 가. 유래 및 역사 송О만은 장승제는 마을과 마을사람의 안녕을 위해 지낸다고 말한다. 마 을이 형성된 초창기인 74~75년 무렵에 당시 부녀회장이었던 송О만이 장단 면출장사무소 소장 등의 도움을 받아 장승을 처음 세우고 고사를 지냈다. 그 때만 해도 마을 주민들은 지금 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참여를 하였다고 한 다. 당시에도 송О만을 중심으로 마을 부인들이 지내오던 장승제는 송О만 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중단 되었다가 최근 3년 전 부터 다시 지내고 있다. 송 О만은 ‘근심스러운 일’이 계속 되어 다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좋대니까 했지. 한지 오래 됐어. 들어와서 한 4~5년 하다가...내 가 다리 수술하고, 허리 수술하니까 못했지. 마을이 좋대니까 옛날 할머 니들이랑 같이 했었거든. 그런데 안하다가 근심스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 고 하니까 이장한테 얘기해서 고사를 지내야겠다고 했지. 그러니 이장도

14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65) 송О만(여, 70대) 2012년 11월 25일 면담 166) 송О만(여, 70대) 2012 년 11월 25일 면담 167) 한О남(남, 70대 후반) 2012년 11월 25일 면담 그러라고 하고. 그래서 여 아줌마들이랑 같이 하는 거야. 혼자는 떡하고 다 못하잖아.165) 또한 송О만은 통일촌이 마을 터가 세기 때문에 터를 달래기 위해 장승제 를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 옛날부터 우해야(위해야)된다잖아. 터가 셔서(쎄서). 우하는 동네래. 근데...모르겠어, 그냥... 하던 거니까 하는 거지.166) 나. 장승 장승은 현재 마을 입구의 직판장 앞에 한 쌍이 있다. 예 전에는 지금 장승이 있는 곳과 함께, 마을 위 길목에 장승 이 한 쌍 더 있었다. 학교에서 정자가 있는 방향의 도로 끝 삼거리에 큰 바위와 함께 나란히 있었다. 현재 장승은 사라 지고 큰 바위만 남아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큰 바위 가 있는 그곳을 여전히 ‘윗장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송О만 을 비롯한 장승제의 참여자들은 ‘윗장승’이 있는 곳이 마을 의 입구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현재 직판장 보다는 ‘윗장 승’이 있는 곳이 더 통행이 많은 길목이었다고 한다. 장승은 송О만이 부녀회장을 보던 1970년대 중반에 송О 만이 장단출장소 소장 등의 도움을 받아 처음 세운 것이었 다. 출장소 소장이 외부에서 만들어진 장승을 사다가 세워 놓았다. 그러나 장승이 오래 되자 썩기 시작했다. 송О만의 남편인 한О남 (남, 70대 후반)이 장승에 페인트칠을 해가며 관리해 주었지만 감당할 수 없 어 결국 뽑아 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장승을 없애고 나서는 3~4년 전에 직 판장 입구 앞에만 지금의 새 장승을 세웠다. 저 마누라가 뭘 봤냐면은 저걸 봤다고. 회장. 그때... 그때 당시 장승이 아 래위에 시는데(세우는데)... 출장소 소장이 300만원을 냈다고...167) 통일촌의 아랫장승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47 처음에는 내가 그걸... 자꾸 썩으니까 뻬인뜨(페인트)칠하고 니스칠해주 고. 근데도 썩기 시작하면 못 당하는 거예요.168) 다. 제일 제사 날짜는 보덕사의 주지스님이 10월 중에 택일해 준다. 송О만은 10월 이 농사지은 곡식을 수확하는 좋은 달이라 ‘상달’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날을 잡을 때는 이장과 부녀회장, 노인회장 마을 대표 세 명의 생년월일을 넣고 좋은 날을 고른다. 금년에도 송О만이 11월 24일 토요일에 보덕사 스님 을 만나 날을 봤는데, 금년 11월 29일이 좋은 날로 나왔다. 날을 받으면 이장 을 비롯한 대표들에게 날을 알려 제의 준비를 할 수 있게끔 한다. 사람이 질서가 있잖아. 이장이 마을의 제일 어른이고. 그리고 그 다음이 부녀회장이고. 마을의 대표들이잖아.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야...(중 략)... 스님이 봐서 좋은 날을 하는 거지. 스님이 책 봐서. 글로 써서. 이렇 장승제의 축을 붙인 지하여장군(좌)과 천하대장군(우) 168) 한О남(남, 70대 후반) 2012년 11월 25일 면담

14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69) 송О만(여, 70대) 2012 년 11월 25일 면담 170) 송О만(여, 70대) 2012 년 11월 29일 면담 게 하는 거지. 어저께 봤더니 그 날짜가 나왔어. 좋자고 하는 거니까. 좋 은 게 좋은 거지169) 라. 제물 장승제에 쓰이는 떡은 팥을 넣은 시루떡이다. 문산의 방앗간에서 맞추는 것으로 제삿날 아침에 배달되어 온다. 떡 이외의 제물들도 모두 문산에서 배 달해 온다. 과일, 북어, 초, 돼지머리, 동동주 등을 준비한다. 제물은 3개, 5 개, 7개, 9개씩 ‘짝을 맞춰서’ 진설 한다. 제물을 준비하는 비용은 제사에 참여한 부인 몇 명과 마을 사람들 몇 명이 조금씩 돈을 모아 함께 마련한다. 제물 차림 앞에 제사를 함께 준비한 이들 의 이름을 적어 걸어 놓는다. 송О만 씨의 남편인 한О남 씨 이외에 11가구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마. 제의 절차 제의는 내포리에 있는 보덕사의 경담 스님의 염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 예전에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다. 당시는 비용마련을 위하여 마을 대 표들이 각 집을 다니며 돈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의 참여가 줄어들 고, 굿의 비용도 비싸고 하여 더 이상 무당굿은 하지 않는다. 늘 하던 거니까 그대로 하지, 어른들은 안계시고... 스님 모셔가지고 하 지. 우리가 할 줄 알어? 보덕사스님이 오셔서 염불 해주시지.170) 장승제의 제물을 진설하는 스님과 참가자들, 장승제에 제물로 올리는 시루떡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49 장승제의 제물 차림 11월 29일 아침부터 부녀회식당에서 송О만 씨 등이 제사 준비를 시작한 다. 오전 10시 50분 경 스님이 도착하면서 제가 시작되었다. 스님과 송О만 씨를 비롯한 부인들이 윗장승에 가서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 진설이 끝나면 초에 불을 붙이고 제를 시작한다. 본격적인 제의에 앞서 거리 한 구석에 동 동주 한 사발을 따로 떠서 올려놓는다. 본격적인 제의가 시작되어 스님이 염 불을 하는 동안 부인들은 스님의 뒤에서 비손을 한다. 제사를 마치고 동동주 를 장승 주변에 뿌려준다. 염불이 끝난 후 제는 20여 분간 계속 된다. 윗장승 에서의 제가 끝나면 바로 직판장 앞의 아랫장승으로 이동한다. 아랫장승에 서도 윗장승에서와 같은 제를 지낸다. 염불이 끝나면 스님과 부인들이 아랫 장승과 그 주변의 길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스님이 장승에 붙였던 축을 태 우고 제를 마친다. 11시 45분 일행은 직판장 옆 식당으로 이동한다. 식당에서의 고사가 시작 장승제의 제물을 차리는 스님과 참가자 장승제 제물을 차리며 거리상을 차리는 스님

15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아랫장승에서의 제의 직판장 식당과 주방에서의 고사 아랫장승에 붙였던 축을 태우는 스님 윗장승에서의 제의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51 부녀회 식당에서의 고사와 제물차림 171) 이О욱의 부인(여, 60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된다. 식당의 식탁에 다시 제물을 차리고 스님의 염불이 시작 된다. 그리고 는 주방으로 들어가 동동주를 떠 놓고 간단히 염불을 한다. 10여분 가량의 고사를 마친 후 일행은 다시 부녀회식당으로 이동한다. 직판장식당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고사를 지낸 뒤 제의를 마친다. (3) 생업의례 가. 밭고사 인삼은 통일촌에서 많이 재배 되는 작물 가운데 하 나이다. 이О욱의 가정에서도 오래전부터 인삼을 재 배한다. 인삼 재배 과정에서 인삼을 심는 양력 3~4월 과, 인삼을 수확하는 양력 9~10월에 밭에서 고사를 지 낸다. 제물은 콩버무리 떡과, 덩어리째 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막걸리이다. 밭 한 곁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술과 제물의 일부를 떼어 밭에 던진다. 그리고 준 비한 음식들을 모인 일꾼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고사를 마친다. 밭고사는 이О욱이 주도를 하고, 음식 장만 등은 이О욱의 부인이 맡아서 한다. 그전에 인삼 캘 때요, 떡도 갖다 놓고 다 차려 놓고 했어요. 인삼 심을 때도 인삼 잘되게 해달라고 갖다 놓고 하고... 그러던 사람이 이제 안하는 거야...171) 통일촌의 논과 밭

15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72)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173) 민О승의 부인(여, 60 대) 2012년 11월 25일 면담 그러나 6년 전 아들을 잃은 후로는 의례가 많이 간소화 되었다. ‘아들 잃은 후로는 마음이 없어 고사는 안 지낸다’고 하며, 콩버무리 떡 만을 해서 ‘할머 니들 잡수라고(일꾼들 먹으라고)’ 준비한다. 그래도 콩버무리 떡을 해서 먹는 날에는 막걸리를 준비해 밭에 뿌리는 것은 계속 한다. 올 가을에도 ‘할머니들 잡수라고’ 한말 정도 콩버무리 떡을 했다. 결론으로다가 일하는 사람들 ‘먹자’ 하는 거지 뭐... 마음이지 그냥...그걸 하던 사람은 그걸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172) 이웃에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종종 고사를 지냈다. 논농사를 짓는 사람 들은 대개가 7월에 고사를 지내고, 이웃들에게도 떡을 나누어 주었었다. 근 래에는 많이 사라져 보기 힘든 광경이 되었다. 나. 장공장의 장고사 민О승의 부인은 영농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장 에서 마을의 특산물인 장단콩을 이용하여 장 공장과, 장 담그기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다. 장을 담그는데 있 어, 콩을 수확하는 가을은 매우 의미 있는 시기이다. 민 О승의 부인은 콩을 수확 하는 가을에 날을 잡아, 한 해 동안 공장의 운영과, 장 만드는 일 등을 무탈하게 잘 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리며 고사를 올린다. 올해는 ‘장 단콩 축제’ 등으로 일이 바빠 11월 말까지 아직 못 지내 고 있다. 조만간 날을 잡아 고사를 지낼 계획이다. 아무래도 가을이지. 가을이 수확을 하고 그랬으니까....(중략)...고사는 그 냥, 일년내내 잘 지냈으니까... 스님 모셔다가 한 번 하는 거예요. 정성드 리는 거지 뭐. 그냥 오셔서 콩이랑 하는 거 차려 놓고 염불해 주시고 가 는 거여173) 통일촌 장공장의 장독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53 174) 민О승의 부인(여, 60 대) 2012년 11월 25일 면담 일 년에 한번 지내는 공장의 고사는, 지난 한해의 수확을 감사드리는 마음 과 동시에, 다음 한해의 무탈함을 기원한다. 민О승의 부인은 보덕사에 다니 며, 불교를 믿고 있다. 때문에 공장의 고사에는 보덕사의 스님이 오셔서 고 사 의식을 지내 주신다. 맨 처음 공장 창업을 함께 하였던 동업자도, 민О승 의 부인과 같은 불교였기 때문에, 서로 종교적인 마음이 맞아 이러한 고사를 정기적으로 지내게 되었다. 고사는 한마디로 발해서 부~~자 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비는거여. 자 기...마음에 있는거 하는 거야. 교인들은 또 안하잖아. 난 또 하니까... 먼저 우리 같이 하시던 분도 절에 다니고 하니까 고사 지내는 거야. 여기 하는 사람이 교회 다니고 그런다면 기독교식으로 기도드리고 하겠지.174) 고사의 제물로는 팥 시루떡과 동동주, 사과, 배, 감의 과일과 북어를 차린 다. 시루떡은 쌀 한말 정도를 방앗간에서 맞추어 시루째 올리고, 동동주는 직접 담가서 사용한다. 고사는 공장 시작하면서 계속 해왔다. 고사에는 민О 승의 부인을 비롯한 공장 식구들이 참석한다. 고사는 공장의 제조실에서 시 작한다. 중앙에 제물을 차려놓고 스님의 염불이 시작되면, 참여자들은 그 뒤 에서 비손을 한다. 공장에서의 의식이 끝나면 일행은 장독으로 이동한다, 동 동주 등 제물의 일부를 들고 장독으로 가서 염불을 하고 의례를 마친다. 민 О승의 부인은 고사를 하지 않으면 ‘께름칙한 마음’이 생겨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렇게 매년 고사를 올린다고 한다. 장공장과 체험장 내부

15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75) 민О승의 부인(여, 60 대) 2012년 11월 25일 면담 아니 그냥 스님이 오셔서 염불 한번 해 주셨지. 안 오셨다 가면...마음이 좀 께름칙 하고 그렇잖어. 내가 몸이라도 한번 아프고 그러면... 절에 좀 가야 하는데... 그러잖어. 교인들은 일주일 마다 가는데... 우리는 너무 안 가는 거야. 이거(공장) 지을 때도 한번 모셔서 해주시고 가셨지.175) 다. 고시레 박О옥은 벼농사를 주로 하였다. 벼농사를 지을 때 일꾼들의 밥을 해갈 때면 항상 밥 한 그릇을 먼저 떠서 논 한 쪽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고시레 고시레’ 를 외치며 세 번을 떠서 밥을 던진다. 그래야 농사가 탈 없이 잘된다고 한다. 근데 지금은 그런거 안하잖아. 그런것들 모른다고 하잖아. 고시레 밥 받 아먹는 혼백이 있대. (4) 가정신앙 가. 이О욱 가정의 사례 이О욱은 어려서 어머니가 가신들을 모시고 가을 고사를 했던 것을 기억 한다. 한편 이О욱의 부인은 6년 전 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만 하여도 가을이면 떡을 해서 직접 가을 고사를 지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상실감이 커서 더 이상 정성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현재 이О욱 과 그 부인은 함께 절에 다니며 아들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큰 신앙생활 이다. 이О욱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가정신앙 이О욱은 어려서 어머니가 터줏대감을 모셨던 것을 기억 한다. 뒤꼍에 벼 를 담은 항아리를 짚으로 덮어 놓았다고 한다. 집터가 세거나 안 좋은 집일 수록 터줏대감을 잘 모셔야 한다고 들었다. 예전 어머니가 계실 때 가을에 굿을 할 때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터줏대감을 모시는 것을 본적이 있다.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55 176)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177) 이О욱의 부인(여, 60 대 중반) 2012년 11월 3 일 면담 터줏대감이라 그러지. 그거를 잘 다독 거려 줘야해. 일년에 농사를 지 면 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 무당 불러다 그렇게 하고, 풀어주고 그랬는 데... 지금은 달나라도 왔다갔다하는 세상이라 그런걸 믿나... 지금은 옛 날얘기 하는 거야. 옛날 옛날에 하는...176) 이처럼 가을에 추수를 다 해놓고 나서 하는 굿은 ‘재수굿’이라 불렀다. 한 편 병이 들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기 위한 굿은 ‘우환굿’이라 했다. 이О욱이 어려서만 하여도 마을 안에 굿을 하는 집이 종종 있었다. 지금은 마을 안에 무당이 찾아와 굿을 하는 일은 거의 볼 수 없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문산 등으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하고 온다. 이О욱 부인이 모시는 가신 이О욱의 부인은 옛날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가신을 위하는 것을 알았 으며, 무당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을 배웠다. 마루와 안방, 장독, 부엌, 화장 실 등에 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옛날 어른들을 통해 전해 들어 예전부터 알고 있다. 각각 모시는 신의 이름이나 그 역할 등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신체 역시 따로 모시지는 않는다. 가을고사를 제외하고 별다른 의례나 비손 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집안이 편하려면 장맛이 좋아야 한다.’고 하며 그래 서 장독간 신을 잘 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독간을 또 우해야 된대. 집안이 편하려면 장맛이 좋아야 된대. 집안이 안되려면 장맛부터 안 좋다고 옛날부터 어른들이 다 그랬어. 집안이 잘 되려면 된장 맛이 좋아야 하고, 간장맛이 좋아야 한대. 안 되려면 간장 맛이 쓰대.177) 가을 고사 고사는 음력 10월 중에 지낸다. 10월은 상달이라고 하여 좋은 달이다. 집 집이 고사를 많이 지낸다. 이О욱은 ‘상달이 왕달’이라고 말한다. 날은 보통 무당에게 가서 잡아오는데, 9일, 10일, 19일, 20일 등의 손 없는 날에 하거나 돼지날에 한다. 이О욱의 부인은 보통 돼지날에 많이 하였다. 손 없는 날은

15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78) 이О욱의 부인(여, 60 대 중반) 2012년 11월 3 일 면담 179)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무방한 날’이라고도 한다. 사방에 귀신이 안 드는 날이라고 해서 귀신의 탈 이 없는 날이라고도 한다. 손 없는 날에 못하는 경우가 많아 돼지날 많이 하 게 되었다. 돼지날도 고사를 지내기에 좋은 날로 친다. 제물은 시루떡과 백설기, 막걸리, 북어 등을 준비한다. 준비한 제물은 마 루에 상을 차리고 접시에 담아 올려놓는다. 시루떡은 ‘고사떡’이라고도 부른 다. 하얀 백설기도 3덩어리 한다. 가을 고사를 지낼 때 시루떡은 집안의 모 든 곳에 놓고, 백설기는 마루와 안방, 장독에만 놓는다. 마루에서 먼저 정성을 들인 후, 시루떡과 백설기를 접시에 담아 안방 안구 석에 놓는다. 다음 ‘장독간’에 올리고 부엌과 화장실, 대문 등등 집안의 구석 구석에 떡을 놓는다. 떡을 놓고는 ‘잘 봐주시고, 집안 평안 하게 해 주십쇼’라 는 축원을 하며 집안 구석구석에 막걸리를 뿌린다. 예전에는 음식을 차려 놓 고 절을 했는데 언제부터 인가는 절 없이 상만 차려 놓았다. 떡은 얼마간 두 었다가 식구들끼리 먹는다. 무슨 대감, 무슨 대감 하는데 나는 모르겠어. 제일 먼저 마루지. 마루 안 방, 장독간으로 가지. 그리고 부엌도 가고...대문간까지 가고, 그리고나서 막걸리로다 대문까지 구석구석 뿌리는 거지. 절은 그 전에는 했는데... 안 했어. 뭐 혼이 있으면 와서 잡숫것지 하는 거야.178) 날을 잡고, 음식을 장만하고, 고사를 지내는 것은 모두 이О욱 부인 혼자 서 한다. 남편이나 자녀들은 함께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하는 거 아니야. 남자들은 가만있다가 막걸리나 마시는 거야. 옛날에 어머니들은 반 무당이라고 그랬어. 다 꿰뚫어 본다고.179) 나. 박О옥 가정의 사례 박О옥은 1927년 파주 장단면에서 태어나, 16세에 결혼하였다. 종교는 없 으며 벼농사 중심의 논농사를 주로 하였고, 콩과 참깨 등의 밭농사를 일부 지었다. 새댁 시절부터 가신을 모시고 고사를 지내는 시어머니를 통해 많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57 부분을 보고 배웠다. 시어머니와 박О옥은 경주이씨의 종부로서 종가의 큰 살림을 이어오고 있다. 박О옥은 집 안팎의 살림을 자녀들에게 물려준 이후 로는, 더 이상 가신을 모시거나 고사를 지내지 않는다. 박О옥 가정의 가신 예전에는 마루의 대들보에 성주대감님의 신체를 매달아 놓고 모셨다. 텃 대감님은 뒤꼍에 있는 장독이 있는 곳에서 모셨었다. 텃대감님은 뒤꼍에다 주저리를 놓고, 주저리 안에다 항아리를 놓고 그 속에 벼를 담아서 모셨다. 벼는 햇곡식이 나면 10월에 고사를 하고 바꾼다. 담아 있던 벼는 떡을 해서 먹는다. 본향대감님은 이 넓은 지역 다 살펴 주시는 분이다. 앞마당에서 모 신다. 가을 고사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가을이면 3년에 한 번씩 무당을 불러 큰 굿을 했다. 여자 무당 1~2명이 와서는 굿을 했다. 특히나 조상신을 크게 모셨다. 굿을 할 때는 가신들 이외에도 산신대감님, 건립대감님, 호영산 등의 신을 모셨던 기억이 난다. 옛날 할아버지들이, 조상들이 이거니까는(최고니까는) 그거를 모시는 거 야. 우리 시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3년 마다 우했다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굿은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가을마다 가 을고사는 빼놓지 않고 하였다. 고사를 할 때는 마루 대들보의 성주대감님을 먼저 위하고 그 다음 텃대감님을 위한다. 그리고는 광이나 화장실, 대문 등 의 곳곳에 떡을 갖다 놓는다. 집의 구석구석에 ‘지킴’이 있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그랬어. 골고루 떼어 놨지. 죄 떼어 놓지. 요만큼씩. 광에, 화장실 에, 대문이고 죄 놨지. 지킴이 있다고. 일 년에 농사지면 딱 한번이야. 가 을에 하면 그만이야. 아이 그럼 남자들이 뭐를 해. 여자들이 알아서 하는 거야. 성주 매다는 것은 남자들이 하는 집안도 있더라고. 높아서 그런지...

15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가을 고사를 할 때면 다음과 같은 축언을 했다. 축언이 끝나면 동서남북을 향해 재배를 한다. 성주대감님, 텃대감님, 본향대감님, 산신대감님 다 대령하고 우춘하니 받으시고 다 햇곡식 끄찍여서, 본전해서 다... 고사 드리니 다 잘 받으시고 다...식구들 자손들 다 편안하고 번창하게 도와 해주십소사. 1973년 통일촌에 들어온 이후에도 가을이면 매년 고사를 드렸다. 그러나 살림을 며느리에게 넘긴 이후로는 하지 않고 있다. 가신에 대한 믿음은 있으 나 ‘며느리 살림’이란 생각에 별다른 간섭은 하지 않는다. 가을이면은 농사이워가지고 시월 상달에 고사 했지. 새달에 새달 초순 에... 근데 지금들은 안하잖아. 내가 근력이 없으니까 안하는 거야. 하라 는 말은 안하고 뜻만 보는 거야. 고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제물은 시루떡이다. 찹 쌀하고 멥쌀을 한말 정도 섞고 붉은 팥을 켜켜이 올 린 시루떡을 한다. 예전에는 가을이면 각각의 집마 다 직접 떡을 많이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래에 는 직접 떡 하는 집을 보지 못했다. 이 밖에도 떡과 함께 돼지고기 몇 근과 막걸리 몇 말을 준비한다. 다. 이О훈 부인의 사례 이О훈의 부인은 현재 73세로, 파주 월롱면에서 태어났다. 남편 이О훈은 파주 장단이 고향이다. 이 О훈 부부는 73년도 마을에 입주하였다. 벼농사와 복숭아 농사를 주로 지어왔다.이О훈 부인의 가을 일손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59 180) 이О훈의 부인(여, 70대) 2012년 11월 3일 면담 181) 이О훈의 부인(여, 70대) 2012년 11월 3일 면담 광에 모셔진 대감독, 안방에 하얀 고깔로 모셔진 지석(제석) 이О훈의 부인은 친정어머니가 안방에서 성주와 지석(제석)을 모셨고, 광 (창고)에서 대감독을 모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감독의 신체는 쌀이 다섯 말 정도 들어가는 크기의 큰 항아리고, 그 안에 쌀을 가득 담아 두었다. 대 감독 안의 쌀은 가을에 고사를 지낼 때와 집안 제사를 지낼 때, 모내기를 마 친 후 일꾼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할 때 등에 사용하였다. 대감독 안에 보관 한 다섯 말 정도의 쌀은 이렇듯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쌀을 보관하는 저장고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매년 가을이면 새 쌀로 갈아 채 우고는 막걸리 등을 차려 놓고 고사를 지냈다. 안방의 한 구석에는 지석을 모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얀 종이로 고깔모양을 만들고 그 아래 쌀을 조금 매달아 놓았다. 근심이 있거나, 아이들의 안녕을 빌 때 어머니가 그곳에서 정성을 들이셨다. 그건 방 네모지며 한 구석에 있잖아, 하얀 고깔을 해갖고 쌀을 요만치 매달아놔. 그러고 거기다가 내가 괴롭고 뭐할 때 정한수상에다 놓고 빌 면서 절을 하더라고 어머니가...자식들 잘되게 해라고... 그런게 지석이 야.180) ‘전쟁에 대감이 다 도망갔것지’ 이О훈의 부인은 전쟁이 났을 때 교하로 피난을 갔다. 11살의 어린나이 여 서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부모님들을 따라 집을 떠나 있었던 기억은 난다. 전쟁 때 대감독 등이 모두 없어졌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대감독이나 지석 등을 더 이상 모시지 않게 되었다. 이О훈의 부인도 결혼 후 더 이상 이 러한 신들을 모시지는 않는다. 6.25 사변 나기 전인데... 6.25 사변 나고는 그런 거 다 없어졌지. 전장에 (전쟁에) 대감이 다 도망 갔것지. 집이들은 알지도 못해. 그지? 대감이 다 도망갔으니까 읍앴지뭐. 지석도 읎애고. ...(중략)... 나면서 인민군들 쳐들어오고 뭐하고 난리나니까 읎어졌나봐.181)

16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82) 김О식의 부인(여, 70 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183) 한О남(남, 70대 후반) 2012년 11월 25일 면담 184) 김О식의 부인(여, 70 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라. 그 밖의 사례 김О식의 부인은 삼신을 기억한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를 낳고 나면 삼신 을 모셨다.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뭐 미역국 끓여서 밥 한 그릇 떠 놓는다 그러대. 난 안해서 몰라. 미신 잘 지키는 할머니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182) 마을의 장승제를 주도하는 송О만은 장승제를 지내고 난 후, 집에서 가을 고사를 지낸다. 장승제를 지낸 날 바로 지내기도 하며 따로 좋은 날을 잡아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송О만의 남편인 한О남은 가을고사는 여자들의 일 이라고 말한다. 모르갓어요. 내가 뭘... 바깥에서 남자가 그걸 알아요? 뭐...이...다 여자들 한테 맡기지 남자가...남자가 해당있어요?183) (5) 치병의례와 민간의료 가. 해물리기 김О식 부인의 사례 고향 친정 동네에서는 삼거리나 사거리에 해물리기를 해 놓은 흔적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삼거리나 사거리에 잡곡밥, 날계란 등을 길가에 던져놓 은 것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집안에 아이가 아프거나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주로 한다. 아이의 엄마가 밤에 하고는 음식을 던져두고 간다. 보기는 했어도 나는 해보지는 않았지. 해물리는 거래. 그게 뭐가 안 좋으 면...해... 물리는 거래184)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61 이О욱의 사례 이О욱은 대여섯 살 무렵에 마을에 무당들이 와서 병을 고치는 것을 본적 이 있다. 알 수 없이 아프고 병원에 가지도 못할 때 무당이 밤에 와서 조로 밥을 하고, 밥 안에 나이 숫자대로 십 원짜리 동전을 넣고 그 안에 환자의 머 리카락을 넣어 휘휘 저어서 마당에 뿌려 버리면 병이 낫는다. 박О옥의 사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밥을 해버린다. 밥을 해 버릴 때는 귀신에 따라서 밥이 달라진다. 하얀 쌀밥만을 할 때도 있고, 밥에 된장과 김치를 넣고 죽을 쑤어서 할 때도 있다. 만신에게 물어보면 어떤 밥 으로 해야 되는지 알려준다. 한번은 큰 며느리가 이유없이 얼굴이 붓는 병에 걸려 수수밥을 해서 버렸다. 그 이후로 병이 싹 나았다. 아...우리 큰며느리는 얼굴이 이렇지(부었지) 뭐야. 근데 수수밥을 해버 리래 만신이. 그래 수수밥을 해서 버렸더니 싹 나았지 뭐야. 해서 버리는 거야. 귀신 먹여야지. 축원을 해서 둘러서 밥을 버리는 거야. ...(중략)...이 름 달고 성달아서... 이렇게 한상 대접, 잘 대접 했으니...잘 먹고는 물 좋 고 산 좋은 곳으로, 경치 좋은 데로 가라고 하고 칼을 긋는 거야. 손아래 사촌 동서가 갑자기 귀가 이유없이 아프다고 하였을 때도 밥을 해 버리고 나서는 병이 나았다. 동서가 귀가 쿡쿡 쑤시며 아프다고 하길래 밥을 해버려 보라고 알려 주었다. 동서는 박О옥이 일러준 대로 하고 나서 병이 깨끗이 나았다. 박О옥은 귀가 아파죽은 귀신이 배가 고파 동서에게 붙어서 생긴 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픈 애어멈은 귀를 갖다 쿡쿡 쑤신데. 그래 내가 ‘아이고 밥을 좀 갖다 해 내버려봐.’ 그랬어. 어딜 갔다 오는데 콱 하더니 계속 그런데... 그래 밥을 좀 해 내버려봐 했지. 밥 해버리고 나았대. 내가 두 가지 병을 고쳐 줬다고. 괜히 콱콱 찌르더래. 귀 앓아 죽은 귀신이 걸 렸지 뭐. 배가 고프니까 밥 얻어먹으려고 그랬지 뭐... 두가지 병을 고

16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85) 김О식의 부인(여, 70 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쳐줬다고. 그래서 뭐가 있으면 큰댁 성님만 찾는다고. 내가 큰댁 성님 아냐... 나. 배탈 병원이 멀고 가기도 힘든 시절에 갑자기 배가 아프면 먹는 것들이 있었다. 증상에 따라 다른데 닭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는 닭 뼈다귀를 태워서 가루로 만들어서 먹이면 나았다. 설사병이나 이유 없는 배탈에는 양귀비 대를 끓여 서 먹으면 증상이 나았다. 양귀비 있잖어. 못심는 거. 그때는 그게 있었어요. 대... 대를 끓여서 그 물을 내려서 먹이는 거야.185) 박О옥은 배탈이 나서 꼼짝 못하는 환자는 사관뜨기를 하면 깨끗이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사관뜨기는 바늘 등으로 손과 발의 끝을 뚫어서 피를 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 육촌 동생, 막내동서 아들 잔치를 한 다고 외아들인데, 세 살짜리가... 잔치를 한다는데... 그냥 아파서 이러고 있어 요. 그러고 누워있는 거를 내가 사관을 떠줬지. 그랬더니 나았어요. 멀쩡히. 박О옥은 사관뜨기와는 다르게 대침 놓아서 피를 빼는 방법이 있다고 한 다. 대침을 놓는 것은 발목을 삐어 아플 때 효과적이다. 발목이 삔 것은 삔 곳에 나쁜 피가 뭉쳐서 생기는 병으로 보아 뭉친 피를 모두 뽑아내면 삔 것 이 깨끗이 낫는다고 한다. 다. 피부병 이О욱의 부인은 어릴 적 할머니가 손녀 몸에 두드래기(두드러기)가 나면 재래식 화장실에서 아이를 세워 놓고 수수 빗자루로 몸을 쓸어내리며 소금을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63 186) 이О욱의 부인(여, 60 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뿌리면서 두드래기를 쫓았다. 그렇게 하고 나면 사흘 뒤 두드래기가 낫고는 하였다. 옛날에 나 우리 할머니가 기를 때는 그... 두드래기 나고 그러면 화장실 에, 지금은 이런 화장실이지만 옛날엔 변소간이잖어. 돌멩이 걸어 놓은 그런데 재들 있는데... 그런데서 수수 빗자루로 소금 뿌려가면서...막... 뭐 라고 어서 잘나라 하고...좋은 말 뭐 하고 그래. 그러면 3일이고 싹 낫고 그래.186) 박О옥은 어린애가 두드래기(두드러기)가 나면 즌산대(전봇대)에 수수밥 을 해 다놓고, 아이는 옷을 벗겨 부엌의 아궁이 앞에서 수수 빗자루로 몸을 쓸어 주면서 ‘중이나 두드래기가 돋지 사람도 두드래기가 돋냐’라고 주문을 외면 병이 낫는다고 말한다. 두드래기. 두드래기가 나면 즌산대(전봇대)에 그 밑에다가 수수밥을 해 서 갖다 놓으면 낫더라고. 그리고 애를 뻘개 벗겨 놓고 아궁이 앞에서 수 수비로 썩썩 쓸어 주면서 ‘중이나 두드래기가 돋지, 사람도 두드래기가 돋냐’ 그러고 축원한대. 이러면 낫는대. 싹 낫더라고, 중... 스님... 라. 약초와 민간요법 이О욱은 콩 등의 밭농사와 함께 약초재배를 한다. 오디와 울금, 천마, 삼 백초 등의 다양한 약초를 키우고 있다. 약초는 각각이 효능이 있어 증상에 맞게 복용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한다. 이О욱을 통해 몇 약초의 효능과 복용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뽕잎 뽕잎은 깨끗이 씻어서 배추 말린 것처럼 말린다. 뽕잎은 당에 좋다고 한 다. 잎을 넣고 반죽하여 수제비도 만들고, 칼국수도 만들고, 차를 끓여서 먹 는다. 뽕잎은 버릴게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한다. 6~7월 초 무렵에 따야 잎이

16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87)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적당히 ‘야들야들’하다. 이 시기를 지나면 잎에 빨간 점이 생겨 그 이후로는 못 먹게 된다. 오디 오디는 깨끗이 씻어서 설탕에 재워 먹기도 하고, 바로 즙을 내기도 하고, 술을 담그기도 한다. 생오디는 냉동실에 얼려 두었다가 우유와 함께 갈아서 먹기도 한다. 오디는 6월 하순 경에 수확한다. 뽕잎이 나오기 전에 수확한다. 그게 복분자 보다 좋대요. 그 뭐... 다들 좋다고 하고 사는데 어디에 좋은 지 모르겠네... 우리는 따다만 주면 알아서 먹더라고. 전에 누가 이걸 ‘아 저씨 이게 어디에 좋아요?’, 하니까 ‘아 아주머니 좋으니까 사 가시는 거 아니에요. 거 잡수면 좋아요.’ 했지. 본래 사 가시는 분들이 더 잘 알아서 ‘알아서 가져가세요.’ 하지.187) 곰보나물 배추 같이 생겨서, 곰보 같이 다닥다닥한 모양이 있다. 상처 난데 비비면 상처가 낫는다. 말려서 보릿물처럼 끓여 먹어도 좋다. 광탄면에서 많이 재배 한다. 삼백초 삼백초의 이름은 그 모양에서 유래 하였다. 뿌리, 꽃 그리고 잎의 일부가 하얗다고 하여 삼백(三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삼백초는 그 냄 새가 매우 특이하다고 한다. 삼백초는 장에 좋은 약초이다. 보릿물처럼 끓여 서 그 물을 복용 한다. 올해 동파리에서 종자를 받아와서 재배 중이다. 그 삼백초가 뿌리가 하얗고, 꽃이 하얗고, 하나는 또 잎이 어디가 하얗다 고 하여 세 가지가 하얗다고 하여 삼백초래... 건들면 화장품 냄새 같은 게 나. 야릇하게 냄새가 특이해.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65 (6) 부적과 그 밖의 속신 가. 부적 민О승 가정의 사례 민О승의 부인은 불교이다. 처녀 시절에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다가, 결혼 후 시어머니가 절에 다니시어 따라 다니게 된 것이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를 따라 광탄의 절로 다니던 것을 현재는 보덕사로 옮겨 다니고 있 다. 부적은 보통 절에서 스님을 통해 구한다. 현재는 집안 대문 위와 시아버지가 지내시는 별체의 대문 위, 그리고 장 공장의 제조실 입구 등에 부적이 붙여져 있다. 집안 대문위에 붙여진 부적은 불경의 일부를 적은 것으로 인쇄된 부적이다. 민О승의 부인은 집안의 부적들에 대해 삼재부적이라고만 하고 자세한 이 야기를 하는 것은 꺼린다. 집안에 삼재가 든 식구가 있으면 대문위에 부적을 붙이거나, 삼재 든 사람의 지갑 등에 넣어 소지하도록 한다. 공장 입구에도 부적이 붙어 있다. 공장은 습기가 많은 곳이고 하여, 부적을 비닐에 싸서 출 입문 위에 붙여 놓았다, 공장의 부적은 몇 해 전 고사 때 오셨던 스님이 부적 을 주고 가셨다. 가을 고사를 지내고 나면 부적을 주는 스님들이 계신다. 스 님마다 다른데, 현재 고사를 지내주시는 보덕사 스님은 고사 때 따로 부적을 민О승 가정 대문 위의 부적

16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88) 민О승의 부인(여, 60 대) 2012년 11월 25일 면담 주시지는 않는다. 집안에 붙여놓은 부적이나, 몸에 지니고 있던 부적은 새로 운 부적을 가져오면 태워 없앤다. 그게 다 마음이야. 우리 사위도 ‘아이고 어머니 이거 갖고 다니니까 사고가 없어요.’ 하고... 저 양반도(남편도) 지갑에 넣어주니까, 벌써 12월 되면 ‘이 거 안 바꿔줘?’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야. 뭐든지 종교는 자기 마음이야188) 민О승 가정의 딸들은 기독교 이다. 집안 대문 바깥쪽에는 성경말씀을 적 은 액자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에 다니는 딸들이 걸어 놓은 것이 다. 교회에 다니는 딸들은 엄마가 부적을 붙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민 민О승 가정 별체 방문 위(下左)와, 대문 위(下右)의 부적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67 189) 민О승의 부인(여, 60 대) 2012년 11월 25일 면담 190)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О승의 부인은 딸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부적을 싫어하는 것도 크게 개의 치 않는다. 우리 애들은 또 교회다녀...‘엄마는....!!!’ 그러면 ‘너는 시집가면 그만이니 까 떠들지 마.’ 그러고.... ‘너는 니 식 대로 살고, 나는 내식대로 산다.’189) 김О식 부인의 사례 김О식의 부인도 보덕사를 다니는 불교신자이다. 절에서는 입춘 무렵 ‘입 춘대길(立春大吉)’을 적은 입춘첩을 나누어 준다. 입춘첩은 입춘날 스님이 일 러주는 시간에 대문바깥쪽에 붙인다. 금년에도 붙여 놓았는데, 여름 비바람 에 떨어져 나가고 없다. 또한 김О식의 가정에서는 집안에 아이들에게 큰 시험이 있거나 아픈 사 람이 있을 때 부적을 쓴다. 그리고 삼재가 든 식구가 있을 때도 부적을 써서 지니고 다니도록 한다. 부적은 절에서 스님이 기도를 올리고 직접 써주신다. 나. 그 밖의 속신 집터와 방향 좋은 터와 방향에 집을 짓고 살아야 집안이 잘된다. 집터가 나쁘면 집안이 잘 안되고 병자들이 많이 난다. 마을에도 그러한 집이 있고, 심지어는 외부에 아파트들 에도 그러한 집터가 있다고 한다. 왜 지금도 밖에 아파트들 보면은 하자가 있는 집들이 많대. 왜냐하면 그 집만 들어 가면은 아프대. 재수가 없다고 안 들어가는 거야. 그거 안 팔린다고 그러더라 고. 그 파주 병원 앞에도 하나 있다고 하더라고.190) 마을에도 집터가 안 좋은 곳이 있다. 멀쩡히 살다가 집안이 기울고 남자 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집을 팔고 나갔다. 그 사람들이 나가고 다른 사람들 안전을 위해 부적과 염주를 소지한 통일촌의 차량

16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이 다시 들어왔는데 새로 들어온 식구들과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먼저 아 저씨가 이유 없이 비쩍비쩍 마르더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줌마가 ‘귀신병 걸렸다.’, ‘무당병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당 병에 걸리면 신을 내려 받아야 하는데 신을 안 받고 있다가 결국 암으로 세 상을 떠났다. 그러고는 그 집에 세를 들어온 사람들도 또 병을 앓는다고 한 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이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살 텐데 그 곳에 계속 있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한번 잘못된 집은 계속 그렇다. 한 마을 안이라고 집터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또한 집안에 수맥이 흘러도 안 좋다고 한다. 집안에 수맥이 흐르는 곳에서 잠을 자면 몸에 병이 든다. 집터 방향은 동쪽과 남쪽이 일반적으로 좋은데 자기운이 맞는 방향도 있다. 잠자리는 동쪽이 좋다.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서 머리를 두면 마음에 생기 가 돈다. 북쪽으로 자면 마음이 어두침침해 지고 몸도 안 좋아진다. 그러한 것은 아이들도 많이 믿는다. 아이들도 스스로 침대 방향을 동쪽 아니면 남쪽 으로 두고 잔다. 북쪽이나 서쪽은 잠자리 방향으로 좋지 않다. 그래야 사람 이 기운이 좋아지고 하는 일도 잘 풀린다. 어려서 어렴풋이 들은 것을 그렇 게 이용하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었더니 동네에서는 ‘동네 시어머니’라 는 별명까지 붙었다. ‘집터 방향은 동쪽과 남쪽이 일반적으로 좋은데 자기운이 맞는 방향도 있다.’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서 머리를 두면 마음에 생기가 돈다.’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69 장독의 버선 민О승 부인이 운영하는 장공장의 장독에는 버선 모양의 종이들이 거꾸로 붙여져 있다. 종이로 모양을 내고 그 안에 축원이나 기원, 축하의 글과 함께 장을 담근 날짜를 적어 코팅 후 실로 달아 놓았다. 현재는 신앙적 의미 보다 는 장을 담근 날짜를 기억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건강과 행복, 대박을 기원하는 글을 적은 장독의 버선 축제를 축하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글을 적은 장독의 버선 기원의 글을 적은 장독의 버선

17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인형 숨바꼭질 통일촌 안의 군내초등학교에 다니는 최О희(13세, 여)와 이О원(12세, 여) 은 인형숨바꼭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형에 초인적인 힘을 불어 넣는 일종 의 주술적 놀이이다. 최О희와 이О원은 인형숨바꼭질을 중고등 학교에 다 니는 언니들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 본인들은 무서워서 직접 해보지 못했으 나, 언니들은 해본 적이 있다고 들었다. 인형 배를 갈라가지고 안에 솜을 다 빼요. 그리고 그 안에를 쌀이랑 자 기 손톱이랑 머리카락 같은 거를 넣어요. 그리고는 빨간 실로 배를 묶어 요. 그 다음에 그 인형 손에 뾰족한 거를 집어 준 다음에 자기 입에 소금 물이나 소주를 머금고 있어요. 그 물을 머금고 숨어 있으면 인형이 그 사 람을 찾아다니는 거에요. 게임을 끝내려면은 인형한테 머금고 있던 소금 물이나 소주를 뱉어 뿌려 줘야 된대요. 근데 그거를 먹거나 뱉게 되면 게 임이 영영 안 끝나요. 그거를 하다가 숨어서 잠들면 안 돼요. 잠들면 죽 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요 자기를 저주 하는 거예요. 이거 하면은 부작용 이 자기 혼자 있는데 자기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물건이 안 움직였는데 통일촌 마을 벽에 붙여진 아이들의 그림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71 191) 최О희(여, 13) 2012년 11월 4일 면담 혼자 막 움직이게 되고 그런대요. 인형숨바꼭질이라고... 중학교 고등학 교 언니 오빠들은 겁이 없어서 이걸 한대요. 끝낼 때는 그 인형한테 소금물이나 소주를 뱉어내고, 칼로 그 인형 배를 세 번 찔러야 된대요. 그리고 나서 인형은 불태워 버려야 끝난대요. 소 주를 삼켜버리면 인형이 계속 그 사람 쫓아다니고 게임이 안 끝나는 거 예요.191) 큰일 치르려면은 초상집에는 안 간다. 김О식의 부인은 혼인을 앞두고서는 날을 받은 신부나 신랑, 그리고 그 가 족들은 상가집에 가면 부정을 탄다고 말한다. 임산부의 배 모양을 보고 아들인지 딸 인지를 구분한다. 박О옥은 임산부의 배 모양을 보고, 태아의 성별을 구분 할 수 있다고 한 다. 배가 전체적으로 둥글둥글 하면 아들이고, 배가 앞으로만 나오면 딸이라 고 말한다. 배가 초무산하고 둥글둥글 하면 아들이고, 앞이 톡 나오면 딸이고 그러 더라고. 3. 통일촌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주거생활 일상에서 사용하는 살림살이에는 사용자의 삶과 생활이 녹아있다. 항상 그 자리에 두고 사용하며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물건이라 사소하게 보일지라 도 물건마다 개개인의 이야기가 있고, 크게는 마을의 역사까지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통일촌 사람들 가정 속으로 들어가 개개인의 물건을 살펴 보기도 하고, 통일촌 모두의 물건인 상여집, 군내 초등학교 소장품 등을 함 께 찾아보았다.

17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92) 송О식의 부인(여, 나이 미상) 면담. (1) 통일촌 사람들의 살림살이 성모마리아상은 송О식의 부인이 처녀시절 세례를 받을 때 구입한 것이 다. 송О식의 부인은 젊은 시절, 신정3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 후 성모상을 거실의 장식장에 보관해 왔다. 그런데 성모상이 신기한 것이, 구입 한 이래로 몇 십 년이 지났음에도 머리에 먼지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나 통일촌으로 이주한 후, 거리와 시간적 제약 으로 인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내가 성당에 세례 받을 때 서울서 받았어. 영세 견진 다 받았어요. 그랬 는데 여기 와서 시간도 안 맞고 농사짓는다고 나갈 새가 없어요. 지금도 딸들은 다 다녀. 아들도 유아영세까지 다 받고 그랬는데, 환경이 이러다 보니까. 문산으로 다녀야 되는데 일요일에 나가면 땡치잖아. 그래서 나 갈 수가 없어서. 일은 안할 수가 없어서 힘들지. (중략) 서른 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내가 성당 영세를 서른둘에 받았나, 20대때 받았나. 아들 낳기 전이지. 서울 목동 옆에 신정동 성당, 신정 3동.192) 명칭 성모마리아상 수량 1 사용자 송О식의 부인 사용여부 사용 재질 사기 입수경로 40여년 전 서울시 신정3동 성당에서 구입 보관 장소 가옥 안 거실 장식장 3층 용도/기능 종교신앙-기독교-기독교기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73 명칭 전축 수량 부속품 7 사용자 송О식 사용여부 사용안함 재질 합성수지 입수경로 1992년 송О식이 서울에서 구입 보관 장소 거실 용도/기능 문화예술-음악-음악기타 193) 송О식의 부인(여, 나이 미상) 면담. 194) 송О식의 부인(여, 나이 미상) 면담. 195) 송О식의 부인(여, 나이 미상) 면담. 먼지 쓰지 말라고 넣어놨는데 성모님이 영험하신 게 뭐냐면, 몇 십년간 머리를 하얀 거즈로 이렇게 닦아도 먼지가 안 앉아. 그게 신기해.193) 송О식은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통일촌에 입주한 지 5년 후인 1992년 에 서울 가락시장에서 전축을 구입해 왔다. 당시 유행하던 태진아, 송대관 등의 음악을 레코드판으로 들었다. 레코드판은 문산에서 구입했다. 현재 전 축을 고장으로 사용하지 않는 상태이나, 본래의 목적이 아닌 수납의 목적으 로 물건을 쌓아두는 용도로 전축장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 이사와가지고 한 5년 있다 샀는데 다 안 써서 소리가 잘 안 나서 없 애버렸어. 지금 저거는 뭐 올려놓느라고 그냥 놓고 쓰는 거야. 고장이 나 서 안 써. 할아버지가 샀어. 노는 거 또 굉장히 좋아하지. 서울서 여기서 살면서 서울 거기 가락동 농산물 직판장 거기서 산 거 같애.194) 이제는 흘러간 노래지 뭐. 노인네들이니까. 기냥 태진아 뭐 그런 흘러간 노래 들었지. 판도 가지고 있었는데 다 망가지니까는 다 쓰레기로 그냥 나가버리고. 그런 판은 문산에서 사지.195)

17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김О민의 남편은 1사단에서 상사로 제대한 군인으로 1973년에 통일촌에 입주하였다. 김О민은 경기 파주 주내 출신으로 남편을 따라 통일촌에 들어 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김О민은 군인인 남편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 려워 부식가게를 운영하다가 통일촌에 입주하였으나 초기 불하받은 전답 대 부분을 1988년 특별조치법으로 뺏기고, 현재는 논 1천평을 소유하고 있다. 김О민의 남편은 2년 전에 사망하여 현재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거주 중 이다. 가옥 내에는 남편이 생전 군인시절 혹은 제대 후에 받아온 군사관련 물품들이 남아있다. 부대에서 기념품으로 증여한 탁상시계는 여전히 거실 TV 위에서 시간을 알리고 있고, 잔과 여러 훈장패들은 진열장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이 훈장은 아들이 몰래 엿으로 바꿔먹었다가 몇해 전에 다시 받아둔 것이다. 통일촌 내에 대부분의 가옥이 소를 키울 때는 농경을 위한 소도 있었지 만 젖소도 있었다. 현재 통일촌 내에는 축산업을 전문으로 하는 극소의 주 민만이 소를 키우고 있으나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통일촌에서 소를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젖소를 키우던 이웃에게서 우유를 보관하는 통을 증여받았던 홍О태는 우유통을 마당에 두고 여전히 보관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명칭 훈장 수량 5 사용자 김О민 사용여부 사용안함 재질 금속 보관 장소 김О민 가옥 내 거실 진열장 용도/기능 군사-표식제식-완장류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75 196)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옛날에 들어왔어. 저것이 천 구백... 그러니까 1990년? 1994,5년까지 있 었나? 나는 안 키웠는데, 나는 젖소 안 키우고 한우 키웠는데 젖소 키우 는 사람이 꽤 많았어. 그때 우유통을 저걸 썼었지.196) 박О희는 1975년에 통일촌에 입주하였다. 솥은 통일촌에 거주하기 전에 용인에서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2012년 11월 26일, 박О희는 솥을 이용해서 고추장을 담갔다. 명칭 우유통 수량 1 사용자 홍О태 사용여부 사용함 재질 금속 보관 장소 홍О태 가옥 내 마당 용도/기능 식생활-음식기-저장운반 명칭 솥 수량 1 사용자 박О희 사용여부 사용 크기 70(가로 지름) × 25(높이) 재질 금속 보관 장소 박О희 가옥 마당 용도/기능 식생활-취사

17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통일촌의 우편함은 모든 가구가 동일하게 제작되었다. 정부에서 제작하여 배부한 것이다. 2012년 현재의 우편함은 2011년 봄에 설치한 것으로, 5년 전 에 제작했다는 우편함은 폐기한 가구도 있고 여전히 현재의 우편함과 함께 설치해 둔 가구도 다소 있다. (2) 통일촌 마을의 공동물건 가. 상여집 통일촌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장례를 치 르고 상여를 만들어 함께 운구한다. 요즘에는 마을 내에서 주민이 사망하 더라도 병원에 모시는 경우가 많아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는 일은 드문 일이 되었다. 가장 최근에 마지막으로 상여를 이용하여 마을 내에서 상을 치른 것은 2년 전 권О택의 모친상이다. 원래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 에 상여집을 마련해 두었으나, 내부에 삽, 곡괭이 등이 근처 농사를 짓는 사 람들에 의해 도난당하게 되자 마을 입구의 컨테이너에 임시로 보관해두고 있다. (상여계는) 계속 했지. 지금도 상주가 원하면 우리가 매줘. 상자회라고 하나, 젊은 애들이 하는데 마을에서 이장을 주축으로 해서, 여기는 다른 명칭 우편함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11(가로) × 14(세로) × 8.5(너비) 재질 금속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77 197) 권О택(남, 나이미상) 면담 일은 단합이 어쩔지 몰라도 죽은 일은, 사람이 죽었을 때는 단합이 잘 돼. (최О세) 튼튼한 목재로 이루어진 상여대는 상여를 중앙에 얹어서 양쪽에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용도로 사용한다. 장지에서 상여를 내리고 나면 상여대를 이용하여 상여에 흙을 한번 끼얹고 사람들이 ‘달고’소리를 하며 흙을 다진다. 한 번 더 흙을 끼얹고 반복한다. 2회 반복한 후엔 봉분을 얹는다. 이거는 상여를 나갈 때 이렇게 나무 다지는 거지. 연초대라고 그러지. 나 무로 사람들이, 이쪽지방에서는 나무 갖고 소리하면서 이렇게 돌아가면 서 하지. 고 나무야. 돌면서.197) 달고라 카는게 있어. 그게 뭐냐 하면은 흙을 넣고 이자 그 흙을 다 넣었 잖아. 사람들이 밟으면서 막대기를 가지고 ‘오호 달고야’하고 그 노래가 있어. 노래를 불러가면서 한사람이 인자 여 앞장서서 해. 그러면 따라서 다해. 난 그거 몰라. 잘하는 사람 있는데 그런 사람도 다 잊어불고 모를 거야. 달고라 하면 알어. 노인네들은 알어. 인자 요렇게 저 뭐야 이제 오 래돼서 잊어부렀네. 널이 들어가잖아. 널. 관이 들어가면 덮잖아. 조금 덮 상여집 내부 물건 보관 장소상여집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17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명칭 거적 수량 2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186(가로) × 558(세로) 재질 기타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명칭 만장대 수량 6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최대 230(길이) × 3(두께지름) 최소 181(길이) × 3(두께지름) 재질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79 명칭 연초대 수량 8 (사진은 편의상 2개만 찍었음)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205(길이) × 6(두께지름) 재질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198) 홍О태(남, 83) 2012년 11월 25일 면담 고 달구하고, 조금 덮고 달구하고. 2번 하고 나면 인제 봉오리를 맨드는 거야. 2번하고 나서 봉분 만드는 거야. 그거를 막대기가 별거는 아니고, 상여 멜 때 인자 상여 밑에 이렇게 양쪽에 두 사람씩 있잖아? 그러면 막 대기를 가지고 이용을 하는거야. 그게 별도로 맨들어오는게 아니야. 그 막대기를 들고 여덟명이, 그냥 여덟 명인가 아홉명인가 그래. 달고를 한 적은 있는데 그거는 인제 내가 몰 알아? 군대 가가지고 계속 마흔 다섯 살까지 있고, 그래서 난 잘 몰라. 따라는 하지.198)

18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명칭 곡괭이 수량 2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52(가로) × 96(세로) × 7(높이) 52(가로) × 84(세로) × 8(높이) 재질 금속,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명칭 요령 수량 3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9.5(가로 지름) × 19(높이) 재질 금속,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81 명칭 윷 수량 12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2.5(가로) × 18(세로) × 2(높이) 재질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명칭 소고 수량 3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22(가로 지름) × 34(세로) × 5.5(두께) 재질 종이,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18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명칭 징 수량 2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40 (가로지름) × 8.5 (높이) 재질 금속, 직물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명칭 징채 수량 1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9 (가로) × 33(세로) 재질 목재, 직물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83 명칭 북 수량 1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43 (가로지름) × 30 (높이) 재질 가죽,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명칭 장구 수량 1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45 (가로지름) × 50 (세로) 재질 가죽, 목재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18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명칭 그릇 수량 42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16 (가로지름) × 4 (높이) 재질 합성수지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명칭 병풍 (전면, 후면) 수량 1 사용자 마을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368 (가로) × 169 (세로) × 2 (두께) 재질 종이 보관 장소 상여집 컨테이너 안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85 나. 군내초등학교 소장품 명칭 군내 초등학교 현판 수량 1 사용자 군내 초등학교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18 (가로) × 60 (세로) × 3 (두께) 재질 석재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사회생활-사회제도-사회제도기타 명칭 국민교육헌장 케이스와 내용물 수량 2 사용자 군내 초등학교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케이스 24 (가로) × 31 (세로) × 20 (두께) 내용물 22 (가로) × 28 (세로) 재질 종이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사회생활-사회제도-사회제도기타

18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종 내부에 ‘한국방공연맹 서대문구지부 1978.1.22. 진관내동’ 이라고 적혀있 다. 노끈이 종의 추와 연결되어 있어 높은 곳에 종을 매달아 두고 칠 수 있다. 명칭 유네스코 협동학교 인증서 수량 3 사용자 군내 초등학교 사용여부 사용안함 재질 종이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사회생활-사회제도-사회제도기타 명칭 종 수량 1 사용자 군내 초등학교 제작년도 1978년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30 (가로지름) × 20 (높이) 재질 금속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교통통신-신호-신호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87 하단에 “TO KUN NAE ELEMENTARY SCHOOL FROM 1/506 TH INFANTRY FOR THEOR CONTRIBUTION TO GOOD RELATIONS 12 MARCH 1999” 라고 새겨져 있다. 명칭 포탄 수량 1 사용자 군내 초등학교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7 (가로지름) × 16 (높이) 재질 금속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군사-화약무기-포 명칭 미군 협약패 수량 1 사용자 군내 초등학교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20 (가로) × 27 (세로) × 1 (두께) 재질 금속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사회생활-사회제도-사회제도기타

18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다. 기타 명칭 망향제단 수량 1 사용자 통일촌 주민일동 사용여부 사용 크기 비 65 (가로) × 165 (세로) × 50 (두께) 밑단 130 (가로) × 110 (세로) × 28 (두께) 제단 105 (가로) × 166 (세로) × 40 (두께) 재질 석재 보관 장소 군내초등학교 내 전시관 용도/기능 사회생활-의례생활-제례 명칭 파주시군내출장소 현판 수량 1 사용자 마을 공동 사용여부 사용안함 크기 30 (가로) × 178 (세로) × 3 (두께) 재질 목재 보관 장소 부녀회 식당 2층 창고 용도/기능 사회생활-사회제도-사회제도기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89 ‘망향제단’은 북한에 고향을 두고 돌아가지 못하는 실향민을 위해 통일촌 주 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건립한 제단이다. 1996년 11월 3일에 완공하였다. (3) 주거생활 가. 1973년 건축한 초기주택 - 남О규씨댁 1973년에 개축한 남О규의 가옥 전면(현재 미거주) 1973년에 개축한 남О규의 가옥 후면(현재 미거주) 1973년 개축당시 가옥 평면도 안방 방1 거실 방2 부엌 <가옥 크기> (단위 cm) 안방 : 252*430 부엌 : 330(255+75)*265(120+145) 방1 : 254*295 거실 : 254*245 방2 : 254*140

19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99)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위 가옥은 현재 통일촌에서 찾기 힘든 1973년에 신축가 옥이다. 통일촌에 처음 입주한 주민들을 위해 정부가 건축 한 것으로, 1986년에 모든 통일촌 주민들이 정부보조로 가 옥을 개축하면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남О규의 경우, 1986년에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 옥을 신축하였다. 다른 주민들은 기존의 가옥을 모두 철거 하였으나 남О규는 헐지 않고 영농을 목적으로 출입만 하 는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다. 세를 줄 때 부분적으로 개조 하여 현재까지 보존 중이다. 내가 74년도에 짓고 있을 때 첨으로 입주할 때 들어와서 살다가 저 집(현재 거주가옥)을 86년도에 지었어요, 내가 고대로 보존하고 있지 이거 살려둔 사람 몇 없어. 우리 처음에 73년에 입 주해서 한 10년 살다가 85년에 저 집에 이사갔으니깐 고전에 우리가 살 았지. 이 후에는 우리가 안 살고 세줬지. 세는 농사짓는 사람들, 우리 마 을 사람들 아니고 밖에서 영농 출입하는 사람들 왔다갔다 하면서 여기다 방 얻어가지고.199) 부분개조 후 세 주었을 당시 가옥 평면도 (현재의 형태) 안방 거실 겸 부엌 현관 수도 현재 거실 겸 부엌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91 200)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원래 현재 거실로 이루어진 공간은 방 2개와 거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 간에 벽을 두 개 설치해 두고 싱크대 자리와 현관 부분을 방으로 사용했다. 싱크대 쪽에 있던 방(1973년도 평면도 방1)은 집에서 거주하면서 일을 돕던 상일꾼이 머물렀고 부엌과 접한 방(1973년도 평면도방2)은 남О규의 세 자 녀가 사용했다. 두 방 사이의 중앙부가 거실이었고, 이곳에서 안방과 부엌으 로 통할 수 있었다. 방을 세 주었을 때 개조하면서 싱크대를 설치하였다. 싱 크대를 비롯하여 액자, 달력, 냉장고, 텔레비전 등 몇 가지 집기가 남아있으 나 모두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1980년도(1973년)에 집을 이렇게 지었었어요. 여기가 여기(거실의 중앙 부) 막혔었어요. 요게 거실, 그리고 또 이쪽(현재 싱크대 자리)으로 방이 있었어요. 방이 하나둘 셋 있었고 가운데 거실 있었고 여기(현재 수도자 리)에 주방이 있었고, 화장실은 밖에 있어. 이거 씽크대, 이게 절로 이사 하고서 한 86년도에 했나봐.200) 당시 부엌은 현재보다 훨씬 바닥이 깊었다. 안방과 접한 벽인 부엌의 좌측 에 아궁이를 두고 난방 및 취사를 했다. 취사 뿐 아니라 난방도 해야 했으므 로 바닥을 깊게 파서 불을 피우면 구들장이 쉽게 데워질 수 있도록 했다. 안 방이 가장 아궁이에서 가까웠으므로 가장 따뜻했다. 아궁이에 솥은 총 3개를 걸었는데 가장 안쪽에는 가장 큰 솥을 걸어 소죽을 끓였다. 나머지 작은 솥 두 개는 취사용이었다. 식구도 많고 일꾼들 식사와 참까지 챙겨야 했기 때문 에 솥이 두 개였지만 모자랄 지경이었다. 현재는 외부와 통하는 문을 막은 상태지만 당시에는 거실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외부로 출입이 가능했다. 과거의 부엌자리(정면 출입문은 현재 폐쇄) 부엌 좌측의 당시 아궁이 자리

19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01)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202) 남О규(남, 74) 2012년 11월 23일 면담 지금은 보일러 키고 그러지만 그전에 주방이 재래식 주방, 장작 때서 불 넣고 방을 데우고, 밥하고 그랬지. 이쪽(당시 부엌자리 좌측)에는 큰 솥 가마솥 걸고 소밥 줬고 그쪽에 끓이고. (바닥이) 왜 깊으냐면 재래식 구들 은 장작을 피면 연기 많이 나오고 여기 깊어야 불이 빨려 들어간다고.201) 안방은 이 가옥에서 1973년 이후로 전혀 손댄 곳이 없는 유일한 공간이다. 창문틀도 고치지 않았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우측으로 부엌과 접해 있으므 로 우측이 아랫목이었고 좌측이 윗목이었다. 당시에도 방이 길쭉한 형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추운 윗목의 좁은 벽 에 장롱을 두고 생활했다. 현재까지도 장롱이 남아있지만 사용하지는 않는 상태이다. 그렇지 요걸 저기 고대로야, 여기 방이 문도 여기 있었고, 고대로야. 여 기 좁으니깐 자구 일어나니깐 좁아서 장롱도 저기다 놓고 썼지.202) 안방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93 나. 1986년 개축 가옥 - 최О순씨 댁 현재 최О순의 가옥과 창고의 평면도 화장실 방2 (부인이 사용) 화장실 거실 마당 평상과 개집 건조기 베란다 현관 다용도실 부엌 안방 (최О순 사용) 수도 및 개방형 창고 방1 (최О순의 부친이 사용했음) 우사 (현재 창고) 창고2 창고1

19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위 가옥은 1973년에 지은 가옥을 철거한 후 1986년에 신축한 가옥이다. 기존의 가옥은 현재의 거실, 부엌, 안방, 방1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5년 전에 현재 최О순의 부인이 주로 사용하는 방2와 화장실, 부엌 뒤편의 다용 도실을 증축하였다. 최О순에게는 2남 1녀가 있으나 오래전에 학업과 생업 등을 이유로 분가한 후 결혼하였으므로 따로 자녀들에게 분리된 공간은 없 다. 명절이나 때때로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방문할 경우 적절하게 방을 분배 하여 사용한다. 안방은 주로 최О순이, 방2는 최О순의 부인이 사용한다. 안방에는 장롱 과 최О순이 사용하는 이불, 옷걸이 등이 있다. 방2에도 장롱이 있으며, 침 대와 빨랫대, 컴퓨터, 가벼운 옷가지를 걸어두는 행거가 놓여있다. 원래 안 방은 부부가 사용하던 공간이었으나 가옥 내 공간을 증축하면서 자연스럽게 최О순 혼자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О순의 부인이 사용하는 방2에 비해 입구에 위치하고 있고 크기도 작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공간의 개념이 여전 히 남아있어 ‘안방’이라고 부른다. 화장실 역시 증축한 공간이며 이곳은 화장 실의 용도 외에 세탁실의 용도도 겸하고 있다. 1986년에 개축한 현재 거주 가옥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95 방1은 최О순의 부친이 생존하였을 때 사용하였다. 최О순의 부친이 사망 한 후에는 물건을 보관해두는 방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최О순의 부친은 병 환을 앓다가 사망하여 생전에 사용하였던 의료용 침대가 여전히 방에 보관 되어 있다. 외에도 청소기, 김치냉장고, 거실 소파의 일부 등 세간 몇 가지를 보관하고 있다. 부엌은 싱크대를 비롯하여 냉장고,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전기밥솥, 집 기류 등 부엌세간을 보관하며 사용하는 공간이다. 가옥 뒤편의 다용도실을 증축하여 부엌에서 바로 문을 열고 이동할 수 있다. 최О순이 사용하는 안방 최О순의 부친이 생존시 사용하던 방1의 전경 부엌 전경 싱크대와 집기류

19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거실은 TV와 소파가 놓여있어 가족들의 공동공간이 다. 그러나 소파의 위치는 TV를 보기에 적절하게 놓여 있지 않아 잠시 체류하여 휴식할 때 사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012년 11월 23일 현재, 콩을 한창 고르고 널어 말리는 기간이었으므로 거실 한 쪽에는 콩이 놓여 있었다. 거실에서 방2로 이동하는 동선에는 도토리 가 루를 널어 말리고 있었는데, 도토리 가루를 구입하여 묵을 제조하기 위해서 건조하는 중이었다. 거실 벽면 곳곳에는 자녀 혹은 손자손녀의 사진들이 다양하게 걸 려 있다. 외부와 가옥을 출입할 수 있는 현관과 베란다는 실내 와 실외의 중간지대이다. 마당과 거실 사이에는 신발을 신고 다니며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실내와 실외의 중 간지대인 ‘베란다’가 있다. 가옥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현관 상단에는 절에 다니는 최О순의 부인이 얻어온 부 적이 붙어있다. 통일촌 주민들은 1986년에 가옥을 신축하면서 1973 년에 지은 가옥의 부속건물 창고를 철거하기도 하고, 보존하기도 했다. 최О순의 경우, 가옥은 철거하였으나 1973년에 지은 창고는 여전히 보존 중이며, 여전히 창 고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창고는 4칸으로 지어졌으며 칸마다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물 건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마당의 출입구를 기준으로 가장 먼 쪽은 원래 화장 실로 사용했다. 지금도 재래식 화장실은 본래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나 가옥 내 화장실이 있으므로 매우 드물 게 이용된다.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화장실 앞 쪽에는 물건들이 쌓여 있다. 마당의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첫 칸은 원래 가마솥을 걸고 부엌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역시 현재는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의 용도로만 쓰이고 있 다. 중앙의 나머지 두 칸 중 안쪽의 한 칸은 우사로 쓰이던 공간이었다. 입주 거실 전경 베란다 전경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97 당시에는 최О순 역시 소를 키웠기 때문이다. 현재는 다른 공간과 큰 차이 없이 창고로 사용 중이다. 마당에는 5-6년 전에 구입한 건조기가 창고 전면에 놓여있다. 마당 곳곳 에도 최О순의 생업을 위한 농경관련 물품들이 쌓여있다. 외부에서 가옥으 로 들어오는 마당의 주된 출입구를 기준으로 바로 오른편에는 평상이 놓여있 고, 태어난 지 한 달 된 애완견의 집이 있다. 좀 더 오른쪽에는 2년 전에 만 든 수도가 있다. 수도의 안쪽에는 비가 들이치지 않게 지붕만 올려서 개방형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가옥의 부속건물인 창고에 물건을 쌓아둘 공간이 점 점 줄어들자 넓은 마당을 답답하지 않게 활용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가옥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현관 상단의 부적 1973년에 개축한 채 보존 중인 창고 창고 내 화장실 부엌으로 사용했던 창고

19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가옥을 나와 바로 길 건너에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2012년 올해에 지은 것 이다. 2012년 11월 현재, 수확한 콩을 널어 말리고, 땅을 파서 겨우내 무를 보관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당 왼편 건조기 평상과 개집 수도와 개방형 창고 가옥에서 바라본 길 건너 비닐하우스 전경 무를 보관할 구덩이를 파는 최О순 콩을 건조중인 비닐하우스 내부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199 203)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4. 통일촌에 전해오는 이야기 (1) 지역과 지명에 관한 이야기 가. 백연리의 지명 유래 통일촌 마을의 행정 구역명은 통일촌 군내면 백연리 이다. 민О승(남, 71 세)은 예전 마을에 하얀 연꽃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나. 백학산 지명유래 파주시 군내면에 있는 백학산은 지역 인근에서도 명당으로 유명하다. 백 학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먼저 민О승(남, 71세)은 백 학산은 하얀 학이 많이 찾아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이О 욱(남, 72세)은 백학산의 이름은 산의 돌멩이가 하얗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 말한다. 다. ‘살아 파주, 죽어 장단’ 옛날 어른들이 ‘살아 파주, 죽어 장단’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사람이 태어나서 활동을 많이 할 때는 파주에 나가고, 죽어서는 장단에 들어와 묘자 리를 쓴다는 이야기 이다. 읍내리 백학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좋은 묘자리 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장단에 좋은 묘자리들이 많아 장단에 무덤을 많이 쓴다. 이О욱이 상여소리를 많이 하여서, 상가집에 자주 다니다 보니 오래 알고 지낸 지관이 있다. 지금도 문산에 살고 있는 지관을 통해서도 장단에 좋은 묘자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살아서는 저기 파주 땅에 가서 놀다가, 죽으면 장단으로 들어오라는 거지. 묘자리가 여기가 파도 돌멩이가 안 나온대요. 그렇게 좋은 자리예요. 장단 에 여기 벼슬 많이 한 사람들 자리가 많아요. 여기 비석들도 많잖아.203)

20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04)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라. 장수를 기다리는 비마(飛馬)가 나온 ‘말우물’ 이О욱은 노상리에 있는 말우물 전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말우물은 장수 를 기다리는 비마(飛馬)가 나오는 우물로 장수가 나타나지 않자 말이 하늘로 날아가 사라졌다고 한다. 말우물 전설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동네 어르 신들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저기 저 노상리 쪽에는 우물에서 옛날에 노인네들이 그러더라고. 말우 물이라고. 거기서 말이 난다잖어. 거기를 지금은 지뢰 캔다고 다 메꿨어. 말이 그게 뭐냐 면은 장수가 하나 나타날 때는 말이 하나가 나온대요. 그 게 말하자면 비마(飛馬)라고 하는데 그게 하나 나타나면 꼭 장수가 하나 나와야 한대. 말이 나오긴 나왔는데 장수가 없어가지고 말이 나왔다가 그냥 울고는 하늘로 날라가버렸대. 그리고 거기를 말우물이라고 불렀대. 근데 지금은 다 지뢰캔다고 다 메꿔져서 없지 뭐...204) (2) 도깨비 이야기 가. 소똥을 참게로 둔갑시키는 도깨비 장난 이О욱은 일찍이 마을에서 유명한 소리꾼이며, 이야기꾼이었다. 그러던 이О욱이 몇해전 아들을 먼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이후로는 소리와 이야기를 끊게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도 소리와 이야기 구술을 거부 하였으나, 어렵게 도깨비에 관한 민담 하나를 들려주었다. ‘소똥을 참게로 둔갑시키는 도깨비 장난’에 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이외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전에 도깨비라는 게 뭐냐면 이런 강 같은데 개울 같은데 밤에 차돌 같 은 거 쭉 깔아 놓고 밤새도록 불을 켜 놓고 참게를 잡는 거야. 밤새 참게 가 한참 내려오는 거야. 그때 한참 내려오니까 밤새도록 참게를 잡아 놓 은거야. 그러고 새벽이 돼서...‘꼬꼬댁’ 하고 새벽닭이 울고 나서 보니까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201 205)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206) 이О욱의 부인(여, 60 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207) 이О욱의 부인(여, 60 대 중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죄 잡아다 놓은 게 소똥이야. 참게인줄 알았는데 전부 소똥만 잡은 거야. 그 얘기가 그짓부렁들은 아니야. 여러 군데서 그런 이야기를 해...205) 나. ‘도깨비 장난’ 이О욱의 부인은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 상황을 ‘도깨비 장난’이라고 설명 한다. 예를 들어 얼마전 인삼을 캤을 때 인삼이 불긋불긋하여 질이 너무 나 빠 속상해 하며 공판장으로 가지고 갔는데, 공판장에서 인삼을 풀어 놓고 보 니 인삼이 너무나 좋아 놀랐다고 한다. 이런 믿기 힘든 상황에 초인적인 힘 이 작용했다고 믿으며 이를 ‘도깨비 장난’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삼을 캤는데 도깨비 장난하는 거 같더라고. 왜 그러냐면 우리 가 인삼 캘테 너무 빨갛고 물건이 안 좋았어요. 어떡하나 등수가 너무 안 나오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잔뜩하고 속이 상해서 갔는데...그러고 팔 러 가서 확 쏟으니까 허~옇게 아주 좋은 거야. 그 사람들도 아주 좋다고 하면서 등수가 엄청 잘나왔어요. 이런 게 도깨비 장난이지 뭐야. 도깨비 한테 꼭 홀린 거 같더라니까.206) 한편 도깨비는 불빛이 날아다니는 형태로 보인다.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불을 내기도 한다. 이렇게 불의 형상으로 날아다니며 장난을 치는 도깨비의 모습을 ‘도깨비 불장난 한다.’하고 이야기 한다. 불이 휙 지나가고 그런대. 대낮에도 가다가 초가지붕에도 불 질러 놓고 그런대.207) 다. ‘도깨비 이야기 하다 길 떠나면 길을 못 찾아간다’ 늦은 밤 조사자들에게 도깨비 이야기에 관해 한참을 들려주던 이О욱(남, 72세)과 그 부인은 조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조사자들에게 ‘도깨비 이야기 하 다 길 떠나면 길을 못 찾는다.’고 이야기 한다.

20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08) 이О욱(남, 60대 후반) 2012년 11월 3일 면담 라. ‘김서방 뭐하나?’ 장난이 심한 도깨비를 예방하는 방법이 있다. 도깨비 장난이 한참 벌어지 고 있을 때 ‘김서방 뭐하나?’ 라고 하며 큰소리로 물으면 도깨비가 도방가고 장난이 끝난다고 한다. 그게 또 예방이 있대. ‘김서방 뭐하나?’ 하고 소리를 지르면 도망가 버 린대.208) (3) 학교 전설 1973년 마을 형성과 함께 자리 잡은 군내 초등학교는 통일촌 어린이들의 교육과 놀이의 중심 공간 이다. 마을의 어린이들은 학교에 설치된 동상에 얽 힌 전설들을 이야기 한다.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은 세종대왕 동상과 이 순신 장군 동상에 얽힌 이야기이다. 제보자들은 모두 초등학교 혹은, 초등학 교 시절 친구들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동 상에 얽힌 이야기는 제보자 마다 조금씩 전승의 차이를 보인다. 군내초등학교 운동장의 세종대왕 동상(좌)과 이순신 동상(우)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203 209) 이О원(여, 12) 2012년 11월 4일 면담 210) 이О원의 오빠(남, 14) 2012년 11월 4일 면담 211) 익명(남, 19, 세경고등학 교 3학년) 2012년 11월 3일 면담 가.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동상과의 싸움 12시 정각에 칼 들고 싸운다고 그래요. 이순신이 칼 들고 세종대왕이랑 운동장에서 싸운대요. 본 애들도 있대요.209) 세종대왕은 마법을 쓰고 이순신은 칼을 들고 싸운대요. 밤 12시 되면 싸 운대요.210) 그 어렸을 때 여기 학교 다닐 때, 밤 12시만 되면은 이순신 동상하고 세 종대왕 동상이... 세종대왕 동상은 책을 찾아다니고 이순신 동상은 칼을 찾아다니고 그러고 다니는데 그러고 다니다가 눈이 마주치면은 서로 싸 운다고 그 전설을 들었어요. 낮에는 잘 잡고 있다가 밤만 되면은 칼이랑 책이 없어져서 찾으러 다닌대요.211) 군내초등학교 운동장의 동상

20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12) 익명(남, 19, 세경고등학 교 3학년) 2012년 11월 3일 면담 213) 최О희(여, 13) 2012년 11월 4일 면담 나. 신사임당 동상과 책 읽는 소녀 동상과의 만남 군내초등학교에는 과거 신사임당과 책 읽는 소녀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상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사임당 동상 과 책 읽는 소녀의 동상이야기 역시 학교 친구들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에 학교 옆쪽으로 연못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 연못에도 동 상이 2개 있었거든요. 그 2개도 신사임당은 붓을 찾아다니고, 책 읽는 소 녀 동상은 책을 찾아다닌대요. 그러다가 둘이 만나면은 싸우는 게 아니 라 얘기를 한대요. 둘이서 밤새도록 얘기를 하다가 해가 뜨면 제 자리로 돌아간대요. 지금은 이 동상은 없어요. 공사를 해서 연못을 새로 짓는 바 람에... 한 9년 쯤 전에 없어졌어요.212) 다. 피눈물을 흘리는 책보는 소녀 동상 최О희는 마을 밖의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그 학교에서 전 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역시 학교 운동장에 있는 동상 에 얽힌 이야기 이다. 다른 학교 얘긴데요. 어떤 소녀가 책보고 있다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밤 12시만 되면 피눈물을 흘린대요.213) (4) 그 밖의 괴담들 학교 동상에 얽힌 전설들 이외에도 아이들은 많은 괴담에 대해 이야기 한 다. 인터넷과 핸드폰 어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들었다는 이야기들도 많았고, 주변의 친구들과 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들도 많은 비중 을 차지했다.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구전을 통해 들은 이야기만을 우선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장 통일촌 사람들의 삶 | 205 214) 최О희(여, 13) 2012년 11월 4일 면담, 친구들 에게 들음 215) 이О원(여, 12) 2012년 11월 4일 면담, 학교 선 생님한테 들음 가. 컴퓨터 채팅방에 나타난 귀신 이야기 밤에 어떤 애가 인터넷 채팅을 하고 있었대요. 채팅하 는 애가 살려달라고, 자기 좀 살려달라고 채팅으로 그 러더래요. 그래서 장난하냐고 그러는데... 갑자기 컴퓨 터 바탕화면이 어떤 여자 얼굴로 바뀌더래요. 그래서 누가 그랬냐고 막 화를 내니까 아무도 안 그랬다고 그 러더래요. 근데 그 사람이 계속 살려달라고 하면서 점 점 말이 거칠어지는 거예요. 채팅으로... 근데 갑자기 그 채팅방 배경 화면이 여자가 피눈물 흘리면서 웃고 있는 걸로 바뀌고 그리고 꺼졌어요. 그리고 화면이 확 꺼지고 모니터가 나갔는데... 그 모니터 나간 화면에 귀신이 비치더래요.214) 나. 목 없는 귀신이 운전하는 차를 만난 이야기 저희 학교에요, 착하고 완전 거짓말 진짜 안하는 선생님이 계세요. 애니 메이션 선생님이 실제로 겪어 봤대요. 어디 어떤 모임을 하고 집에 갈려 고 하는데 버스가 안 된대요. 그래서 어떤 아줌마, 아저씨가 태워준다해 서 선생님이 탔대요. 친하셔서. 근데 앞에 까만 차가 음주를 한 듯이 막 비틀거리는 거예요. 아줌마랑 아저씨랑, 선생님이 너무 화가 나서 그 차 가 누군지 확인하려고 앞질러 갔대요. 운전하면서 이렇게 앞질러 가서 옆 을 봤데요. 근데 목이 짤려 있었대요. 몸통만 있고 목이 없었대요.215) 다. 검은 망토의 귀신을 본 이야기 전에는 아주 예쁜 애니메이션 선생님이 있었어요. 근데 그 선생님이 가 위를 너무 잘 눌리신대요. 근데 잘 때 꿈도 아닌데 검은 망토를 한 사람 이 들어와 가지고. 남자래요. 들어와 가지고 자기를 안았대요. 선생님이. 근데 발가락이... 아... 선생님이 이불이 쫌 작나봐요. 선생님이... 발가락 이 나오고 몸을 다 덮었어요. 근데 망토가 발가락을 스쳐 지나간 거예요. 통일촌의 군내초등학교의 제보자 학생들

20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16) 이О원(여, 12) 2012년 11월 4일 면담, 학교 선 생님한테 들음 217) 최О희(여, 13) 2012년 11월 4일 면담, 학교 선 생님한테 들음 근데 선생님이 콧물도 흘리고 진짜 무서워서 눈물도 진짜 많이 흘리셨 대요. 근데 그 사람이 나가고 나서 너무 무서워서 다시 베개를 끌어 안고 잤대요. 근데 일어났더니 침흘리면은 여기 하얗게 묻잖아요. 콧물도 묻 고...그렇게 묻어 있었더래여. 꿈이 아니었더래여.216) 라. 죽은 친구가 데려가는 것을 뿌리치는 꿈 이야기 옛날에 미술선생님한테 들은 얘기에요. 미술선생님이 진짜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죽었대요. 근데 꿈에 나타나서 자꾸 같이 가자고 그랬대요. 남 편이 있는데... 남편이 얘기 하니까 따라 가면 안 된다고 했었대요. 또 꿈 에 친구가 나타나서 같이 가자고 손을 잡고 끌었대요. 어느 버스 앞에 까 지 가서 같이 타자고 진짜 쎄게 손목을 잡고 끌더래요. 그리고 사람들이 막 버스에 몰려서 타더래요. 그때 선생님이 아주 쎄게 확 손목을 뿌리치 고는 꿈에서 깼대요. 그리고 꿈에서 깨고 아침에 보니까 침대 옆에 금붕 어가 있었는데 금붕어 3마리가 죽어있더래요.217)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부 록

20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1. 전쟁에 대한 기억 전쟁과 휴전 “낮에는 아군이 차지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와서 차지하고 그런 데야 여 기가” “전쟁 끝나고 돌아오니 마을은 다 폐허에요” “폭탄 실은 차고 우에 지붕에도 사람이 타고 갔다고” - 백연리 부근 주민들의 전쟁 경험 분단선이 가까운 이 통일촌 옛 지역 주민들은 전쟁이 발발한 직후 극심한 폭격에 급히 피난을 나가게 된다. 이들은 가까운 곳에 연고가 있어 김포나 탄현, 월롱, 광탄으로 갔다가 곧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군과 적군의 접전지 의 폭격 속에 생활하다가 1.4후퇴 이후에는 모두 내쫓겼다. 이곳이 전투고 지가 아님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유는 임진강 때문이었다. 임진강 을 두고 낮에는 아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차지하는 상황이었다. 정자리가 고 향인 이О욱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금촌, 현재 파주시청 자리에 있던 피난 민수용소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들어왔는데, 겨울(1.4후퇴 때로 추 정)에 임진강이 얼었을 때 걸어서 다시 피난을 나갔다. 주민들은 두 번째 피난길에도 다시 들어올 때를 대비해 고향과 가까운 봉 일촌, 문산 등지로 피난을 갔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까지 내려갔던 주민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09 도 있었다. 장단 진선면이 고향인 한О호는 영등포에서 포탄 실은 화물차 지 붕에 많은 피난민들과 대전으로 피난 갔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전에서도 인민군을 피해 시내로, 산 속 마을 등지로 옮겨 살았던 한О호의 가족은 1년 동안 아버지가 현지에서 품을 판 돈으로 생활하다가 금촌으로 이주하였고 휴 전이 되어서야 고향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О호의 부인은 원 고향에서 멀지 않았던 월롱면 덕은4리로 피난을 갔다. 인민군들은 피난민들보다 앞서 서 점령해갔기 때문에 더 멀리 갈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 군인 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잠자리 비행기’가 돌면 이북 군인이 안 오 고 한국군이 오기 때문에 기다려지기도 했다. 폭격이 시작될 때면 방공호 속 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운이 없는 주민들은 방공호 속에서 몰살당하기도 하 고 집이 불타버리기도 했다. 임진강 부근처럼 전방인 강원도 출신 주민들의 기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강원도 홍천이 고향인 임О소는 전쟁 발발 직후에는 가까운 시골에 잠 시 피난을 가 있다가 1.4후퇴 때 청주로 피난을 갔다. 하루에 10리, 20리를 걷고 며칠 동안 걸어서 청주까지 가야 했다. 청주 어느 학교에 마련된 피난 민수용소에 기거하다가 시내에서 조금 변두리인 우암동에 셋방을 얻어 지냈 다. 배급받은 식량과 나무 땔감으로 살다가 휴전된 후 폐허가 돼버린 고향 홍천으로 돌아왔다. 많은 주민이 피난길에 오를 때에도 노인들은 더러 고향집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었다. 최О명과 한О호가 그러했다. 임О소의 경우처럼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고향에 남겨놓은 조부모님들이 전쟁 3년 사이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마다 인민군에 대한 기억이 다른데, 60년 전 어린 나이에 기억하는 적군이란 크게 남다르거나 배타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한О호의 부인은 초 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여서 그랬는지 ‘인민군과 중공군이 들끓은’ 지역이 었음에도 큰 피해를 잘 못 느꼈다고 기억한다. 백연리가 고향인 최О명은 인 민군과 중공군이 더 신사적으로 느껴질 만큼 당시 한국군의 ‘빨갱이’ 축출이 심했다고 기억한다. 임О소는 피난길에 호의적인 인민군을 만나 노래도 배 웠다.

21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그렇게 철수해서 나오니까 단신으로 여기 나온거지” “가족들은 서너달 뿐이라고 하니까 안 나오고, 나만 나왔지” - 이북 출신 주민들의 전쟁경험 이북 출신의 주민들에게 6.25전쟁이란 가족과 생이별하고 혈혈단신이 된 아픔이었다. 이북에서 교직생활 중 인민군 선전장교로 차출되었다가 탈출해 단신으로 월남하여 입대하였던 임О권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평안남도 개천이 고향인 임О권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두 동생과 어머니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 이 되었다. 평남 교육간부양성소를 나와 1949년 평남 안주 입석 남자중학교, 여자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듬해 6.25가 발발하자 총 으로 무장한 인민군들이 와서 전교생을 집합시킨 뒤 체격을 보고 분류해 차 량 다섯 대에 인민군으로 끌고 가게 된다. 임О권 같은 젊은 교사들은 점령 지역의 문화선전장교로 선출되었다. 열악한 환경의 열차로 호송되던 임О권 은 가까운 동생뻘 친구 집 근처를 지날 때 함께 도망치게 된다. 사과 과수원 을 했던 집이라 지하실 사과상자들 안에 숨어서 넣어주는 음식을 먹고 지내 게 되었다. 얼마 후 북진한 미2사단 후견대가 길 안내를 위한 젊은이들 열댓 명을 모집할 때 지원하였다. 미군복에 칼빈총 사격술까지 갖춘 이 부대는 매 향산 쪽으로 이동하다가 산악지대에서 중공군들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게 된 다. 청천강 강변을 따라 퇴각하다가 눈이 많이 쌓여 쉬고 있는 백 대가 넘는 전차부대, 탱크대대를 만났고 중공군에 쫓길 때 전화선으로 전차에 몸을 묶 고 퇴각했지만 전차에서 떨어지며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임О권은 그렇게 문수리 비행장까지 왔지만 가족을 찾아 되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냥 영등포까지 철수해서 오게 되었다. 단신으로 월남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군 훈련소에 들어가게 되고 2년 반 정도 병사생활을 하게 된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의 낙후된 물자, 부족한 식량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2년 반 동안의 병 사생활 후 장교가 되는 시험을 치고 임관하여 2사단 17연대 소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정전이 되고 편제가 늘어나질 않자 중, 소위인 소대장들은 진급할 수가 없었고 임О권도 소대장을 7년 반을 하였다. 장О동의 고향인 개풍군 서면 전포리는 개성 근처에 있지만 6.25 전에는 남한 땅이었다. 1950년 12월에 미군의 도움으로 홀로 피난길에 올랐고 서너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11 달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 그 길로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순경이던 친척을 찾아 인천에 머물렀다가 1.4후퇴 때 인천항에서 미군 화물 선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이미 피난민이 많았던 부산에서 받아주지 않자 제 주도로 가서 6개월간 살았다. 1951년 6월에 마산으로 와서 부둣가에서 전쟁 물자 옮기는 일을 했다. 1952년도 6월에는 친척을 따라 춘천으로 이주해 미 군부대에서 일했다. 춘천에서 휴전을 맞이하고 1955년까지 지냈는데 미군들 이 철수하자 인천으로 이주하여 군에 입대하였다. 휴전 직전 20여 일간 춘천 을 지나는 화물차에는 하루 5, 6대씩 화물이 들어올 만큼 많은 포탄, 실탄 등 을 실어날랐다. 그만큼 사상자가 많았던 것이다. 전쟁과 피난 사연 “전투 구경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 “6.25 때 비가 많이 와서 다 풍년이 됐어” - 후방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 후방이 고향인 주민들 중에는 전방지역 주민들처럼 6.25전쟁을 위협적이 거나 비참하게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경북 고령이 고향인 박О혹이 10살 무렵에 기억하는 6.25 전쟁은 간혹 있는 포나 소총의 사격 같은 것이었 다. 하지만 당시 ‘호주기’라고 하는 공습 비행기에 대해서는 두려웠던 존재로 기억 하고 있다. 경북 지역의 피난민들은 청도에 있는 수용소에 모두 집결되 었으나 박О혹은 8월 2일 쯤 한 달간 피난을 간 것 외에는 대부분 고향집을 지키면서 전쟁기간을 보냈다. 김О조는 전쟁 당시 외가였던 경주 횡성 형산강 쪽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집이 없어 창고에 멍석을 깔고 자기도 했고, 밤이면 등화관제를 해서 호롱불 은 끄고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멍석으로 막기도 했다. 김О조는 인민군들 의 따발총 소리, 들것에 실려 가는 군인들 모습 등의 전쟁 기억 뿐 아니라, 비가 많이 와 풍년이 됐던 그 해 여름 냇가의 고기를 잡아서 찌개 먹을 생각 을 했던 6세 아이의 순박한 기억도 간직하고 있었다.

21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방위군에서 국민병으로, 하사관으로” - 6.25로 직업군인이 된 사람 청도가 고향인 홍О태는 방위병으로 징집된 것을 시작으로 전쟁과 동시에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된 주민 중 한 사람이다. 홍О태는 전쟁 직후 방위군 으로 징집되어서 경남 창원쯤에서 10일 동안 교육을 받고 전방으로 올라오 게 되었다. 1951년 2, 3월에 시작된 방위병 복무는 9.28에 수복된 서울로 올 라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식군인이 아닌 방위군은 총, 군번도 없었고 1개 중대에 4, 5자루의 총만 지급될 정도로 열악했으며 빨치산들이 식량운반차 량을 자주 공격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량을 공급받기도 어려웠다. 이들 방위군들이 영천, 안동, 영주, 제천 등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을 때가 9.28 수복 이후인 10월이었다. 서울에 와서 군의관을 통해 신체검사를 하고 부상병들을 귀가시키기 시작했는데, 홍О태도 당시 말라리아를 앓아서 건강 이 좋지 못했으므로 귀가 조치되었다. 제대증이 아닌 귀가증을 받은 4명이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서울역까지 기차가 오지 못하므로 영등포로 가야 했 다. 한강에 띄운 부교를 뛰어 건너서 용산역에 도착해 이틀을 노숙하며 기차 를 기다렸다. 여객기차는 없었기 때문에 화물기차를 몰래 타고 내려갔다. 중 간 중간 열차가 설 때마다 역 주변 밭에서 무 같은 것을 뽑아 와서 먹었다. 대구에서 2명이 내리고 한 명은 밀양에서 내리고 홍О태도 고향인 청도에서 내렸다. 당시 18, 19세였다. 고향으로 간 뒤 부산의 빵집에 취직하여 있다가 1951년 11월에 정식으로 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와 입대를 했다. 입대 후에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하 사관학교까지 졸업했다. 일반병으로 입대하여 차출되어 하사관학교에 가게 되었다. 1952년 1월 6일에 입대하여 16주의 신병훈련을 받고 하사관학교에 서 8주 교육을 받으니 6개월이 지났다. 미군 수송함 LST를 타고 이틀 만에 강원도 양양에 내렸다. 새로 창설된 12사단 52부대에 가서 수색중대로 배치 를 받은 지 6개월 후에 중사가 되고 곧 휴전되었다. 수색부대에서는 서무계 조수를 하였다. 옛날 복사기인 ‘가리방’을 서툴게 사용하며 행정병 근무를 하 다가 완전한 전투태세가 되서 의무중대로 투입되었다. 당시 격렬한 전투지 중 하나였던 ‘돌바우(돌바위)고지’에는 낮에는 아군이 공격하고, 밤에 인민군 이 올라오면 후퇴하는 전투가 휴전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의무중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13 대 소속이었던 홍О태는 위생병들이 죽거나 다칠 때 고지에 가서 2, 3일씩 못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소위를 달고 전방에 배치되는 소대장들은 한두 달 안에 대부분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다. 최전방에서 ‘공격 앞으로’ 할 때는 소대장부터 올라가야만 일반병들이 뒤따라갔기 때문이었다. 휴전 직전에 휴 가를 다녀온 후에는 전방에 배치되지 않았다. 유능한 지휘관들은 막 휴가를 다녀온 사람은 전방에 바로 배치시키지 않는데 이는 정신상태가 해이하기 때 문이다. 휴전이 될 무렵에는 매우 전투가 심했다. 동해에서는 포사격이 연일 있었고 낮에는 비행기에서 폭탄을 퍼부었다. 휴전일 이틀 전에는 군부대 내 에서 모두 휴전 사실을 알고 있었다. 7월 27일 휴전되기 전 날 저녁에는 갖 고 있는 모든 포탄, 실탄을 양쪽에 퍼부었다.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고 한다. 휴전이 되고 나니 언제 싸웠냐는 듯 고요해졌고 모두 껴안고 춤을 추며 기뻐 했다. 홍О태는 휴전이 되고 나서도 6년 동안 전방에 있다가 대구 5사령부로 발령을 받았다가 1사단으로 와서 전역을 하고 통일촌에 입주했다. 2. 통일촌 마을에 들어오게 된 사연 DMZ. “잠깐 나가있으라고 해놓고…” “여기 피난민들 고생 직싸게 했어” -DMZ 조성으로 쫓겨난 백연리 주민들 휴전 이후 민통선, 비무장지대 때문에 통일촌 옛 지역 주민들은 전쟁 이후 에도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내쫓기게 된다. 이들이 고향에 다시 들어 오기까지는 통일촌이 생긴 1973년이 될 때까지 20년이 걸렸다. 정자리가 고 향인 민О승은 전쟁 직후 가까운 곳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나갔다 들어오 고를 반복했다. 휴전된 이후에는 비무장지대, 민통선을 만든다며 잠깐 나갔 다 오라고 했던 지시에 고향을 떠났으나 이는 오랜 고생으로 이어졌다. 휴전 이후에도 피난생활이 이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떠났기에 배급 식량에 의존해 살다가 그마저도 몇 달 만에 끊어졌고 주민들의 고생이 극심 했다. 또 다른 정자리 주민이었던 이О욱도 휴전 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미군

21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등이 나가라고 하여 지어놓은 농사도 수습하지 못한 채 쫓겨났다. 이들 주민 은 서울, 파주 등 타 지역으로 이주해 살아갔다. “팔도사람 다 와 있어” “제주도 빼고 다 와 있어” - 여러 지역에서온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통일촌 군인 출신 40세대, 일반인 40세대로 이루어진 통일촌은 전국 각지에서 모 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팔도사람 다 있다’, ‘제주도 빼고 다 와 있다’라고 하곤 한다. 군인들은 육군본부에서 공문이 내려와 통일 촌 입주 공고를 알았고, 일반인들은 파주시의 연고자 선발로 알게 되었다. “고향이 여기니까” “이북이 가까워 온 곳” 백연리 출신인 최О명처럼 대부분의 일반인 주민들은 파주시민을 대상으 로 한 파주시의 통일촌 입주민 공고를 접하고 들어오게 되었다. 장단이 고향 인 이О훈처럼 순수한 농사꾼으로서 생계를 위해서 들어온 사람, 김О자처 럼 남편이 장단 출신이면서 군인이어서 제대하고 함께 들어온 사람도 있었 다. 백О달도 파주 주내가 고향으로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온 주민이다. 백О 달에 의하면 1973년 당시 우리나라 경제에서 쌀은 현금보다 더 중요할 때였 다고 한다. 공무원 봉급이 농사꾼 수입에 훨씬 못 미칠 만큼 쌀값이 높았을 시절에, 농지를 무상으로 준다는 조건은 많은 신청자를 모집하게 하였고 심 사를 거쳐 최종 입주자가 선정되었다. 백연리, 정자리, 읍내리에 살았던 약 15명이 고향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장단 출신 사람들 이었다. 임О소 같은 경우는 이북이 고향인 군인출신의 남편을 따라 들어온 사람이다. 입주 전에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던 임О소의 남편은 아내의 반 대를 무릅쓰고 입주하여 ‘이북 가까이 살면서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들어간 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6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떴다. “제대하고 들어오다” “월남 갔다 온 사람들” - 군 출신 주민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15 군인 출신의 주민들은 당시 군인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 분 생계를 위해 통일촌에 입주하기를 결심했다. 급여가 낮을뿐더러 자녀 교 육에 혜택도 없던 시절이었다. 홍О태는 휴전 이후에도 6년 동안 전방에 있다가 1958년도에 후방인 대구 5사령부로 가서 6년 동안 근무하고 1사단으로 왔고 통일촌에 들어오게 된다. 더 근무하여 준위계급을 달수도 있었지만, 급히 제대하고 통일촌에 들어온 것은 당시 농지 9천 평을 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일반병사로 입대한 장О 동은 자신이 속한 22사단이 해체되어 2사단으로 편입된 후, 1960년쯤 미군 카투사에 1년간 근무하다가 1사단으로 왔다. 그는 통일촌 건립 이전 1사단이 운영했던 ‘전진농장’에서 일하다가 통일촌에 들어오기 위해 전역하였다. 당 시 전진농장에는 곧 제대할 사람도 있고 군복무를 더 할 사람도 있었지만 농 지와 집을 보급해준다는 말에 모두 제대했다. 경주에서 20대까지 살았던 김О조는 1966년에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만 7 년간 군생활을 하였다. 1969년에 1년 반 동안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해서 1사단으로 왔고 통일촌에 들어오게 된다. 전북 남원이 고향인 김О식은 30사 단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월남에 파병되었고, 1971년도에 1사단으로 와서 통일촌에 입주하게 된 사람이다. 홀로 월남한 이북출신 임О권은 월남에서 1967년부터 69년까지 복무하고 귀국한 뒤 육군본부에서 교련장학관으로 파 견을 나가기도 하고, 특전사령부 인사처 과장 등으로 근무하였는데 진급이 나 처우에 불만이 많았던 차에 셋방살이밖에 못했던 가난한 시절에 집도 지 어주고 농지도 준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통일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육, 해, 공군 출신들이 골고루 지원했는데 육군이 가장 많이 들어왔고, 해병대도 몇 명 지원했으나 입주하지는 못했다. 임О권은 당시 군인 출신 주민들은 25 사단, 1사단에서 온 중·상사들이 20명이었고 대위 2명, 소령 16명, 중령 댓 명, 부사단장 하던 대령 1 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혼 안하면 들여보내주지 않았어” “통일촌 오려고 급히 결혼했지” - 입주하기 위해 한 결혼 당시 통일촌 입주 심사는 16가지 서류로 이루어졌다. 이 심사에는 결혼 여 부도 입주 조건에 있어서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부부들은 부랴부랴 신

21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고를 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서둘러 혼인하기도 하였다. 백О달은 2월에 식 도 올리지 않고 혼인을 하고 4월에 통일촌에 들어왔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 하여 통일촌에 들어왔지만 가끔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부모의 많은 재산을 뒤로 한 채 들어온 통일촌에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김О용은 농사를 직접 지어보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통일촌에 들어오기 위 해 18년 동안의 군생활을 정리하고 박О년과의 결혼을 서둘러 했다. 파주시민이거나 군대출신이 아닌 가구도 있다. 박О년의 동생 박О희는 입 주 전 통일촌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2년 만에 땅을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 농사 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가는 군인 출신 주민들이 더러 있었는데, 한 장교 출신 의 주민이 적성이 안 맞아 통일촌을 나갈 때 파는 땅을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 3. 통일촌 마을의 역사 “육이오 전에는 마을별 부락별 씨족으로 모여 살았으니까” - 집성촌 6.25 전의 옛 통일촌은 마을별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종중산이 많았던 백연리의 강릉 최씨와 전주 이씨가 주로 있었고 정자리에는 여흥 민 씨들이, 임진강 옆에는 전씨들이 살고 있었다. 몇몇 성씨들의 집성촌이었지 만 현재 통일촌에 그 성씨들의 후손은 두어 집들 밖에는 없다. 강릉 최씨는 최О우, 최О순 두 집이 있고 이씨는 이О훈이 있다. “통일촌이 위치한 곳은…” 통일촌은 비무장지대 DMZ와 민간인통제선 사이에 위치해 있다. 비무장 지대(Demilitarized Zone, DMZ)는 휴전 이후 미군이 책정한 남과 북을 가 로지르는 155마일(248km)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양쪽 2km 지점에 지정 한 군사시설금지구역이다. 민간인통제구역, 일명 민통선(民統線 : Civilian Control Line)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 밖에 설정한 구역 을 말한다. 민간인통제구역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비무장지대를 따라 띠 형태로 분포하는데, 파주지역은 임진강 이북지역의 군내면ㆍ진동면ㆍ장단면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17 등이 이에 해당된다. 군내ㆍ장단ㆍ진서ㆍ진동 등의 4개면은 임진강 너머에 위치해 있으며, 군내면을 제외한 3개면은 미수복지구이다. 이들 지역의 대부 분이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군사시설 보호지역에 속하며 통일촌과 대성동에 만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1사단에서 중사였던 홍О태는 휴전 이후에 진지보수를 맡게 되었고, 전방 에서 지뢰제거를 하였는데 전방이다 보니 인민군들과 마주칠 기회도 있었 다. 인민군들은 지뢰탐지기가 없어 긴 장대를 끌고 다니면서 지뢰를 터뜨리 곤 했다. 이북 사투리라서 똑똑히 알아듣지도 못할 말이지만 '밥 먹었어? 쌀 밥하고 소고기국 먹었다. 똥바가지야!' 라고 농담도 주고받곤 했다. “2킬로 밖에 있을 때 통일촌이 개발이 된 거니까” - 민통선이 줄어들다 1980년대에 민통선 내의 마을들이 출입절차와 영농시설에 대한 규제완화 등을 요구하면서 민통선을 북상시켜 설정하였다. 민통선이 북방 지역의 면 적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민통선 내의 마을의 면적이 늘어나게 되었다. 통 일촌 역시 북쪽으로 1킬로 넓어진 땅을 갖게 되었다. 홍О태가 기억하는 통 일촌 건설 당시의 민통선은 도라산 입구에 있는 도라산 부대 앞 철조망 너머 로 1킬로 공간까지였다. 그래서 당시 통일촌이 거기까지밖에 개발을 못 했 다. 군사분계선 양쪽에 2km씩 물러서서 4km, 555마일의 공간이 있던 것이 80년대에 정부가 합의하여 1km씩 총 2km 앞으로 가게 되었다. 통일촌 북 쪽으로 넓어진 땅에는 집문서를 가진 주인들도 나타나는 등 지주들이 대부분 찾아 농지로 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통일촌은 민통선 내에 있으면서 군사 안보적 차원에서 민감한 지역이다. 지도자료, 항공사진, 관련 도면자료 등이 좀처럼 공개되어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도깨다리밖에 없었어” - 통일촌의 옛 모습 파주 임진강에는 4개의 다리가 있다. 휴전협정 때 포로들이 넘어온 자유의 다리, 판문점과 개성을 연결하는 통일대교, 파평의 리비교, 두포리의 전진대 교가 그것이다. 6.25 당시에는 이런 육로나 대교가 없어 임진나루에서 배로 오갔으며 군인들도 배로 점령했다가 후퇴했다가를 반복했다. 주민들이 철다

21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리라고 부르는 ‘도깨다리’는 배로 통행하던 시절 유일한 다리였지만 기차 철 교였기 때문에 기찻길에 나무판을 대고 차가 다녔다. 이 도깨다리를 주로 이 용했던 사람들은 미군들이었는데, 큰 차는 커서 좁은 다리로 못 가기 때문에 밑으로 다니기도 했다. 약 5년 전에 출렁출렁했던 다리가 위험하다고들 해서 해체하였고 현재는 잠수교처럼 이용하고 있다. “여기가 다 야산이고 공동묘가 많았어” 통일촌 마을은 야산을 고지에서부터 깎고 개간해 주택지로 만든 것이다. 통일촌을 건설할 당시부터 보아온 1세대 주민들은 산에 묘자리가 많았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산을 헐어내고 마을을 만드는 공사 당시 군청에서 공 고를 하여 대부분 묘 주인들에게 배상을 해주고 이장했지만 무연고자들의 묘 는 통일촌 공원묘지에 합동으로 모시고 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마을 주민 몇 명도 이곳에 묻혀있다. 현재까지도 형질변경을 안한 집터는 등본에 묘지 자리로 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집은 지을 때 시신이 10구나 나왔다. 공사 중 에 시신을 발견하면 재수가 좋다는 미신이 있어 공사를 진행하던 불도저, 포 크레인 기사들이 삼색나물과 제주까지 준비해 정성껏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까치골, 안골” - 지명 0000 부근을 까치골이라고 한다.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40년 전에 그곳에 있던 큰 나무에 까치집이 있어 부르기 좋게 ‘까치골’이라고 마을사람들이 부 르기 시작했다. JSA쪽으로 가는 골짜기, 개성공단 들어가는 터널 쪽은 안골 이라고 한다. “수내나루” - 수내나루와 고랑포 북문 다리 밑이 수내나루가 있던 자리이다. 수냇강이라고 했던 이 지역은 지금은 농지로 쓰고 있어 흔적이 없지만 임진나루에서 배타고 올라올 때 주 로 사용했다. 임진강 나루터로 적성 장좌리에 연결되어 연천 고랑포까지 가 는 나루터였다. 장좌리와 장단군을 연결하던 나루터로 연평도에서 잡은 조 기들을 개성으로 운반하던 큰 나루터였다. 고랑포는 경기북부 농특산물의 집하장이기도 했으며 번성했을 때는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을 정도였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19 “여기 최전방 사단이름이 전진부대잖아? 그래서 전진 농장이다 이거지” 통일촌의 시초는 정부의 전략촌 개발사업 계획 이전에 전진농장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진농장이란 1972년 4월부터 1사단 사단장의 주 관 하에 군부대 내에서 자급자족을 위해 15명의 군병력이 노후 경유지를 경 작하여 운영한 농장이다. 1사단 부대 이름이 전진부대였으므로 ‘전진농장’이 라고 불렸다. 군복무를 하면서 농사도 지었던 전진농장 소속 군인들은 밤에는 전진농장 근처 막사에서 잤다. 전진농장에는 1사단에서 중령 1명, 하사관들, 일반 사병 들을 지원해주어 총 50명 정도의 군인들이 생활하였다. 전진농장 경작에 참 여했던 인원은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5명으로 통일촌 입주심사 당시 연좌제 에 걸려 탈락한 1인 외에 14명 전원이 통일촌에 입주했다. 현재는 대부분 고 인이 되었고 생존한 사람은 총6명으로 김О식, 장О동, 최О복, 김О용, 이 О태, 박О혹이다. 전진농장에서 일하던 하사관 중 곧 제대할 사람도 있었고 군복무를 더 해야 할 사람도 있었지만, 농지와 집을 보급해준다는 통일촌 개 발계획 소식을 듣고 1972년 7월~8월에 모두 제대하여 통일촌 입주민 모집 에 지원했다. 전역을 해야 지원 자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통일촌에 들어오기 위해 전진농장에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고도 하고, 제대한 하사관 모두가 통일촌에 들어올 정도로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몇 년 살지 못 하고 이주해 나간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통일촌 입주민 모집 중에는 군인들이 제대하고 농사를 지을 때는 병사 2명을 지원해준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실제로 이행 되진 않았다. 전진농장에서는 주로 벼농사를 지었는데 당시에 많이 고생들을 했다. 장 О동은 고생한 보람도 없이 처음 심은 벼농사를 망쳤던 일을 기억한다. 첫 해에 도깨다리 근처에 심었던 통일벼를 추수도 하기 전인 10월말 경에 내린 눈 때문에 파주시 공무원들까지 동원해 다 묶어 내버려야 했다. “이스라엘 키부츠처럼 전략촌을 맨든거야” - 통일촌 계획 미 육군 제8군단사령관이 설정한 민통선의 통제권이 한국군에게 이양된 후 정부는 정책적으로 1959년부터 99개의 자립안정촌(自立安定村)을 건설 하였고, 1968년에 발표한 민북재건촌건립계획 하에 1968∼1973년에는 12

22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개의 재건촌(再建村)을 건설하였다. 1972년에는 ‘수복 및 접적지구 종합개발 사업’을 본격화하여 1973년에 2개의 통일촌(統一村)을 건설하였다. 통일촌 은 1972년 당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한참 진행되던 시기로 ‘농촌근대 화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기도 했다. 1972년 5월 적십자 전방사무소를 방문해 시찰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 농촌을 건설하라”고 지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통일촌 건립 기본계획이 확정되었다. 당시까지 건설된 재건촌은 종합개발계획 없이 영세민을 입주정 착시킴으로써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외래인과 연고인들이 혼재 하여 단결력과 향토애가 없었고, 토지와 주택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아 임시 거주지라는 생각으로 주택관리가 소홀했다. 통일촌은 이러한 재건촌의 미비 했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출발했다. 당시 파주군 군내면 백연리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가 통일촌의 건설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이는 이스라 엘의 ‘키부츠’농장을 모델로 한 것으로 유사시 자위능력을 가진 전략촌을 조 성한 것이었다. 즉 통일촌은 시범농촌이면서 대북선전용으로 활용할 목적으 로 건설된 것이었다. 통일촌 건설은 수복지구개발사업과 농촌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 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통일문제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육군본부 민사군정감실의 소장으로 있던 육영수 여사 의 조카에게 통일촌 건립에 대한 의지를 지시하였다. 또, 통일문제를 계획할 만한 교수를 지정하여 각 관청의 2급 이상 공무원, 중등학교 교장급 이상 등 을 선발해 교육시켰는데 통일연수원에서 역사교육을 포함해 통일교육에 필 요한 교재를 만들어서 논문을 쓰게 했다. 그 연구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전방 에 주민을 이주시켜 전략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촌을 건설하기 위해 관계부처로 여러 과제들이 하달되었다. 농업에 관련된 부분은 농림부로, 군사문제 부분은 국방부로, 교육문제·농토 개간문 제 등 여러 과제가 생기기 때문에 내무부와 국방부간의 내무국방각서가 만들 어졌다. 재정부에서 지원을 받은 예산은 농수산부로, 파주시로 내려오면 파 주시청에서는 각 사업을 벌일 업체를 지정하고 개간하였다. 개간사업, 주택 사업 모두 국가예산으로 진행한 것이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21 “박정희 사단장 할 적 부관이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주민들이 이해하는 통일촌 건설에 대한 이야기는 제각기 조금씩 다르거나 변형되어 있다. 박정희대통령이 1972년 5월에 이 지역을 순시하다가 전진농 장의 농사짓는 군인들을 보고 청와대에 있었던 박О선이 1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 것이 통일촌 건설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또, 전진농장에 대해서 도 박정희대통령이 사단장을 할 시절의 전속 부관이던 소장이 단독으로 하사 관들을 데리고 4거리 벌판에 개간을 한 것으로, 이 지역은 군단장 소관의 작 전지역이었으므로 난리가 나서 전진농장이 한 달간 중단된 적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그 소장이 박정희대통령에게 찾아갔고 내무부, 국방부, 농림수산 부 3개 부처가 협의하여 통일촌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주민 도 있다. 주민들은 통일촌 건설에 대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까지 정확히 알 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이스라엘 키부츠를 모델로 한 전략촌이었다는 점, 대 통령 지시로 1년 만에 계획과 건설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은 알고 있다. "황무지 넓은데 개간해서 농사지으면 군대생활보다 낫지 않겠나" "당장 큰 부자될 것 같이 얘기하니까 지원했는데, 와서 막상 해보니까 그렇게 안 되는 거라" - 통일촌에 지원하다 입주자의 선정은 ‘군복무를 마친 사람, 5인 가족 이내로 노동력 2인 이상 인 기혼남자, 새마을 정신이 투철하고 국가관이 확고한 사람, 신체 건강하고 영농능력이 있는 사람, 사상이 건전하고 전과사실이 없는 사람, 주벽 및 도 벽이 없고 채무가 없는 사람’ 중에서 선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제대를 앞둔 장교 및 하사관 40세대와 예비군 자격을 가진 원주민(원 고향인 주민) 40세 대, 총 80세대를 통일촌 입주자로 선발하였다. 일반인들은 파주시의 연고자들 대상으로 선발한다는 공고에 지원하였고, 군 출신들은 1973년 초에 내무부, 국방부의 합의서를 토대로 1사단 부사단장 대령이 주관이 되어서 모집했다. 대상은 중·상사 이상인 자로서 제대·전입을 희망하는 자였다. 1973년 4월에 전국적으로 육군본부에서 공문을 내려 군인 출신 입주민을 모집하였고 각 사단에서 하사관, 장교들이 지원하였다고 한 다. 전진농장에 있던 하사관들은 모두 통일촌으로 들어오기로 하고 1972년 7월에 모두 전역을 신청하였다. 현역군인으로서는 군복을 입고 농사를 지을

22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키부츠같은 전략촌으로서 전투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는 조건이 선발에 우선이 되었다. 이О욱은 6.25 참전군인을 선발했다 고 기억하고 있고, 백О달은 월남 파병 경력 등의 전투경험이 중요시되었다 고 이야기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땅 천 평으로도 먹고 산다 할 정도였던 당시에, 정확한 측량 전이기는 했 지만 논 6천 평, 밭 3천 평, 총 9천 평을 준다고 하는 조건은 큰 갑부 정도의 규모였다. 따라서 너도나도 혹해서 덤벼들게 되었다. 하사관 출신들은 군에 남아 간부생활을 계속 한다 해도 상사에서 준위 정도밖에 진급할 수 없고, 지금처럼 자녀들의 무상교육 혜택 같은 군인에 대한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통일촌 입주를 신청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입주한 제대 군인들에 게는 가족 교육비 50%, 교통비 50%를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장화도 없이 맨발로 들어가 개간 하는 거야” “남자들만 들어와서 숙영을 해가지고” - 공동영농, 개간, 경지정리작업 입주심사 후 입주민이 정해지자 1973년 3, 4월에 파주시에서 영농교육을 받았고 5월에는 통일촌에 세대주들만 들어와 개간, 정지작업을 하며 터전을 닦기 시작했는데, 7월에 주택이 완성될 때까지 숙영생활을 하였다. 공동영농 을 하였을 때 숙영지는 미군부대가 동두천으로 이동하면서 철수한 뒤 남은 집 자리였다. 공터에 군용천막을 길게 치고 40명씩 1반, 2반으로 나누어 기 거하면서 정지작업을 했다. 가족들은 통일촌 밖에 둔 채 세대주들만 들어와 서 취사병을 정하는 등 군대처럼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통일촌은 공동묘지 가 있는 산을 불도저로 깎아서 만들어야 했으며 정지법상 한 필지를 900평 m, 1200평 단지로 만들고 필지 당 중간에 농로를 만들었다. 농사를 이때부 터 짓기 시작했는데, 수리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벼농사는 생각도 못했고 콩 같은 작물을 심기 시작했다. 입주 후에도 한동안 공동영농을 했다. “계급만 있었으믄 위치도 좋은데 뽑고 할 텐데” “집이 몇 호인지 호수 정해놓고 제비뽑았지”- 제비뽑기로 정한 땅 9천 평을 준다던 입주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이 받은 땅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23 은 논 4500평과 밭 2000평도 좋은 환경이었다. 덜 받은 사람들은 5 ~ 600 평씩 차이가 났다. 가족 수에 관계없이 모두 일정한 규격이었던 주택은 방 2 개, 부엌, 거실, 창고 건물로 이뤄진 슬레이트지붕 집이었다. 1973년 가을 쯤 80호의 주택이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집들이 완성되어갈 무렵에 조를 짰는 데 80세대 중 10세대씩 1조로 하여 8조를 만들고, 4조를 1반으로 만들어 8조 2반 체제를 만들었다. 중령, 소령, 대위, 상사, 중사, 일반인 이런 식의 계급 위주로 편성하였는데 반장은 고참 중령들이 맡고 조장은 소령, 중령, 대위 들이 맡았다. 집과 땅을 호수를 정해놓고 제비를 뽑아 정했다. 각 조에서 10 명을 대표하는 사람이 한명씩 나와서 조별로 어떤 땅과 집 자리를 가질 것인 지 제비를 뽑았고, 각 조마다 10채의 땅과 집을 알아서 분배하였다. 어느 조 는 입지가 나쁘고 좋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10명끼리도 제비뽑기를 했다. 어 느 조는 조장이 집을 각기 정해줬는데 조장이나 반장은 지휘나 통솔하기 좋 은 길가나 중앙에 위치한 집들을 가지고 계급 순으로 분배했으며 군 출신 이 외 일반인들은 나이순으로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런 분배방식에 ‘계급 만 좋았으면 위치 좋은 집을 뽑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기도 하였다. 이 8개조는 북한의 오호 담당제를 본 따 만든 것이라고도 하는데, 땅과 집 의 위치를 정할 때 외에도 예비군 훈련, 품앗이를 할 때 등에도 함께 하는 통 일촌의 기본단위 집단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미군사단장, 미군부대 등 해가지고 입주식을 거창하게 했죠” - 입주식을 하다 심사를 거쳐 선발된 통일촌 입주 세대는 공식적으로 80세대이지만, 관련 기관 종사자 4세대까지 포함해 총 84세대가 입주하여 생활을 시작했다. 박 О혹이 기억하는 초창기 통일촌 입주가구는 총 83가구였다. 입주세대 80세 대 외에 학교사택, 교회목사, 양수장관리인이 들어왔었다. 1973년 8월 21일 에 국방부차관 유원창, 내무부장관 김연옥, 경기도지사, 1사단장, 미군사단 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을 거창하게 하였다. 입주식에 참여한 주요 인 사들을 보면 당시 통일촌 조성이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입주식을 가졌던 8월 21일은 실제로 모든 주민이 입주한 날은 아니다. 입 주식을 하던 당시에도 주택들이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었고 9월쯤 완공되

22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었다. 일부 완공된 집의 주민은 먼저 입주하곤 했는데, 방 하나만 먼저 세워 져도 입주하였다. “몰래들 숨겨가지고 들어왔다더라고” “우리 동생하고는 항아리에 숨어서 들어오고” 통일촌에 입주할 수 있는 세대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군복무를 마친 사람, 5인 가족 이내로 노동력 2인 이상인 기혼남자’로 정해져 있었다. 입주자의 구성은 부부와 자녀를 중심으로 한 2세대가 주를 이뤘지만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 자녀가 3인 이상인 경우도 있어 5인 이상 가족도 더러 있었다. 홍О태는 ‘노동력 제공자 2인 이상’이라는 조건만 있을 뿐 가구 내 인원 수 제한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증거로 ‘칠공주네 집’으로 불리던 집도 문제없 이 입주했다고 하였지만, 몇몇 주민들의 기억으로는 ‘5인 가족 이내’라는 조 건을 지키기 위해서 이사할 때 몰래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민О현의 부인은 입주 시 조사를 피하기 위해 아이들이 여럿 있는 가족은 몰래 아이를 들여와 야 했고, 몰래 왔기 때문에 주민등록에도 나중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를 회상한다. 입주 2세대인 최О우의 가족도 조부모와 4남매까지 8명이었으 나, 2명의 아이는 항아리 속에 숨어서 들어왔다. “우리가 너무 고생했는데 그 땅을 다 뺏겨버리니까” “소유권은 없고 경작권만 있는 상태에서” “나라에서 받은 땅을 땅 임자한테 돈 주고 샀지” - 수복지구 부동산특별조치법 통일촌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1980년대에 있었던 ‘수복지구 부동산특별 조치법’시행 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현재까지 재판중인 주민들이 있을 정 도이다. 이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민통선 일대 실제 토지 소유자들이 나타나 옛 등기문서와 인후보증을 통해 자기 땅을 찾아갔다. 당시는 세 사람만 인후 보증을 해주면 등기를 내주었던 때여서 이를 악용해 월북한 주인의 땅을 등 기에 올리고 되파는 브로커들도 있었다. 이 특별조치법에 의하면 원칙적으 로 정부 차원에서 건설한 통일촌 내 주택들은 무허가 주택이고, 주민들은 소 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가지게 된 셈이었다. 정부에서 받은 땅을 개간하여 살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25 고 있는 주민들은 법원까지 가봤지만 소용없었다. 경작자와 소유권자 사이 의 법정 소송에서 소유권자가 잇따라 승소하면서 토지 분쟁은 소유권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군이나 행정당국에서 민통선 지역의 유휴지를 경작자 에게 분배한 것은 임시적 조치에 불과한 것으로 소유권 자체를 부인하는 구 속력은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로 토지 소유권자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 한 것이다. 제대해서 농사를 지으면 집도 땅도 공짜로 준다고 하여 제대하여 정착한 군 출신 주민들의 억울함은 매우 컸다. 정부가 일괄적으로 수매하여 다시 나눠달라고도 요청하였는데, 파주군청에서 지주들의 손해를 이유로 반 대하여 개인별 재판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장О동은 당시 한 달 꼬박 재판에 매달렸는데, 통일촌 계획과 취지를 담고 있는 내무부 국방부 협의각서를 증 거로 내놓아도 재판에서 인정되지 않아, 받았던 땅을 다 빼앗기고 현재는 3 천여 평밖에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통일촌에서 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원주인들에게 돈을 주고 땅을 사야 했지만, 경제 적 여유가 있어야 살 수가 있고, 그에 앞서 주인이 판다고 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홍О태의 땅주인은 반 밖에 팔지 않겠다고 하여 반만 살 수밖에 없었다. 박О식의 경우 집 터 주인 3명에게 각각 땅을 다시 사서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여러 명의 소유로 되어있어 집터도 못 산 사람도 있었다. 이런 문제들로 통일촌 전 주민들이 청와대 앞으로 데모를 하러 간 사건도 있었다. 청와대 앞 기습데모를 계획하고 군부대나 출장소에서 못 보도록 불 빛을 가려가며 새벽 2시에 전 주민이 서울로 향했다. 기차로, 지하도로 이동 하여 당시 중앙청 앞 공원에 모여 있다가 붙잡혀서 매를 맞기도 하며 전경차 에 실려 다시 마을로 쫓겨왔다. 아이들까지 모두 데려갔던 데모는 비록 불발로 끝이 났지만 조금은 효과 가 있던 것인지 정부는 주민들이 융자를 받아 땅을 매입할 수 있도록 평당 2000원씩을 지원해주었다. 이에 주민들은 20년 장기상환으로 정부에서 돈 을 빌려 땅을 샀다. 사지 못하면 임대, 소작 형식으로 경작을 계속 해 나갔 다. 한О호처럼 땅을 빼앗겼지만 그만큼 많이 사서 농지를 유지하고 있는 주 민들도 있다. 외부에 살고 있는 땅주인들은 새로 집을 지어 거주할 수는 없 어서 문산 등지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든지 통일촌에 지어진 집을 사서 들어 와 농사짓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2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남들은 안 믿어요. 당해본 사람 아닌 이상…” 민간인통제구역은 군사작전과 보안유지를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지만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는 영농 등 토지이용이 허가된다. 민통선 내에 위치한 통일촌도 출입과 행동, 토지 소유권 행사 등이 통제되는데, 이는 통일촌 주 민들이 받는 가장 큰 불편이다. 군사작전지역이어서 사단에서 계속 관리를 받으며 주민증을 검문소에 맡기고 출입증을 받아서 들어와야 한다. 특히 손 님들의 신원조회는 여러 주민들을 불편하게 했던 기억을 남기고 있다. 멀리 서 오는 친척들도 미리 면회를 신청하지 않으면 바로 들어올 수 없었고 하룻 밤 외부나 초소에 잡아두었다가 허가가 떨어진 후에야 들어와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주민들을 직접 통제하는 군인들 때문에 주민들은 매우 고통을 받 았다. 통일촌 건설 초기에는 군인들이 주관을 많이 했다. 5.16 이후 군인들 의 위상이 높아진 상태였고 더군다나 민통선 안이라 통제가 많이 심했다. 이 러한 통제는 출입과 행동 등을 제재하는 것을 넘어 주민들의 입주를 좌지우 지할 정도로 심해졌다. 조금만 잘못하면 트집을 잡아 사단에서 군인들이 와 서 차로 짐을 실어내고 내쫓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최전방이기 때문에 부근 의 많은 군부대의 훈련 사격소리는 물론이고 북한에서 하는 대남방송은 무척 시끄럽고 무서웠다. 그러나 통일촌에 살다보니 점차 익숙해졌고 김대중 정 부 이후로는 대남방송이 없어져 소음으로 고통 받는 일은 줄어들었다. “여긴 초등학교밖에 없어서” “사서 이고 버스에서 내려서 저기까지 걸어오고” 통일촌은 교육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통일촌에 들어오기 전 군인가족 자 녀들은 군인자녀교육기관이었던 동부이촌동의 중경고등학교를 다녔다. 통 일촌 내에는 초등학교가 있지만 중·고등학교는 문산 등의 외지로 가야 했 다. 김О태의 경우 자녀들이 문산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늦은 하교 때에 는 마중을 가야 했다. 임О소 같은 경우는 자녀들이 서울로 진학하여 친척집 에서 기거하며 공부하였다. 특히, 통일촌은 대중교통이 불편했다. 옛날엔 사 거리 직판장 앞에서 버스를 타야 했는데 들어오는 입구의 교량은 일방통행이 어서 한 쪽이 건너올 때는 한 쪽이 서서 기다리곤 했다. 문산 시장에서 야채,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27 곡물 등을 장봐서 돌아올 때도 머리에 이고 가져와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들어오곤 했다. 외부로 학교를 다녀야 했던 중학생 이상 학생들도 마 찬가지였다. “군인출신, 민간인출신 이렇게 불렀지” 통일촌을 구성하는 주민들은 파주 지역에서 모인 민간인 40세대와 전국 에서 모인 군인 40세대였다. 초기에는 군 출신들 중 일부가 중대장과 이장 을 겸하면서 군대식으로 민간인들을 통솔하려하다가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 다. 또, 군 출신들도 장교와 하사관 출신으로 나뉘어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민간인들과 하사관 출신들은 장교 출신 주민들이 계급 순으로 일처리 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다. 유일한 특전사 출신인 임О권은 대부분 1사단에서 들어온 군인들로 서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 속에서 아는 이 없이 홀로 적응해 야 했다. 80세대가 들어온 후 조를 짰고, 대령이었던 부사단장이 임О권에게 1조장을 시킨 후에 무리하게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이에 임О권은 다 예편 한 사람들인데 원칙대로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회의를 통해 투 표를 하였는데, 결국 임О권이 초대 중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초기에는 출신별로 조금 갈라지긴 했지만 점차로 단합이 잘 되어 40년 넘게 잘 지내고 있다. “총 쏘고 아휴 사격훈련하고” “일 년에 세, 네 번씩 훈련 받았지. 벙커로 가서 숨는 것도 하고” - 군사훈련이나 비상시 행동요령 ‘통일촌 조성 승인 심사서’에 따르면, ‘휴전선 인접지역의 지위향상’, ‘승공 시범촌 건설’, ‘군사작전에 기여’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어 대북선전 및 군사 전략요충으로서의 마을조성이라는 좀 더 주요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최전 방인 만큼 안보사건에 민감함은 물론이고, 언제나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도 록 주민들을 훈련시켰다. 1970년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특전사가 진입하려고 헬기에서 낙하한 곳이 통일촌 내의 농경지였다. 당시 마을은 전쟁이 나느냐 안 나느냐 일촉즉 발의 상황이었고 학교도 일주일간 휴교했다고 한다. 가을 추수 전 논이 군사

22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작전으로 망가져도 보상은 말도 못 꺼낼 정도였다. 1980년대에는 간첩이 잡 힌 사건이 있었다. 임진강 쪽 1사단 부근에서 공작활동을 하던 간첩 세 명을 일반병이 발견해서 잡았던 사건이다. 간첩들은 통일촌 내 78호~80호 주택 근처에서 잠자고 움직였다고 하는데, 당시 군 부대는 물론이고 마을 전체에 도 비상이 걸려서 일 주일 동안 농사도 못 짓고 군에 무조건 협조해야 했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훈련에 들어오라고 하면 예비군 훈련을 받고 군에 협조해 야 하는 것이 당시 마을 분위기였다. 예비군 훈련 때나 비상이 걸리면 무기창고에서 무기를 받아서 벙커로 들 어가는 훈련을 했었다. 통일촌에는 50세까지 예비군훈련을 받아야 할 정도 로 일반적인 예비군훈련이 아닌 자체적인 군사훈련 시스템이 있었다. 처음 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1년간 자주 했고 2년째에는 농사일이 늘어나자 줄 어들었고 3년째 되던 해는 주기별로 하는 대신 겨울철에 대대적으로 했다. ‘뻑하면 비상’이라고 할 정도로 사이렌 불면 뛰어나가는 훈련을 자주 했다. 군인출신의 주민이 중대장을 맡아서 비상훈련, 대피훈련 등을 주도하였고 주민들은 실제 군인처럼 각개전투, 총검술 등을 훈련받았다. 훈련 중에는 밤 에 보초도 서곤 했다. 통일촌의 모델이 된 이스라엘 키부츠의 농민들이 총 으로 무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개개인에게 총 한 자루씩 지급되어 무기고에 두었다가 훈련 때 받았다. 전쟁이 날 경우에는 전방지역인 대성동, 연평도, 백령도 주민이나 문산 주민들이 어느 쪽으로 피난해야 하는 행동요령이 있으 나 통일촌 주민들은 1사단과 함께 현장을 사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년에 한 번씩 한 도하훈련에서는 주민들이 식량을 꾸려서 임진강에 배를 타고 가 면 1사단에서 배를 가지고 나와 문산 쪽에서 들어오는 작전을 펴기도 했다. 후방으로 송계하는 것이나 피난 가는 것, 각 진지에 배치되어 경계하는 훈련 등을 받았다. 1사단에 비상이 걸리면 주민들도 훈련을 받았다. 마을 전체 외 곽을 방위하고 야간침투훈련 때는 창문에 커텐을 치고 불빛이 안 새어나가는 훈련도 했다. 안기부 홍보관이 와서 강원도 1땅굴 같은 곳에 데리고 가는 안 보교육도 있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는 구호 아래 50~60 대 여성들도 사격 훈련과 각개전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주민 중 일부는 여 자들의 훈련은 현재 부녀회식당 자리에 있던 사격장에서 1인당 9발씩 쏘던 사격훈련밖에 없었다고 기억한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29 전략촌인 통일촌에서는 벙커, 토치카, 무기고가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다. 주택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시설을 곳곳에 만들었고, 출장소 자리는 대피소로 정해놓았다. 무기고는 각 반마다 하나씩 2곳이 있었고 조별로 담당 할 토치카가 있었는데 그 개수가 8개 이상 이었다. 통일촌이 자체방위개념으 로 지어졌기 때문에 전투 목적의 토치카는 많은 반면 벙커는 하나밖에 없었 다. 벙커는 토치카와 다른데, 벙커는 지휘본부, 대피소 역할을 하는 피난처 이고 토치카는 총을 쏘며 전투를 할 수 있는 방호시설이어서 은폐, 엄폐, 위 장이 다 되어야 했다. 각 토치카는 연결되어 있어서 마을을 다 돌 수 있었다. 전쟁이 나면 물자를 보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시설은 현재 공원자리, 망향동산 밑 울타리 등에 있었는데 일부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대부분 폐 쇄되거나 사라졌고 무기고는 가정의 창고로 쓰이고 있다. 연평도 사건 때 같이 북한이 도발할 때는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종종 나온다. 요즘 주민들은 벙커로 들어가기 보다는 중요한 물건만 싸가지고 외부 로 나가 대피하는 편이다. 하지만 새로 지은 집들에는 일종의 대피소인 지하 실이 다 있어 통일촌은 여전히 최전방 전략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전쟁의 흔적 “지뢰가 둥둥 떠내려 오고 그랬다구” 휴전선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민통선은 6.25 전쟁의 휴전회담이 진행 되는 동안 교착상태에 있었던 전선이었다. 전장의 한복판이었기 때문에 지 뢰 등의 폭발물이 남아있는 곳이 많을 수밖에 없다. 휴전 이후 미군들이 전 망대를 만들어 보초를 서고 순찰을 돌던 시절, 휴전선에서 10km 떨어진 곳 에 철책선을 둘렀었다. 1968년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찻길과 이 철책 선 사이에 헬기로 지뢰를 뿌렸다. 그 때 지뢰를 뿌린 땅 위로 통일촌 주민들 이 개간을 하여 사고가 많이 났다. 또, 철책선 앞으로는 지뢰가 없었지만 철 조망 때문에 논에서 철사에 많이 찔리기도 했다. 사단의 허가를 받아 민간인 들이 지뢰탐지를 하여 지뢰를 캐내고 개간을 해야 했다. 개간한 논밭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발목지뢰에 다치거나, 지뢰 때문에 입산금지 표시를 해 둔 산 에 나물을 캐러 나섰다가 다치거나 해서 사상자가 났었다. 비가 오는 날은

23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더 위험했는데, 논밭 고랑 같은 곳으로 지뢰가 둥둥 떠내려오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오르면 지뢰표시가 많이 보였다. 도라산 자락에서 발목지뢰를 밟아 크게 다친 사람이 생겨난 이후로는 주민들은 산 쪽 깊은 곳으로는 잘 안 가게 되었고, 지금도 산에는 다들 잘 안 올라가는 편 이다. 이렇게 인적이 드물기 때문인지 노루, 고라니, 돼지 등 들짐승이 많다. 최О우는 1세대 주민들은 어딜 가면 안전한지, 어딜 가면 위험한지 잘 알고 있지만 이러한 지식이 별로 없는 외부에서 새로 들어온 연로한 주민들이 지 뢰사고를 겪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중앙정보부에서 산업시찰도 보내주고 그랬어” 산업시찰의 명목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세대주들을 모아 여러 곳을 견학시 켜주기도 했다. 주민들은 포항제철이나 철원 통일마을 같은 곳을 다녀온 것 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에서 마을을 관리하고 끊임없이 지원을 계속 해 온 것은, 접경마을로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지역민에 대한 배려 이면서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 성공적인 통일촌 조성사업으로 북한에 대한 선 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국가차원의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일부 자부담하고 정부 지원받고 해서” - 주택개량사업 농촌 풍경은 전부 초가집이던 1973년에 통일촌에 지어진 보로끄(벽돌)집 은 당시로서는 최현대식 집이었다. 1985년 6월에 주택개량사업을 하여 현재 는 부속건물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다. 정부지원 사업이었지만 일부는 자부 담으로 한 것이었다. 2개 반 중에 1반 주민들의 주택을 먼저 짓고 2반 주민 들의 주택을 나중에 짓는 식으로 했다. “장남 외에는 다 마을을 떠나요” - 젊은 세대의 부재 대부분의 입주민 2세대들은 진학, 결혼, 취직과 함께 외지로 나가 생활하 게 되므로 통일촌 내에 노동력 있는 젊은 세대들은 당연히 줄어들게 되었다. 유년시절 통일촌에 들어온 입주민 2세대인 최О우는 이렇게 젊은 세대들이 줄어드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О우는 집안의 장남들만 가업 인 농업에 종사하며 마을을 지키고 그 밑 형제들은 외지로 나가 생활하기 때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31 문에 자연히 젊은 세대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현재 마을을 지키는 40대, 50대들이 대부분 장남들인 것이다. 80세대였던 초창기 입주민 중 현재까지 살고 있는 사람은 30명, 40여 가 구밖에 되지 않는다. 부동산특별조치법 사태 때 땅을 빼앗긴 사람이 적지 않 지만 그래서 통일촌을 나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고된 농사일에 흥미를 잃 었거나 빚을 지고 나간 사람들, 농사를 몰랐던 군인 출신들이 실패하거나 다 른 사업을 위해 통일촌을 나갔다. 하지만 새로 전입한 세대들도 많아지고, 카터대통령이 만든 해비타트 지구에 일반 영세민들이 들어오기도 해서 현재 는 약 200세대의 큰 마을이 되었다. “또 다른 통일촌” - 파주 통일마을의 현재 통일촌 건설 대상지는 이곳 파주군 군내면 백연리 외에 강원도 철원군 김 화읍 유곡리도 있었다. 그러나 철원의 통일촌은 입주 2~3년만에 주민들 대 부분이 뿔뿔이 흩어져 원 입주자는 없고 토지 반 이상을 토지 주인에게 빼앗 겼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파주 통일마을이라고도 부르는 통일촌은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재건촌의 약점들을 극복하고 살기 좋은 농촌마을이면서 성공 한 계획 전략촌으로 남았다. 통일촌은 건설 이후부터 현재까지 급속히 진행된 현대화, 산업화를 겪으 며 ‘농촌마을의 근대화’라는 건설 당시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4. 농사, 생업 공동목장 통일촌 입주가 확정되고 세대주들만 80명이 들어와서 조를 짜고 막사에 생활하면서 개간하며 터를 닦았다. 이렇게 시작을 해서인지 공동으로 하는 일이 많았다. 초창기에 있었던 공동목장도 그와 비슷했다. 마을 입구 큰 길 가에 목장을 만들고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소를 키웠다. 지금도 ‘공동목장 자리’라고 하면 누구나 알고 있다. 마을이 생길 초창기에 한 5년 정도 운영했 다가 1980년 전에 사라졌다.

23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조이삭이 기가 맥혔어. 잘될 때는 팔뚝만큼 했어” - 노인회 농사 노인회에서 공동으로 지었던 농사도 공동작업 중 하나일 것이다. 홍О태 가 초대 노인회장, 총무를 할 때 버섯재배를 했다고 한다. 겨울 같은 농한기 에는 다들 일이 없기 때문에 모여서 화투놀이나 음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홍О태는 초가을에 계획을 세워서 파주산림조합에 버섯재배를 문의했 다고 한다. 마을에는 부녀회, 직판장 등 운영되는 식당이 많은데 버섯을 키 워 운영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버섯을 직접 재배하면 3개 식당의 버섯 수 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나무를 2m 50cm 정도 크기로 잘라서 산 림조합에서 종균을 사서 시작했다. 주민들의 공동작업으로 남자들이 산에서 기계톱으로 참나무를 베고, 밀고 내려오고 던지고 해서 옮겨오면 여자들은 종균을 넣는다. 남자 둘, 여자 하나 이렇게 조를 짜서 작업하였다. 경로당 앞 학교 울타리 바로 옆에서 작업을 하여 폐품수집소 자리에 하우스를 만들고 종균을 넣은 참나무를 보관했다. 물을 줄 때는 경로당 화장실에서부터 호스 로 연결해 물을 뿌렸다.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안일한 생각으로 관리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버섯이 자라서 한 번 수확할 때 2kg씩 땄다고 한다. 장부를 만들어 직판장, 부녀회식당에 납품하고 가을이나 연말 에 한꺼번에 돈을 받았다. 100~200만 원 정도로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으나 3년이 지나니 나무 수명이 다 되어 수확이 잘 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다른 작물을 농사지었다. 그 다음에는 500평 정도의 공동농장에서 조농사를 지었다. 수수는 공동영 농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먼저 나온 것이 먼저 익고 뒤에 나오면 뒤에 익는 등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확량도 좋지 않았다. 공동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먼저 가서 뽑는 사람이 임자였다. 대체로 콩이 농사를 짓기에는 무 난하지만, 노루가 먹거나 밭을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망을 쳐서 막아야 하 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은 DMZ 지역으로 산짐승이 많아서 야생 동물을 피해 심을 것을 고민하다 조를 심게 되었다. 조는 동물들이 잘 먹지 않고 또 수요가 많다. 공동 작업한 사람들끼리는 싸게 나눠 먹고 가마니 째 직판장에 공급하여 판매하였다. 6월, 7월 초순에 모종으로 심는 조는 물을 주는 게 중요했다. 홍О태는 회장으로 있을 때 출장소에서 소화용 차량을 빌 려서 물을 줄 정도로 책임을 다 해서 가꿨고 그 정성으로 농사가 잘 되었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33 이렇게 농사가 잘 되자 사람들이 조를 오며가며 훔쳐가기도 했다. 조를 심고 난 뒤 2009년에는 감자를 심었다. 심을 때는 열심히들 안 해도 수확할 때는 모두 나와서 거들었다. 비닐 싼 밭에 심어놓은 감자밭에 비닐을 벗겨놓고 보면 큰 감자들이 주렁주렁 나오기 시작하는 수확의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처음에 호미를 들고 와서 캐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손 으로 열심히들 캐게 되었다. 농장을 체험하러 온 손님들에게 비닐봉지를 주 고 알아서 담게끔 하여 5천원씩 받고 팔았고, 4kg 한 상자에 12000원을 받 고 팔았다. 식당에는 4~6상자를 납품하고 나머지는 5kg씩 회원들이 나눠가 져갔다. 2010년에는 배추를 심어 농사를 지었는데 물주는 사람 순서를 정해 써 붙여 놓아도 다들 잘 지키지 않았다. 공동영농에는 책임감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임진강에서 물 퍼오는 거지” - 벼농사 물대기 통일촌에서 벼농사를 짓기는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에는 수리시설이 부족 해 벼농사를 실패하기도 했다. 부대에서 나오는 물을 대었더니 오염이 되어 서 다 죽고 만 적도 있었다. 그 후부터 논에 댈 물은 임진강에서 퍼왔다. 물 을 끌어오는데 드는 비용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연차적으로 갚아가면서 돈 을 냈다. “첫 소출은 힘 들었다.” - 첫 농사의 애로사항 입주 후 첫 수확은 얼마 나오지 않았다. 약 4천 평의 논에서 가장 많이 나 온 곳은 150가마, 평균 100가마 전후로 나왔다. 벼 종자도 좋지 않았고, 불 도저로 개간한 논은 높은 곳은 높고 낮은 곳은 낮아서 농사도 제대로 못 지 을 정도였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완전한 논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따라했지” - 농사 초보자들 통일촌에 입주한 주민들 중에는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농사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적은 사람 들을 모아놓고 농사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당시 교육은 주민들 중에 농사경 험이 있는 사람과 파주시농촌지도소에서 파견된 새마을지도자가 맡아서 했

23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다. 군인 출신 주민들은 농사를 직접 지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가장들은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농사일지도 적으며 농사일을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꾸준히 노력한 가장들도 있었지만 몇몇은 처음 호미 질, 낫질도 서투른 초보로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기도 했다. 때문에 부인들이 더 고생하고 농사일을 많이 했다. “여기 들어온 사람들 다 고생 많이 했어요” “개간하는 데서 골병 든 거야” “열심히만 하고 부지런하면 농사는 짓는 거야” “별 보고 일터에 나가면 저녁에 별보고 들어왔으니까” - 힘들었던 농사 요즘처럼 좋은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던 입주 초창기 시절에 가장 힘든 일 은 농지를 개간하는 것이었다. 나무가 우거진 곳을 불도저로 밀어놓으면, 나 무 그루터기가 안 뽑힌 곳도 많아서 사람 손으로 일일이 파내야 했다. 밭과 논으로 가꾸었어도 여전히 나무뿌리, 철조망 등이 많았고 철사에 손을 찔리 는 일도 많았다. 입주 때 두 집에 하나씩 배정해주었던 경운기는 당시로서는 최신 농기구 였다. 하지만 운전법이 익숙하지 않아서 물을 대놓은 곳으로 빠져 기계를 건 지느라 일도 못한 적이 많았다. 당시에는 병충해도 별로 없었고 ‘농사는 씨 심어서 잘 가꾸고, 잘 수확하면 그만’이라고 할 정도로 농사기술이라는 게 없었다. 하지만 제초제 없이 해야 했던 밭농사는 풀뽑기에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거의 소득이 없었다. 박 О혹은 ‘별 보고 나가 별 보고 들어올 정도’로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조금만 게을리 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잠시도 쉬지 않았다. 농사일지나 책을 보고 정보를 얻는 것보다는 오로지 부지런하게만 일했다. 당시는 좋은 기술을 알 게 되면 남에게 알려주지도 않던 세상이었다. 이О훈은 최전방에 들어와 농 사만 열심히 하며 살면 넉넉히 살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 땅 2, 3천 평을 가지고 있어도 서울 아파트의 전세 값도 안 되는 정도이며 전업농으로 는 자녀들 교육비를 대기도 빠듯하다. 우리나라 경제가 이 정도로 발전된 지 불과 몇 년 안 되었는데, 지금 세대들은 부모 세대들의 고생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어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35 “전라도에서 모내기하는 사람들 오고” - 전라도 모내기꾼들 벼농사를 주로 했던 통일촌에서 특이한 점 한 가지는 모내기 때 외부인들 이 들어와서 일손을 도왔다는 점이다. 농사 시기가 다른 전라도지역이나 가 까운 파주에서 약 30~50명의 일꾼들이 트럭을 타고 들어왔다. 지금처럼 트 랙터, 이앙기 같은 농기계도 없이 경운기나 소를 이용했던 시절에 마을 내 품앗이로도 일손이 부족할 때에는 외부에서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일해야 했 다. 모내기는 동네 모든 집이 같은 시기에 하므로 외지에서 온 일꾼들이 동 네 모내기를 다 맡아서 끝날 때까지 기거하면서 일하고 갔다. 모내기를 하는 날에는 새벽 4시에 나가서 밤에 찐 못짐을 지게로 뿌려야 한다. 일꾼들이 조반을 먹고 모를 내는데, 못줄대로 일렬로 쭉 서서 모를 한 줄 심고 나서 ‘오라이’ 하고 신호를 하면 줄을 넘기고 하여 심었다. 통일촌 주 민들은 일꾼들은 전라도 지역 사람들이라 그런지 신명도 많고 일도 잘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주민들은 일꾼들의 잠자리나 먹을거리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일꾼들이 외지에서 들어오는 농번기면 집주인들은 건너방이나 쪽방에서 기거하고 일 꾼들에게 안방을 내주기도 했다. 집집마다 이 일꾼들의 식사준비를 위해 여 러 이웃끼리 품앗이를 해야 했다. 많은 인원의 식사를 동시에 준비해야했기 때문에 수저, 덜어먹기 위한 사발 등을 주로 사두었는데 지금도 각 집마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한 끼 밥을 지으려면 쌀 서너말을 씻어서 가마솥을 걸고 지어야 했다. 밥은 큰 대야같은 그릇에 담아 갖다놓고 여러 반찬을 늘 어놓으면 일꾼들이 양쪽에 주욱 앉아 넓은 그릇에 덜어서 먹곤 했다. 먼 곳 에서 온 손님이기도 한 일꾼들의 식사이기 때문에 마을 체면을 생각해서 반 찬도 신경 써서 오이김치, 생선, 닭 등 요리를 해서 주었다. 상차림도 아침, 새참, 점심, 곁들이참, 저녁 총 5번을 차려야 했다. 새참을 논으로 나를 때는 똬리 또는 또아리를 머리에 대고 밥, 반찬을 잔뜩 넣은 다라이를 이고 운반 했다. 똬리에는 끈이 달려서 입에 물고 가면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었다. 차도 없고 경운기도 두 집 건너 하나씩 있을 때여서 부인들이 줄지어 음식을 이고 나갔는데 밥, 국, 물, 반찬 등을 5명씩 가지고 나갔다.

23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동네아줌마들이 다 와서 해줘” “마음 맞는 이웃간에 같이 차려서 해먹고” - 품앗이 부인들끼리의 품앗이는 주로 모내기 일꾼 식사나 집안잔치에 음식을 준비 할 때 했다. 이О훈은 자녀 4명 중 3명의 혼사 때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떡 은 한 가마씩 맞추고 집에서 국수를 만들고, 가락동시장까지 가서 홍어를 사 와서 손님들을 대접했다. 동네 부인들이 다 와서 내 일처럼 도와줬다. 모내기 품앗이도 마음이 맞는 5~6집이 모여서 했다. 이О훈의 경우처럼 같은 조원들끼리는 단합이 잘 되어서 종종 품앗이를 했다. 큰 잔치나 농번기 가 아니고 소소한 생일 때에도 함께 차려서 나눠 먹곤 했는데 현재는 잘 안 하게 되었다. “소를 융자해서 한 마리씩 줬다고” - 소와 경운기 정부에서는 통일촌 입주민들에게 논밭, 주택 외에도 송아지 한 마리씩 융 자해주었다. 소는 1년 정도 키우면 송아지를 낳을 수 있어서 새끼를 낳으면 판매하여 대출금을 갚아나갔다. 소는 새끼를 낼 수도 있고 논밭을 갈거나 마 차를 끌 때 유용했다. 통일촌 입주 초기 농지정리가 덜 되어서 2년 동안은 소 를 이용한 밭농사를 주로 지었다. 농지정리가 끝난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논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때 정부에서 40대의 경운기를 보조해주었다. 2가 구당 1대씩 배치해 준 것이다. 1980년대에는 소파동이 있어 대부분 가구에서 소를 처분하면서 통일촌 내 의 축산업은 쇠퇴하였다. 지금은 소를 키우는 집이 3가구뿐이지만, 통일촌 마을을 다녀보면 폐사된 축사들이 꽤 많이 남아있어 축산업이 어느 정도로 운영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정부에서 배급받은 경운기로 약 10여 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정부에서 농 기계 구입을 위한 자금을 보조해주어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당시 4,600만원 의 돈을 주고 트랙터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트랙터가 없는 사람은 트랙터가 있는 사람에게 품삯을 주고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통일촌에서는 기계를 이용한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호당 경지면적이 넓은 통일 촌에는 기계를 통한 효율적인 영농방식이 필요했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37 “젖소 키우다가 그만 뒀지” - 축산업 1990년대 이후, 서울과 신도시 개발에 따른 영향으로 우유생산을 위한 젖 소 목장이 마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성세대들 보다는 젊은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기존의 농업을 탈피하여 젖소 사육에 관심을 갖고 막대한 돈을 투 자하여 비교적 큰 규모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고소득을 보장해줄 수 있고, 수입상 안정성을 기할 수 있었다는 장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젖소 목장을 운 영하는 가구가 많다. 한О호는 젖소를 키웠던 8가구 중 하나이다. 젖소 키우는 집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한 집밖에 남아있지 않다. 30년 전에 시작해서 20년 정도 하다가 자 녀들이 이어서 하지 않는다고 하여 10년 전에 그만 두었다. 처음 시작할 때 정부에서 융자를 보조해주어 젖소 세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암컷 세 마리 만 들여왔는데 수정시키는 사람들을 통해 새끼들을 내었고 쌍둥이 송아지를 몇 번 낳고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 최대 30마리까지 늘어났다. 당시는 소 한 마리면 대학 등록금을 낼만큼 부자라고 했던 시절이었다. 우사에는 젖소를 키우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소를 식별할 수 있는 소 번호표도 남아있고, 소 등을 긁어주는 긁개도 있다. 손으로 짠 우유를 우유 통에 붓고 냉장고에 옮기는 식으로 일을 했는데 초기엔 이 우유통을 그대로 우유회사에서 가져가고 이튿날 통을 돌려주는 식으로 했다. 한О호는 축협에서 사료구입, 신용거래를 충실히 하여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우리가 옛날에 벌을 했드랬거든” - 양봉 통일촌 내에는 축산업이 쇠퇴한 뒤 벌을 키워 꿀을 채집하는 양봉업이 성 행했다. 그러나 이도 곧 쇠퇴하여 현재는 1가구만이 양봉업에 종사하고 있 다. 양봉은 통일촌에서 한때 성행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쇠퇴하였다. 이О훈도 양봉을 했는데, 장독에 꿀을 담아 보관했다가 병에 담아서 팔곤 했다. 김О태의 집에는 넣어서 돌리면 통에 떨어져 담을 수 있는 깔대기가 남아 있는데 이는 10년 전 부친이 살아계셨을 때 양봉을 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3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요새 벼 한 말 주고 일하라 그러면 미친놈이라고 그러지” - 임금 삯 쌀로 받기 예전에는 임금을 화폐보다 쌀로 받는 경우도 많았다. 백 가마 넘게 수확을 한 집은 타작을 새벽 3시부터 시작을 할 정도로 일거리가 많았다. 하루 종일 일해서 100가마를 넘게 털고 나면, 하루 일한 사람들의 삯은 쌀을 고봉으로 눌러서 한 말을 주는 것이었다. 새벽 3시부터 저녁 어두울 때까지 일하고 온 인건비는 ‘한 말’이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로선 그것도 많 이 주는 것이었다. 쌀이 본위화폐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쌀이 귀한 시절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만 평 이상 지어야 돈이 나와” - 많이 지을수록 유리한 벼농사 연로해져서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없는 1세대 입주민들은 타인에게 농지를 빌려주고 텃밭 정도만 관리하며 살고 있다. 이 ‘도지’주는 것도 ‘3백 평에 얼 마’라는 기준이 있다. 논농사는 소규모로 할수록 손해이다. 만 평 이상 지어야 어느 정도 소득이 되는데, 대규모이므로 기계로 지어야 한다. 기계 또한 자가용보다 비싼 편이 어서 논농사 짓는 젊은 사람들은 땅을 많이 차지할수록 유리하다. “군인들이 못 먹게 조를 심는다” 주민들이 통일촌에 정착해 농사를 시작할 무렵, 인근 주민들은 조 외에 옥 수수, 고구마, 콩, 팥 같은 작물은 심지 말 것을 조언했다고…. 인근 부대의 배고픈 군인들이 따먹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좁쌀은 너무 잘아서 까서 먹 기 힘들기 때문에 조만 심으라고 했던 것이다. “메주 해서 팔고” “재래식 장 명인이야” - 장 사업 통일촌의 밭작물 중에는 콩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 때문에 콩을 이용 한 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주민들도 늘어났다. 현재 통일촌 내에서 콩을 이용한 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주민은 3가구 정도이다. 한О호의 부인은 20년 전에 메주장사를 했었다. 지금은 메주틀 같은 도구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39 만이 남아 메주장사를 했던 시절을 알려주고 있다. 메주틀을 사용하는 방법 은, 콩을 삶아서 찧고 보자기를 깔고 틀에 넣어서 꾹꾹 눌러서 모양을 만드 는 것이다. 손으로 툭툭툭툭 치고 보자기를 싹 들어올리면 메주만 남게 된 다. 김О조의 부인은 된장 담는 명인으로 선정됐다. 재래식 된장, 고추장, 간 장, 청국장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10년 전부터 파주시 지정업체로 판매하고 있다. 전국의 된장 담는 명인으로 선정이 되어서 경기도청에 명인 의 전당에도 올라있다. “먹어보고 좋아들 하니까 부쳐주고 팔기도 하고” - 농산물 판매 김О자는 벼, 인삼, 고추, 콩농사 등 다양하게 농사를 짓고 있다. 인삼농사 는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올해는 쉬고 내년에 다시 한다. 작년에 700 평 지어서 팔았다. 쌀, 콩, 고추 같은 작물 외에도 메주, 고추장 같은 것도 만 들어 판매한다. 판매는 막내아들이 돕고 있는데, 주문을 받으면 김О자가 택 배로 부쳐 보낸다.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은 직접 농사짓는 곳에서 사는 것이 기 때문에 믿고 대부분 계속 구입한다. 장단콩 축제가 11월 18일에서 20일까지 끝나면 그때부터 메주를 쑤고 간 장을 담가서 정월달에는 주문자들에게 부쳐준다. 메주는 5덩이에 10만원, 간 장 생수병 한 통에 12000원, 된장 1킬로에 13000원 정도에 판매한다. 메주를 잘 만드는 비법은 잘 말려서 잘 띄우는 것에 있다. 고추 말리는 건 조기에 말려서 지하실에 난로불을 켜고 짚으로 깔아서 띄운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게 농사여” - 농산물 판매 박О년은 통일촌에 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농산물을 판매한다. 입주 후 농사짓던 땅을 지주에게 빼앗기고 남은 땅은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에게 도 지를 주고 양식을 얻는다고 한다. 자투리 땅을 빌려 미나리, 참외, 고추 등 을 심어 먹거나 판매를 한다. 박О년은 예전에는 참외 종류도 많았다고 기억 한다. 속이 빨갛게 팥죽 같은 팥죽참외, 겉이 빨간 사과참외, 얼룩덜룩한 개 구리참외 등 여러 종류의 참외가 있었다. 통일촌 땅은 풀이 많이 나와 감당 이 되지 않아 대부분 제초제를 쓰지만 박О년은 제초제를 쓰지 않고 손으로 김을 맨다. 젖소 목장에서 나오는 거름을 밭에 뿌려 좋아진 땅을 묵히기 아

24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까워 몇 집을 모아서 부추를 심기도 했는데, 매일 뽑아도 나오는 풀 때문에 다른 집들은 포기하고 박О년만 지금까지 재배하고 있다. 첫 입주한 세대 중 대부분은 사망하고 얼마 안남은 지금, 부인들은 노령으로 농사를 못 짓기 때 문에 도지를 주고 있다. 악착같이 땅을 많이 확보하거나 자식들이 함께 농사 를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찬 지방 복숭아라서 맛이 달아” - 경기지역의 유일한 복숭아농사 이О훈은 10년 전에 이곳에서 처음 복숭아농사를 시작했다. 추운 기후 때 문에 잘 안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유일한 과실농가 로 남아있다. 2012년 한파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죽었지만 5년이면 또 자라 서 딸 수 있기 때문에 바로 회복할 수 있다. 또, 냉해를 극복하기 위해 장비 를 설치하였다. 오목한 밭에 추운 바람이 모여서 유발되는 냉해를 없애기 위 해 과수원에 바람개비를 설치하였다. 이 바람개비는 영상 2도 정도에 돌아가 게끔 맞춰 놓았다. 현재 농가는 벼농사 정도의 소득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1년 동안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나면 먹을 양식을 제외하고, 농기계 기름값 등 농사에 들어간 비용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는 반면, 복숭아농사는 잘되면 벼농사의 서너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О훈의 복숭아는 입소문이 나서 중간 유통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판매를 하고 있다. 저농약 농법을 써서 시에서 하는 검사에서 친환경마크를 받았다. 5. 의식주 생활 “드레스 재봉틀 들어봤어요?” “궁디짝이 다 헤지고 그래서 누벼서 기워입히고 그렇게 키웠지” 물자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 가정집에서는 재봉틀을 갖추고 가족들의 옷 을 손질하기도 했다. 이О훈의 부인도 재봉틀을 가지고 있는데 통일촌에 들 어오자마자 문산에서 산 재봉틀이라고 한다. DRESS 재봉틀로 당시엔 유명 하고 비쌌던 제품이었다. 재봉틀은 4만원에 샀는데 송아지가 5만원인 시절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41 이었다. 당시에도 여유 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었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밖에서 미끄럼이며 얼음판에서 놀고 오면 엉덩이, 무 릎이 자주 헤졌고 어른들 속옷, 바지 등도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면 누벼서 기워 입히곤 했다. 더딘 손바느질보다 재봉틀이 더 빠르고 바느질자국도 이 쁘게 나서 좋았다. 살림이 넉넉해지고 좋은 새 옷도 나오니 사서 입게 되자 재봉틀도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페달로 밟아서 돌리는 재봉틀이었으 나 다리가 아파 앉아서 하는 것으로 개조했으나 잘 안 써서 창고에 보관해왔 다. 개조하는 사람들이 집집마다 ‘손잽이로 고치시오’하며 다니며 차로 싣고 가져가서 개조해서 갖고 왔다. 개조 비용은 만 원 정도가 들었다. 이О훈의 부인은 결혼 전 올케가 쓰던 드레스재봉틀도 기억하고 있다. 우 체국이 직장이던 큰 오빠가 재봉틀을 사왔는데. 처음 본 재봉틀이 신기해 만 지다가 작동법을 몰라서 고장이 난 줄 알고 올케에게 야단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이웃의 총각이 와서 작동법을 알려주어서 해결이 되었다. 한О호의 부 인 이О례도 재봉틀을 가지고 있다. 페달을 밟아서 하는 기계를 2년 전에 손 재봉틀로 개조하는데 1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젠 눈이 어두워져서 바늘 귀 꽂기가 어려워 못 쓰고 있다. “문산, 금촌 다 그런데서 사지” - 시장보기 이О훈의 부인이 재봉틀을 문산에서 샀다고 하듯 주민들은 문산, 금촌에 서 주로 장을 보고 있다. 문산장은 5일장으로 4일 9일에 장이 선다. “한 식되만 꿔줘” - 배고픈 시절 통일촌 주민들은 나라에서 내어준 농토와 집에 희망을 걸고 통일촌에 입 주했을 만큼 가난과 굶주림을 겪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많다. 가난한 시절에 는 쌀을 꿔서 먹는 일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한 가족이 4, 5명일 때 밥 한 끼 먹으려면 한 식되는 있어야 한다. 요즘같이 2, 3명 가족이 아니라 많으면 10 식구이고 평균이 4명 이상이 한 가족이던 시절이었다. 이웃에 쌀을 빌리러 갈 때 ‘한 식되(5홉)만 꿔줘’ 이렇게 얘기했다. 장О동은 우리나라가 가난에 서 벗어나 살기 좋아진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데, 다들 풍족하게 되니 감 사한 것을 모르는 지금 세대에 대해 걱정이 많다.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 노

24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인들은 하다못해 산에서 풀이라도 캐먹을 수 있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굶주림 을 못 견딜 것 같다고 했다. 옛날 군대에서는 오홉들이 한 식되(됫박)를 밥그릇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양은으로 만든 얇은 것으로 며칠 못 가 망가지곤 했는데, 훈련 한 번 갔다 오 면 다 찌그러져 펼 수 없을 정도였다. “화덕을 만들어가지고 불 때서 해먹지” - 여름화덕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해먹었지만, 여름에는 밖에 화덕을 만 들고 불을 때서 밥을 했다. 화덕은 기름통 같은 것을 잘라서 만드는데, 뒤에 는 연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을 조금 뚫어놓는다. 부엌 문턱에 놓고 쓰는데 얇은 나무로 때도 금방 끓었다. 수제비나 밥을 해먹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 면 여름엔 덥기 때문에 화덕을 따로 만들었다. 겨울에는 무쇠로 된 가마솥에 밥하고 쇠죽이나 물을 끓였다. “명절 때도 꼭 만둣국 끓여먹어요” 평양이 고향인 최О주의 집에서는 생일 때면 미역국보다 만둣국을 끓여먹 는다. 잔치음식은 떡, 만둣국, 나물 등을 차린다. 백일잔치 때는 100사람이 나눠 먹으면 좋다는 시루떡을 꼭 차렸다. 돌잔치 때는 시루떡과 수수옹심이를 했 는데, 높은 나무에 나는 걸로 하면 오래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사는 이목 짜는 장사고 만두는 손목 짜는 만두” - 이북만두 최О주가 만드는 이북식 만두는 빚은 다음 끝을 붙여서 동그란 모양을 만 든다. 고기와 숙주나물 등을 넣고 해야 하지만 어쩔 때는 숙주 대신 묵은 김 치, 고기를 넣어 김치만두를 만들기도 한다. 많이 만들어놓고 냉동해두고 종 종 먹는다. 일하다 보면 라면을 자주 먹기 때문에 대신 만두를 해놓고 먹으 면 좋다. “한 일주일, 열흘 동안 그게 바글바글 끓으면서 막걸리가 이루어지는 거야” - 막걸리 만들어 먹기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43 다음은 박О년이 말한 막걸리 만드는 방법이다.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서 는 우선, 도리깨로 털고 남은 벼이삭을 벼 찧는 기계로 껍데기만 벗겨 달린 식으로 대강 찧는다. 쌀을 시루나 큰 솥에 찌어 익히고 누룩과 빻고 섞어서 버무린 뒤 물을 알맞게 넣어서 뽀얗게 곰팡이같이 될 정도로 띄운다. 말려놓 았다가 대강 빻아서 물에 넣으면 풀어지는데 7~10일 동안 바글바글 끓으면 서 막걸리가 된다. 물을 넣을 때는 적실만큼만 넣으면 너무 독한 술이 되고, 너무 멀겋게 많이 넣으면 시어서 못 먹게 된다. 너무 독하면 물을 타서 먹는 데 2, 3일 놔두면 신 맛이 난다. 술 찌꺼기는 물에 여러 번 헹구고 짜서 소한 테 주면 잘 먹는다. “고사리 꺾으러 다녔거든” 최О주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고사리나물을 뜯으러 산에 다녔다. 그러나 이제 산은 지뢰 때문에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기도 하고, 걷고 이동하는 게 힘이 들어 이제는 다니지 않는다. 덕진산성 자리인 덕진단 부근은 지뢰 없는 산이라 하여 고사리를 캐러 자주 갔다. “이거 만드는 사람 다 죽고 없어” - 지게, 가마니, 코뚜레 만드는 기술 농사에 쓰는 도구들은 웬만한 기술력이 있어야 만들 수 있었다. 지게 만들 기, 가마니 짜기 , 소 코 뚫기 등의 기술이 그것이다. 이О훈의 집에 있는 지게도 기술자가 만든 것이다. 어지간한 짐은 경운기 로 옮길 수 있지만 때로는 지게로 옮겨야만 하는 일도 있어서 낡았지만 40년 째 계속 쓰고 있다. 지게는 소나무로 만들어야 썩지 않고 오래 가는데, 산에 다니면서 적당한 나무를 베어 와서 말려놓고 모양을 만든다. 가지가 구부러 지게 돌 같은 것을 매달아놓고 휘어지게끔 만든다. 1~2년 쯤 말려놓고 지게 만드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만든다. 지금은 지게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멜빵도 짚으로 머리 땋듯이 만든다. 벼를 탈곡하여 담는 가마니는 농사 에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다. 집집마다 가마니 짜는 틀이 있었고 가마니 짜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요즘 가마니는 조합에서 단체로 파는 것을 사용한다. 소를 움직이기 위해선 코뚜레가 꼭 필요했다. 이런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코뚜레를 만들고 소를 묶어서 코에다 끼웠다. 코뚜레도 잘못 뚫으면 들창코

24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경험 많은 사람이 코를 만져보고 제일 얇은 데로 뚫는 다고 한다. 6. 마을조직과 여가생활 “그전에는 ‘노인’이라는 말도 없었어” - 노인회 조직 통일촌에서는 노인회가 마을 내에서 중요한 사회조직의 하나로서 기능하 고 있다. 그 이유는 노인회에 소속된 회원들이 과거 마을을 발전시킨 장본인 으로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있겠으나, 청ㆍ장년의 이주로 인 해 실질적으로 마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주민이 대부분 노인이기 때문이 다. 통일촌 노인회는 1996년에 입주민들의 부모 세대 6명으로 정식으로 조 직이 되었다. 입주 초기부터 노인회를 조직하지 않은 것은 당시 ‘노인’이라는 용어도 생소할 만큼 여건이 되지 않아서였다. 노인회 가입 자격은 통일촌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인 남녀이다. 회장, 총무는 투표를 해서 선출하지만 적임자가 없을 경우 오래 맡아서 하기도 한다. “우리가 파주 출장소 앞 마을 도로에서 청소를 했어” - 노인회 경비 마련 노인회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시에서 나오는 보조금과 공동영농 농산물 판매대금, 구판장 대여비, 회비로 충당한다. 시에서 경로당 관리비와 노인회 지원금이 나오며 구판장 임대비를 연 단위로 계약해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의 휴경지에 포도, 배추, 감자 등을 심고 수확해 판매한 수입과 폐비닐을 수 거해 판매한 대금을 노인회 기금으로 보탠다. 또, 파주 출장소 앞에 고물줍기 나 분리수거 같은 공공작업을 하고 사회봉사활동을 했다는 서류를 제출하면 시청에서 한 달에 10만원씩 지원금을 내준다. 운영에 모자란 금액은 그때마 다 회비를 걷어서 충당한다. 이러한 비용으로 경로당 건물의 전기· 수도·가 스 등을 관리하며 특히, 겨울에는 난방을 위한 보일러 가동, 기름 구입 등에 사용한다. 마을의 환경미화도 노인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회의 를 통해서 대청소하는 날을 정하여 실시한다. 대청소일이 되면 전체 노인회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45 회원이 모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한다. 이는 단합과 함께 마을을 내 손으로 가꾸어 나간다는 애향심을 기르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쫓아 댕기고 놀았지” - 노인회 관광 관광은 일상의 피로를 풀고 노인회원의 친목을 위해서 매년 여름에 1회씩 가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회, 부녀회에서 후원해줘서 봄, 가을에 관광을 가 곤 했지만, 수입원이 적은 요즘은 여름에 한 차례 다녀온다. 경비는 개인이 3~5만원씩 갹출하여 차비, 운전수와 안내양 수고비를 충당한다. 회원들이 고령인 관계로 가까운 거리의 장소를 선정하여 관광을 가고 있다. 노인회에 서 준비하는 관광은 노인회의 회원뿐 아니라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행 사로 발전하였다. 이것도 지역주민의 감소와 주민의 노령화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마을 직판장 만들어서 성공한데가 여기밖에 없다고 그래” - 직판장 조성 통일촌의 마을 조직은 초기에 예비군 중대, 새마을지도회, 노인회가 있 었다. 초대 새마을지도자는 민О승이 맡았었다. 새마을지도자는 월급 없는 봉사직이지만 읍면장이 임명을 하고 취임식도 한다. 민О승은 시의원이 된 1991년부터 3년간 직판장 건립을 추진해서 1994년 4월 1일에 개장을 했다. 당시 이장, 자치위원장, 부녀회장과 함께 4명이 현지답사를 다니면서 준비를 했다. 경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시에는 예산이 없어서 손을 벌릴 수 없었고 경기도에서 예산 4억 6천을 따냈다. 직판장 부지는 마을 땅을 빌렸고, 건물 은 시에 기부채납을 해서 시에 사용료를 싸게 내고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 직판장을 만들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꾸며야 하는데 맡을 사람이 없었 다. 그래서 직판장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민О승이 1년 동안 여러 가지를 보완하여 마을에 인계하였다. 조그마했던 식당도 늘리고, 냉난방시 설도 완비하고, 판매대 같은 것, 식탁 등도 준비해놓았다. 세대 당 40만원씩 출자를 받았는데, 당시 돈으로 큰 돈이어서 못 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을 전체 주민이 참여하는 데 의미가 있는 사업이므로 농협에서 융자를 해서 미 리 내고 나중에 채우게끔 하였다. 마을 공동 출자로 만드는 직판장은 당시엔 활성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렇게 노력하여 꾸민 마을직판장은 전국적으로

24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성공한 유일한 직판장이 되었고 각급 고관 부인들, 단체들에서 많이들 와서 견학했다.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통일촌이 관광지로서 여건이 좋았 기 때문이다. 현재는 직판장 대표를 따로 뽑아 운영하고 있는데, 마을 전 세 대가 매년 200 ~300만원씩 이익금을 배당받는다. 또한 식당에서 주민을 직 원으로 채용하고 직판장에 농산물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등 여러 가지로 마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통일촌 부녀회 일반적으로 부녀회는 새마을운동과 관련이 깊지만, 통일촌의 부녀회는 양 상이 조금 다르다. 부녀회는 통일촌에 초기 거주했던 여성 전원이 가입하여 1974년 설립되었다. 통일촌 초대 중대장이었던 임О권은 상부에서 조직을 만들라는 명령에 부녀회를 소집하였는데 사무실도 없고 아무 조직이 없는 상 태였다. 부녀회 식당 2층은 당시 반공교육장이 되었다. 처음 부녀회 기금은 전원이 500원씩 혹은 절미 한줌씩과 폐품수집 운동으 로 마련해 구판장을 차렸다. 절미는 한 사람 앞에 한 숟갈씩 쌀을 회비로 걷 는 것을 말한다. 가구당 식구수대로 걷었는데, 나중에 살림들이 넉넉하게 되 자 양재기로 걷기도 했다. 고물이나 폐비닐을 모아서 팔아서 운영비를 모으 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 노인회에서 맡아서 하고 있다. 또,통일촌을 찾는 관 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구판장은 물품 판매대금으로 부녀회를 운영하는 역할 을 하고 있다. 1987년에는 관광객을 위한 식당을 부녀회에서 운영하게 되었 다. 식당의 수익은 부녀회에서 관리하였고, 수익의 일부는 부녀회 사업을 운 용하는데 사용되었다. 2012년 현재 회원은 85명이며 두 달에 한 번씩 월례회를, 1년에 두 번씩 정기회의를 연다. 통일촌 부녀회는 새마을대청소·재활용품수집 운동·쓰레 기 줄이기 운동·재생용품 쓰기 운동 같은 생활환경 운동도 전개하는 등 활 발히 활동하고 있는 마을 조직이다. 예전에는 주부대학이라고 하는 프로그 램도 운영하여 대구 어느 지역과 자매 결연을 맺기도 하였다. “고생은 많이 했지만 옛날이 더 재미났다구.” - 여가 생활 물놀이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47 철다리는 마을 주민 공동의 놀이터와 같았다. 아이들은 수영하고, 어른들 은 어항으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먹었다. 장О동에 의하면 주민들은 철다리 부근에서 물놀이를 많이 했다고 한다. 군 무전기의 배터리로 민물고기를 많이 잡기도 했다. 모내기철이 끝나고 한 가할 즈음에는 마음이 맞는 서너 명이 ‘밤붕어’를 해먹기도 하였다. 당시는 물이 굉장히 깨끗할 때여서 유리로 만든 어항을 갖다놓기만 해도 고기들이 많이 잡혔다. 이 어항은 입구는 있고 뒤는 막힌 형태로 구멍이 있어서 물이 흐르기 때문에 물고기가 들어가서 뺑뺑 돌기만 할 뿐 나올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정자리를 흘러서 백연리까지 내려오는 수내천에서 멱 감고 고기 잡는 아이들의 모습은 예전엔 흔한 풍경이었다. 통일촌의 천들은 20년 전까 지만 해도 매우 깨끗한 수질을 자랑했지만, 그동안 농사에 들어간 농약들이 스며들어서 지금은 많이 오염되었다. 지금은 임진강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예전에는 임진강에 낚시를 많이 다녔 다. 김О태가 초등학생일 시절에는 장어, 조개 같은 것을 주로 잡으러 다녔 다고 한다. 하지만 1989년에 ‘임수경 평양축전참가사건’ 이후로 임진강가는 철조망으로 가려져 출입이 금지된다. 대학생들이 임진강가에 모여서 데모를 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임진강에서 낚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사전에 허락을 받아서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소풍과 운동회 자녀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부형들이 소풍을 함께 가곤 했다. 4, 50 명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두 세대의 버스를 이용하였다. 초등학생 가을운동 회 때는 가족들도 많이 참여하여 마을잔치 같았다. 백О달이 기억하는 당시 의 마을은 초등학교도 출장소도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방과 후에 학생 들 과외를 시켜주기도 했고, 정년퇴직한 후에도 지금까지 왕래하는 전 교사 들이 있을 정도로 친밀했다지만 요즘은 그런 정이 없이 삭막하다. 사냥 사냥을 취미로 가진 주민도 있었다. 최О주의 남편은 11월부터 2월까지 사 냥철에 수렵증을 받아서 강원도 쪽으로 사냥을 다녔다. 시외삼촌과 함께 하

24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다가 나중에는 자녀까지 총을 사줘서 함께 했다. 사냥하지 않을 때는 총을 경찰서에 맡겨놓는다. 사냥개를 끌고 다니며 산돼지, 꿩 같은 것을 주로 잡 아오는데 최О주는 이 꿩을 가지고 만두, 까스 등을 요리해 먹었다고 한다. 위험한 놀이 벙커, 토치카 같은 군사시설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나무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하기에 알맞았다. 지뢰 등 전투 잔해물이 많았던 지역이라서 아 이들은 탄피, 수류탄, 불발탄 같은 것을 간혹 주워서 놀기도 했던 위험한 일 도 많았다. 연날리기, 쥐불놀이 아이들은 정월달에 연날리기, 쥐불놀이를 많이 했다. 연날리기를 하러 실 패 째 훔쳐가는 바람에 실패를 많이 망가뜨리기곤 했다. 정월 대보름에 하는 쥐불놀이는 이 지역 아이들에게 큰 놀이였다. 현재는 어린이들이 몇 안되지만 입주 초기에는 초등학생이 70~80명 되었다고 한 다. 대보름 날 외에도 겨울철에 자주 하는 놀이가 쥐불놀이였는데, 원두막이 나 산에 불이 번져 다 태우는 사고도 빈번했고, 심하게 번지면 마을 전체에 비상이 걸려 인근 부대에 잡혀 혼이 나기도 했다. “중복놀이. 복놀이라 그래” 통일촌에서 철다리는 명물이다. 이 철다리에서 천렵도 하고 중복놀이도 했었다. 지금은 할머니들이 된 부녀자들이 솥단지를 가져가서 육개장, 개장 을 손수 끓여 먹곤 했다. 1년에 초복 때에만 가서 보양식을 먹곤 했는데 이러 한 관습이 노인회를 중심으로 변형되었다. 노인회에서는 가장 더운 중복 때 인 매년 7월 말에 가까운 곳에 가서 보신탕 한 그릇씩 먹고 돌아오는 관광을 해오고 있다. 마을 내에서 복놀이를 하기에는 이제 뒤처리할 여력이 없기 때 문에 홍О태가 회장을 하면서부터는 외부로 나가서 복놀이를 하게 되었다. 멀리 가지는 않고 파주 적성, 인천 소래포구 같은 곳에 버스를 대절해서 다 녀온다.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49 “어느 마을마다 다 하는 정월대보름 척사대회” 정월 대보름에는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있는 백연리, 대성리, 동패리 등의 세 마을이 돌아가면서 윷놀이 및 노래자랑대회를 한다. 3년에 한 번 개최순 서가 돌아온다. 2012년에는 대성동에서 개최되었다. 마을 주민들끼리 모여 서 윷놀이와 노래자랑대회를 통해 마을주민들 간의 유대감과 협동심을 키우 고 있다. 통일촌 입주기념일 1973년 8월 21일은 통일촌 입주기념일이다. 실질적으로 주민들이 그날 하 루에 모두 입주한 것은 아니고 주택이 세워진 순서대로 주민이 모두 입주한 뒤에 행정관서에서 따로 날짜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주 초기 3~4년 간은 여력이 없어서 기념행사를 따로 하지 않았다. 비용문제 때문에 마을 상 조회 기금으로 시작하여 찬조금으로 2년에 한 번씩 하려고 하였으나, 현재는 통일촌, 대성리, 동패리 3개 마을이 돌아가면서 하므로 3년에 한 번씩 하는 행사가 되었다. 입주기념일 행사는 정월대보름 행사식으로 운동회 하듯이 한다. 현재는 시청에서 2백만원을 지원해주었고 마을 전체의 수입원인 미곡 창고에 보관된 통일촌, 대성동의 수매한 벼의 보관료, 직판장에서 나오는 수 익금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7. 신앙과 세시풍속 교회 강남 충령교회 김창인 목사가 북한 선교를 위해 이 곳 통일촌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이 현재 통일촌 교회의 모체이다. 1973년에 9월 18일에 현재 부지 에 교회 건물을 짓고 의료봉사ㆍ농촌일손 돕기 등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활동 을 이어오고 있다. 통일촌 건설 초기부터 교회를 함께 건설하였기 때문인지 기독교인이 다수 있다. 독실한 신앙으로 질병을 극복하기도 하고 고사, 제 사 같은 의례는 기독교식 추도예배로 대신 하기도 한다. 교회조직 또한 활발 히 이어졌다. 최О복의 부인 길О순의 경우 종교의 힘으로 암을 극복하였는

25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데 44세 당시 발병했을 때 병원에서는 6개월 시한부를 선고했으나 30년 동 안 이겨냈다. 최О주도 교회 조직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기독교인으로 제사 나 고사는 지내지 않는다. “새 쌀 찧어다가 담아놓으면 배가 다 부르더라고” - 뒤주고사 한О호의 집에는 부인과 결혼할 당시 시부모님이 사놓은 뒤주가 있다. 뒤 주를 두면 새 며느리 얻는다고 해서 특별히 마루에 두었다. 뒤주에는 쌀을 방아 찧어서 뒤주에 부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퍼서 밥을 해먹었다. 처음 들여 올 때는 고사를 지냈다. 소 고사 젖소농장을 했던 한О호는 소 고사를 지냈는데 가을에 우사에 북어를 걸 어놓고 지냈다. 햅쌀로 팥시루떡을 해서 우사 근처에 한 덩이 잘라 갖다놨다 가 여기 저기 떼어 버린다. 소한테 갖다놓고‘솔 잘되게 해주십사’하고 빈 후 먹었다. 막걸리 한 잔도 부어놓는다. “장승님한테 비는 거지. 마을 사람들 다 편안하게 우환 없이 도와달라 고…” - 장승제 통일촌에 장승은 원래 두 쌍이 있었다. 장승도 니스칠을 하며 관리를 해 줘야 하는데 오래 되니 버섯이 나올 정도로 낡아있었다. 위쪽에 있던 장승은 땅주인이 치우라고 해서 술을 붓고 동전을 묻은 후 파내버렸다. 아래쪽에 삼 거리 돌 뒤에 있던 장승은 둘 중 한 군데라도 남겨놔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 해서 길옆으로 7년 전에 새로 모신 것이다. 예전에 이 마을은 공동묘지 자리이기 때문에 3년에 한 번씩 굿을 해야 하 는 마을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연이어 병이 들고 우환이 생겼는데, 무 당에게 물어보니 닭을 많이 기르고 나무를 많이 심어야 편안해진다고도 했 다. 무당을 데려와 떡을 놓고 빌어야 한다고 해서 집집마다 쌀을 걷어서 했 다. 한 식되~한 말 정도 각각 내고 싶은 만큼 걷었는데 2가마가 모였다. 굿 을 하고 났더니 아픈 사람이 나았다고 한다. 몇 년 간 굿을 하였는데 2년 전 부터는 보덕사에서 스님을 모셔서 장승제를 한다. 스님보다 무속인을 불러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51 서 굿을 할 때가 돈이 많이 든다. 무속인을 통해 굿을 하게 되면 주최자의 생 일을 따져서 좋은 날을 맞춰야 하고, 비린 음식을 가리는 등 철저하게 하지 만 스님을 통해 고사를 지낼 때는 주최자들이 날짜를 잡는다. 장승제를 지낼 때는 추수한 햅쌀로 떡을 하여 10월에 지낸다. 부녀회에서 도 기부하고, 식당, 개인 등에게 쌀이나 돈으로 기금을 받는다. 장승제는 민 간신앙에 관심이 많은 송О만이 도맡아서 하고 있는데, 허리가 아파서 2, 3 년간 진행하지 못했을 때를 빼고는 계속 맡아서 해왔다. 송О만은 마을을 위 하는 봉사정신으로 고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마을을 돌면서 비용을 걷는 것 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제는 많이들 응원해준다. 정월 대보름 척사대회, 입주식 같은 행사 때도 장승제를 지낸다. 3년에 한 번 통일촌 차례일 때 한О남이 중심이 돼서 장승제를 지내고 다른 마을 차례 일 때는 술만 한 잔 붓는 식으로 생략한다. 또, 매월 초하루에는 잊지 않으면 장승 앞에 술을 붓는다. 마을에 오가는 사람의 무사 안녕을 빌면서 술을 붓 는데, 제를 안 지내면 행사 중에 사고가 난다. 산신제 파주시에서 하는 월롱산 산신제는 매년 부녀회, 농촌지도자, 연합회 모두 참여하는 행사이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되기 전에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드 리는 제사이다. 상달고사 민О현의 부인은 매년 10월이면 좋은 날이다 싶은 날에 시루떡을 해서 고 사를 지낸다. 산고사 송О만은 장승제 말고도 산제사도 맡아서 하고 있다. 이장, 노인회장과 함 께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것을 피해서 단정하게 제사를 지낸다. 날짜는 상의 해서 정한다.

25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집안고사 송О만은 산신제, 장승제를 지낸 후에 며칠 후에 본인이 지내고 싶은 날 집안(가택)고사를 지낸다. 터주 대감을 우선으로 마루에 떡을 차리고 술 한 잔 부어서 절을 한다. 마루의 터주 대감에게는 팥시루떡을 시루 째 놓고 술 을 붓는다. 가끔 무나물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놓고 절을 세 번 한다. 꼭 고사 때가 아니더라도 집안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터주 대감에게 무사고를 기원한다. 그 다음에는 아궁이가 있는 주방에 가서 떡을 놓는다. 안방에는 삼신을 위해서 깨끗한 백설기와 정한수를 올려놔야 한다. 방에는 절을 한 번 한다. 집안에 아기를 낳았을 때는 아기 낳고 3일 후에 밥상을 안방에 놓고 삼 신할머니께 ‘삼신자손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바깥에 농기계에도 떡을 한 조각씩 놓았다. 기계도 잘 돌아가라고 놓는 것 이다. 화장실에도 한 쪽 놓았다. 옛 말에 화장실에서 넘어지면 죽는다는 말 도 있듯이, 화장실에서 넘어지거나 빠지면 떡을 한 시루 해놓고 빌었다. 장 독에도 떡을 놓았고 밖에도 한 바가지 해놔야 한다. 바깥에서 죽은 사람은 집에 못 들어오기 때문에 대문 앞에서 먹고 가라고 떡, 술을 차려놓는다. 산 소자리라서 귀신이 많으므로 막걸리를 두 병 사서 부었다. 예전에는 삼신상도 안방에 차리는 등 고사를 정성껏 지냈으나, 지금은 며 느리들도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 없애고 간편하게 산다. 부적 민О현의 집에는 부적이 있다. 절에서 받아온 부적인데 나무에 붙이라고 하여 널빤지에 붙여놓았다. 8. 나와 가족들의 사연 “나라가 망할려고 하니까 내가 자원해서 갔어” - 군 생활 이О욱은 일제 치하였던 20세 때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군생활을 처음 시작하였다. 20대 중반이던 6.25 때 이О욱은 애국심으로 자원입대했다. 일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53 본군대를 갔다 온 경험이 있어 자원한 것이었는데, 함께 한 사람 중에는 입 대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하다 익사하기도 했다. 7월 1일 9사단 19연대 사병 으로 입대한 이О욱은 일본군에 있었던 경험을 인정받아 15일간의 특별교육 을 받은 후 같은 해 11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안 끌려가고 안 죽은 대신 고생도 많이 했지” - 인민군 징집 피하기 인민군들의 징집이 시작되자 이를 피하려는 여러 노력들도 있었다. 장О 동은 할미꽃을 이용해서 입대를 피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다리를 손톱 으로 긁어 빨갛게 생채기를 낸 다음에 할미꽃 뿌리를 짓찧어서 붙이는데, 이 는 독성이 있어서 상처가 더 탈이 난다. 크게 붓고 진물이 나는 다리를 보여 주고 일단 징집을 피하는 대신 회복하는 데도 고생을 많이 했다. “군에 대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 군에 입대한 사연 박О혹은 제복에 흰 머플러 두르고 휴가 나오는 군인들을 보고 군에 대한 매력을 느껴 군인이 되었다. 해병대에 지원했다가 신병훈련소를 나와 일반 병으로 입대하였고 하사관학교로 가게 된다. 원주 해군사령부에 있다가 1사 단으로 가게 되었는데 약 10년간을 군에 있었다. “장교하면 밥은 먹겠다 해서…” 일반병사로 입대한 장О동은 군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군대반 합은 숟가락 두 개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배급량이 적었다. 1957년쯤 22사단 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군인이 많다는 이유로 사단이 해체되어 2사단 으로 편입되고 1960년쯤 미군 카투사에 1년간 근무하고 1사단으로 와서 제 대하였다. 당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장교하면 밥은 먹겠다 고 생각해서 직업군인을 하게 되었다. “옥수수 12개를 먹고 붙들린거야.” “배만 부르면 군대생활 할 거 같았어” - 배고픈 군 시절 장О동의 군 시절에는 식사가 매우 열악했다. 매 끼마다 고기가 나오는 지 금 군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한 두 달에 한 번 고기가 나오지만, 그것도 국

25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물뿐이었다. 한번은 이등병 하나가 부대 밖에서 인근 밭의 옥수수를 훔쳐 먹 다 걸린 일도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12개를 날것으로 먹었다고 한다. 주 민들도 ‘오죽 배고팠으면 그랬을까’하고 봐주기 일쑤였다. 가을에 누렇게 익은 벼를 훑어서 포탄으로 찧어 먹기도 했다. 81mm 훈련 탄으로 찧고 반합에 찌어 먹었다. 덜 자란 감자를 통째로 뜯어오는 일은 예 사였다. 새벽 4시에 걸리는 비상시에는 2인에 건빵 한 봉지씩 주었고, 두부 해먹으라고 주는 콩은 보리쌀과 삶아서 먹는데 설사가 나기 일쑤였다. 백О 달이 군에 있을 시절에도 비슷했다. 훈련소에서 시궁창에 밥풀 떠내려가는 것을 주워먹다 걸려서 얻어맞기도 했다. 참 열악했던 군시절이었다. “죽고 올지 살고 올지 모르니까 결혼은 하고 가야겠다…” “휴가 가서 3일 만에 결혼했지” 이О욱은 장교 시절 미 보병학교로 유학을 가기 전인 1951년에 결혼했다. 살아서 돌아올지 모를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의 오빠가 육군 소령 으로 중매 해줘 결혼했다. 당시는 예식장 같은 것도 없었고 폭격에 많이 파 괴된 터라 집에서 간단히 혼인식을 올렸다. 임О소는 고향인 홍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할 무렵 홍천으로 근무 온 남 편을 만났다고 한다. 중매 반 연애 반으로 만나서 결혼식은 서울의 종로예식 장에서 했다. 결혼 후에는 교사를 그만 두었고 남편도 예편 후에는 회사원이 되었다. 길О순은 아버지 고향인 춘천에서 어머니의 고모님의 중신으로 군인이었 던 남편 최О복을 만났다. 홍О태는 군생활 중 휴가를 나가서 혼인을 했다. 어느 날 집에서 신부감 사진과 혼인 날짜가 잡혀있는 편지를 받았는데, 이 미 날짜가 지난 상태였다. 급히 휴가를 받고 간 고향집에서 화가 난 형 부부 앞에 꿇어앉아 빌었다고 한다. 이후 처가집에 신랑이 왔다고 연락을 하여 3 일 후에 혼례를 올렸다. 처갓집 마당에서 혼례식을 하고 부인은 고향에 남겨 둔 채 3일 후에 부대로 돌아왔다. 결혼 후에는 다시 휴가를 신청하여 근무지 에 부인을 데려왔다. 살림도 없이 방만 얻어서 시작한 결혼생활은 혼례를 올 린 지 4개월만이었다. 타지로 발령이 나면 다시 떨어져 있는 생활이 반복되 었다. 한О호와 이О례는 같은 고향에서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휴전 후 조

부록 주민들에게 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 255 금 안정이 된 뒤에 결혼을 했다. 족두리 쓰고 꾸미고 뜨거운 방에 하루 종일 앉아 ‘색시놀음’을 했다. 가마는 타지 않았다. “재를 갖다 얼굴에 머리에 퍼붓는 재끄러미” - 혼례식 박О년은 통일촌 입주를 위해 급하게 신부감을 찾던 남편과 결혼과 함께 들어온 주민이다. 혼례식을 올리지 않고 살다가 2, 3년 후에 가깝게 지내던 마을사람들이 남편을 설득해 혼인식과 잔치를 하게 되었다. 가마를 타고 재 끄러미(잿거르미)를 하는 등 형식을 갖추었다. 가마는 신랑 신부 모두 탔는 데, 신부는 지붕이 있는 가마를, 신랑은 틀만 있는 가마를 탔다. 재끄러미는 잿거름, 짚 같은 것을 태운 재를 봉지에 담아서 한껏 꾸민 신랑에게 던지는 짓궂은 장난이었다. “사돈집하고 점잖은 얘기하는 훵이 하나 있어” - 파주 월롱 지역의 전통 혼례식 광주이씨, 함안 최씨 집안인 이О훈 부부는 하인들이 혼례식을 도와주었 다. 결혼식은 신부집에 가서 절하고 제례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서로 진 행됐다. 가까운 한 동네여서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전쟁 후 10년 안팎 인 1960년대 초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혼례할 때 ‘훵’이라는 역할이 있었다. 신랑의 친척 중 삼촌, 형님뻘 되는 점잖은 사람이 집안을 대표로 가서 사돈 집과 대화를 나누곤 하는 것이다. 훵은 부모가 아닌 제 3인이 가는 데, 이О 훈은 팔촌 형님이 훵을 해주었다. 집에 들어갈 때 문지방 넘을 때 바가지를 밟아 깨뜨리며 들어갔다. 아랫집 이나 옆집에 있다가 준비가 되면 신랑이 혼례하는 장소로 들어가는데, 이런 대기실에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훵이다. 양가 훵이 대화를 나누며 혼례식을 기다린다. 대례상에는 닭, 국수 등을 놓았다. 하인(하님)이 절을 시키곤 했 다. 이О훈은 남자는 두 번 반, 여자는 다섯 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절이 끝나면 본가로 가야하는데 전쟁 후여서 말이 없었고 소를 탈 수도 없으니 걸 어갔다. 신부가 탈 가마도 없었지만 전쟁 후에 가마 타는 문화가 없어졌다. 신랑집 안방에 신부는 앉아 기다리는데, 이를 색시놀음이라고 한다. 아랫목 에 앉아있고 여자 하님이 옆에서 심부름을 해주었다.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

256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리고 며칠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날 바로 신랑집으로 오는 것이 경기도 풍습 이었다. 혼례를 하고 나면 어린 친척들이 사방에 서서 재를 던지고 신랑 얼굴, 옷 에 갖다 문지르는 장난을 했다. 옷장 등에도 집어넣고 심하게 했다. 잔칫날 깨끗이 마련한 예복은 재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장난들은 지금으 로 치면 폭죽 같은 것으로 가장 축하해주는 표현 중 하나였다. “맏며느리야 내가. 고생도 엄청 하고 살았지” - 시집살이 김О자는 시누의 중매로 남편과 만나 23세에 결혼했다고 한다. 8남매의 집안의 맏며느리로 고생을 많이 했다. 결혼 후 8개월 만에 남편은 군대로 떠 나고 화양리에 있는 시집에서 시부모 밑에서 시동생, 시누들 모두 11식구와 같이 살았다. 5, 8살이었던 시동생들을 씻기고 밥 해먹이며 5년을 살다가 남 편과 함께 통일촌에 들어와 살았다. 들어올 때도 초등학교 졸업한 시동생 한 명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다. “부산도 가고 양산도 가고 영천도 가고, 많이 돌아댕겼어요” - 군인가족 삶, 이사 다니기 길О순은 군인인 남편과 결혼하여 부산, 양산, 경북 영천 등 배치 받는 곳 마다 옮겨다니며 이사를 많이 했다. 군 생활을 했던 홍О태도 이사를 자주 다녀서 필요한 물건 외에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이불 한 채, 옷, 냄비만 있으면 되었다. 당시에는 이불가게 같은 것이 없을 때여서 이불은 꼭 가지고 다녀야 했다. 최О주도 이사를 자주 했다. 반닫이는 옷 등을 보관한 채로 열 차에 짐을 부쳐서 운반했다. 열차까지 운반하는 것은 군인들이 도와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258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군대시절 군 입대 후 전쟁터 투입 전(홍О태) 1972년 통일로 건설 작업에 나가서(홍О태) 12사단 복무시절 보급품을 나눠주며(홍О태) 12사단 창설 6주년을 기념하며(홍О태)

부록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 259 혼례 월남전에 참전함을 기념하기 위해 월남에서 찍은 사진(백О달) 군 생활 동안 받은 편지들을 모아둔 추억록(문О배) 친척의 약혼식 장면(문О배) 약혼식(임О소)

260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혼례식을 보러온 하객들(한О호) 신랑 옷에 재가 묻은 ‘재끄러미’ 혼례사진(이О훈) 등에 업혀 입장하는 신랑(한О호) 나란히 앉아있는 신랑과 신부(한О호)

부록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 261 청도에서 올린 혼례식(홍О태) 혼례식을 위해 차려입은 사모관대(백О달) 혼례식을 마치고 떠나는 신랑과 신부(백О달) 집에서 찍은 혼례사진(백О달)

262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결혼식 후 친구들과 함께 올라간 임진각(백О달) 신식으로 다시 찍은 혼례사진 (백О달) 식장까지 차로 이동하는 신부(임О소)

부록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 263 신식혼례식(민О승) 청첩장(최О주)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올린 혼례식(최О주)

264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이런저런 옛모습 금촌예식장에서 올린 신식혼례사진(민О승)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여 마을체육대회가 되었던 군내초등학교 운동회 통일촌 경로잔치의 날 군내초등학교 학생들의 공연

부록 마을 사람들의 사진첩 | 265 교회행사 중 하나였던 신년축복성회 통일촌 입주초기 찍은 타 마을 견학 단체사진 군내면에서 열린 ‘통일기원 제1회 전통민속놀이’

통일촌브랜드마을육성사업 : 통일촌마을조사보고서 •주최 : 안전행정부 · 경기도 DMZ정책과 · 파주시 문화관광과 · 민북관광사업소 •기획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조사 · 집필 : 김종대 중앙대학교 비교민속학과 교수 김현경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 남창근 청주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 / 경기학연구팀 연구원 이동아 문화살림연구원 연구원 정세영 중앙대학교 대학원 비교민속학과 석사과정 진수현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전소윤 중앙대학교 민속학과 김지욱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수석연구관 이승훈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연구원 •진행 · 발간 : 김지욱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수석연구관 / 팀장 이승훈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연구원 김성신 고려대학교 민속학 석사 이은솔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팀 연구원 2012. DMZ지방브랜드세계화시범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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