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촌마을박물관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Tongilchon Village Museum - Tongilchon People, Their Life Stories 統一村博物館 - 統一村の人々、生活の話 统一村村庄博物馆 - 统一村的人们,他们的生活故事 2013

일러두기 Explanatory notes はじめに 绪言 이 도록은 안전행정부•경기도•파주시의 ‘2012. DMZ지방브랜드 세계화시범사업’ - 『통일촌브랜드마을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조 성한 통일촌마을박물관의 전시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2012. 8. ~ 2013. 8. 까지 통일마을정보화체험관을 리모델링하여 박물관으로 조성하고 마을사람들을 직접 만나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기증받 아 박물관에 전시하였다. This book contains exhibition materials of Tongilchon Village Museum which was established by Tongilchon Brand Village Development of DMZ Global Brand Business by Paju City Office, Gyeonggi Provincial Office and the Ministry of Security and Public Administration. The existing Tongil Village Information Center was remodeled into the Museum from August 2012 to August 2013 and the village people donated their story-telling materials to the Museum for exhibition. この図録は安全行政部・京畿道・坡州市の「DMZ地方ブランド 世界化モデル事業」 - 『統一村ブランド村育成事業』の一環 として造成した統一村博物館の展示内容を収録したものであ る。2012.8.~ 2013.8.まで統一村情報化体験館をリモデリン グして博物館を造成し、村の人々に実際に会って経緯のある 諸物の寄贈を受けて博物館に展示した。 本图录介绍了作为安全行政部、京畿道、坡州市‘DMZ地方品 牌全球化示范项目’——『统一村品牌村培养项目』的一部 分建造的统一村村庄博物馆的展品。从2012年8月到2013年8月 把统一村信息化体验馆改造为博物馆后, 收集村民们捐赠的 各种带有故事的物品展览在博物馆里。

<박물관에 전시품을 기증하신 분들> 권영한, 길종순, 김성태, 김순조, 김용민, 김용분, 김정식, 남상규, 문성배, 민복현, 민위현, 민태민, 민태승, 박복년, 박복희, 박우영, 박차순, 백운달, 서정환, 송천만, 심간난, 이귀례, 이완배, 이일태, 이종옥, 이창훈, 임권정, 임병순, 임인소, 장성동, 조동순, 조복덕, 최영주, 최필순, 한봉호, 한선희, 홍순태, 황분이(가나다순)

어서 오세요!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담은 곳, 민간인통제구역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 자리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별로 펼쳐놓지는 못했습니다. 40년 전, 자유의 다리 검문소 앞에서 경운기에 타고, 싣고 들어온 이삿짐이었으니 무엇이 남았겠습니까? 이미 전쟁 피난길에 잃어버린 살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몇 가지를 빌미로 마을이 생긴 내력과 이 마을을 일구어낸 우리들의 의지를, 그리고 지금도 휴전선 옆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 속내를 한 번쯤 돌아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쟁, 그리고 휴전이 지금의 현실임을.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함께 공감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먼길,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13. 8. 14.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통일촌 주민 일동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We cordially welcome you! Tongilchon is a village in a restricted area for civilians. The village is still affected by the painful history of the Korean War. Household goods which were not aged and not expensive because they were brought on a small cultivator from the checkpoint on the Bridge of Freedom to each house about 40 years ago. A lot of household goods were lost on a refugee way during the war. However, our determination to restore the village and the history of the village are presented here with several objects which we kept after we moved into this village. We hope you will share our desire and longing for the peaceful reunification in the reality ʻarmisticeʼ after the war as well as our lives in this village. Once again, we deeply appreciate your visit to this remote village. Aug. 14, 2013. All residents in Tongilcheon Paju, Gyeonggi-do, Republic of Korea. Tongilchon People, Their Life Stories

いらっしゃいませ! 統一村は、朝鮮戦争の痛ましい歴史を持つ民間人統制区域の中にある村です。 40年前に自由の橋検問所の前を通り、小さい耕耘機に乗って持ってきた荷物は古いものばかりで、 高価なものなどありませんでした。戦争避難の最中で失ってしまったのです。 それでも、その少ない荷物を持って村を築いた来歴や、 この村を育ててきた私たちの意志をここに展開しています。 戦争、そして休戦という現実の中で平和統一を願りながら生きている私たちのことを共感してい ただければと期待しております。 遠路はるばるお越しいただき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2013. 8. 14. 大韓民国 京畿道 坡州市 統一村住民一同 統一村の人々、生活の話

欢迎光临! 统一村位于民统线区域内,是烙有韩国战争悲痛历史伤痕的村庄。 40年前,小型手扶拖拉机拉着破旧不堪的行囊来到了自由大桥边卡前, 值钱的大部分行李早已在战争避难中丢失。 不管怎样,仅凭这些什物,展现了村庄历史和洒下汗水开垦出这片村庄的我们的意志。 不断在战争和停战现实中祈愿和平统一的我们,希望引起大家的理解与共鸣。 感谢您们远道而来。 2013.8.14. 大韩民国京幾道坡州市统一村全体村民 统一村的人们,他们的生活故事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1. 비무장지대 DMZ … 16 2. 서부전선 DMZ의 자연환경 … 18 3. 통일촌의 역사 … 20 Ⅱ. 군인시절의 흔적 1. 마을에 남은 전쟁의 흔적들 … 31 2. 군대시절의 기억들 … 37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1. 공동체를 이루다 … 46 2. 의식주 생활 … 47 3. 마을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 55 4. 이런 저런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 58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1. 고향 땅에 돌아와서 - 한봉호 씨의 농사일지 … 72 2. 제대하면서 통일촌 들어왔어 - 제대 장병 홍순태 씨 … 78 3. 최영주 씨의 옛 집 이야기 … 82 4. 정자리 민씨 댁의 일생의례 … 89 부록 ● 사진으로 보는 통일촌브랜드마을 … 93 ● 통일촌 이야기와 문화유적 … 107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Contents

휴전선으로 분단된 장단군 Jangdan-gun Divided by Truce Line 休戦線により分断されている長湍(チャンダン)郡 停战分界线隔开的长湍郡 군사분계선 장단군 ● 개성 대남면 강상면 대강면 소남면 장도면 진서면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 장남면 통일촌 해마루촌 대성동 자유의마을 10

The History and People of Tongilchon. 'Tongilchon', a special brand by itself. Tongilchon is located at 4.5km south of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in the restricted area for civilians on the western front of the DMZ, in Baekyeon-ri, Gunnae-myeon, Paju, Gyeonggi-do. Clan villages of the Mins, the Chois, the Baks, and the Yis existed around this village before the Korean War. 80 households have succeeded the history of their hometown around the DMZ, which is recognized as an area of landmines and barbed-wire fences, since Aug. 1973. 統一村の歴史と住民、村名自体が特化ブランドとなった「統一村」 統一村は、韓国京畿(キョンギ)道坡州(パジュ)市郡内(クンネ)面白蓮(ペギョン)里・DMZ西部戦線民間人統制区域の 中にある村で、軍事分界線から南に4.5㎞離れた地点に位置する。戦前は、この村を中心にミン氏、チェ氏、パク 氏、イ氏などの集姓村(同族部落)があった地域である。1973年8月、南北分断により離れざるを得なかった故郷に 80戸が入居し、地雷と鉄条網に覆われたDMZの近くで分断以前の故郷の歴史を受け継いでいる。 统一村的历史和人们,村庄名称原原本本成为特化品牌的“统一村” 统一村位于京幾道坡州市郡内面白莲里,是一非武装地带(DMZ)西部战线民统线区域内的村庄,距离军 事分界线南侧4.5㎞处。战争前以该村庄为中心曾有过闵氏、崔氏、朴氏、李氏等集姓村。但1973年8月因南 北分裂不得不离开这片故乡。后有80户人家住进了这片有着对地雷和铁丝网深刻印象的DMZ附近,延续着 分裂以前的故乡历史。 통일촌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DMZ 서부전선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자리 잡은 마을로 군사분계선 남방 4.5㎞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전쟁 전에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민씨, 최씨, 박씨, 이씨 등 집성촌이 있었 던 지역이다. 1973년 8월, 분단으로 인해 떠나야만 했던 고향으로 80호가 입주하여 지뢰와 철조망으로 각인된 DMZ 인근에서 분단 이전 고향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민통선 내 행정기관인 장단출장소와 통일촌마을박물관, 군내초등학교, 백연보건지소, 민방위 대 피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외 통일촌 교회, 경로당, 복지회관, 부녀회식당, 통일촌구판장, 농산물직판장, 장단 콩 슬로푸드 체험장, 정보화 마을 체험장, DMZ 체험 농장, DMZ 야생화 체험장 등이 있다. 장단출장소 관할구역에는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 진서면 등 4개 면 22개 리가 속해 있다. 그 중 거주 지역은 백연리 통일촌과 조산리 대성동(1953년, 자유의 마을), 동파리 해마루촌(2001년, 수복마을) 3개 리 8개 반이다. 파주시 전체의 19.3%라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거주 가구의 95%가 농사를 짓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볼 때 해서정맥(海西正脈)의 기맥을 이어받은 산줄기로 북한의 용맥과 인연을 맺고 있는 길지이다. 통일촌의 역사와 사람들, 마을이름이 그대로 특화브랜드인 “통일촌” 11

12 ● 통일촌의 이야기 역사 1910 ~1945년 (일제강점기) 1946 ~1960년 1960 ~1980년 1981 ~2000년 2001년 ~현재 국가사 마을사 개인사 1910 1919 1945 한일강제병합 3·1독립운동 8·15광복 1914 1945 장단군으로 10개 면 67개 리로 구성 장단군 5개 면이 북한에 편입 1930 1934 1937 1941 1945 홍순태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출생 최영주 평양 신양리에서 출생 한봉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서 출생 이귀례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에서 출생 민태승 경기도 장단군 정자리에서 출생 한봉호 파주 마정리로 이사 한봉호 파주 마정국민학교 입학 1950 1951 1953 한국전쟁 발발 1·4후퇴 한국전쟁 정전으로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 설정 1953 민간인 통제구역 설정으로 민간인 거주 불가 1948 1950 1952 1953 1954 1956 1957 1958 1959 1960 민태승 파주 신산국민학교 입학 홍순태 방위병으로 입대/ 최영주 평양에서 남한으로 피난 홍순태 정식 군대 입대/ 강원도 양양 돌바위고지 전투 참전 최영주 서울 한성여자고등학교 입학/ 한봉호 금촌리에 정착 최영주 · 이영화 혼인 민태승 파주 광탄중학교 입학 최영주 첫째 득남 한봉호 대경상업고등학교 졸업 홍순태 대구 5군관구사령부로 전출 민태승 서울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입학 최영주 남편 군대 전역으로 용주골에서 장사 시작 홍순태 · 박차순, 한봉호 · 이귀례 혼인 한봉호 군대 입대 1961 1964 1968 1972 1976 1978 5 · 16군사 쿠데타 발발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 파견에 관한 협정 체결 1월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으로 향토예비군 창설 유신헌법 공포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발발 파주지역 제 3땅굴 발견 1972 1973 1978 1979 장단면, 진서면, 진동면이 파주군에 편입 육군 1사단 제대 장병 14명 영농 시작 통일촌 준공 및 입주 통일촌 주민 자유회관에서 북한의 남침야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 개최 군 조례 제601호에 의해 군내출장소 설치 1961 1963 1964 1965 1966 1970 1971 1975 1979 한봉호 · 이귀례 첫째 득남 한봉호 군대 전역 한봉호 금촌3리 마을이장 취임 민태승 군대 입대 홍순태 1사단으로 전출 민태승 군대 전역 최영주 용주골에서 양계업 시작 민태승 · 박옥미 혼인 민태승 · 박옥미 첫째 득녀 민태승 초대 새마을지도자 취임 최영주 초대 부녀회장 취임 한봉호 축산업 시작 1982 1985 1994 1999 2000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등록과 보존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 40년 만에 고향방문단 혈육 상봉 김일성 사망 1차 연평해전 발발 김대중 대통령 북한 방문 1987 1988 1996 1997 1998 2000 자유회관 준공 통일촌 주민 생계대책 호소 농성 파주군이 파주시로 변경/ 통일촌 노인회 구성 DMZ 일일 관광 시작/ 제1회 통일촌 장단콩 축제 개최 통일대교 개통 사랑의 집 완공 1985 1991 1993 1995 최영주 주택 신축 민태승 파주군 군의원 당선 한봉호 참외농사 시작 민태승 · 박옥미 첫 딸 혼인 2002 2003 2006 2010 2011 2013 2차 연평해전 발발 개성공단 건설 착공식 북한 1차 핵실험 실시 천안함 사건 발발/ 연평도 포격사건 발발 김정일 사망 개성공단 사실상 가동 중단 위기 2001 2005 2011 2013 통일촌 시범 정보화마을 지정 장단주민자치센터 준공 농식품부에서 슬로푸드마을로 지정 군내출장소를 장단출장소로 변경 통일촌마을박물관 건립 2004 2006 2008 2013 홍순태 노인회장 취임 한봉호 인삼농사 시작 민태승 파주문화원장 취임 한봉호 노인회장 취임

13 국가사 마을사 개인사 1910 1919 1945 한일강제병합 3·1독립운동 8·15광복 1914 1945 장단군으로 10개 면 67개 리로 구성 장단군 5개 면이 북한에 편입 1930 1934 1937 1941 1945 홍순태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출생 최영주 평양 신양리에서 출생 한봉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서 출생 이귀례 경기도 장단군 진동면에서 출생 민태승 경기도 장단군 정자리에서 출생 한봉호 파주 마정리로 이사 한봉호 파주 마정국민학교 입학 1950 1951 1953 한국전쟁 발발 1·4후퇴 한국전쟁 정전으로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 설정 1953 민간인 통제구역 설정으로 민간인 거주 불가 1948 1950 1952 1953 1954 1956 1957 1958 1959 1960 민태승 파주 신산국민학교 입학 홍순태 방위병으로 입대/ 최영주 평양에서 남한으로 피난 홍순태 정식 군대 입대/ 강원도 양양 돌바위고지 전투 참전 최영주 서울 한성여자고등학교 입학/ 한봉호 금촌리에 정착 최영주 · 이영화 혼인 민태승 파주 광탄중학교 입학 최영주 첫째 득남 한봉호 대경상업고등학교 졸업 홍순태 대구 5군관구사령부로 전출 민태승 서울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입학 최영주 남편 군대 전역으로 용주골에서 장사 시작 홍순태 · 박차순, 한봉호 · 이귀례 혼인 한봉호 군대 입대 1961 1964 1968 1972 1976 1978 5 · 16군사 쿠데타 발발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 파견에 관한 협정 체결 1월 북한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입으로 향토예비군 창설 유신헌법 공포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발발 파주지역 제 3땅굴 발견 1972 1973 1978 1979 장단면, 진서면, 진동면이 파주군에 편입 육군 1사단 제대 장병 14명 영농 시작 통일촌 준공 및 입주 통일촌 주민 자유회관에서 북한의 남침야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 개최 군 조례 제601호에 의해 군내출장소 설치 1961 1963 1964 1965 1966 1970 1971 1975 1979 한봉호 · 이귀례 첫째 득남 한봉호 군대 전역 한봉호 금촌3리 마을이장 취임 민태승 군대 입대 홍순태 1사단으로 전출 민태승 군대 전역 최영주 용주골에서 양계업 시작 민태승 · 박옥미 혼인 민태승 · 박옥미 첫째 득녀 민태승 초대 새마을지도자 취임 최영주 초대 부녀회장 취임 한봉호 축산업 시작 1982 1985 1994 1999 2000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등록과 보존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 40년 만에 고향방문단 혈육 상봉 김일성 사망 1차 연평해전 발발 김대중 대통령 북한 방문 1987 1988 1996 1997 1998 2000 자유회관 준공 통일촌 주민 생계대책 호소 농성 파주군이 파주시로 변경/ 통일촌 노인회 구성 DMZ 일일 관광 시작/ 제1회 통일촌 장단콩 축제 개최 통일대교 개통 사랑의 집 완공 1985 1991 1993 1995 최영주 주택 신축 민태승 파주군 군의원 당선 한봉호 참외농사 시작 민태승 · 박옥미 첫 딸 혼인 2002 2003 2006 2010 2011 2013 2차 연평해전 발발 개성공단 건설 착공식 북한 1차 핵실험 실시 천안함 사건 발발/ 연평도 포격사건 발발 김정일 사망 개성공단 사실상 가동 중단 위기 2001 2005 2011 2013 통일촌 시범 정보화마을 지정 장단주민자치센터 준공 농식품부에서 슬로푸드마을로 지정 군내출장소를 장단출장소로 변경 통일촌마을박물관 건립 2004 2006 2008 2013 홍순태 노인회장 취임 한봉호 인삼농사 시작 민태승 파주문화원장 취임 한봉호 노인회장 취임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 In 1972, before the village, Tongilchon was established soldiers and non-commissioned officers in Army Division 1 cultivated the land around Sunaetbeol, calling it “Jeonjin Farm”. In May 1972, President Bak Jeonghui gave a special order to “build a strategic exemplary farming village to offset the disadvantages of reconstructed village” after a visit to the Red Cross Office near the front line. Tongilchon was built in Aug. 1973. The number of residents who could move in at the beginning was restricted to 40 households including heads of families who had been discharged from military service and 40 residents whose hometown was the Tongilchon area. Tongilchon was built on the basis of an Israeli kibbutz. At first, the village was intended for the people to work during day time and to be prepared for battles in case of emergency. Since then, Tongilchon advanced to become Tongil Information Village, the Jangdankong Slow Food Experience Village and the DMZ Globalization Village and has been securing its position as a base for peaceful unification. 統一村が建設される前の1972年、1師団の兵士と下士官たちがスネッポル原の近くの土地を開墾し、「前進農場」と呼んでいた。 1972年5月、パク・ジョンヒ大統領の赤十字前方事務所を訪問した際に、「再建村の不備を補完した戦略的なモデル農村を建設せよ 」という特別指示が下され、1973年8月に統一村が建設された。初の入居者は除隊兵士世帯40戸と、この地域の原住民世帯40戸に制 限された。統一村は建設当時、イスラエルのキブツ村を手本にし、昼間は働き、有事の際には戦闘に臨むことを目標としていた。以 後、この村は統一情報化村、長湍大豆スローフード体験村、DMZ世界化ブランド村と発展を重ね、平和統一の拠点地域として位置づ けられている。 1972年,在建立统一村之前第一师的士兵和副士官们开垦了数内平原的土地,并把其称为‘前进农场’。1972年5月,朴正熙 总统于在视察红十字前方事务所的时候下达了“完善重建村的不足之处建设战略性示范农村”的特别指示。1973年8月,统一 村建成。统一村的第一批住户限为40户退役官兵和40户当地原住民。统一村的建设模仿以色列的基布兹村,以白天干活、发 生紧急情况时立即投入战斗为目标。此后,统一村经统一信息化村、长湍大豆慢食体验村发展成DMZ全球化品牌村,正成为 和平统一之据点。 History of Tongilchon – “Fighting as work and work as fighting” 統一村ができた経緯 – 「働きながら戦い、戦いながら働く」 统一村的形成历史 – “边耕作边打仗,边打仗边耕作。” 통일촌이 건립되기 전 1972년 1사단 사병과 부사관들이 수냇벌 인근의 땅을 개간하여 ‘전진농장’이라고 불 렀다. 이후 19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적십자 전방사무소 순찰시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 범농촌을 건설하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졌고, 1973년 8월에 통일촌이 건립되었다. 첫 입주자는 제대 장병 40호, 이 지역 원주민 40호로 제한되었다. 통일촌 건립 당시 이스라엘의 키부츠 촌을 본 따 낮에는 일을 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후 이 마을은 통일 정보화마을, 장단콩 슬로푸드 체험마을, DMZ세계화브랜드마을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평화통일의 거점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6 1. 비무장지대 DMZ The History of the Korean War and DMZ 戦争の歴史とDMZ 战争的历史和非武装地带(DMZ) 비무장지대(DMZ)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으로 전쟁은 끝났고 남 과 북 사이에는 군사분계선이 정해졌다. 이 군사분계 선을 사이에 두고 생겨난, 길이 248km, 폭 4km, 넓이 98,000ha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이 바로 비무장지대 (DMZ)이다. 이 지역에는 민간행사와 구제사업을 제외 한 어떠한 적대 행위나 적대 시설도 설치할 수 없다. 게 다가 남북한 양측이 이중삼중으로 철조망을 치고 군부 대를 주둔시키고 있어 지구상에서 가장 긴장된 지역이 되었다. 파주의 DMZ와 민간인통제보호구역에는 전쟁과 자 연 그리고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 토지 이용의 규제로 야생동식물의 서식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인 근에는 덕진산성과 마애사면석불, 허준선생묘소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또, 판문점과 제 3땅굴, 도라산 전망 대,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등이 조성되어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Demilitarized Zone (DMZ) The Korean War ended with a truce agreement on July 27, 1953 and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MDL) was formed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The DMZ is a broad zone of 98,000ha, 248km long and 4km wide between the MDC. No hostile actions or facilities can be carried out or installed in this zone except private events or relief work. Moreover, South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17 and North Korea station their military forces here with dual or triple barbed-wire fences. The DMZ is the tensest zone in the world. War, nature and people exist together in the DMZ in Paju and the civilian control and protection zone. These zones have created the optimum environment for wild animals and plants because of the restriction in land use. Cultural heritages in the area include Deokjinsanseong fortress, Maaesamyeonseokbul (Buddha's statue), and the tomb of Master Heo Jun. Moreover, the zone has been changed into a space for peace and life through the construction of Panmunjeom, the third underground tunnel by North Korea, the Mt. Dora observatory and Imjingak Pyeonghwa Nuri Park. 非武装地帯(DMZ) 1953年7月27日の休戦協定により戦争は終わり、南北 の間には軍事分界線が定められた。この軍事分界線を 間に挟んでいる、長さ248km、幅4km、広さ98.000haに 至る広い地域がいわゆる非武装地帯(DMZ)である。この 地域では、民間のイベントや救済事業を除いたいかな る敵対行為や敵対施設の設置をしてはならない。さら に、韓国と北朝鮮の両側が二重、三重に鉄条網を張り 巡らせ、軍部隊を駐屯させており、地球上で最も緊張 している地域となったのである。 坡州のDMZと民間人統制保護区域には、戦争と自然、 そして人間が共存している。土地の利用が規制されてい るため野生動植物の生息に適した環境となっており、近 くには徳津山城と磨崖四面石仏、ホ・ジュン先生墓所な どの文化遺産がある。また、板門店や第3トンネル、都 羅山展望台、臨津閣平和ヌリ公園などが造成され、平和 と生命の空間として生まれ変わりつつある。 非武装地带(DMZ) 随着1953年7月27日签订休战协议,朝鲜战争结束,在 南(韩国)北(朝鲜)之间划定了一条军事分界线。以此军 事分界线为中心出现了长248km、宽4km、面积达98公顷 的广阔的非武装地带(DMZ),在非武装地带除了民间活动 和救济项目以外不得进行任何敌对行为或设置任何敌对 设施。而且,南北双方在非武装地带铺设双重、三重带 刺铁丝网并驻扎军队,因此非武装地带成为在全球局势 最为紧张的地带。 坡州的非武装地带和民统线保护区是人和自然以及战 争并存的地区,因土地的使用受到限制,为野生动植物 的栖息提供了良好的环境。附近有德津山城和磨崖四面 石佛、许浚先生墓地等文化遗产。而且,还有板门店、 第3洞穴、都罗山瞻望台、临津阁和平世界公园等,因此 正成为和平和生命之地。 멀리 보이는 인공기와 태극기 한국전쟁 참여증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18 2. 서부전선 DMZ의 자연환경 Natural Environment on the Western Line of DMZ 西部戦線DMZの自然環境 西部前线DMZ的自然环境 최근에 DMZ는 단순한 긴장지역이기보다 우수한 생 태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생 태계가 스스로 복원되어 가는 원시식생의 모습을 조사 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심 부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거대한 벨트처럼 연결된 DMZ 는 남한과 북한의 접경지역으로 더 이상 분단의 상징 으로만 머물지 않고,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나아가 고 있다. Recently DMZ is considered to be an excellent area of ecosystem not to be an area with tension. It has a high academic value of the original vegetation showing the natural restoration of devastated ecosystem. DMZ lying east to west like a huge belt at the central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is a border line area of the North and South Korea and is now becoming a space for peace and life not symbolizing the country’s division any more. 最近DMZは単純な緊張地域というよりは優秀な生態地 域としても認識されている。戦争により毀損された生態 系が自ら復元していく原始植生の姿を調査することがで きる学術的価値が高いためだ。朝鮮半島中心部の西側か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19 ら東側まで巨大なベルトのように連結されたDMZは、韓 国と北朝鮮の境界地域としてこれ以上分断の象徴だけに 留まらないで、平和と生命の空間に進んでいる。 最近,非武装地带(DMZ)被人们更多地视为良好的生态 地带。这是因为,可以调查因战争遭到破坏的生态系统 通过自我修复恢复原始植被的过程,所以具有很高的学 术价值。在朝鲜半岛的中央从西到东形成巨大带状的非 武装地带(DMZ)是韩国和朝鲜的边境地区,也是南北分裂 的象征,但正成为和平和生命之地。 서부DMZ민통선의 임진강·한강 하구권역은 동고서 저의 한반도 지형에서 볼 수 있듯이 고도가 낮은 구릉 지 형태의 산지와 평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더불어 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있어 다양한 형태의 습지가 발 달되어 있다. 파주시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 진서면 을 포괄한 민통선 지역과 그 일원인 교하탄현면 일대 의 임진강 물길은 하루에 두 번 서해의 바닷물이 밀려 왔다 돌아나가는 기수역(汽水域,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 는 곳)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골마다 드러나는 펄 가장자리로 산남습지, 공릉천하구습지, 시암리습지, 성동습지, 장단습지, 문산습지, 임진각습지, 초평도습 지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대규모 습지의 배후에는 넓 은 농경지와 다양한 형태의 둠벙이 있고, 야트막한 야 산을 끼고 구불구불 느리게 흘러가는 자연 하천들 주위 로 토양이 퇴적되면서 수변식물이 자라고 다양한 종류 의 물고기와 갑각류, 파충류 등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 이 만들어지면서 야생동물의 먹이사슬 구조가 유기적 으로 연결되어 있다. 말똥가리 삵 창포 투구꽃 뜸부기 금눈쇠올빼미 독수리 통발 고라니 귀제비 재두루미 성동습지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0 3. 통일촌의 역사 History of Tongilchon 統一村ができた経緯 统一村的历史 1) 통일촌 생성 이전의 역사 (1)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 통일촌이 있는 파주지역은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 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 를 차지한 것은 백제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싸 움으로 475년에는 파주 땅 전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 었다. 그 뒤 신라 진흥왕 때 고구려를 몰아내고 신라가 차지했으며 삼국통일 과정에서 파주는 고구려와 신라 가 서로 싸우는 각축장이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지역 을 주 · 부 · 군 · 현(州府郡縣)으로 지명을 고치는데 이 때 적성지역을 적성현이라 불렀다. 그 뒤 장단 · 적성 · 파평 지역이 개성부 관할의 기현에 속하게 된다. 1018 년(현종 9)에 들어 파주지역은 경기(京畿)에 속하는 데 본래 경(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뜻 하고 기(畿)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다. 이후 파주지역은 무신정변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는 데 1170년(의종 24)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보현원이 바로 장단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174 년(명종 4)에는 장단지역에 궁궐조성관을 두어 새 궁궐 을 지을 준비를 시작하여 1217년(고종 4)에 당시 장단 현의 백악에 궁궐조성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에 파주는 교하 · 파평 · 파주 · 적성 · 장단 5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398년에 파평현과 서 원현(파주지역)을 합해 원평군이 되었다. 1414년에는 중앙관제와 지방군현제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교하현 이 원평군에 소속되고 장단현은 임단현이 되었다. 이듬 해 1415년에 인구 1,000호를 넘어선 원평군이 원평도 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59년(세조 5) 원평도호부가 세 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목(牧)으로 승격되어 파주로 고치게 되었다. 일제시대인 1912년 당시 파주의 행정구역은 교하군 · 파주군 · 장단군 · 적성군 4개 군으로 나누어져 있었으 나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적성군이 연천군에 흡수되었고 교하군 전역이 파 주군에 폐합되었으며 또한 양주군 · 고양군 · 적성군의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21 일부가 파주군에 편입되어 주내 · 월롱 · 천현 · 광탄 · 조리 · 임진 · 파평 · 와석 · 청석 · 탄현 · 아동 11개 면 을 관할하게 되었다. (2) 광복과 남북분단 The Independence and Division of Korea 光复和南北分裂 光復と南北分断 1945년 태평양전쟁이 일제의 패망으로 기울자, 일본 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기준으 로 각각 남쪽과 북쪽에 주둔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8 월 15일 광복과 함께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남북 분단이 시작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과 영국, 소 련 3개 국 외상회의에서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개 국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찬탁과 반탁의 대립이 발생 하였다. 그 대립이 점차 심해지면서 남북의 통일은 현 실적으로 점차 어려워져 갔다. 결국 남북한은 각각의 정부 수립을 꾀하여 1948년 8 월 15일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결국 38도선 을 기준으로 남북한에 각각 사상과 체제가 다른 2개의 정부가 공존하게 되었다. As time for the defeat of Japan drew closer during the Pacific War in 1945,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agreed to stay in the southern and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respectively dividing the peninsula by the 38th parallel to disarm the Japanese army. The division of Korea was determined as the U.S. Army and the Soviet Army remained in the south and north of Korean peninsula at the time of the liberation of Korea on Aug. 15. South and North Korea tried to establish their own governments. Thus, the Republic of Korea was founded in South Korea on August 15, 1948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was founded in North Korea on September 9, 1948. This meant two governments with different ideologies and systems in South and North Korea around the 38th Parallel. The five-year trusteeship plan was announced by 4 foreign countries at the foreign ministers conference of 3 of the countries--the United States, the United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2 Kingdom and the The Soviet Union--held in Moscow in Dec. 1945. Pro-trusteeship and anti-trusteeship groups came into conflict with each other. The conflict became more and more aggravated and the unification of South and North Korea became more and more difficult. 1945年太平洋戦争が日本の敗北へと傾くと、日本軍の 武装解除に向け、アメリカとソ連は北緯38度線を基準に それぞれ南側と北側に駐屯することで合意した。その 後、8月15日、光復と同時に38度線の南側にはアメリカ 軍が、北側にはソ連軍が駐屯し、南北分断が始まった。 1945年12月、モスクワで開催されたアメリカとイギリ ス、ソ連による3ヶ国外相会議で、5年以内を期限とす る4ヶ国信託統治案が発表されると、賛託派と反託派の 対立が発生した。その対立は次第に深刻化し、韓国と 北朝鮮の統一の実現はだんだん困難になっていた。結 局、韓国と北朝鮮はそれぞれ政府樹立を図り、1948年8 月15日、南側には大韓民国政府が、9月9日に北側には朝 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が樹立した。結局、朝鮮半島に は38度線を基準に韓国と北朝鮮というそれぞれ思想と体 制の異なる2つの政府が共存することになった。 1945年,日本在太平洋战争中显露出战败迹象,为了 解除日军武装,美国和苏联对以38线为准各自驻扎在南 侧和北侧达成共识。在8月15日光复后,随着美军驻扎在 南侧、苏军驻扎在北侧,朝鲜半岛出现了南北分裂。 1945年12月,美国、英国和苏联等三个国家在莫斯科 召开外长会议,发布了由四个国家以5年为期限对朝鲜半 岛进行托管的方案。托管方案发布后,出现了赞成和反 对的人相互对立的情况。并且,意见分歧越来越大,导 致南北统一越来越困难。 结果,南北双方决定各自成立政府,南方于1948年8月 15日成立了大韩民国,北方于9月9日成立了朝鲜民主主 义人民共和国。终究,以38线为界线出现了思想和体制 各不相同的两个政府。 (3) 전쟁과 휴전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38 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자행하였다. 개전 초기 한국 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이후 한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9월15일 인 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이어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반격을 전개하여 9월28일 서울을 수복, 10월26일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 선은 다시 38도선 부근으로 후퇴하였으며, 이후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1951년 7월 미국과 소련은 대한민국의 반대에도 불 구하고 휴전회담을 시작하였고, 결국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에 조인하였다. 3년여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남한과 북한을 합쳐 약 450만 명의 전사자와 1000만 명의 전재민이 발생하였고, 전 국토의 약 80%가 피해 를 입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North Korea suddenly invaded South Korea over the whole 38th parallel to communize the whole country on June 25, 1950. At the beginning of the war, South Korea forces were pushed down just behind the Nakdong River line by North Korea forces. After then, South Korea forces performed landing operations called Operation Chromite with the UN forces. Together with this operation, South Korea forces took the counterattack from Nakdong River line and reclaimed Seoul on September 28 and advanced to Amnok River line. However, interfere by the Communist Chinese army pushed South Korea forces back to the 38th parallel line and back and forth battles at the parallel line were continued. On July 1951, despite of the objection by South Korea,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started the truce talks and finally agreed to cease the war on July 27, 1953. The war continued for 3 years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23 and resulted in 4.5 million casualties and 10 million refugees. The result was so severe as to devastate approximately 80% of the territory. 1950年6月25日、北朝鮮は韓国を共産化するために38 度線全域で奇襲南侵を行った。開戦初期、韓国軍は北 朝鮮軍の攻撃に押されて8月初めに洛東江防御線まで後 退した。以後、韓国軍は国連軍と共に9月15日に仁川上 陸作戦を敢行し、続いて洛東江防御線で総反撃を展開 して9月28日にソウルを取り戻し、10月26日には鴨緑江 まで進撃した。しかし、中国共産軍の介入で前線は再 び38度線付近に後退し、以後現在の休戦ライン付近で一 進一退の攻防戦が続いた。 1951年7月、米国とソ連は大韓民国の反対にもかかわ らず、休戦会談を始め、結局1953年7月27日に休戦協定 に調印した。3年余りの間続いた戦争で韓国、北朝鮮約 450万人の戦死者と1000万人の戦災民が発生し、全国土 の約80%に被害が出る残酷な結果をもたらした。 1950年6月25日,朝鲜为了把韩国共产化在整条三八线 不宣而战全面入侵韩国。在战争初期,韩国军在朝鲜军 强大的攻击下8月初退守到洛东江防线。9月15日,韩国 军与联合国军一起开展仁川登陆战役,接着在洛东江防 线进行全面反击。9月28日韩国军和联合国军收复首尔, 并到10月26日一直推进到鸭绿江。但是,在中国的参战 下整条战线重新退回到三八线附近。此后,双方在现在 的停战线附近展开了一进一退激烈的攻防。 1951年7月,美国和苏联不顾韩国的反对开始进行停战 谈判,并于1953年7月27日签订了停战协议。因持续三年 多的战争,在朝鲜和韩国共死亡450万人、出现1000多万 名战争受害者,整个国土有80%左右遭到严重破坏。 이후 연천군 관할이던 적성면과 남면이 파주군에 편 입되었고 이듬해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다. 1963년 에는 장단군 군내면에 속했던 백연리 · 정자리 · 조산 리 · 읍내리 · 송산리 · 공덕리 · 방축리 · 방목리가 임 진면에 편입되었다. 1972년에는 장단군의 장단면 · 군내면 · 진서면 · 진 동면이 파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에는 아동면이 금촌읍으로, 임진면이 문산읍으로 승격되어 2읍 9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80년에 주내면이 읍으로 승 격되었고 1983년 다시 주내읍이 파주읍으로 이름을 바 꾸었으며 1989년에는 천현면이 법원읍으로 승격하였 다. 1996년에 파주군은 도농복합의 파주시로 승격하였 으며 2002년 조리면과 교하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현재 5읍 4면 2동 1출장소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2) 통일촌의 생성 (1) 전략적 시범농촌 건설 통일촌은 1973년 8월에 건립되었으나 그 이전인 1972년 통일촌의 모태가 될 수 있는 전진농장이 있었 다. 파주 인근을 지키던 1사단에서는 일부 장병들을 이 용하여 민통선 내에 넓은 토지에 농사를 짓게 하였고 이것을 전진농장이라고 불렀다. 이후 1972년 5월 대통 령의 적십자 전방사무소 순찰시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농촌을 건설하라”는 특별지시에 따 라 통일촌이 본격적으로 건립되었다. 전진농장에서 농 사를 지었던 군인들도 대부분이 전역을 하고 통일촌 조 성에 참여하는 주민이 되었다. Tongilchon was established on August 1973. However, Jeonjin Farm which could be considered to be a matrix for the village was there before 1972. The Fist Division of South Korea forces responsible for Paju area had its soldiers cultivate the land within the civil control line and called this land Jeonjin Farm. On May 1972, by the presidential order for construction of strategic model of farm village made during the president’s visit to the front line camps, Tongilchon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4 was formally established. Retired soldiers who cultivated this land also became the village people. 統一村は1973年8月に建設されたが、それ以前の1972 年、統一村の母胎になるチョンジン農場があった。坡 州近隣を守っていた1師団では一部将兵を利用して民統 線内の広い土地で農作業をさせて、これをチョンジン 農場と呼んだ。以後、1972年5月、大統領の赤十字前方 事務所の巡察時、「再建村の不備点を補完した戦略的な モデル農村を建設しろ」という特別指示により統一村が 本格的に建設された。チョンジン農場で農作業をして いた軍人も大部分が退役して統一村の造成に参加する 住民になった。 统一村建于1973年8月,其前身是1972年开垦的前进农 场。守坡州附近的第一师团抽调部分官兵在民统线(限制 民间人士出入的控制线)内广阔的土地进行开垦和耕农, 并把其称为前进农场。在1972年5月,按照朴正熙总统在 视察红十字前方事务所时下达的‘完善重建村的不足之 处建设战略性示范农村’的特别指示,此地正式开始建 立统一村,在前进农场进行耕农的军人们也大部分转业 后成为参与统一村建设的居民。 (2) 전진농장 “이게 처음 전진농장 만들 때 찍어둔거야.” “도자 자국 있지. 그 도자로 다 밀어가지고 논하고 이렇게 만든거야.” 전진농장이 개간될 당시의 사진이다. 당시 전진농장 에서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던 장성동 씨가 소장하고 있 었다. 통일촌 건립 이전에도 재건촌 조성 사업은 여러 차 례 있었으나 구체적인 종합개발계획 없이 제대군인과 고향민, 그리고 영세민을 입주, 정착시켰다. 이로 인한 낙후성, 단결력 및 애향심 결핍, 토지 및 주택 사유 불 인정 등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통일촌은 이러한 재 건촌의 미비했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출발하였다. <전진농장 개간 당시의 사진(1972년/장성동 기증)> 1972년 전진농장 A지역 개간 현장 1972년 6월 전진농장 B지역 개간 현장 1972년 전진농장 C지역 개간 현장 1972년 전진농장 최초의 못자리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25 (3) 통일촌 입주 당시 파주군 군내면 백연리,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가 통일촌의 건설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입주자 의 선정은 군복무를 필한 사람, 5인 가족 이내로 노동 력 2인 이상인 기혼 남자, 새마을 정신이 투철하고 국 가관이 확고한 사람, 신체 건강하고 영농능력이 있는 사람, 사상이 건전하고 전과사실이 없는 사람, 주벽 및 도벽이 없고 채무가 없는 사람 중에서 선별하였다. 이 를 바탕으로 통일촌에는 제대를 앞둔 장교 및 하사관 40세대와 예비군 자격을 가진 원주민 40세대 총 80세 대가 입주하게 되었다. 이 중 입주 제대 군인들에게는 가족 교육비 50%, 교통비 50%를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통일촌 입주 80세대에는 논과 밭을 합하여 200ha의 경지가 제공되었는데, 이곳은 외부인의 입주가 허용되 지 않는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있다. 통일촌의 주민들은 북방지역의 넓은 토지를 경작함으로 인해 호당 평균 경 지면적이 2.7ha에 이르고 있다. 또한 경지면적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한 까닭에 보다 효율적인 영농 방식이 요 구됨으로써 농기계 보유정도도 여타 지역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마을 출입증 “옛날에는 사위도 못 들어왔어. 초상이 났는데 도.”(한선희) “일주일 전에는 (예통을)해야 들어 와.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자유지.”(한선희) 통일촌에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검문 소를 통과하기 위한 증표이다. 주민들은 민통선에 거주하는 대신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우편함 “그거 정부에서 다 공짜로 달아준거야. 그거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 민통선 내에 사는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만큼 정 부에서는 많은 지원을 해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편함도 정부에서 제작, 배포하였다. 현재 있는 우편함은 2011년에 새롭게 설치한 것이다. 마을 출입증(1990년대/민태민, 한선희, 이완배 기증) Pass of Tongilchon Village / 出入證 우편함(2007년/이창훈 기증) Mailbox / 郵便函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26 ■임명장 “그때는 새마을운동 사업이 한창 일 때라서 마을 안길 포장 이런 걸 많이 했어요. 소형 다리 같은 거 많이 하고.” 통일촌 마을이 조성되었을 때 마을 의 계속적인 유지 관리를 위해 마을 조직을 정부 주도로 구성하였다. 임명 장은 민태승 씨가 초대 새마을지도자 가 되면서 받은 것이다. ■통일촌 현황 문서 장성동 씨가 소장하고 있던 통일촌 현황 문서이다. 이 문서는 출장소에서 모든 주민에게 한 부씩 주었던 것으 로 기억하고 있다. 문서를 입수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 만 가옥들을 개축한 1984~1986년 사이에 입수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총 84가구 중 80가 구가 농가였다. 인구는 663명으로 남성이 431명, 여성이 232명이었다. ■이종옥 씨가 제작한 태극기 이종옥 씨가 직접 제작한 태극기이다. 이종옥 씨는 태 극기의 괘는 푸른색이어야 하며 태극 문양의 회오리 방향 이 반대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쇄소에서 태극기 모양 이 다르다고 만들어주지 않으려 하는 것을 특별히 부탁하 여 만들었다. 임명장(1975년/민태승 기증) Appointment certificate / 任命狀 통일촌 현황 문서(1984~1986년/장성동 기증) 이종옥 씨가 제작한 태극기(이종옥 기증)

Ⅰ. 통일촌이 생긴 내력 27

Ⅱ. 군인시절의 흔적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 Traces of Time in the Army 兵士時代の名残 军人时期的痕迹 40 out of the 80 households here were the families of soldiers when they moved into Tongilchon. The qualification for moving into Tongilchon was to be the head of families who had been discharged from military service and whose hometown was the Tongilchon area. Thus, the variety of events that they experienced in the army has been frequently talked about. 統一村に始めて入居した80世帯のうち40世帯の戸主(家長)は軍人出身で、地域縁故地出 身の40世帯も戸主が軍隊を除隊した場合のみ入居が許された。そのため、軍隊にいた時 のさまざまなエピソードが頻繁に話題に上っている。 在最早入住统一村的80户中有40户是转业军人,以此地为家乡的其他40户也是户主 为退役军人才可以入住统一村。因此,人们经常在茶余饭后谈到军队生活中遭遇 过的各种事件。 통일촌에 처음 입주한 80가구 가운데 40가구가 군인 출신이었으며, 지역연고 출신 40가구도 군대를 제대한 호주만이 입주가 가능하였다. 그래서 군대 생활에서 겪은 다 양한 사건들이 자주 이야기되고 있다. “전쟁도 한번 안 해본 놈들이”말하는 전쟁은 제 대로 된 전쟁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도 군대시절을 함께 보낸 전우들의 글과 그림을 남긴 추억록과 편지 등은 그대로 개인의 역사이자 우리 민족의 역사서가 되었다.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0

Ⅱ. 군인시절의 흔적 31 1. 마을에 남은 전쟁의 흔적들 Trace of the War in the Village 村に残った戦争の痕跡 村里留着的战争痕迹 한국전쟁 당시 통일촌 인근은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 히 입은 지역이다. 한국전쟁 개전과 동시에 북한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9 28 수복 후 10월1일 유엔 군이 점령하였다. 그리고 1951년 1월 중공군이 다시 파 주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51년 5월에 다시 점령하였 다. 이후 통일촌이 있는 지역은 북한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포격전이 계속 벌어졌다. 당시 사용되었던 포탄과 탄피, 불발탄 등을 통일촌이 조성된 후에도 마을 인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탄피 등은 엿장수에게 팔거나 쌀로 바꾸기도 하였으며, 탄피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던 아이들은 위험한 무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하였다. Tongilchon is an area having the ravages of the war without any protection. North Korea forces occupied this area at the beginning of the war and the UN forces reclaim this area after September 28, 1950. And then the Communist Chinese army once again took over this area on January 1951 before the UN forces regained this area on May 1951. After the back and forth, intense artillery duels were kept on in the area cross over the Han River.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village, cannonballs, empty cartridges and unexploded bombs could still be easily found in this area. People collected and sold them to the traditional candy sellers and children played with these dangerous things without knowing what they are. 朝鮮戦争当時、統一村近隣は戦争の被害をまともに受 けた地域だ。朝鮮戦争の開戦と同時に、北朝鮮軍がこ の地域を占領し、9.28収復後10月1日に国連軍が占領し た。そして、1951年1月、中国共産軍が再び坡州地域を 占領し、1951年5月に再び占領した。以後、統一村があ る地域は北朝鮮と漢江を間に挟んで激しい砲撃戦がず っと繰り広げられた。 当時使われた砲弾と薬莢、不発弾などを統一村が造成 された後にも村近隣で容易に発見することができた。 薬莢などは飴売りに売ったり米に変えたりもし、薬莢 がどんなものなのかも知らなかった子供たちは危険な 武器を持っておもちゃのように遊んだりもした。 在朝鲜战争时期,统一村一带因战争遭受了严重破 坏。战争开始后,朝鲜军随即占领了这一地区。但是,9 月28日韩国军和联合国军收复首尔后,10月1日联合国军 夺回了这一地区。接着,1951年1月中国军再次占领了坡 州地区,1951年5月联合国军重新夺回坡州地区。此后, 统一村一带隔着汉江不断与朝鲜进行激烈的炮战。 建立统一村后在村子附近还能经常发现当时使用的炮 弹、弹壳和哑弹等物品,捡到的弹壳等物品卖给卖糖人 或换大米,不知弹壳为何物的孩子们还把危险的武器当 作玩具玩。 ■버려진 전쟁용품 “이거 엿장수 하나 갖다 주면 종일 막걸리 마셨어. 신주로 만든 거라 비쌌거든…이런 포탄은 밑둥을 잘라서 재떨이 만들면 좋아~”(이일태) “이 근처에 이런게 아직도 많아. 어떤거는 쌀도 바 꿔주고 했다고.”(최종수) “초등학교 때는 학교운동장 밑에, 수업시간에 동네 형이 끌고 가가지고 수류탄을 하나씩 들고 왔죠. 우리가 수류탄인지 뭔지 몰랐는데 선생님한테 걸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2 려서 뒤지게 혼나고 맞고 그랬죠.”(김성태) “ 애들이 사내애들이다 보니깐 그런걸(버려진 군 용물품) 막 주워오는거야. 예전에는 놀게 따로 있 어? 위험한 거는 못하게 하지만 사내애들이 말 을 들어? 총알도 주워오고 그런 거 주워다 노는거 야.”(최영주) 마을 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전쟁의 잔해들 Traces of the war found near the village 村の近隣から出土した戦争の残骸 在村子附近出土的战争残骸 파주시의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군사보호구역은 3곳 의 마을 외에는 경작지, 산림지대, 미확인 지뢰지대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와 남북 연결도로(통일대교~장단), 경 의선 연결도로, 도라산 유적 등 비무장지대에서 실시한 문화 유적 조사에서는 구석기시대~조선시대까지 폭넓은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오랜 역사위에 뒤덮인 지뢰와 포탄 등은 이 지역에서 살아온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전쟁의 산물이고 생활 속의 일부였다. Within the military restriction area including the DMZ in Paju-si, only farmlands, forests and unidentified mine fields exist except three villages. However, at the beginning of 2000’s, roads connecting North and South Korea (for Tongil Bridge to Jangdan and Gyeongui Railroad Line) were constructed and number of historic sites and relics including those of Dorasan Mountain from Old Stone Age to the Joseon Dynasty were found by the investigation for cultural relics in DMZ. Mines and cannonballs covering those relics in the ground were the materials from the war and part of the life for the people living there. 坡州市の非武装地帯を含んだ軍事保護区域は、3ヶ 所の村の他には耕作地、山林地帯、未確認地雷地帯だ けが存在する。戦争の痕跡がそのまま残っている。し かし、2000年代に入って南北連結道路(統一大橋~長湍 間)、京義線連結道路、都羅山遺跡など非武装地帯で実 施した文化遺跡調査では旧石器時代~朝鮮時代まで幅 広い時期の遺跡と遺物が確認された。長い間の歴史の 上に覆われた地雷や砲弾などは、この地域で暮らして きた村人の記憶の中では戦争の産物であり、生活の一 部であった。 在坡州市包括非武装地带(DMZ)在内的军事保护区除了 三处村庄外还有一些农田、山林地带和未确认的布雷地 带,因此还留有战争的痕迹。但是,进入2000年代后在 南北连接公路(统一大桥至长湍)、京义线连接道路、都 罗山遗迹等非武装地带(DMZ)实施的文化遗迹调查中,还 发现了从旧石器时代到朝鲜时代的遗迹和遗物。对生活 在这一地区的村民们来说,铺盖住悠久历史的地雷和炮 弹等物品是战争的产物,也是生活的一部分。 수총류탄 3점 연막수류탄 1점 포탄장약보관통 뚜껑

Ⅱ. 군인시절의 흔적 33 좌측부터 105mm장약통, 90mm탄피 3점, 76mm직사포탄피 2점, 60mm포탄 2점, 106mm탄피(65mm탄피) 65mm포탄28, 포탄부수기재 탄통(탄박스), HHG50탄피 15점, M60탄피 1점, MG50탄피 1점 포탄날개 3점 군용대검(2013년/통일촌 마을에서 수습)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4 ■피난 갈 때 묻어 둔 항아리와 그릇들 “우리가 여기 들어온 지 사십 년인데 나무를 하러 갔다가 항아리 두 개 있는 거, 울타리 가에다가 묻 어놨더라고.” “이렇게 해서 (항아리 안에 그릇을) 엎어놨더라고. 하난 줄 알고 이렇게 허니깐 여러 개가 이렇게 나온 거지. 피난 갈 때 쓰던 거를 육이 오 때 이렇게 집기들 하고. 집이 없고, 인제 집이 헌 자리 옛날에. 그 울타리 바깥에 그걸 아마 놨나 봐. 근데 그게 깨지지 않고 있었어. 그거 좋은 거지 그래도. 그거 한 백 년은 됐을 거여. 백 년 됐는지 그 연도는 모르지 하여튼. 육이오 전 거니까.” “우 리 자랄 때는 이런 꽃그릇이 없었어. 이건 있는 사 람이 쓴거야.” “We have been living here for 40 years. We found these two pots which were buried around the fence.” “(Bowls were turned down) like this, I thought there was only one but when I picked it up I found several bowls. I guess that people left these things outside the fences when they were evacuated from here. Now the houses were all destroyed but they have been remained unbroken. They are good. I don’t know exactly but I think that they are from 100 years ago. Things were there before the war.” “I didn’t see this kind of floral bowls when I grew up. I believe that they are used by someone.” 「私たちがここに来て40年になるが、柴刈りに行っ たら、二つの壷が垣根のそばに埋めてあったんだ。 」 「こうして(壷の中に器を)ひっくり返してあった んだ。一つだと思ってこうしたら何個か出てきたん 피난 갈 때 묻어 둔 항아리와 그릇들(1973년 이창훈 수습 기증) Pots and bowls buried in the ground for emergency evacuation / 避难时埋在地里的缸和碗碟

Ⅱ. 군인시절의 흔적 35 だ。避難する時に使ったのを朝鮮戦争の時このよう に什器と、家がなくて、昔の家の場所に。その垣根 の外にそれを多分置いたようだ。でも、それが割れ ていなかった。それ良いものだよ、それでも。それ は百年ぐらい前のものだろう。百年前のものか、は っきりとは分からないが、ともかく、朝鮮戦争前の ものだから。「私たちが子供のころはこんな花が描 かれた器はなかった。これはお金持ちの人が使った ものだよ。」 “我们到此地居住已有四十多年,在砍柴时发现两 个缸埋在篱笆旁。”,“在缸里面有倒放着的碗和 碟,不止一个。可能是在6.25战争(朝鲜战争)时期 住在此地的人避难时把家里使用的碗和碟等物品埋 到了篱笆旁吧,现在房子是没了,但这些碗和碟还 留着,没有破碎。这些碗和碟有一百多年了吧,不 知道是在什么时候制作的,反正是在6.25战争前的 物品。”,“我们生长的时候可没有这种带有花纹 的碗和碟,这肯定是有钱人家使用的物品。”。 이창훈 씨가 마을 인근 산에서 땅에 묻혀 있던 항아 리를 발견하였다. 항아리는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간 장이 담겨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릇이 들어 있었다. 이창훈 씨는 그릇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가져왔다. 항아 리를 발견한 곳이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이 들어와 살지 못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전쟁 당시 피난을 가면서 땅에 묻고 간 것으로 보인다. ■탄통 “예전에 이거 흔해빠졌는데 뭐.” “이거 공구통으로 쓴거야.” 탄약류를 보관하거나 담아서 이동할 때 사용하는 통 이다. 예전 통일촌에는 이러한 군용물품이 매우 흔한 것이었다. 민위현 씨는 탄통을 주워 공구통으로 사용하 고 있었다. 탄통(1970년대/민위현 기증) Bullet cases / 弹药盒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6 ■지뢰 “논에서 지뢰가 터져서 경운기 망가진 사건, 다리 잘라진 사건, 여러 건 나왔지.”(한봉호) “적군들 밟으면 발목 만 날아가서 생포하는 그런 지뢰인데, 여기 논밭에 떠 댕겨서 그거에 다친 사람들이 있더라고.”(홍순태) “외부 에서 들어와서 연로하신 분이 지뢰사고가 많았지 주민들은 극소수였어요.”(최승우, 2세대) “68년도에 서울에 서 김신조 사건 났을 때, 여기는 찻길이고, 여기는 철책선이고. 여기 사이에 헬기로 지뢰를 뿌려버린 거야. 사 고사 많이 났지.”(장성동) “몰래 들어가서 죽는 사람들도 있고…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걸 못보고 들어갔다가 그래.”(홍순태) 전쟁의 흔적들 중 통일촌 주민들의 생존에 가장 위험이 되었던 것은 지뢰였다. 지뢰는 무기의 일종으로 땅 속에 묻어두고, 그 위를 사람이 나 차량 따위가 지나가면 폭발하도록 만든 폭약으로 전쟁에서 전술적 가치가 높지만 민간인 희생자를 증가시키고, 전쟁 종료 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는 문제점이 있다. 특 히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 울까지 침투하였던 1·21사태로 민통선 인근에 많은 양 의 지뢰가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통일촌에 주민들이 들어왔을 때 집 밖이 온통 ‘미확인 지뢰지대’였다. 지금 도 이 마을 주변에는 지뢰밭과 농토가 공존하고 있다. 대전차지뢰 M16A1대인지뢰 파손품M14대인지뢰 파손품 지뢰크립, 안전핀, 적승캡 지뢰표식판

Ⅱ. 군인시절의 흔적 37 2. 군대시절의 기억들 Memories of Army Days 軍隊時代の記憶 军队时期的回忆 통일촌에 입주할 때 중요한 선정 기준 가운데 하나가 예비군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래서 초창기 입주자 들은 일반 사병 출신이건 하사관, 장교 출신이건 모두 군대를 전역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하 거나 월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도 여럿있었다. When those who would live in Tongilchon were selected, one of the important qualifications was for those who were retired soldiers. And therefore the village people in early days were all retired soldiers regardless of their ranks whether crews, non-commissioned officers or officers whatever. There were number of people who also fought in the Korean War or Vietnam War among them. 統一村に入居する時の重要な選定基準の一つが予備軍 資格を備えた人だった。それで草創期に入居したのは 一般兵士出身、下士官、将校出身など皆軍隊を退役し た人々だった。特に、朝鮮戦争やベトナム戦争に参戦 した人も多数だった。 到统一村落户时重要的选拔条件之一是具有预备役资 格,因此在初期统一村的居民都是原先为普通士兵、军 士、军官等的从军队转业的人。尤其是,不少人还参加 了朝鲜战争或越南战争。 “이 베(벼)도 가을에 누룻누룻하면 훑어다가, 철모 에다 놓고 팔십일미리(81mm)훈련탄이라는 게 있 었어. 그걸로 찧어 벼를. 훑어다가. 불리고, 또 찧 고 그래서 집어넣으면, 그러면 밥이 지어져, 반합 으로 하나 돼 나와.”(장성동) “When we harvest grains, we collected and put them in the military helmets. We used 81mm drilling bomb to pound the grains for cooking rice for canteen” (Jang Seong-dong) 「この稲も秋に点々と黄ばんだらこき落とし、鉄帽 に入れて81mm訓練弾というものがあった。それで搗 いて稲をこき落として、ふるって、また搗いて、そ れで入れればご飯ができる、飯ごうに一つになって 出てくる。」(チャン・ソンドン) “到秋天这些水稻变黄时,把水稻脱粒后放入钢盔 里用81mm训练用炮弹舂米。反复脱粒和舂米后,用 军用饭盒做成饭。”(张成东) “그때는 한국 군인이 대한민국 군인들이 전부 못 먹었어. 말도 못해. 진짜 저기 훈련소 가면 시궁창 에 밥풀 떠내려가면 그거 주워 먹었는데. 그게 걸 려가지고 그냥 얻어터지고 밥만 먹으면, 배만 불르 면 군대생활 할 거 같앴어.”(백운달)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38 ■군화 “그거 우리 아들이 제대할 때 신고 나온 건데.” 김정식 씨 아들이 군대 전역할 때 신고 나온 전투화 이다. 아들이 예비군 훈련이 끝난 이후 사용하지 않는 것을 김정식 씨가 가끔 일을 할 때 발을 다치지 않기 위 해 신었던 것이다. ■군인 밥그릇 “50년 넘은 거야. 군인 양재기야. 군인생활 할 때 옛날에는 여기다 밥을 줬어. 60년도 넘은 거다. 우 리가 예전에 젊어서 가게를 했드랬어. 구멍가게. 그런데 군인들이 보급계들이 이거를 10개 사래. 그 래서 10개 사가지고 그전에 쌀을 팔면 싯되에 팔면 5홉짜리잖아. 사서 하나씩 줬어. 하나가 남아서 여 태 우리가 쓰는 거야.” “애들 밥도 주고 국도 주고 썼드랬어. 그랬더니 사 람들이 싯대하래 이거.” 군인들이 사용하던 밥그릇이다. 이창훈 씨는 통일촌 에 입주하기 전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인근 부대에 서 물품을 관리하던 사람이 그릇 10개를 사라고 했다. 당시 그릇이 부족하여 10개를 사서 사용하다가 지인들 에게 주고 현재 1개가 남아 있다. 밥그릇의 크기가 5홉 들이라 싯되로 주로 사용하였다. 밥그릇 안에 눈금이 있고 1~5홉이 적혀 있다. ■반합 “우리 영감 군대생활 할 때 제대하면서 갖고 왔겄 지.” “여기 못 같은거 담아두고 썼지.” 조복덕 씨의 남편 박남식 씨가 군 생활을 할 때 사용 한 반합이다. 전역할 때 반합을 가지고 나왔으며, 못을 담는 통으로 사용하였다. 군화(1990년대/김정식 기증) Military boots / 军靴 군인 밥그릇(1960년대/이창훈 기증) Bowls for soldiers / 军用饭碗 반합(1960년대/조복덕 기증) Canteen / 饭盒

Ⅱ. 군인시절의 흔적 39 군대 추억록, 군 생활 편지 모음(1960년대/문성배 기증) Soldier’s memory notes, bunch of letters 军队回忆录,军队生活书信集 “자대 배치 받으니까 고참들이 만들어 가더라고. 그러니까 나도 이걸 하면 시간이 잘 갈 거 같다 해 가지고 이 용지를 샀어. 이 용지를 색깔별로 사가 지고, 철을 해가지고 그림 그리는 애한테 “야 이거 그림 좀 그려줘라”그랬더니 그려주고. 글씨 쓴데도 그리고, 그림 그려놓고 쓰기도 하고.” “동생들이나 친구들이나 다 안부편지 온 거니까 뭐. 내용 읽어봐도 별거는 아니지만. 편지 내용도 비밀이 없으니까.” “When I was placed in my troop, I saw seniors made and brought them together. I thought that times would pass by quickly with those things. I also bought these papers with different colors. Filing them and told other soldiers who could paint to paint on them for me. They painted on the papers and on the typographies and I used them.” “They were all letters of regards from my brother or friends. Nothing’s special. There was no secret as you know.” 「自隊配置を受けてから古参たちが作って行ったん だ。それで、私もこれをすれば早く時間が過ぎる と思って、この用紙を買った。この用紙を色別に 買って、針金で絵を描く子に「おい、ここにちょっ と絵描いてくれ」といったら、描いてくれた。字を 書いたところに描いたり、絵を描いておいて書い たり。」 「弟妹や友人たちから安否を問う手紙が来たが、内 容は読んでみてもたいしたことはないが。手紙の内 容も秘密がないから。」 “在安排到所属部队后,见到老兵们带信纸到部 队,我想写回忆录会让时间过得快一些,所以我也 买了信纸。我买了各种颜色的信纸装订成本后,叫 部队里会画画的朋友帮我在本子上画个画,有时画 在写完的地方,有时画完后再写。” “弟弟妹妹和朋友们经常写来问候信,内容没什 么,反正没有秘密。” 문성배 씨는 혼례를 올리고 5개월 후에 입대하였다. 입대할 당시에 이미 아내는 첫째 아들을 임신한 상태 였다. 군 생활은 강원도에서 했는데, 당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면회를 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휴가 도 자주 나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외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편지였다. 편지는 친척들과 친 구, 위문편지까지 여러 사람들과 주고 받았다. 그리고 군대 내에서 답답함을 잊기 위해 추억록을 만 들었다. 동료들과 같이 글을 쓰고 거기에 맞게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이 그려진 곳에 글을 쓰기도 하며 군생활의 추억들을 남겨놓았다.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0 군 생활 편지 모음 Bunch of letters / 军队生活书信集

Ⅱ. 군인시절의 흔적 41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2 군대 추억록 Soldier’s memory notes / 军队回忆录

Ⅱ. 군인시절의 흔적 43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Community Life and Story-telling Household Items 共同体生活と経緯のある生活用具 共同体生活和带有故事的生活用品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6 1. 공동체를 이루다 Community is formed 共同体の形成 形成共同体 통일촌 입주 후 정책적인 마을 조직과 주민들의 자 발적인 공동체 모임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는 부녀회와 새마을지도자, 1980년대에는 상조계를 직 접 조직하였다. 1991년에는 마을주민들이 공동출자한 통일촌마을직판장이 조성되었으며 입주 1세대들이 원 로가 되기 시작하면서 1996년에 노인회가 조직되었다. 군내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동창회와 주민들 간 에 친목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생업과 관련한 다양한 영농조합들이 조직되어 지연공동체로서의 통일 촌 마을공동체를 굳건히 하고 있으며 농사일과 명절 때 마을 공동 두레 농악도 한 몫 하였다. The political village organization and the community club were made after the residents moved in. The Women’s Association and Saemaeul Leaders were established in the mid 1970’s and the Mutual Aid System was established by the residents in 1980’s. The Tongilchon Village Shop was formed by joint investment from residents in 1991. The first generation of residents that had moved in initially became older and so the Senior Citizens Society was formed in 1996. 統一村に入居後、政策的な村の組織と、住民による 自発的な共同体が形成された。1970年代半ばには婦女 会とセマウル(町おこし)指導者を、1980年代には相助 契を直接組織した。1991年には村の住民たちが共同出 資した統一村直売場が造成され、入居1代目の住民が元 老になり始めた頃、1996年に老人会が組織された。 장구 Janggu (traditional double-sided drums) / 长鼓 요령 Yoryeong (a small bell for ritual ceremonies) / 摇铃 징 Jing (traditional percussive instrument made of metals) / 锣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47 在入住统一村后,除了政策性的村级机构外村民们还自 发形成了共同体组织。在1970年代中期出现了妇女会和新 村指导人,在1980年代组织了相助会。1991年,村民们共 同出资建造了统一村村庄直销市场。1996年,当入住统一 村的第一代人成为村里的元老后又成立了老人会。 2. 의식주 생활 Food, Clothing and Shelter 衣食住生活 衣食住行生活 의(衣), 식(食), 주(住)는 단어 그대로 입고, 먹고, 자 는데 필요한 생활양식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 는 안 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이것은 삶의 기본이 되 기 때문에 그 지역의 전통 생활방식을 내포하고 있으 며,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1970년대에는 귀했던 재봉틀, 타자기와 같은 물건부 터 바쁜 일상에서 듬성듬성 실로 꿰맨 골무,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적삼과 다듬이, 30~40명의 일꾼들에게 한 꺼번에 밥을 먹여야 해서 많이 필요했던 그릇과 수저 들,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널어 말리기도 하고, 찐빵도 찌고 했던 둥근 채반 등 이름과 쓰임은 같아도 조금씩 다른 생김과 각각의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윷 Yut (four sticks used for traditional games) / 掷柶 북 Buk (traditional drums) / 鼓 소고 Sogo (traditional snare drums) / 小鼓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48 Food, clothing and housing are essential for human life, basic things people need for living. They are the basis of life and contain the traditional way of living in the relevant areas as well as the wisdom of residents for living. 衣、食、住とは言葉通りに着て、食べて、住むに必要 な生活様式で、人間が生きていく上でなくてはならない もっとも基本的なものである。これらは暮らしの基本と なるため、その地域の伝統的な暮らし方が反映されてお り、その住民の暮らしの知恵が凝縮されている。 ■다듬잇방망이 “이게 박달나무로 만들어가지고 다른 방망이보다 무거워. 이런 박달나무로 만들어진 게 보기 어려 워.”(조동순) “이거 우리 어머니가 사용하던 건데, 나 결혼하고 이 사람이랑 같이 썼지. 광목 이불 껍데기 같은 거 풀 멕여가지고.”(김정식) ■다듬잇돌 “이거 백 년이 넘은 거야! 집 안채 새로 질 때 거기서 나왔으니까…” “이거가 다듬잇돌 맞아요? 아닌거 같 은데, 윗면이 너무 거친데…” “맞어, 이백 년도 넘었 을 거야. 하하하. 땅속에서 나왔으니까.”(권영한) ■말 “우리 처남이 저, 양주 그 저, 공무원 생활할 적에 쌀집이 그걸 쓰면 그걸 압수해 갔어. 못쓰게.” 곡식의 양을 부피로 잴 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무게를 공식 단위로 사용하게 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This was used to measure the quantity of grains in volume. However, it was not used any more when weight became the official unit for measurement. 穀物の量を体積で量る時に使った。しかし、公式単位 で重さを量るようになってから使わなくなった。 用于以体积测量谷物的量,但是把重量定为正式测量 单位后不再使用。 장성동 씨의 처남이 경찰이었는데 부피로 곡식의 양 을 재면 그 도구를 압수했다. 그것을 장성동 씨가 처남 에게 말이 필요 없으면 달라고 하여 집에 두고 가끔 사 용하였다. 박남식 씨 댁에도 말이 있어 지금도 사용하 고 있다. 콩이나 곡식의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 말을 사 용하여 확인한다. 다듬잇방망이와 다듬잇돌 (권영한,조동순,김정식 기증) Stone block and club for fulling clothes / 捶衣棒和捶衣石 말(1970년대/장성동 기증) Measurer of Grains / 斗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49 ■재봉틀 “아저씨가 애들 옷 이쁘게 기워주라고 사줬지.” “이거 돈 있는 사람이나 사지 못 샀어. 그때 돈 이게 사만(40,000)원이야. 송아지가 한 마리였어, 거진.” 이창훈 씨가 마을에 들어와서 산 재봉틀이다. 당시 DRESS 재봉틀이 유명하였으며 재봉틀 중에서도 비싼 편에 속하였다. 재봉틀을 산 것은 아이들의 장난이 너 무 심해 매일 옷이 찢어지거나 해지는 경우가 많아 재 봉틀이 있으면 간단하게 수선할 수 있어서 구매하였 다. 처음에 재봉틀을 집으로 가져 왔을 때는 재봉틀 판 매하는 사람이 직접 와서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점차 살림살이가 좋아져 해지거나 찢어진 옷은 버리 게 되면서 재봉틀을 사용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이 재봉틀은 원래 발로 굴려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부피가 커서 불편하였다. 점차 재봉틀 사용이 줄어들 때 쯤 마 을에 재봉틀을 개조하는 사람이 들어와 재봉틀 박스를 작게 하고 손으로 돌려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재봉틀(1970년대/이창훈 기증) Sewing machine / 缝纫机 ■양은도시락 “아들이 중학교 다니면서 쓴 거야. 국민학교 다 닐 때는 바로 앞이 집인데 도시락을 왜 싸.” 심간난 씨의 아들이 사용하던 도시락이다. 국민 (초등)학교는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도시락을 쌀 필 요없이 점심을 집에 와서 먹었다. 중학교 이후부터 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를 다녀야 했 기 때문에 도시락을 항상 싸 가지고 다녔다. 양은도시락(1979년/심간난 기증) Lunch box made of nickel silver / 铜饭盒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0 ■양재기 “피난 들어와가지고 가서 쓰던 거야”. “시집 올 때도 가져왔지. 그릇이 없으니까 친정에 가서 가져왔지. 쓸 게 얼마 없으니까 친정에 가서 양재기 몇 개 갖다가 쓰다가 이렇게 버린거지.”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 사용하던 양재기이다. 언제 구 매하여 사용하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며 한국전쟁 당 시에도 이 그릇을 들고 피난을 나왔다. This was used in my parents’ home before she got married. She couldn’t remember when to buy and use it. They also brought this together when they escaped during the Korean War. 結婚する前、実家で使っていたほうろう引きの器。い つ購入して使ったのかは覚えていない、朝鮮戦争当時 にもこの器を持って避難した。 结婚前在娘家使用的铝碗,不记得什么时候买的,但 在朝鲜战争时期也带着此碗避难。 피란 때 이 그릇에 밥도 해먹고 국도 떠먹은 기억이 있다. 결혼 한 이후에 집에 그릇이 없어 친정에 가서 이 그릇을 가지고 왔다. 이후 이 그릇에 나물도 무쳐 먹고 밥을 떠서 먹기도 하는 등 다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제 는 오래 사용하여 그릇에 작은 구멍들이 나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똬리 “이거를 무거운 거 이고 밥거리, 논으로다가 이고 다녔거든. 다라이에다 밥 잔뜩 반찬 잔뜩 해서 이 고 가져갈 적에.” “끈이 떨어지니까 중심을 잡아서 여기다 물고. 물 고가면 중심이 있잖아. 어디로 탁탁 떨어지지 않 고.” 물건을 머리에 이고 갈 때 머리 위에 얹고 그 위에 물 건을 올린다. 그냥 물건을 올리면 중심이 맞지 않는 경 우도 있고 머리가 아프기도 해서 똬리를 사용한다. This was used to carry something on the head between the head and the materials to maintain balance and to avoid pain on the head. 物を頭にのせて行く時、頭の上にのせてその上に物を 上げる。そのまま物を上げればバランスが取れない場 合もあって、頭が痛いこともあるので敷物を使う。 똬리(1970년대/임병순 기증) Straw coils / 顶圈 양재기(1940년대/이귀례 기증) Aluminum pot / 铝碗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51 싯되(1970년대/최필순 기증) Measuring basket / 升 在头上顶东西时把顶圈(圆形垫圈)放在头上后再把东西 放在上面。因为顶东西时不易保持平稳,而且头顶也疼, 所以使用顶圈。 원래는 똬리 아랫부분에 끈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 금은 떨어지고 없다. 끈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갈 때 입 에 문다. 그럼 물건의 균형이 안 맞거나 옆으로 흘러내 리는 것을 미리 알아 챌 수 있다. ■싯되 “반 그릇씩 먹어도 한 싯되는 되야지. (당시 가족 인원이) 최하가 하여튼 그때는 다섯 명 이상은 됐 으니까. 요새같이 둘이나 셋 되는 집이 어딨어. 옛 날 열식구 넘는 집이 보통이었어. 시골에서. 그러 니까 한 싯되만, 쌀 한 싯되만 꿔줘 그러는 거야.” “One basket was a minimum to have half bowl of rice for each of family members. (At that time, the minimum number of) family members were more than five unlike these days of people having only two or three kids. It was usual to have more than 10 family members at that time in rural areas. People used to request others to lend one basket, only one basket of rice.” 「1杯の半分を食べても1升はないと。(当時家族人員 が)最低でもその時は5人以上はいたから。最近のよ うに二人や三人の家はない。昔、10人を超える家が 普通だった。田舎では。それで1升だけ、米1升だけ 貸してくれというんだ。」 “每人吃半碗也要一升(量粮食的器具)。当时一般在 一家至少有五人,不像现在,一家只有两三人。过去 在乡下一家超过十人的家庭也非常常见,所以借米时 说借给我一升米。” 곡식의 부피를 재는 도구로 5홉 들이를 싯되라 부른 다. 보통 1홉이 1명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라고 하 며, 한 가족이 밥을 해 먹으려면 1싯되 정도는 있어야 된다. 양식이 없어서 주변에게 쌀을 빌릴 때도 “한 싯 되만 빌려줘”라고 하며 싯되 단위로 쌀을 빌리는 경우 가 많았다.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2 ■반짇고리 “그냥 이렇게 실하고 골무하고 만들어 담아놓고 써. 실 뭉치도 이래 뭉쳐 두고 골무도 천 조각으로 기워 만들었어.” “Like this, we made it to contain threads and thimbles for use. Threads are massed like this and thimbles were made of cloth patches.” 「このように糸と指ぬきと作って入れて使う。糸の 塊もこのように一つにしておいて、指ぬきも布切れ で縫って作った。」 “装线和顶针(指套)等,像这样放些线团,顶针(指 套)也用布片制作。” 바늘, 실, 헝겊 따위의 바느질 도구를 담다. 듬성듬성 기능성만 살려 만든 골무가 정겹다. This is a tool for containing haberdashery like needles, threads and patches. Thimbles sparsely made only for the functionality looks very affectionate. 針、糸、布切れなどの裁縫道具を入れる道具だ。点々 と機能性だけ生かして作った指ぬきが懐かしい。 装针、线和布片等的工具(盒子),功能上没有任何问 题的用布片制作的顶针(指套)让人感到非常亲密。 반짇고리(2000년대/이귀례 기증) Sewing box / 顶针(指套)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53 ■그릇과 수저 “일 나가면 일꾼들 밥 여기저기 퍼 놓잖아. 쫘악 앉 았으면. 여기다 퍼서 놓으면 이 사발에다 덜어 먹으 라고. 그래서 많이 산 거야.” ■주전자 “참(새참)할 때 술 갖다 먹고. 그전에 술 담가 먹었 잖아. 저기 두고도 먹고.” 통일촌 주민들은 입주와 동시에 넓은 토지를 지급받 았다. 넓은 토지에 농사를 짓기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 하였고 주로 전라도에서 인부들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지었다. 특히 모내기 때에는 인부들이 많기 때문에 밥 을 해 먹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마을 내 주부 들이 품앗이로 음식을 장만했다. Tongilchon people received vast areas when they moved in. They need number of workers to cultivate those vast areas and usually hired workers from Jeolla province and brought them here for farming. Especially in the rice planting period, as there are a lot of workers, preparing meals were tough job and therefore all the housewives of the village together prepare meals as exchange of labor. 統一村の住民たちは入居と同時に広い土地が支給され た。広い土地で農作業をするために多くの人材が必要 で、主に全羅道から人夫を連れてきて農作業をした。特 に、田植えの時には人夫が多いので食事の仕度をして食 べさせるのも難しいことだった。それで、村内の主婦が 助け合って食べ物を用意した。 统一村的居民们在落户时将得到大面积土地,在大面积 土地进行耕农需要很多人手,所以主要从全罗道雇用劳工 做农活。尤其是,在插秧时使用很多劳工,给他们做饭也 并非易事。因此,村里的妇女们一起给劳工们准备食物。 한 집에서 모내기를 실시하면 5집의 주부들이 함께 음 식을 장만하여 인부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다음 모내기 를 하는 집에 가서 음식을 함께 장만하였다. 5집이 품앗이를 하는 것은 음식을 가지고 갈 때 보통 5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명은 밥, 1명은 반찬, 1명 은 국, 1명은 물과 수저를 들고 간다. 일꾼에게 밥을 줄 때 사용한 도구 (그릇과 수저 - 1970년대/ 조동순 기증, 주전자 - 1980년대/ 이귀례 기증) Tools used to provide meals for workers(Bowl, spoon and chopsticks, Kettle) / 劳工们进餐的工具(碗、 筷子和勺子、水壶)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4 ■타자기 “이거 가지고 쳐가지고 저 친구들 뭐야, 다 취직했어요.” 1949년 공병우 타자기의 발명으로 한글타자기 는 실용화의 기반은 만들어졌으나, 1980년대 초반 에는 10만원이 넘는 귀한 것이었다. 비싼 가격에 도 길종순 씨는 딸이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도록 타자기를 사주었다. ■적삼 타자기(1980년대/길종순 기증) Typewriter / 打字机 “이거 시집가기 전에 하나하나 내가 다 손으로 만든 거야. (중략) 이걸 만들 줄 알아야 시집을 가지.”(박차순) “All these things were handmade by me before I got married. (Syncopated) You could not get married unless you were able to make them.” (Park Cha-soon) 「これ嫁入りする前に一つ一つ私が全部作った の。(中略)これを作ることができてこそ嫁に行 くんだよ。」(拍車順) “这是我在出嫁之前一个一个亲手做的。(略)会 做这个才能出嫁。”(朴次顺) 시집을 오기 전 20살에 만들어둔 적삼이다. 박차 순 씨는 22세에 혼인하였다. 적삼을 만들기 위해 직접 삼베를 키우고 쪄서 실을 만들고 베를 짜서 만 들었다. 적삼(1957년/박차순 기증) Traditional jacket / 汗衫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55 3. 마을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For the Peaceful Reign of a Village 村の安泰のために 为了村庄的太平盛世 통일촌 사람들의 신앙생활 Religious Lives of the Village People 統一村の人々の信仰生活 统一村人们的信仰生活 통일촌은 여러 지역의 주민이 모인 만큼 다양한 믿음 이 존재하며, 신앙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통일촌에 입주한 가구 가운데 기 독교 신자들은 군내면 출장소에서 예배를 보다가 1973 년 9월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불교 신자들은 마을 인근 에 사찰이 없어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에 있는 보덕사 로 불공을 드리러 다닌다. 기성종교 이외에 마을 공동 체 신앙으로 장승제가 있다. 개촌 초기에 마을에 안 좋 은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1980년대 초반에 장단출장 소의 도움을 받아 과거 마을 입구와 현재 마을 입구 부 근인 공원에 각각 2기씩 총 4기의 장승을 세웠다. 그리 고 매년 음력 10월 경에 좋은 날짜를 잡아 장승제를 지 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과거 마을 입 구 부근의 장승을 윗장승, 현재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 을 아랫장승이라고 부르며, 윗장승은 비바람에 손상되 어 없애게 되었으나 장승제는 함께 올리고 있다. 장승 제는 마을 여러 지역에서 온 마을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As the village people came from various areas, they had various kinds of religions. Their religions made the community stronger. People with Christianity had their church times together in Gunnae-myeon Local Office and then established their own church on September 1973. People with Buddhism go to Bodeoksa Temple which is located in Naepo- ri, Munsan-eup, Paju-si as there is no temple near the village. Beside those major religions, there is a traditional community religion called Jangseungje. During the early period, as there were series of bad events in the village, people constructed total four Jangseung totems with two at the entrance of the old village and other two at the entrance park of the new village with support from Jangdan Local Office in early 1980’s. They chose one fine day in every October of lunar calendar and performed a ritual ceremony called Jangseungje and this tradition still continues until now. They call the two Jangseung totems at the entrance of the old village ‘Upper Jangseung’ and other two at the entrance of the new village ‘Lower Jangseung’. The Upper Jangseung totems were destroyed by the weather but they still have the ritual ceremony together with the Lower Jangseung. This ritual ceremony makes all village people mentally combined with one another. 統一村は色々な地域の住民が集まっただけに多様な信 仰が存在し、信仰を通じて共同体意識を強固にする役割 をしたりもする。統一村に入居した世帯の中でキリスト 教信者は郡内面出張所で礼拝を行って1973年9月に教会 を建設し、仏教信者は村近隣に寺院がなくて坡州市汶山 邑内浦里にあるポドク寺にお参りする。既成宗教以外に 村共同体の信仰でチャンスン祭がある。開村初期に村に 良くないことが続いて発生すると、1980年代初期に長湍 出張所の助けを受けて、昔の村の入口と現在の村の入口 付近である公園にそれぞれ2体ずつ計4体のチャンスンを たてた。そして、毎年陰暦10月頃に良い日を決めてチャ ンスン祭を行い、現在まで受け継がれている。昔の村の 入口付近のチャンスンを上チャンスン、現在の村の入口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6 にあるチャンスンを下チャンスンと呼び、上チャンスン は風雨で損傷してなくなったが、チャンスン祭は一緒に 行っている。チャンスン祭は村の各地域から来た村の住 民を精神的に一つにまとめる役割をしている。 统一村是来自各地的居民集在一起形成的村庄,所以存 在多样的信仰,并通过信仰巩固共同体意识。在统一村的 住户中,基督教信徒们在过去到郡内面办事处做礼拜,后 来于1973年9月在村里建立了教会。佛教信徒们因村子附 近没有寺院,所以到位于汶山邑内浦里的普德寺拜佛。除 了这些宗教外,作为村里的共同体信仰还有长丞祭。在建 村初期,村里接连发生了不好的事件,所以1980年代初在 长湍办事处的帮助下在过去的村庄入口和现在的村庄入口 附近的公园各立两个长丞,共立了四个长丞。而且,在每 年阴历10月选择吉日过长丞祭,并一直延续到现在。立在 过去的村庄入口附近的长丞称为上长丞,立在现在的村庄 入口附近的长丞称为下长丞,虽然上长丞因在风雨下受损 而撤除,但还是一起过长丞祭。长丞祭起到把来自各地的 村民在精神上团结为一体的作用。 ■장승제 이 마을에는 공동체신앙으로 장승제가 전승되고 있 다. 개촌 초기 마을에 안 좋은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1980년대 초반 장단출장소의 도움을 받아 옛 마을 입구 와 현재 마을 입구 부근인 공원에 장승을 세웠다. 제의 일은 매년 음력 10월에 좋은 날짜를 가려 정한다. Tongilchon inherits the Jangseungje, the community religion. As bad luck continuously cropped up after the first move-in of residents, the residents set up a Jangseung (a totem pole) around the village entrance in the past as well as the current one with help from the Jangdan District Office in the early 1980s. A rite is performed on a good day in October in the lunar calendar every year. 장승제 Scene from Jangseungje, a ritual ceremony / 举行长丞祭的情景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57 この村には、共同体信仰として「チャンスン祭」が受 け継がれている。開村初期、村に芳しくない事件が相次 いだため、1980年代初頭に長湍出張所の支援を受け、過 去村の入口だった場所と現在の入口の近くにある公園に チャンスン(丸太で作った村の守り神)を建てた。祭儀 の日は毎年、旧暦の10月に良い日を選んで定める。 作为村里的共同体信仰,在统一村传承长丞祭。在建 村初期,村里接连发生了不好的事件,于是1980年代初 在长湍办事处的协助下在过去的村口和现在的村口附近 公园立了长丞,并在每年阴历10月选择吉日过长丞祭。 ■부적 “그거, 잡귀를 몰아내는 거야.” “That’s for exorcism to expel evil spirits.” 「それ、雑鬼を追い払うもの。」 “那个,是用于驱妖魔的护身符。” 김정식 씨가 다니는 절에서 받아온 부적으로 악귀를 물리친다고 한다. 부적을 붙여 둔 나무판자는 재래식 화장실의 받침대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재래식 화장 실의 바닥이 오래되어 무너질 염려가 있으므로 나무 판자를 대어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부적을 굳이 판자에 붙인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부적(2000년대/김정식 기증) Traditional jacket / 汗衫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58 4. 이런 저런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Living tools containing diverse stories あれこれ訳ありの生活用具 带有各种故事的生活工具 사람들이 사용하는 여러 도구들은 그 쓰임에 따른 다 양한 기능적 요소와 함께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내포하 고 있다. 통일촌 주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인 만큼 출 신지역의 문화적 요소를 보여주는 도구들이 눈에 띈다. 특히 주 생업인 농업과 관련한 도구들이 많다. 벼농사 와 콩을 주로 경작하는 마을의 특성상 이와 관련된 도 구들이 많이 남아 있다. The variety of tools used by people contains the cultural features of an area as well as the various kinds of functional elements depending on usage. Tongilchon residents have tools showing the cultural elements from their hometowns because their hometowns were diverse areas around Tongilchon. In particular, there are lots of tools related to farming, the main livelihood. Most tools are related to farming due to the features of a village farming beans and rice. 住民が使用するさまざまな道具には、その用途による 多様な機能的な要素とともに、その地域の文化的な特 徴が表れている。統一村の住民たちはさまざまな地域 から集まってきただけに、出身地域の文化的な特徴が 見られる道具が多くある。特に、主な生業である農業 の道具がたくさんある。稲や大豆を主に生産している ため、それに関連する道具が多く残っている。 人们在生活中使用的各种工具根据其用途除了有多种 功能外,还蕴含了不同地区的文化特点。统一村的居 民来自不同的地区,使用的工具带有各个地区的文化因 素。尤其是,有很多与赖以生存的农业相关的工具。统 一村主要种水稻和大豆,因此与此相关的工具较多。 ■물뿌리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버리는지 몰러. 쓸 만한 것 도.” “이게 앞에가 없으니까 구덩이 같은데 물 콸 콸 나오게 붓고, 앞에 막는게 있으면 심어놓은 것 위에 이렇게 주고.” 박복년 씨가 사용하던 양철로 된 물뿌리개로 마을에 버려져 있던 것을 주워서 사용하였다. This is a water can made of tin plates and used by Park Bok-nyeon. It was abandoned in the village but found by her. パク・ポクニョン氏が使ったブリキのじょうろで、村 に捨てられていたのを拾って使った。 朴福年使用的铁皮浇水壶,在村里捡来使用。 물뿌리개(1970년대/박복년 기증) Traditional watering can / 浇水壶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59 물을 여러 갈래로 뿌려지는 입구 부분은 최근에 잃어 버렸다. 이 부분이 없기 때문에 구덩이 같은 곳에 물을 한 번에 많이 줘야 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반두 “옛날에 (철다리) 가서 고기 잡아먹고 그랬지. 올라 오면서 가서 잡는데, 지금은 고기가 씨가 말라서 없 어.”(장성동) “We used to go (to the steel bridge) and catch animals for meat. We went up catching animals but now there are no animals there.” 「昔、(鉄橋)に行って魚を捕まえて食べたんだ。上が りながら捕まえるが、今は魚が絶滅していない。」 “过去到(铁桥)抓鱼吃,沿着河抓鱼,但现在河里很 难见到鱼。” 통일촌 남쪽에 있는 임진강은 출입제한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대신 주민들이 주로 고기를 잡는 곳은 철다리라고 불리는 곳 이다. 철다리에 여럿이 함께 가거나 가족끼리 가서 고기 를 잡기도 했다. 통발을 설치하기도 했고 입구가 좁은 병 을 고정시켜 놓아도 고기가 많이 잡혔다. ■대광주리 “이것도 오랑거야. 시방 이런 거 어디 써?” “여기다 그전에 배추 씻어 건져놓고 김장했는데, 인 자는 저런 소쿠리에다가 하잖아.” 통일촌에 입주한 이후 장에 가서 사온 광주리이다. 주 로 김장을 할 때 배추를 씻어 담거나, 다용도로 물건을 담아 옮기는데 사용했다. 반두(최필순 기증) Scoop net / 抄网 대광주리(1970년대/이귀례 기증) Bamboo basket / 大筐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0 ■쳇다리 “그냥 이렇게 큰 다라이에다가 도토리묵이나 두부 할 적에 자루에다가 뭐 담아가지고 저걸 놓구서는, 소쿠리에 담아서 누르고 그러는 거. 장 담을 적에 도 그거(쳇다리) 놓고 소쿠리 놓고 보재기 씌워서 소금물을 이렇게 부어서.” “We used to press beans and acorns in the sack which was put on that big basin to make acorn jellies or bean curds, putting them in the basket for pressure. When we made soy sauces, we used to put salt water into the cloth containing soy beans within the sieve stand.” 「このように大きな洗面器にどんぐり豆腐や豆腐な どを作る時に袋に入れておいて、あれを入れてから は、笊に入れて押すんだ。醤を作る時にもそれ(物 をこす時にふるいをのせる道具(チェッタリ))を置 いて、笊を置いて風呂敷を被せて塩水をこのように 注いで。」 “用大盆制作橡子凉粉或豆腐时,在袋子里装入材 料后,把袋子放在蒲篮(竹篮)并用Y型支架支撑后挤 压。制作大酱时,也把蒲篮(竹篮)放在Y型支架上后 盖上布倒入盐水。” 임병순 씨가 직접 만든 쳇다리. 남편인 이종옥 씨는 군 생활을 했으며 통일촌 입주 이후에도 글을 쓰거나 다른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농사와 관련한 일은 임 병순 씨가 담당하였다. 쳇다리도 임병순 씨가 직접 만 들었다. 쳇다리는 용도에 따라 크기별로 있는데 작은 편에 속하는 쳇다리이다. 쳇다리는 단단해야 하기 때문 에 참나무로 만들었다. 쳇다리는 동이나 함지 같은데 걸쳐놓고 소쿠리나 체 를 얹어 거를 때 사용한다. 주로 간장을 담그거나 묵을 해 먹을 때 사용한다. 쳇다리는 미리 예비로 만들어 놓 고 혹시 부러지거나 하면 사용할 수 있게 해둔다. 쳇다리(임병순 기증) Sieve stand / Y型支架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61 ■뒤주 “새 쌀 져다가 담아놓으면 (보기만 해도) 배가 다 부르더라고…이거 처음 들여놓고 고사 했대나봐. 그거 들여놓고 아들 결혼시켰지.”(이귀례) “I felt full when I saw new rice pounded and contained in that… I heard that they had a ritual when they installed it here. After then, I could have my son married.” 「新しい米を搗いて入れれば(見るだけでも)腹がい っぱいになるんだ…これ初めて家に入れたとき、祭 祀して、それ入れて息子を結婚させたんだ。) “装满新收获的大米,(瞅着也)感到肚子饱…。刚 买来时还过了祭祀,买来粮柜后儿子也结婚了。” 한봉호 씨가 결혼하기 전 부모님이 미리 준비해 둔 뒤 주이다. 한봉호 씨의 부모님이 구매한 후 뒤주에 고사를 올렸다고 한다. 뒤주에는 나락 상태로 보관하는 것이 아 니라 나락을 찧어서 쌀로 보관을 한다. 한봉호 씨 부인 이귀례 씨는 한해 농사를 지어 뒤주에 쌀을 담아 두면, 보기만 해도 저절로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고 한다. 뒤주(1960년대/한봉호ㆍ이귀례 기증) Wooden rice chest / 粮柜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2 ■풍구 “(풍구를 가지고 있으면) 마을에서 부자소리 듣고, 다 부자로 일, 이등한 사람들이 사용하고 그랬으 니까.” “(This winnowing machine was) used by the rich people in the village. The first and second richest family used this.” 「(唐箕を)村で金持ちだと言われ、みな金持ちで1、 2等の人々が使っていたから。」 “使用扬谷机的人是在村里数一数二的富人。” 곡물을 고르는데 쓰는 농기구이다. 지푸라기, 먼지, 등겨 따위를 골라내거나 싸라기, 현미 따위를 고르는데 쓴다. This is a farming tool for winnowing grains to filter out straws, dusts and rice chaff or to pick out bush clovers and brown rice. 穀物を選別するのに使う農機具。わら、ホコリ、もみ がらなどを選別したり、屑米、玄米などを選別するの に使う。 扬谷机是用于去除稻壳和麦壳等的农具,可以去除稻 草屑、灰尘、稻壳等,或用于分离碎米、糙米等。 김순조 씨가 개인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원래는 경선봉 씨가 가지고 있었던 풍구이다. 경선봉 씨가 풍 구를 부수어 뗄감으로 사용하려다가 김순조 씨가 민속 품을 모으는 것을 알고 준 것이다. 당시 비싸게 주고 산 풍구였으며 경선봉 씨의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에 사용 했던 것이다. 풍구(1970년대/김순조 기증) Winnowing machine / 扬谷机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63 ■채반 “부산서, 우리 애들 할아버지가 군인 했었는데요, 저기 미사일기지에 있었어요. 거기서 샀는데, 뭐 음식 같은 거 해서 담는 거죠. 지짐 같은 거 아니면 뭐 말리는 데도 해서 놓고 말리고.” ■키 “(키는) 예전에는 잘 썼는데 먼지만 구르고 돌아 댕 겨서 귀찮아요.” 곡식 따위를 담고 까불러서 쭉정이검부러기 등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식생활 용구이다. ■어레미 “깨 털어가지고 들깨. 들깨 치면 깨만 나가고 거스 레미는 여기 걸치거든.” “I used to shake up and down the perilla. After shake, only perilla remains in the bottom leaving zest on the net.” 「ゴマをはたいて、エゴマ。エゴマをふるいにかけ ればゴマだけ落ちて、かすはここに残るんだ。」 “用于筛芝麻和紫苏,芝麻粒掉到下面,在筛子里 剩下杂物。” 통일촌에 들어오기 전에 구매한 것이다. 주로 깨를 털 때 사용한다. 깨를 털고 어르미에 부어서 흔들면 깨는 아래로 떨어지고 위에는 찌꺼기만 남는다. 사용한 지 오 래되어 어레미 거름망 부분이 뜯어졌으나 이를 실로 어 레미 망 크기와 비슷하게 다시 꿰매어 사용하였다. 채반(1960년대/길종순 기증) Wicker tray / 柳条盘 키(1960년대/길종순 기증) Winnowing basket / 簸箕 어레미(어르미, 1960년대/이귀례 기증) Coarse sieve / 筛子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4 ■가마솥 “작은 솥은 평소에 밥 해먹을 때, 국도 끓여먹고 뭐 다하지.” “큰 가마솥은 문산에서 안 팔았어. (큰 것은) 금촌가서 산 거야. 모내기 할 적에 큰 솥에 해야 30~40명씩 밥을 먹잖아. 잔치 같은 거 있어 도 밥 많이 해야 되고.” “This small caldron was used to cook rice, soups and anything.” “We couldn’t buy a big caldron in Munsan. We had to go to Geumchon (to buy the big one). During the rice planting period, we had to use the big caldron to make meals for 30 to 40 workers. When we had village festivals, we also had to make meals for large numbers.” 「小さい釜はいつもご飯を炊いたり、汁を作った り、何でも使う。」「大きい釜は汶山では売っていな かった。(大きいのは)金村に行って買ったんだよ。 田植えする時に大きい釜でご飯を炊けば30~40人ご 飯を食べることができるから。祭りなどがある時も ご飯をたくさん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し。」 가마솥(1970년대/이일태 기증) Iron caldron / 铁锅 화덕과 양은솥 (화덕-1970년대/임병순 기증, 양은솥-1970년대/이귀례 기증) Fire pot and So(traditional caldron made of nickel silver) / 火盆和白铜锅 “화덕을, 요만한 통을 갖다가 오려가지고 아궁 지를 만들어.” “겨울에는 아궁이 때니까 여기 다 안 해먹고, 여름엔 여기 화덕에다 해먹고 겨 울엔 무쇠솥단지에다 불 때서 해먹고.”(이귀례) 밥을 지어먹을 때 사용하던 화덕이다. 여름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면 집이 너무 덥기 때 문에 화덕에다 작은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밥을 하였다. 화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양철통 등 을 잘라서 만들었다. 아래에 있는 구멍에 나뭇가지 를 넣어 불을 피운다. 뒤쪽 윗 부분에 있는 구멍은 연기가 나가도록 만들어 둔 구멍이다. 양은솥은 여름에 밥을 지어먹거나 나물을 삶는 등 다용도로 사용하였다.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기 때문에 가마솥에 밥을 했지만 여름에는 부엌 밖에 화덕을 설치해 두고 양은솥에 밥을 했다.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65 “小锅平时用于做饭、煮汤。”,“当时在汶山没 有卖大锅的地方,(大锅)是到金村买来的。在插秧 时需要做30~40人份的米饭,因此要用大锅做饭。 在举行宴会等时也要做很多饭。” ■쇠스랑 “부러져서 버릴 건데 내가 그 이후에 다리 아프니까 앉아서 그냥 나무때기 있으면 주워다가 끼워놓고.” 길종순 씨가 직접 자루를 새로 만든 쇠스랑이다. 예전에 사용하다가 자루가 부러졌던 것을 크기가 맞는 쇠스랑 자루를 구해 보수해 두었다. ■맷방석 “맷돌 받치고 뭐 갈고 하는 거니까, 맷돌에다가 방 석이라고 해서 맷방석이지.” 맷돌을 사용할 때 바닥에 깔아두는 맷방석이다. 맷방 석은 맷돌에 갈린 음식물을 모아두는 역할도 하지만 맷 돌을 돌릴 때 맷돌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한봉호 씨의 맷방석은 통일촌에 입주하기 전부터 사용하였으며,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만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모판 떼는 기계 “지금은 부포를 깔고 못자리를 하니까 손으로 떨어 지니까 이제 안 써.” 모판이 땅에 붙어 있으면 뗄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도구 하단에 있는 것이 모판의 크기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모판에 맞추고 밀면 모판이 바닥에서 쉽게 떨어진다. 모판 떼는 기계는 모를 심는 이앙기가 나온 이후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모판 아래에 부직포 같은 것을 깔기 때문에 모판이 쉽게 떨어져 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쇠스랑(1980년대/길종순 기증) Pitchfork / 铁耙子 맷방석(1960년대/한봉호 기증) Round straw mat / 石磨垫子 모판 떼는 기계(1980년대/홍순태 기증) Seedbed detaching machine / 抬起苗床的工具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6 ■콩 선별 체 “예전에는 콩 선별할 필요가 없지. 그냥 무게만 달 아서 팔면 되니까.” “그게 콩축제하면서 썼지. 콩축 제 하면서 아무거나 못 팔잖아. 그래도 상품성 있 는거, 큰거 이런걸 팔아야 하니까 이걸로 이렇게 거르는 거지.” “이거는 우리처럼 농사 조금씩 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한 10가마 이상씩 하는 사람 들은 이걸로 못하고 그런 사람들은 기계가 있잖아. 그런 사람들은 이걸로 다 못해.” “이걸 뭐라고 하 나. 딱히 부르는 이름은 없는데. 콩 선별하는 거니 깐 콩 선별 체라고 해야 되나.” “We didn’t need to sort beans at that time. We could sell them just measuring weights.” “We had to use it at the bean festivals. We couldn’t sell unsorted beans at the festivals as the quality was not good. We had to sell good quality beans at the festival and therefore we used it to sort beans like this.” “This is for people like us farming small amount of beans. People farming more than 10 straw bags don’t need this. They had machines for that big amount.” “I don’t know the name. We didn’t have a specific name for this. We used this to sort beans so we may call it bean sorting sieve.” 「以前は豆を選別する必要がなかった。重さだけ量っ て売れば良いから。」「それは豆祭りをしながら使っ たんだ。豆祭りをしながら何でも売るわけにはいか ないだろ。商品性のあるもの、大きいもの、こんな ものを売ら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これでこのよう に選別するんだよ。」「これは私たちのように農作業 を少しする人々が使うんだ。およそ10かます以上す る人はこれでできなくて、そういう人は機械がある 콩 선별 체(1990년대/한봉호 기증) Bean sorting sieve / 大豆筛子 콩 선별 모습

Ⅲ. 공동체 생활과 사연 담긴 생활용구들 67 제초기(1980년대/황분이 기증) Grass cutter / 除草机 でしょ。そういう人々はこれでは全部できないよ。」 「これを何というか。正式な名前はないけれど。豆選 別するものだから豆選別ふるいというべきか。」 “在过去无需筛选大豆,只要称重卖出即可。”, “但是,自从举办长湍豆节,因不能随意卖大豆, 要卖有可销性的大一点的大豆,所以开始用筛子筛 选大豆。”,“这是像我们这样产量不多的人使用 的工具,产量超过10袋以上的人不能用这个,他们 用机器筛选。”,“这个没有正式的名称,因为用 于筛选大豆,该叫做大豆筛子吧。 콩 선별 체는 작은 크기의 콩을 골라내기 위해 한봉 호 씨가 만든 것이다. 큰 함지 위에 둥근 나무봉을 걸쳐 두고 그 위에 콩 선별 체를 올린 후 콩을 붓는다. 그리 고 봉을 따라 체를 앞뒤로 흔들면 크기가 작아 상품성 이 떨어지는 콩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콩 수확 량이 많은 집에서는 기계를 이용해서 콩을 선별하지만 적은 양을 수확하는 집에서는 지금도 콩 선별 체를 사 용하고 있다. 체 아래로 떨어진 작은 콩들은 집으로 가 져와서 두부나 메주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제초기 “남대문인지 동대문, 아마 남대문 그거 하는데 있잖아. 뭐 파는데 있지. 그런데서 산 거 같은데. 여기는 찾아보이 없으니까 돌아댕기면서 사갖고 왔어.” “Maybe in Namdaemoon or Dongdaemoon, I a m n o t s u r e b u t I g u e s s t h a t i t w a s Namdaemoon where I bought this. You know that there is a place people are selling things in Namdaemoon. I couldn’t find this here so I just roamed around here and there to buy it.” 「南大門なのか東大門なのか、多分南大門、あれす るのあるでしょ。何か売るところあるでしょ。それ で買ったようだけど。ここは探してもないから、あ ちこち探しながら買ってきた。」 “南大门还是东大门记不清楚,好像是南大门吧, 那里不是有市场吗?是在那里买的。当时在我们这 里没有卖的,所以到处找后买来的。” 논이나 밭의 잡초를 뽑아 없애는 도구이다. 당시 제 초기가 귀하여 황분이 씨의 남편이 서울의 큰 시장까지 나가서 구입하였다. This is a device to remove weeds in rice fields and farms. It was very hard to find at that time. Hwang Bun- e’s husband went to a big market in Seoul to buy it. 水田や畑の雑草を抜く機械。当時、除草器は珍しいも のでファン・ブニさんの夫がソウルの大きな市場まで 行って購入した。 除草机是除去水田或旱田杂草的机器,当时除草机非 常少见,所以黄芬伊的丈夫到首尔的大市场购买。

통일촌 마을 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68 ■지게 “지게 할 만한 게 있다 그러면 (나무를) 베어오 는 거야. 지게 거는 사람이 있어, 아무나 거는 게 아니야. 그런 사람 사서 하는 거지.” “경운기 없을 땐 밤낮 지고 댕겼지. 꼴도 지고 댕기고 볏단도 지고 댕기고.” “If you had something to be used as an A-frame carrier then you go out to cut (the woods). There were people who were specialized in carrying. It’s not an easy work. We had to hire them.” “When we didn’t have cultivators, we had to use this A-frame carrier for green feeds and rice sheaf.” 「背負うものがある、そうしたら(木を)切って くるんだ。背負子を背負う人がいて、誰でも背 負うものじゃない。そういう人を雇ってするん だよ。」 「耕うん機のない時は昼夜背負ったよ。飼い葉 も背負って、稲束も背負って。」 “当有东西背时,到山里砍来一些(木材)做背 架。不是什么人都能用背架背东西,有专门用 背架背东西的人,所以叫他么背东西。” “没有手扶拖拉机的时候天天用背架背东 西,有时背喂牛马的草、有时背稻草。” 이창훈 씨가 사용하던 지게이다. 지게는 사 용하는 사람에 맞게 제작하는데 본인의 키에 맞게 지게도 작게 만들었다. 지게의 재질은 소 나무가 좋다. 송진이 있어 다른 나무에 비해 잘 썩지 않고 나무가 질긴 편이기 때문이다. 지게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을 가진 나무가 드물 기 때문에 산에 다닐 때 미리 나무를 확인 해 베 어 둔다. 나무를 베어서 바로 지게를 만드는 것 이 아니라 1~2년 정도 말린다. 나무가 다 마 르면 지게 제작에 들어가는데 아무나 만 들 수 없고 지게 만드는 사람을 불러 야 했다. 지게(1970년대/이창훈 기증) Traditional A-frame carrier / 背架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Trace of Lives by the Individual Life 個人生涯史から見る生活の痕跡 通过个人生涯和历史回顾的生活痕迹 “All the people are gathering here except people in Jeju.” “The residents here came from all over the country except Jeju.” Before division, there are 40 families those who are retired soldiers along with other 40 families whose birthplace was located around the village. That’s why people all around the country could be together when the local community was established. The village has its own culture compared to that of near villages including seasonal customs, lifetime ceremonies and rituals for hometown. Sangyeo nori (a funeral ceremony performed a day before the burial) is slush and customs to greet husbands from other villages are somewhat severe although people think they are just for fun. ‘Back Line Village’, ‘Wire Fence English’, ‘Bartender English’ and ‘Scamp Village Head’ are terms that you can hear in this village only. These make a ‘new unification culture’ for living culture of Tongilchon (Unification Village) by combing all these differences. 「済州島の人を除いて皆来ている。」 「ここに入居した人々は済州島を除いて皆来ている。」分断される前、この村近隣が故郷である40世帯の他の40世帯は軍部隊の除隊将 兵だった。それで初めて村共同体を構成する時から各所で住民たちが集まることができた。それで、歳時風俗や一生儀礼や、望郷祭 を行うのも他の村とは違った話がある。 喪輿ノリもぐうたらで、婚礼の宴の時、他地域から来る新郎を迎える風習もいたずらにしては苛酷なだけだ。「後方村」、「鉄条網英語 」、「バーテンダー英語」、「ごろつき里長」などもこの村だけで聞くことができる用語だ。それで、「統一村の生活文化」はその違いが集 まって成し遂げられている「新しい統一文化」となる。 “除了济州岛外哪个地方的人都有。” 这里除了济州岛外哪个地方的人都有。”,在统一村有40多户是在南北分裂之前以此地为家乡的人,其他40多户是军队的退 伍军人。因此,从一开始形成村庄共同体时起,已有来自各地的居民。所以,节日习俗、仪式、过望乡祭(思乡祭祀)也与其 他村庄不同。 丧舆仪式(出殡前一天抬着空着的灵车在村庄游行的民俗仪式)非常盛大,在举行婚礼时迎接来自其他地方的新郎的习俗虽说 是一种玩笑,但可以说有些粗暴。在统一村有‘后方村’、‘铁丝网英语’、‘吧台英语’、‘痞子里长’等只在统一村使 用的词汇,因此‘统一村的生活文化’汇集各地不同的文化形成了‘新的统一文化’。 제주도 사람 빼고 다 와 있어 “여기 입주한 사람들은 제주도 빼고 다 와 있어.” 분단이 되기 전, 이 마을 인근이 고향인 40가구 외에 다 른 40가구는 군부대 제대 장병들이었다. 그래서 처음 마을공동체를 이룰 때부터 각처에서 주민들이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세시풍속이며 일생의례며, 망향제를 지내는 것도 다른 마을과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상여놀이도 질펀하고 혼례 잔치 때 타지에서 들어오는 신랑을 맞이하는 풍습도 장난치고는 가혹하기만 하다. ‘후방마을’, ‘철조망 영어’, ‘빠텐더 영어’, ‘건달이 이장’ 등도 이 마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용어들이 다. 그래서 ‘통일촌의 생활문화’는 그 다름이 모여서 이루어내고 있는 ‘새로운 통일문화’가 된다.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2 1. 고향 땅에 돌아와서 - 한봉호 씨의 농사일지 In the Hometown – The Farming Diary of Han Bongho 故郷の地に入り – ハン・ボンホ氏の農業日誌 返回乡土 – 韩奉镐的农耕日志 통일촌 입주 초기의 주요 생업은 농업으로 재래식 벼 농사를 주로 하였다. 1980년대에는 서울과 신도시 개 발에 따른 영향으로 우유생산을 위한 젖소목장이 들어 서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쌀 가격의 하락 등으로 콩과 채소, 인삼, 과수 같은 여러 작물들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장단콩’의 높은 명성으로 인해 콩 재 배가 늘었다. 2000년대에는 초창기 입주민들의 고령화 로 영농조합에 임대를 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역 원 주민으로 마을에 들어온 한봉호 씨는 1979년도부터 농 사일지를 쓰고 있어 이 마을 농사짓기의 역사와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있다. The main work for living was traditional rice farming in the early period when residents moved into Tongilchon. Mr. Han Bong-ho, who moved in as a resident, kept his farming diary from 1979. His diary showed the history and details of farming in this village. 統一村入居初期の主な生業は農業で、主に在来式の稲 作が行われた。 地域の原住民として村に入ってきたハン・ボンホ氏は 1979年度より農業日誌を付けており、村の農業の歴史や 実態が詳しく分かる。 在初期的统一村,主要通过传统的水稻耕作赖以生存。 作为在该地区土生土长的原住民,韩奉镐在入住统一 村后从1979年开始坚持记录农耕日志,通过这一农耕日 志可以详细了解统一村的农耕历史和内情。 통일촌의 개촌 슬로건이 ‘전략적 시범농촌을 건설’ 이었던 것처럼 입주 초기의 주요 생업은 농업이었다. 1980년대에는 서울과 신도시 개발에 따른 영향으로 우 유생산을 위한 젖소목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2년 에는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등록과 보존등기에 관 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토지를 잃 게 된 주민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0년 대에는 쌀 가격의 하락 등으로 두류와 채소, 인삼, 과 수 같은 여러 작물들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장 단콩’의 높은 명성으로 인해 콩재배가 늘었다. 1997년 부터는 ‘장단콩축제’의 개최로 장단콩이 지역특산물로 육성되고 있다. 2000년대에는 초창기 입주민들의 고령화로 대부분 의 토지는 젊은 사람들에게 임대를 주는 경우가 많으 며, 가정에서 필요한 양 만큼의 밭작물을 재배하는 자 급자족 형태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못쓰고 그래도 상 황이 좀 좋아졌을 때부터 쓰기 시작했지.” “I Couldn’t write this diary as I was so busy and fatigued at the beginning. But I started to write the diary when it became better.” 「最初はとても忙しくて大変で書けなかったけど、 それでも状況がちょっと良くなった時から書き始め たんだ。」 “刚开始时因太忙、太累没能写日志,后来情况有 些好转后开始写日志。” 한봉호 씨는 1979년부터 농사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하 였다. 그날의 작업내용과 모종, 농약 등의 구매목록, 소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73 농사일지(1979년/한봉호 기증) Farming life records / 农活日志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4 의 수정 날짜와 우유의 양, 판매금액 등을 기록하였으며 축산 관련 일지는 별도로 두었다. Mr. Han Bong-ho started to write his own diary from 1979. The records mainly contained daily farming works, types of seeds, use of pesticides and list of purchased things. Records for stockbreeding were maintained separately which contained insemination dates for cows, quantity of milk collected and their sales values. ハン・ポンホ氏は1979年から農業日誌を記録し始め た。その日にした作業内容と苗、農薬などの購入目録 を主に記録した。畜産業関連の日誌は別に書いて、牛 の受精日と牛乳の量、販売金額などを記録した。 韩奉镐从1979年开始写农耕日志,在日志上主要记录 了一天的做工内容和购买秧苗和农药等的目录。他还另 外写了关于畜产的日志,记录了牛的受精日期、牛奶产 量、销售额等内容。 농사를 짓던 젊은 시절 소 상황판(1980년대/한봉호 기증) Cow feeding records / 记上牛状态的黑板 ■소 상황판 “거기다 수정한 날짜라든지 그런걸 다 적어두지. 그래야 안 잊어먹고 볼 때마다 확인을 하거든.” 소의 수정일이나 분만일 등을 적어 우사 뒤에 걸어 두는 상황판이다. ■소 등긁개 “소 이걸로 긁어줘야지 그냥 두면 소가 그냥 꺼칠 하잖아. 이거라도 박박 긁어주면 반드르르 해지드 라구.” “(소는)가끔 긁어줘야 되거든. 벌러지도 있고 물 것도 있고 그런데, 이런걸루다가 긁어주면은 기분 좋지.” 뒤쪽은 쇠가 성근 빗처럼 생겨서 벌레를 떼거나 할 때 사용하며 앞부분은 솔로 되어 있어 털을 빗어줄 때 사용한다. 소 등긁개(1980년대/한봉호, 임병순 기증) Backscratcher for cows / 牛背刷子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75 ■코뚜레 “황소두 조그만 것도 기운이 얼마나 센지 사람이 못 당해요. 그렁께 코에다 끼는거야.” “The cow was small but much stronger than humans. So we had to use this nose ring for cows.” 「黄牛も小さいのがどれほど気勢が強いことか、人 はかないません。そうやって鼻にはめるんだ。」 “小的黄牛也有很大的力气,人不易架驭,所以要 在鼻子上穿环。” 소의 코청을 꿰뚫어 끼우는 나무고리이다. 좀 자란 송아지 때부터 고삐를 매는 데 쓴다. 임병순 씨가 일꾼 으로 두었던 사람이 만들었다. This is a wooden ring for piercing cow’s nose. It was used to make a bridle for half grown cows. A worker hired by Lim Byeong-soon made this ring. 牛の鼻中隔を貫いてはめる木の鼻輪だ。ちょっと育っ た小牛の時から手綱を結ぶのに使う。イム・ビョンス ン氏が雇っている人が作った。 这是穿在牛鼻子上的木环(牛鼻环),在稍微长大的小 牛时期开始使用,用于拴牛绳。这个牛鼻环由林炳淳雇 用的劳工制作。 ■우유통 “손으로 짤 때. 그때 우유통 이거 갖다 놓구선 짜 가지고 여기다 붓고, 부어가지고 인제 이걸 들어다 놓고 냉동실에, 냉장고에다 붓고 그랬지.”(이귀례) 소의 젖을 짜서 보관하는 알루미늄으로 된 통이다. 한봉호 씨가 축산업에 종사할 때 우유통은 우유의 보관 과 운반에 중요한 도구였다. 코뚜레(1970년대/임병순 기증) Nose ring for cows / 牛鼻环 우유통(1980년대/한봉호ㆍ이귀례 기증) Milk bucket / 牛奶桶

76 통일촌의 특산품 - 장단삼백 Specialty of Tongilchon - Jangdansambaek (three white specialty of Paju; rice, beans and ginseng) 統一村の特産品 - 長湍三白 / 统一村的特产品 - 长湍三白 콩 (Beans / 豆 / 大豆) 파주시 장단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콩은 그 품질로 인해 명성이 높았다. 1913년 콩 장려품종으로 결정된 ‘장단백목’은 장단 지역의 토종콩이 며,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작물시 험장에서 인공교배로 육성보급된 품종인 광교(光敎)는 장단 백목과 일본에서 도입한 육우3호 품종을 교배한 것이다. 장 단지역은 일교차가 크고 토양이 마사토로 되어 있어 콩의 육질이 단단하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콩에 비해 유기질은 두 배, 항암성분인 이소플라본은 50% 정도 함량이 높다. 통일촌이 조성된 후 이 지역에 100만㎡의 재배면적을 확 보하여 콩 농사를 짓고, 전통장류 가공시설을 운영하면서 장단콩을 지역 특산물로 육성하고 있다. 해마다 11월에는 임진각관광지 일원에서 ‘파주장단콩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Beans produced in Jangdan-myeon, Paju-si were very famous for their superior qualit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ongilchon, the government secured million square meters of areas for bean farming and operates facilities for processing traditional bean sources to promote the specialty of the area. Every November, ‘PAJU Jangdan Soybean Festival’ is held around the Imjingak tourism areas. 坡州市長湍面地域で生産される豆はその品質によっ て名声が高かった。 統一村が造成された後、この地域に100万㎡の栽培 面積を確保して豆を栽培し、伝統醤類加工施設を運営 しながら、長湍豆を地域特産物として育成している。 毎年11月には臨津閣観光地一円で「坡州長湍豆祭り」を 開催している。 产于坡州市长湍面的大豆以优异的质量闻名。 在建立统一村后,这一地区在100万㎡的土地上种 大豆,并经营传统酱类加工设施,把长湍大豆培养成 地区特产。坡州市每年11月在临津阁旅游地一带举办 ‘坡州长端豆节’。 인삼 (Ginseng / 高麗人参 / 人参) 예전부터 개성을 중심으로 파주 를 포함한 인근의 8개 지역에서 재 배한 인삼을 개성인삼이라고 불렀 으나, 현재 남한에서 나오는 개성 인삼은 파주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 고 있다.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인삼을 가공하고 재배하던 지역 이 장단이었다. 임진강, 한강, 사천강 등 3개의 강이 흘러 가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인삼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만 들어 주며, 특히 모래와 흙이 적당히 섞여 물 빠짐이 좋은 토양은 물과 상극인 인삼에게 안성맞춤이다. 장단 인삼은 다른 지역의 인삼에 비해 머리가 크고 뿌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리가 단단하고 향이 진한 특성이 있으며 다른 지역의 인 삼에 비해 사포닌 함량(6년근 기준 4.66%)이 높아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From a long time ago, ginsengs grown in eight regions including Paju and mainly in Gaeseong were called Gaeseong ginseng. However, only Paju continued this tradition. Jangdan ginseng has its distinctive large head and solid root with rich flavor compared to ginsengs in other regions. The Jangdan ginseng also has more saponin elements (4.66% of saponin for six-year ginseng) than other ginsengs for its excellent medical effects. 以前から開城を中心に坡州を含んだ近隣の8地域で栽 培した高麗人参を開城高麗人参と呼んだが、現在韓国の 開城高麗人参は坡州だけがその命脈を維持している。 長湍高麗人参は他の地域の高麗人参に比べて頭が 大きくて根が丈夫で、香りが濃厚な特性があり、他 の地域の高麗人参に比べてサポニン含有量(6年根基準 4.66%)が高くて優れた薬理作用を有している。 自古以开城为中心在包括坡州在内的附近8个地区 栽培的人参称为开城人参,目前只有坡州在韩国生产 开城人参。 长湍人参与其他地区的人参相比头部大、根部结 实、香味浓厚,而且皂角苷含量(4.66%,以六年根人 参为准)高,所以具有出色的药理作用。 쌀 (Rice / 米 / 大米) 파주지역의 쌀은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품목 가 운데 하나였다. 임진강을 경계로 송도(개성)와 한성(서 울)이 백리거리(40km) 이내에 있어 고려 태조와 공민 왕, 조선 태조, 정조, 태종, 세종 등 수많은 왕이 파주의 행궁에 머물면 서 수라(水剌)를 받고 향연을 베풀 기도 하였다. 파주 지역의 쌀은 임진강의 깨 끗한 물과 큰 일교차가 쌀알을 단단하게 하여 밥의 찰 진 맛이 더하다. 2011년에는 ‘고품질 쌀 생산 전업농 선 발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Rice grown in Paju areas was the one of things which were served to the Kings. With the border line of Imjin River, Songdo (now Gaeseong) and Hansang (now Seoul) were located within the distance of 40km and therefore many Kings including Taejo Wang Geon and Gongmin of the Goryeo Dynasty and Taejo Yi Seong- gye, Jeongjo, Taejong and Sejong of the Joseon Dynasty stayed in Haenggung palace of Paju to enjoy royal meals and allow feasts. 坡州地域の米は昔から王に献上した品目の一つで あった。臨津江を境界に松都(開城)と漢城(ソウル)が 百里(40km)以内にあって、高麗太祖と恭愍王、朝鮮太 祖、正祖、太宗、世宗など数多くの王が坡州の行宮に 留まりながら水剌(王の食膳)を受けて饗宴を施したり もした。 坡州地区的大米自古是向国王进贡的贡品之一。 以临津江为界松都(坡州)和汉城(首尔)只有相隔百里 (40km)左右,所以高丽太祖和恭愍王、朝鲜太祖、正 祖、太宗、世宗等许多君王到坡州行宫用御膳及举行 宴会。 77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78 2. 제대하면서 통일촌 들어왔어 - 제대 장병 홍순태 씨 I moved into Tongilchon after being discharged from military service - Mr. Hong Soon-tae, discharged soldier 除隊してすぐ統一村に入った – 除隊将兵ホン・スンテ氏 退役后来到统一村 – 退役官兵洪顺泰 홍순태 씨는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으로 한국전쟁 직 후 방위병으로 차출되었으며, 1951년 정식 입대하여 참 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부사관으로 군대생활을 하다 혼인 후 대구로 전출을 갔다. 다시 전방으로 전출 갈 때 1사단으로 오게 되었으며, 통일촌 입주와 함께 전 역을 하게 되었다. 입주 이후 마을일에 열심히 참여하 였으며, 2004년부터 8년 동안 통일촌노인회장을 역임 하였다. Mr. Hong Suntae was transferred as a standby replacement right after the Korean War. His hometown is Cheongdo-gun, Gyeongsangbuk- do. He joined the army in 1951 and served in the war. After the war, he worked in the army as a non- commissioned officer. After marrying, he was transferred to Daegu. In the next transfer, he was transferred to Division 1. He was discharged from military service and moved into Tongilchon. He was 1972년 통일로 건설작업 현장에서 대구 5군관부 사령부 근무당시 군번이 적힌 사진(신분증으로 사용)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79 actively engaged in community affairs right from the start and worked as a chairman of the Senior Citizens Society for 8 years starting in 2004. ホン・スンテ氏は慶尚北道清道郡出身で、朝鮮戦争の 直後に防衛兵として選ばれ、1951年に正式に入隊し、参 戦した。戦争が終った後も下士官として軍人として勤 め、結婚した後は大邱に転出した。ふたたび前方に転出 した際に1師団に入り、統一村への入居とともに除隊す ることになった。入居後、村の仕事に熱心に参加し、 2004年から8年間統一村老人会長を務めた。 洪顺泰生于庆尚北道清道郡,在朝鲜战争爆发后被抽 调为防卫兵,1951年正式入伍参战。战争结束后,洪顺 泰在部队任副士官,结婚后调动到大邱。之后,再次被 调到前线来到第一师,并在落户统一村时转业。落户后 洪顺泰全心投入到村庄建设,从2004年起连续8年任统一 村的老人会会长。 입대 후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 휴전되기 얼마 전 선임하사와 함께 휴전되고 난 후 동료들과 함께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0 물지게(1970년대/홍순태 기증) Traditional water carrier / 挑水扁担 ■물지게 “물지게는 진짜 기술이 필요해 아무나 못 져. 얼마나 흔들리는데 그것도 요령이 있어야 돼.” “It’s not easy for people to carry water. It really required special skills to maintain balance.” 「水背負子は本当に技術が必要で誰でも背負え るものじゃない。とても揺れるので、それも要 領がなければならない。」 “背挑水扁担需要一些技术,不是任何人都 能背上。扁担在背上非常摇晃,因此要有技 巧。” 통일촌에 입주하였을 때 물이 부족하지는 않아 물 지게로 물을 날라야 하는 경우는 적었다. 멀리 물 을 운반할 때 사용했으며, 거름을 나르기도 하였 다. 물지게는 일반 지게를 지는 방법과 달라 좌우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81 ■삼각건 “전쟁 끝나고 나니까 의무중대에 남아돌아.” “이게 접 는 방법이 따로 있어. 딱 접으면 딱 담뱃갑 만해져.” 부상자의 응급 치료에 붕대 대용으로 쓰는 삼각형의 헝겊이다. 접으면 담뱃갑 크기로 줄어든다. 홍순태 씨 는 의무가 주특기로 부사관 생활을 하였으며, 제대할 때 기념으로 하나 가지고 나왔다. ■코뚜레와 소 코 뚫는 나무 송곳 “소를 많이 부리다보니까 코뚜레도 맨들어 주고 그 런 사람이 있어.” “우리가 잘못 뚫으면은 들창코 돼 버려, 그 사람이 만쳐 보고 제일 얇은 데로 뚫어.” “We had to use a lot of cows and therefore had a person to make nose rings for cows.” “If we did the piercing, it would make cows’ noses turned up wrong. He touched the cows’ noses and then did the piercing on the slightest part of the noses.” 「牛をたくさん働かせていると、鼻輪も作ってくれ る人がいる。」 「私たちが誤って穴をあければ、上 を向いた鼻なってしまって、その人が触ってみて一 番薄いところに穴をあける。」 “养牛的很多,所以有专门制作牛鼻环的人。” “我们可不太会穿牛鼻子,穿错了会使牛鼻子翘起 来,那些人摸牛鼻子穿最薄的地方。” ■반합 “밥 담고 반찬 담아서 배낭에 딱 달고 행군하는 거야.” 직접 밥을 지을 수 있는 알루미늄으로 된 밥그릇인데 주로 군인이나 등산객이 사용한다. 홍순태 씨가 군생활 동안 사용하던 것을 제대하면서 가지고왔다. 코뚜레와 소 코 뚫는 나무 송곳(1970년대/홍순태 기증) Nose ring for cows and wooden pick for cow nose piercing / 牛鼻环和穿牛鼻的木锥子 반합(1970년대/홍순태 기증) Canteen / 饭盒 삼각건(1970년대/홍순태 기증) Cravat (in 1970’s / donated by Hong, Soon-tae) / 三角巾(1970年代/洪顺泰捐赠)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2 3. 최영주 씨의 옛 집 이야기 Old House Story of Choi Young-joo チェ・ヨンジュ氏の昔の家の話 崔永珠的故居故事 1973년 통일촌이 개촌할 당시 가옥은 정부에 의해 제 시된 표준주택설계안을 기본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대 부분의 가옥들은 개축되어 초창기 가옥의 모습들을 살 펴볼 수 없으나 최영주 씨 댁에는 초창기 가옥이 남아 있다. 최영주 씨 댁 가옥은 시멘트블럭조이며 시멘트기 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평면규모는 정면3칸, 측면2 칸으로 정면이 약 8.4m, 측면이 6m 내외이다. 가옥의 주인인 최영주 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남 한으로 피난을 와서 서울에 거주하였다. 군인인 남편과 혼인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사를 다니 다가 남편 전역 후 용주골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이후 통일촌에 입주자를 찾는 공고를 보고 통일촌에 입 주하게 되었다. 1984년에는 아들의 결혼으로 집의 확 장이 필요하여 가옥의 전면을 넓혔으며, 1985년에는 가옥과 직교하는 창고를 허물고 양옥집을 건립하였다. 현재 초창기 가옥은 확장한 전면을 허물고 창고로 사용 하고 있다. When Tongilchon was established, all the houses were constructed in accordance with the standard housing designs by the government. Most of the existing houses were reconstructed and therefore the appearances of the early houses cannot be found. However, Mrs. Choi’s house remains with its old structure. The house was constructed with cement blocks and barge boards made of cement. The flat structure consists of three fore rooms and two side rooms with the fore length of 8.4 meters and side length of 6 meters approximately. The owner was born in Pyeongyang and moved to Seoul during the Korean War. 최영주 씨 집에 있는 초창기 본체 가옥 모습 Scene from early-stage house owned by Choi, Young-joo / 留在崔永珠家的统一村初期房屋形状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83 She married to a soldier and moved to various regions. After her husband was discharged from the army, they settled down in Yongjugol. They applied for living in Tongilchon and then moved to this village. They expanded the forefront of the house as they needed additional space due to their son’s marriage. In 1985, they constructed a new western- style house where storage was crossly located with the main house. The expanded forefront is now used as storage. 1973年、統一村が開村する当時、家屋は政府によって 提示された標準住宅設計案を基本として建設された。 現在、多くの家屋は改築されて草創期の家屋の姿を見 ることはできないが、チェ・ヨンジュ氏宅には草創期 の家屋が残っている。チェ・ヨンジュ氏宅の家屋はセ メントブロック造であり、セメント瓦をのせた切妻 屋根である。平面規模は正面3間、側面2間で正面が約 8.4m、側面が6m前後。家屋の主人であるチェ・ヨンジュ 氏は平壌で生まれて朝鮮戦争当時、韓国に避難してソ ウルに居住した。 軍人である夫と結婚し、色々な地域に引っ越して夫の 除隊後、ヨンジュゴルに定住した。以後、統一村の入 居者を求める公告を見て統一村に入居することになっ た。1984年には息子の結婚で家の拡張が必要で家屋の全 面を広げ、1985年には家屋と直交する倉庫の場所の倉庫 최영주 씨 댁 초창기 가옥 평면도 부엌 아궁이 옛 부엌을 설명하시는 최영주 씨 통일촌 1970년대 창고 평면도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4 を崩して洋風の家屋を建設した。現在、草創期の家屋 は拡張した全面を崩して倉庫として使っている。 在1973年建立统一村时,房屋基于政府提出的标准住宅 设计方案建造。目前,因大部分房屋进行了改建,所以很 难见到初期的房屋形状,但在崔永珠的家还留有初期的房 屋。这一房屋使用水泥砖建造,盖上水泥瓦的屋顶是人字 坡顶。从平面上的看,房屋正面三间、侧面两间,正面长 约8.4米、侧面长约6米。房屋的主人崔永珠出生在平壤, 在朝鲜战争时期避难到韩国后在首尔居住。 崔永珠的丈夫原是军人,所以随着丈夫多次迁居。在 丈夫转业后,他们在龙珠谷落户。此后,见到统一村招 收村民的公告,他们就到统一村居住。1984年,因儿子 结婚需要扩建房屋,所以加宽了房屋的前面。1985年, 拆除与房屋连接的仓库后,在仓库位置建造了洋房。目 前,初期的房屋拆除在前面扩建的部分后用为仓库。 ■반닫이 “여기다 옷 같은 거 넣고 이사 갈 때 늘 가지고 다녔지. 아저씨 젊은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녀 서…” “We put the clothes in this for moving to keep them with us. We had a lot of moving when my husband was young.” 「ここに服などを入れて引っ越しする時、いつ も持ち歩いたんだ。おじいさんが若い時に引っ 越しをたくさんして…」 “把衣服装在里面在搬家时总是带着,丈夫年 轻时搬了很多次家…” 반닫이(1970년대/최영주 기증) Cabinet / 半开柜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85 ■작은단지 “이게 저기 강가에서 주운거야…여기에 사람이 안 살았잖아. 예전에 살던 사람이 쓰던 거니까 오래된 거지.” ■요강 “요즘처럼 수세식 변소가 없어서 밖에 추운데 나가 기도 그러니까 사용하는 거지.” ■칼 “그 칼은 아저씨가 쓴 거 같은데, 뭐하는 데 쓴 건 지는 모르겠네.” 물건을 베거나 썰거나 깎는 데 쓰는 도구이다. 최영주 씨의 남편이 사용하던 것이다. 작은단지(민위현 기증) Small pot / 坛子 요강(1960년대/이일태 기증) Korean chamber pot / 溺江 칼(2000년대/최영주 기증) Knife / 刀 ■오디오 “이거 심심할 때 많이 듣고 뉴스도 듣고 했지.” 오디오(1980년대/이종옥 기증) Audio system / 录放机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6 옹탱이 (1950년대/조복덕 기증) ■옹탱이 “우리 친정아부지가 인제 나 클 때 맨들어 갖고. 나 이제 시집오니까 갖다 써라 하고 줬 는데, 플라스틱으로 만든걸 주로 쓰고 저거는 그냥 보관했던 거지…친정아부지 생각 많이 나지.” 조복덕 씨의 친정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것이다. 크기 가 다른 3개가 하나의 세트로 있었다. 중간크기의 옹탱 이는 비에 맞은 후 검게 썩어 버려 아궁이에 넣어 태웠 다. 옹탱이는 짚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갈대처럼 자라 는 풀로 만든 것으로 그 잎을 따서 엮어 만든다. 이 풀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풀잎을 뽑아 줄 기와 연결된 부드러운 부분을 씹으면 단맛이 난다고 했다. ■깔때기 “(분리기에) 넣어가지고 돌리면은 일루 떨어지면서 통에다 이렇게 떨어지게.” 나팔꽃 모양으로 밑에 구멍이 뚫린 기구인데 윗부분 은 폭이 넓고 아랫부분은 폭이 좁다. 한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물질을 옮길 때 주로 쓴다. 김성태 씨가 양봉을 하면서 꿀을 통에 담을 때 사용하였다. This is a tool with morning glory like shape. The upper part is wide and the lower part is narrow. It is used to transfer materials from one bottle to another. Mr. Kim Seong-tae used it when he put honey in the bottles for his beekeeping. 朝顔の形で下に穴があいた器具で、上部は幅が広く て下部は幅が狭い。容器から他の容器に物質を移す時 主に使う。キム・ソンテ氏が養蜂をしている時、蜜を 筒に入れるのに使った。 깔때기(2000년대/김성태 기증) Funnel / 漏斗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87 漏斗是具有喇叭花形状且在下面穿 孔的一种工具,上宽下窄,主要 用于把液体等物品从一个容器装 到另一个容器。金盛泰在养蜂时 用漏斗把蜂蜜装进桶里。 ■시루 “이거는 떡만 해 먹는 거야. 고사 해먹는 거 야, 시루떡.” 심간난 씨가 통일촌에 들어오기 전 월롱에 살 때 문산 에서 산 시루이다. 주로 떡을 찌거나 콩나물을 키울 때 쓰던 것이다. 심간난 씨는 떡 해먹는 용도로만 사용하였 다. 10월에 고사 지낼 때 떡을 해서 시루째 상에 올리고 지냈다. 시루 입구 부근에는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철사로 감아 조여두었다. ■호미 “저건 아저씨가 쓰는 거야. 내 꺼는 따로 있어. 그 건 손녀딸도 못 쓰게 해.” “That is for my husband. I have my own. My husband does not let even his granddaughter use it.” 「あれはおじいさんが使うんだよ。私のは別にあ る。それは孫娘にも使わせない。」 “这个是丈夫用的锄头,我用另外一个锄头,那个 连我的孙女也不让用。” 최영주 씨의 남편이 사용하던 호미로 남편 손에 맞게 고무로 손잡이를 감았다. This is a hand hoe covered by the rubber bar fitted for Mrs. Choi’s husband. チェ・ヨンジュ氏の旦那さんが使っていた草取り鎌 で、旦那さんの手に合わせてゴムが巻かれている。 崔永珠的丈夫使用的锄头,为了适合丈夫的手在手柄 上还缠上了橡皮带。 호미(2000년대/최영주 기증) Hoe / 锄头 시루(1960년대/심간난  이일태 기증)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88 ■배자 “시집 올 땐가 오기 전인가, 할머니가 해줬어.” “애들 어릴 때 그때 입고는 안 입고 싸서 넣어놨으 니까. 손녀딸 한번 입혀보리라 했거든. 손녀딸이 하나 있으니까. 손녀딸 입혀보고 줄게.” “My grandma gave me this before or at my marriage, I couldn’t remember well.” “I wore this a long time ago when my children were young and then kept it well. I thought that I could wear this on my granddaughter. Now I have one granddaughter and I will give it to her for wearing.” 「嫁に来る時か来る前か、祖母がくれた。」 「子供が幼い時、その時着てからは着ないで、しま っておいたから。孫娘に一度着せようと思って。孫 娘が一人いるから。孫娘に着せてみるよ。」 “记不清出嫁时还是出嫁前,是奶奶给我做 的。”, “在孩子们小的时候穿过,此后包起来放在柜里没 有穿,想给孙女穿上一次。我有一个孙女,给他穿 一次后再给你们。” 배자 (1900년대/최영주 기증) Traditional waist coat / 毛背心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89 4. 정자리 민씨 댁의 일생의례 Rites of Life of the Mins in Jeongja-ri 亭子里ミン氏宅の一生儀礼 亭子里闵氏家族一生仪式 일생의례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은 뒤까지 평생을 통 해서 거치는 의례로 출생의례, 성년식, 혼례, 상례, 제 례를 개인 일생의 마디로 꼽고 있다. 통일촌 인근, 정 자리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민씨들은 다행히 고 향으로 돌아와 해마다 조상님께 제사와 시제를 지내면 서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Rites of life refer to those rites a person travels through from birth to death, including the ceremony for birth, coming-of-age and marriage, funeral and ancestral rites. 一生儀礼とは人が生まれてから死んだ後まで、一生を 通じて行う儀礼で、人生の節目に出生儀礼、成年式、 婚礼、喪礼、祭礼を行う。 一生仪式指人从出生到死亡为止的一生中所经历的仪 礼,以出生仪礼、成人仪式、婚礼、葬礼、祭礼为个人 一生节点。 1941년 장단군 정자리에서 출생; 1948년 군내국민학 교 입학 1964년 군입대; 1970년 혼례; 1971년 큰딸 득녀; 1972년 큰딸 백일 1973 큰딸 돌잔치; 1973년 신문 공모를 보고 통일촌 에 입주 1981년 부친 민복현 씨 환갑잔치; 1995년 손녀 혼인; 2010년 칠순잔치 ■제기 제사에 사용하는 각종 그릇 및 도구를 말한다. 일반 적으로 나무, 사기, 놋쇠 등으로 만드는데, 사당에서는 놋쇠나 사기로 만든 제기를, 묘소에서는 가볍고 운반하 기 쉬운 나무 제기를 사용한다. 제기(1900년대/김용분 기증) Jegi(traditional kicking toy) / 祭祀用品

통일촌마을박물관 - 통일촌 사람들, 그 삶의 이야기 90 ■놋화로 놋으로 된 숯불을 담는 그릇이다. 선조 때부터 전해 온 화로로 불씨를 보존하거나 난방을 위하여 쓰였던 것 이다. 민태승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화로에 차조 로 만든 조망댕이 떡을 구워주었던 추억이 있다. This is a brass bowl to put charcoal fire in it. It’s a fire pot passed from generations and used to keep the fire or warm the room. Mr. Min Tae-seung has a memory of having Jomangdaengi (traditional rice cake) with his grandma who made the cake of glutinous millet using the fire pot. 真鍮でできた炭火を入れる器だ。宣祖の時から伝えら れてきた火鉢で、火種の保存や暖房のために使われた ものだ。ミン・テスン氏は幼い時、お祖母さんが火鉢 にモチアワで作ったチョマンデンイ(餅)を焼いてくれた 思い出がある。 用铜制作的装炭火的炉子。从先祖时期传下来的火 炉,用于保存火种或供暖。闵泰胜还记得小时候奶奶在 火炉上给他烤用糯小米制作的小米糕。 ■조망댕이 떡 “구워서 조청에 찍어 먹었어. 조를 11월에 수확하 니까 겨울에 만들어 먹는 떡이야.” 찹쌀이 귀한 지역에서 차좁쌀로 만들어 먹었던 떡이 다. 겨울에 얼려두었다가 석쇠에 올려두고 손으로 달걀 모양을 만들면서 화로에 구워 먹었다. 놋화로와 조망댕이 떡(1950년대/민태승 기증) Fire pot made of brass and traditional rice cake / 铜火炉和小米糕

Ⅳ. 개인 생애사로 살펴보는 삶의 흔적들 91 영상으로 보는 민태승 씨 댁의 일생의례 Images from Lifetime ceremonies of a family (Min Tae-seung’s) / 闵泰胜家一生的各种仪式

부록 사진으로 보는 통일촌브랜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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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마을 박물관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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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마을길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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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통일촌브랜드마을 개관 및 마을 40주년 기념행사 자랑스런 경기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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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통일촌 이야기와 문화유적

부 록 108 “잠깐만 나갔다오라더니 그 길로 20년이 지나서야 다시 들왔지.” 통일촌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DMZ 서부전선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 는 마을이다. 1973년에 새롭게 형성된 ‘전략촌’으로 ‘후방마을’과는 다른 마을의 역 사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지뢰와 철조망으로 각인된 DMZ 인근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 삶의 역사가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민씨, 최씨, 박씨들의 집성촌이 자리 잡 고 있었던 지역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나자 사람들은 서둘러 피난을 나갔다. 귀한 물건들은 항아리에 담아 뒷산에 묻어두고 떠나야 했다. 곧 고향으로 돌아왔지 만 극심한 폭격에 남아난 것이 없었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낮에는 아군이 차지 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와서 차지하고 그러던 데”가 이 마을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고향 땅을 지키면서 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휴전이 되고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사람들에게 잠시만 마을에서 나가있으라고 해서 살림살이도 그대로 둔 채 몸만 나왔던 것인데, 그게 20년이 지나 서야 이 통일촌 마을이 생기면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통일촌 이야기 -마을 이름이 ‘통일’ 브랜드- 김지욱1) 1)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수석연구관/ 팀장. 통일촌브랜드마 을 육성사업 총괄 추진.

마을이름이 그대로 특화브랜드인 “통일촌” 109 그것도 이 지역이 고향인 40가구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인근 부대 제대 장병 40 가구와 함께 산등성이를 밀고 마을을 만들어 ‘정책 입주촌’으로 자리를 잡은 지가 이 제 40년이 된다. 1973년 8월에 각자의 집에 입주하기 전부터 남자들은 미리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하나같이 사연이 없는 이들이 없어….” 마을 입주 자격을 갖추느라 서둘러 군대를 제대한 남편을 따라 혼례식도 제대로 못 치르고 마을에 들어왔다는 박씨 할머니는 척박한 터를 농지로 일구기 위해 고생 했던 이야기를 그저 한마디로 되풀이하기만 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 신문 공고 마지막 날 우연히 통일촌 입주 모집 공고를 보고 동생을 들여보내려 고 했다가 동생이 구비서류를 갖추지 못해 맏이인 본인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민씨댁 사연에서는 필연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된다. 파주 인근에 살다가 들어오게 된 실향 원주민들도 그렇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온 이들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고 향이 전국적이다. 공동체로 뭉쳐지기까지의 과정이 농토를 일구는 일만큼이나 어려 운 일이었지 싶다. “이스라엘의 키부츠같이 시작했어” 처음, 마을은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모델로 하였다. 제대 장병과 원주민들을 고 르게 배정하여 2개 반 8개 조로 나누어 남녀가 모두 훈련도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는 무기고와 방공호, 벙커가 처음부터 조성되어 있었다. 안채와 창고를 모두 똑같이 지은 집과 농지도 공평하게 제비뽑기를 해서 나눠가졌고 학교와 교회도 지었다. 주 민 스스로가 마을을 지키고 자급자족하는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분명, 여느 후방 마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2012년 8월부터 DMZ 통일촌브랜 드마을 육성 사업이 진행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를 토대로 마을박물관과 마을길 탐방로를 조성하였다. 장차 에코뮤지엄(Eco-Museum)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하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여기 들올 때? 살림살이가 뭐 있어? 피난 다니느라 다 없애고…” “이사들올 때, 지금 이장이 검문소 앞으로 경운기 끌고 나와서 온 가족이 그거 타 고 들왔지. 애들은 항아리에 넣어가지고… ” 살림살이는 우선 덮을 이불과 밥해먹을

부 록 110 솥, 밥그릇, 숟가락 등이 전부 였다. 전쟁 통에, 폭격에 없어 지고, 잠시 나갔다 오라는 말에 그대로 두고 나왔던 살림살이 들이라 예전 것이 없다. 오래되 어도 40년이라 했다. 그래서 그게 전부인지 알았 다. 그런데 이 통일촌에 마을 박물관을 만들면서 하나둘씩 사연과 함께 역사가 묻은 물건 들이 기증되었다. 일제의 강압 에서도 지켜냈던 놋화로는 ‘조 망댕이’라는 차좁쌀로 만든 떡 을 구워먹었던 어린 시절의 추 억과 함께 전시되었다. 겨울이 면 할머니가 조물조물 손으로 모양을 만들면서 화롯불에 구 워주던 떡이었다. 시집올 때 친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배자 를 “손녀딸에게 한 번 입혀보 고 줄게”라면서 내 놓으셨고, 친정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 라 쓰지 않고 아껴두었다던 옹 탱이, 듬성듬성 기능성만 살려 만든 골무, 군인시절에 만든 추억록과 편지들, 꼼꼼하게 적 어 둔 농사일지… 아직은 ‘골동품’도 되지 못하는 것들을 전시하면서 그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들에서 이 마을의 역사와 마을을 가꾸면서 공동체를 이루어낸 마을 사람 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지역의 독특한 혼례 문화인 ‘재끄러미’와 스 님을 모시고 지내는 ‘장승제’, ‘콩 고사’, ‘시제’, 전국에서 모인 주민들이라 유난히 심 했다는 상여가 나갈 때의 장난질 등 전통 문화의 전승은 여느 마을과는 ‘같고도 다 름’이 있다. 분단이 만들어낸 또 다른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마을뿐만 아니 라 DMZ 지역의 가치를 배가하고 있는 귀한 생활 문화이다. 전국에서 모인 군인 출 신들의 본 고향 생활방식 역시 이 마을의 문화로 자리매김 한 유산일 터이다. 파주 통일촌마을박물관은 이제 막 이러한 기록을 담기 시작하였다.2) 농기구와 전쟁의 흔적이 같이 전시된 통일촌마을박물관 ‘재끄러미’ 당한 혼례사진 2) 2012년 8월부터 2013년 8월까지 안전행정부 2012. DMZ 지방브랜드 세계화시범사업 ‘통일촌브랜드마을 육성사업’으로 선정되어 경기도, 파 주시, 경기문화재단이 함께 추진하 였다. 2013년 8월14일에 통일촌브랜 드마을 개장 및 통일촌 입주 40주 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마을이름이 그대로 특화브랜드인 “통일촌” 111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산다는 것 - “불안한 건 없지….” 실상, 이 지역은 6.25전란 이전에는 장단군이었으나 휴 전에 의해 군 작전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다.3) 1953년 조산리(대성동)에 ‘자 유의 마을’이 조성되어 DMZ 내 유일한 민간인 마을이 생겨 2013년 8월에 정전 60년과 같 이 마을 이름 붙인 지 60주년 이 되었다. 통일촌은 1972년 5 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방사 무소 순시 중에 정착촌 개발을 지시하였는데 당시 인근 전진 부대 장병들이 전진농장을 개 간하고 있던 터였다. 1973년 3 월에 개발 사업에 착수하였고 1973년 8월 21일에 주민들이 입주하였다. 2001년에는 진동 면 동파리에 연고지가 장단지 역인 실향민 1세대를 위한 ‘수 복마을 해마루촌’이 조성되었다. 1979년 5월에 민통선 내 행정기관으로 군내출장소 가 개설되었으며 2011년에는 장단출장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4) 장단출장소 관할구역인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 진서면 등 4개 면 22개 리 중 거주 지역은 백연리 통일촌과 조산리 대성동, 동파리 해마루촌 3개 리 8개 반에 약 280세 대가 살고 있으며 파주시 전체의 19.3%라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거주 가구의 95%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들에게 들은 얘기는 이렇다. 이 지역에 사는 게 “불안하지는 않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통일촌은 군사분계선 남방 4.5㎞에 위치하고 있다. 도깨다리와 철교 통일촌 조성기념비와 정자 3) 1972년에 장단군에서 파주군으로 편입되었다. 4) 장단출장소 현황 자료, 2013년 1월.

부 록 112 통일촌브랜드마을 - DMZ 안보관광의 거점 지금 이 통일촌에는 연간 70 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내방하 고 있다. 그 중 중국인 관광객 등 외국인이 90%나 된다. 일 반 관광객들은 임진각에서 2개 코스의 안보관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 중 한 코스가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 등을 돌아 통 일촌농산물직판장식당에서 장 단콩으로 만든 점심 식사를 하 거나 특산품을 판매하는 직판 장을 보고 바로 버스에 승차하 여 임진각으로 돌아간다. 세계 에 한 곳뿐인 분단국가의 긴장 감을 보겠다고, 혹은 당시 전 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할아 버지의 흔적을 보겠다고 온 그 들에게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는 코스다. 이제, 이 통 일촌에서 말 그대로 ‘전쟁과 평 화’를 보고 느끼고, 또 쉬어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관람객이 평화누리 임진각에서 통일대교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느끼게 되는 긴장 감은 도라산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는 자연 환경에서 멈추게 된다. 한참을 내려가는 긴 땅굴에서 남한과 북한이 심각한 대치 상황임을 실감하면서 잠시 불안감을 느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도착한 통일촌에서 지역 특산물인 장단콩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고 마을박물관과 마을길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가들의 의미 있는 작품 들을 돌아보면서 평화로운 삶에 대해 조금은 감사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될게 분명 하다. 그리고 통일촌 마을길은 마을 입구에서 출발하여 통일촌길을 걸어 올라가 마 을박물관을 관람하고 급수탑 아래 골목길을 돌아 통일촌 안길로 다시 내려오는 총 1.4㎞가 되는 탐방길이다. 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하기에 아주 적당한 거 리다. 그 길에는 작가들의 아트워크인 둥지 전망대, 방공호 체험, 위험한 놀이가 있 통일촌 조성기념비와 홍순태 노인회장이 쓴 글

마을이름이 그대로 특화브랜드인 “통일촌” 113 다. 그리고 이정표로 설치한 군인들, 군인 포토존, 위장막을 친 벤치, 그림이 있는 정자 쉼터 등이 길가에 있다. 안내는 길가에 있는 기름통에 적혀있다. 간이 안내판 도 나무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어 손 글씨로 쓴 게 정겹다. 첫 눈에 들어오는 태극기와 빨간 우체통, 꽃밭, 장독대, 은행나무 쉼터, 대추나무 집, 복숭아 밭, 옛 집과 담장, 전선위에 앉은 제비 등은 ‘통일촌 마실가기’의 작은 재 미이다. 무엇보다 ‘후방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무기고, 벙커, 방공호 그리고 멀리 북녘의 송악산이 보이는 관람 포인트는 꼭 챙겨볼 일이다.

부 록 114 1. 파주 비무장지대 주변 지역의 역사적ㆍ지리적 환경 경기도 서북단에 위치한 파주시는 임진강을 경계로 북쪽 지역을 남북 접경지역으 로 부른다. 파주시의 임진강 북쪽지역은 모두 비무장지대, 민간인통제지역, 군사보 호구역으로 파주시 행정구역상 군내·장단·진서·진동면 등 4개 면이 해당된다. 파주 시 군사보호구역 내에는 현재 남북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성동·통일촌·해마루촌 등 3곳에서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개발에 대한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문 화유적이 잘 보호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군사분계선에서 2㎞ 떨어진 남방한계선까지의 지역을 말하는 비무 장지대는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우나, 그 후방에 유사시 군사작전을 하기 위한 민간 인통제지역(또는 민간인통제선을 줄여 민통선이라고도 한다)은 신분확인만 이루어 지면 비교적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파주시에서도 임진강 이북지역은 옛 장단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파주시 비무장지대 주변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환경을 살피려면 장단(長湍)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장단은 본래 고구려의 장천성(長淺城)이었으나 신라가 장단(長湍)으로 고쳐서 우봉 군(牛峯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송림(松林)·임 진(臨津)·임강(臨江)·토산(兎山)·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정주(貞州)·덕수(德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백종오1) 1) 한국교통대학교 교수 /전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15 水)·강음(江陰) 등과 같이 적현(赤縣)·기현(畿縣)으로서 개성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001년(목종 4)에는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의 고향이라 하여 단주(湍州)로 승격하 여 지주사(知州事)의 부임지가 되기도 하였다. 1018년(현종 9) 다시 현령으로 환원되 어 송림·마전 등의 7개 현을 관리하게 되면서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직할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410년(태종 10) 송림현을 폐합하였고, 1414년 임강현이 혁파되 면서 장단으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에 다시 송림·임강현으로 분리되었다가 재편되 어 임진현에 병합되면서 임단현(臨湍縣)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장단현은 세조 때 정 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의 선영이 있는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知 郡事)를 배치하면서 치소를 도원역(桃源驛)으로 이전하였다. 도원역의 치소는 1469 년(예종 1) 이곳에 진(鎭)이 설치되면서 다시 승격하여 도호부로 지정되었으며, 강 화도호부를 비롯하여 풍덕(風德)·삭녕(朔寧)·마전·연천·교동에 이르는 6개 현을 관 리하게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방어사를 겸하면서 부치(府治)는 백악산(白岳山) 남방인 옛 임진현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1866년(고종 3)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장단군으로 개칭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11월 북한은 38선 이북지역에 속해 있던 경기도 장단군의 5개 면 (대남, 강상, 대강, 소남, 장도)과 개풍군의 2개 면, 연천군의 서남면을 통합하여 황해 도에 장풍군을 신설하였다. 이후 195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면을 폐지하고 개풍 군의 6개 면(봉동·상도·중·흥교·임한·청교면)과 장풍군 진서면의 일부지역을 합쳐 판 문군을 신설하였다. 남한은 197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단군의 장단면·군내면·진서 면·진동면이 파주군에 편입되었고, 1996년 파주시로 승격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다음은 장단군의 지리적 환경에 대해 살펴보자. 장단군은 마식령산맥의 여맥이 뻗어내려 대체로 산지가 많은 지역으로, 북부는 수룡산(秀龍山, 717m), 대둔산(大 屯山, 760m) 등이 솟아 비교적 높지만 남부는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평탄하다. 북 동부의 사미천(沙尾川)이 장남면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며 남부의 사천(砂川)이 장단면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들어 그 주변으로 평야가 발달되었다. 임진강은 사행 (蛇行)하며 흐르는데 장단면의 하안(河岸)은 공격사면으로 가파른 절벽을 이룬다. 이 때문에 좁은 하안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0.4℃, 1월 평균기온은 –6.2℃이며 8월 평균기온은 25.3℃이다. 연강수량은 1,184㎜이다.2) 이 지역의 지질은 경기육괴의 북단에 속하며 선캠브리아기의 경기변성암 복합체 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부 지역에는 중생대 쥐라기에 퇴적된 남포층군과 이에 관 입한 화강암, 신생대에 흘러내린 현무암 등이 분포한다. 임진강 이북의 초리, 용산 리, 석곶리 일대에는 대체로 화강편마암, 안구상편마암이 분포하며 이 지역은 오랜 기간 침식을 받아 낮고 평평한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신생대에 형성된 현무암류의 대지는 플라이스토세(홍적세)에 만들어졌으며 대지의 곳곳에는 현무암이 냉각되면 서 갈라져 솟아오른 암괴들로 이루어진 작은 구릉이 있다.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 문 화대백과사전』, 1995.

부 록 116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환경을 가진 파주시의 비무장지대 주변 지역은 임진강과 개성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예나 지금이나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 을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2. 파주시 비무장지대 주변 문화유적 현황 파주시의 북쪽, 임진강 이북 지역을 대상으로 군사보호구역 내의 문화유적 현황 은 현재까지 80여 개소가 파악되고 있다.3) 접근이 어려운 진서면을 제외한 3개 면 에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조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 지 폭넓은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지방역사문화의 성격을 파 악할 수 있는 중요유적을 골라 유적위치에 따라 임진강 동쪽에서 서쪽 순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 동파리 마애사면석불(磨崖四面石佛)4) ○ 소 재 지 :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31-1 ○ 지정사항 : 경기도 유형문화재 156호 이 석불은 임진강 이북 일월봉 능 선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석불의 조성시기로 보아 고려전기에는 사 찰이나 암자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국립문화재연구 소에서 처음 발견하였는데,5) 당시 에는 동파리의 일월봉 서쪽 산기슭 땅속에 묻혀있었다. 이 때문에 대 좌의 하반신부분은 상태가 양호하 나 상반신부분은 훼손이 심한 상태 이다. 석불의 규모는 동면높이 116 ㎝, 서면높이 93, 남면높이 101, 북 면높이 129로 파악된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네 면을 이루었으 나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다. 마 모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각 면에 음각으로 조각된 불상은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인 다. 불상은 각 면에 1구씩 조각되었으며 모두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 3) 부록 표3) 참조. 4) 엄기표, 「경기지역 비무장지대 의 불교문화」, 『비무장지대 도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로 비무장지 대 구간 시굴조사 보고서-』, 경기 도박물관·세종대학교박물관·서울 지방국토관리청, 2003, 416-417쪽. 5) 국립문화재연구소, 『군사보호구 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 -경 기도편-』, 2000, 276쪽. 6) 엄기표, 앞 논문, 2003, 417쪽. 파주 동파리 마애사면 석불 전경6)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17 추고 있다. 두광과 신광은 불상의 상호(相好)나 불신(佛身)과 적당한 비례를 유지하 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부에는 앙련과 복련이 장식된 대좌를 갖추었는데 연화대좌 는 연입형의 연화문을 표현하고, 판단을 뾰족하게 하였다. 연화문의 표현 수법은 통 일신라나 고려 초기의 화려한 양상과는 다르게 간략화된 경향이며, 특히 연화대좌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대형 석불이나 마애불에 표현되는 단순하고 정교하지 못한 연화 문의 특징과 유사하다. 동면 불상의 상호는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지만 어깨 아래로 U자형의 옷주름이 가슴에서 배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어 통견(通肩)의 법 의(法衣)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가부좌한 양다리는 몇 가닥의 음각선 으로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아래쪽으로 향하여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왼손은 팔을 배 쪽으로 구부린 것 같지만 마 모가 심하다. 따라서 불상의 명칭은 판별이 불가능하지만 머리 크기, 어깨 너비, 손 과 손가락의 표현, 결가부좌한 다리 등 전체적으로 신체의 비례가 잘 어울리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전기의 조성 수법으로 판단되는 요인이다. ■ 서곡리 벽화고분7) ○ 소 재 지 :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112 이 유적은 1991년 도굴된 채로 발견되어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 구소에서 발굴 조사된 고려시대의 벽화무덤이다. 무덤은 구릉의 경사 면을 ‘ㄴ’자형으로 파내고 평탄하게 정리한 암반층에 마련되었다. 길이 394㎝, 너비 202㎝, 깊이 103㎝ 규 모의 장방형 수직 광 안에 석곽(石 槨)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목관(木棺) 을 안치하였으며, 그 위를 덮어 원 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마무리 하였다. 평면 장방형의 석곽 동벽 과 서벽은 각각 너비가 좁은 긴 판 석 1장을 광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넓고 긴 대형 판석을 올려 양 장벽을 마련하였다. 북벽은 정방형에 가까운 큰 판석 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에는 같은 크기의 너비가 좁고 긴 판석을 사용해 구축하였 다. 남벽은 정방형에 가까운 판석 1장으로 문돌을 만들어 마감하였다. 천장에는 방 7)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파주 서곡리 고려벽화묘 발굴조 사 보고서(坡州 瑞谷里 高麗壁畵 墓 發掘調査 報告書)』, 1993. 8)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앞 보고서, 1993, 표지. 파주 서곡리 벽화8)

부 록 118 형의 큰 판석 2장과 장방형의 큰 자연석을 사용해 덮었다. 곽의 내부 바닥에는 한 변의 길이 35㎝, 두께 4.5㎝ 크기의 정방형 무문전(無文塼)을 전체적으로 깔아 처리 하였다. 그러나 발굴조사 전 도굴로 인해 문돌 일부가 깨졌고, 무문전도 대부분 제 거된 상태였다. 벽화의 내용은 천장에 북두칠성과 삼태성(三台星)을 표현하였고, 네 벽에는 십이 지(十二支)를 나타낸 전신인물상이 그려져 있으며, 동벽과 서벽에는 5인의 인물상 이, 남벽에는 1인의 인물상이 자리한다. 그림은 먼저 음곽선으로 윤곽을 잡고 그 위 에 묵선(墨線)으로 그렸다. 얼굴의 세부와 손에 쥔 홀(笏) 등은 직접 묵선으로, 얼굴 의 코·입술·관모 등은 묵선으로 그린 다음 붉은 채색을 하였다. 침수에 의해 벽화가 대부분 지워진 상태이나 북벽의 추정 주인공의 모습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었으나, 희령원보(熙寧元寶), 개원통보(開元通寶), 함평통보 (咸平通寶), 정화통보(政和通寶) 등 동전과 수정구슬, 토기편, 자기편, 파손된 묘지 석(墓誌石)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묘지석이 확인되면서 고려 공민왕(1352년) 때 축 조되었으며, 권준(權準)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 허준 묘9) ○ 소 재 지 :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 ○ 지정사항 : 경기도기념물 128호 허준(1546∼1615)은 조선시대 중기의 의관(醫官)으로 호는 구암(龜巖)이고 김포 출신이다. 1610년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알 리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 의 지위를 누렸다. 1615년 70세로 일기를 마감하자 호성(扈聖) 공로의 어의로서 선 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으며, 임진강 건너 비무 장지대의 해발 159m에 허준의 묘를 마련하였다. 이 묘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재미 고문서연구가 이양재 등에 의해 1991년 9월 30일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쌍 분으로 보이는 봉분은 이미 도굴되어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으나 묘비, 문인석 2기, 상석, 향로석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어 허준의 묘임이 밝혀졌다. 묘역은 50여 평 규모로 좌측 묘는 허준, 우측 묘는 부인인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추정된다. 쌍분 위에는 허준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 1기가 더 있으며 『양천허씨족보』에도 이러한 기 록이 남아있다. 묘비는 두 쪽으로 잘려진 채 땅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마모된 비문 가운데 ‘양천군(陽川君)’, ‘호성공신(扈聖功臣)’, ‘허준(許浚)’ 등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묘비는 113×41×12㎝의 규모이다. 2개의 문인석은 높이 203㎝로 상태는 양 호하게 남아있다. 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 1995.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19 ■ 덕진산성(德津山城)10) ○ 소 재 지 :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 산13 외 일원 ○ 지정사항 : 경기도기념물 218호 덕진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식 산성으로,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여러 번의 수·개축을 반복하며 사용되었다. 산성의 해발고도는 낮은 편 이지만 임진강의 북쪽에 연해있고 남쪽의 시야가 확보되어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덕진산성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처음 소개 된 이후 각종 지리지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 있다. 정확한 산성의 구조와 축조방법은 2004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의 시굴조사와 2012년 중부고고학연구소 발굴조 사를 통해 점차 파악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성은 해발 65m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싼 표주박 형태로 둘레는 약 600m이다. 성내에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평탄지가 있으며 성벽은 처음에 토성이었으나 2~3차례 이상 수·개축을 반복하며 석성으로 변화하 였다. 내성의 시설물로는 집수지와 치(雉),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집수지는 평면 원형에 가깝고 계단상의 호안석축이 있으며, 규모는 직경 15m, 깊이 5m정도이다. 치는 성의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확인되는데, 특히 북서쪽의 치는 고구려 때 초축되 어 수·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외성은 약 1㎞ 규모의 포곡식으로, 내성의 북동쪽 성벽에 연접하여 능선을 따라 10)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국 방유적연구실, 「파주 덕진산성 정 밀지표조사 및 시굴조사 약보고 서」,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국방유적연구실, 2004. 안성현 외, 「파주 덕진산성 학술 시ㆍ발굴조사」, 『2012년 중부지방 발굴조사 성과 발표 자료집』, 중부 고고학회, 2012. 11) 안성현 외, 앞 논문, 2012, 148쪽. 12) 안성현 외, 앞 논문, 2012, 163쪽. 13) 안성현 외, 앞 논문, 2012, 163쪽 고구려 토기편. 덕진산성 현황도11) 출토유물13) 외성벽 축조상태12)

부 록 120 ‘U’자형으로 축조되었다. 두 개의 문지가 남아있으며 성가퀴(여장)의 흔적도 2곳에 서 확인된다. 외성벽 역시 처음에는 토축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7차례에 걸친 수·개축을 통해 석축으로 외벽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내에 서는 삼국시대~조선시대의 기와편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내벽 외부 다짐토를 굴착 한 수혈주거지 내부에서 호·시루 등의 고구려 토기도 확인되었다. 고구려 토기 가 운데 시루는 5세기 후반 경으로 편년되고 있어 성의 초축시기를 추정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북서쪽 치 인근에서는 20~30 크기의 볏이 출토되었다. 덕진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고쳐쌓으며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조사에서는 덕진산성 동쪽으로 인접한 구릉에서 고구 려가 축조한 동파리보루가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성곽의 배치는 강의 북안에 설치된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등과 함께 임진강변의 고구려 관 방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이해된다. ■ 조랑진보루14) ○ 소 재 지 : 파주시 장단면 노하리 조랑진의 북쪽에 있는 산에 있으며 강에 인접한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이곳 은 임진강이 사행곡류하다 강폭이 좁아지기 시작하며 임진강으로 향하는 능선 정상 부(해발 89m)의 남동쪽으로 강 건너 문산읍 일대가 잘 조망되는 지역이다. 비교적 높지 않은 고지에 조성되었으나 주변이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성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강과 인접한 부분과 구릉 정상부에는 석렬과 석재가 노출되어 있으며 주변에 고구려 기와가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구 려 보루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다. ■ 점원리 고려 석실분(點元里 高麗 石室墳)15) ○ 소 재 지 :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점원리 고려 석실분은 개석이 절반가량 파손되어 내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규모 는 동서 장축으로 동서 길이 130, 남북폭 66, 석실 내부 높이 60~70이다. 내부는 벽을 2단의 석괴로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개석 크기는 길이 165, 폭 56, 두께 18이 다. 후면인 동벽은 고르게 다듬은 2개의 화강암 벽석으로 이루어진 반면 북면은 1개 의 장대석으로 상단을 이루었으나 하단은 모두 5매의 견치석으로 벽을 이루었다. 14)백종오·신영문, 『고구려유적의 보고 경기도』, 경기도박물관, 2005, 94쪽. 15)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문화유적조사서』, 1992.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21 ■ 경의선 연결도로(통일대교~장단) 구간 내 유적16) ○ 소 재 지 :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장단면 도라산리 2000년 7월 경의선 철도복원에 이어 8월 문산~개성 간 도로 개설에 합의함에 따 라 경의선 남북연결도로 공사를 위하여 문화유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민통선 지역 에서 도로 확장 및 개설공사구간(통일대교~장단 간 총연장 5.1㎞) 중 지뢰제거작업 이 완료된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와 장단면 도라산리 일대에 이르는 약 4.3㎞를 지 표조사하였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폭넓은 시기의 유물이 지표 상에 노출되어 2000년 11월부터 해당 지구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지 역은 4개 지구, 약 5000평에 이르렀으며, 시굴조사는 유적의 유무확인에 주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1지구에서는 지표상에 노출된 유물 외에는 특별한 유구나 문화층이 발견되지 않 았는데 오랜기간의 경작과 지뢰제거 과정에서 모두 유실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2지 구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분묘군(6기)에 대해서는 전체 확장조사를 통하여 무덤의 구 조와 조성시기 파악을 위한 정밀조사를 진행하였다. 분묘의 조성방법은 모두 암반 을 굴착하여 묘광(墓壙)을 조성한 후 회곽을 안치한 회곽묘(灰廓墓)로 확인되었다. 그 중 1호분에서는 회곽 덮개에 음각으로 “嘉善大夫鄭世雲之(墓)”라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피장자의 이름과 관직의 품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묘 안에서는 총 9개 체의 이골이 수습되었으며 연구결과 16~1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시대 분묘군과 가까운 3지구에서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고분 3기가 함께 발견되 었으나 설계변경으로 현상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밀지표조사(사진 및 실측)만을 실시하였다. 낮은 구릉의 서쪽 경사면에 자리한 3기의 고분 중 1호분은 방형 기단 위에 원형봉분을 갖추고 있으며, 나머지 2기는 원형봉분만 남아있다. 이들은 개성과 불과 10㎞ 떨어져 있는 양호한 형태의 고려고분이나 3호기는 도굴의 흔적이 있어 관 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4지구에서는 지표조사에서 구석기시대 흑요석 제 긁개가 수습되어 구석기문화층의 존재가능성이 높아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유구 4지구 트렌치2 토양쐐기 노출모습17) 4지구 수습 흑요석 긁개18) 16)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남 북연결도로(통일대교~장단간) 문 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 박물관·육군박물관, 2001. 17)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18)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부 록 122 19) 백종오·김병희·한준영 외, 『경의 선 연결도로 비무장지대구간 문화 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박 물관, 2003. 하문식 외, 『비무장지대 도라산 유 적 -경의선 연결도로 비무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박 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울지방 국토관리청, 2003. 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구석기유적에서 나타나고 있는 고토양층이 전체적으로 존재하였으며 지표에서 격지 등 석기유물이 소량 수습되었다. 유구층은 경작지화와 지뢰제거 과정에서 삭토된 것으로 여겨지며 고토양층은 평면상 다각형의 구조를 나 타내는 동시에 쐐기모양의 구조가 발달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수습된 석기류는 흑요석제 긁개와 규질암질, 석영질의 격지 등이 있다. 이중 긁개 는 우리나라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하며 규모가 크고 잔존상태가 양호하여 학술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흑요석은 선사인들 이 정교한 석기를 만들 때 쓰던 돌감으로 그들이 이동하면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선사시대의 문화전파·교류는 물론 사람의 이동관계까지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최 근 임진강을 중심으로 흑요석이 집중 출토되고 있어 향후 이 지역의 선사시대 연구 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1지구에서는 삼국시대 타날문토기편이 채 집되었으며, 2지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편병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기와류와 전류, 토기류, 자기류 등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많은 양의 역사시 대 유물이 다량 수습되는 점은 도라산봉수를 중심으로 활발했던 지역세력의 생활상 을 엿볼 수 있다. ■ 비무장지대 도라산유적19) ○ 소 재 지 :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325전·326전, 314임 일대 남북연결도로 비무장지대(연장 1.8㎞) 공사구간의 지뢰제거가 2002년 12월 완료 됨에 따라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장단면 동장리 일대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가 2003년 1월 13일부터 30일 사이에 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와 장단면 동장리를 지나는 폭 60m의 도로공사 구간을 대상으로 지표조사한 결과 유물산포지 2개소, 분묘 4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발굴조사가 가능한 유 물산포지 1개소와 파괴된 회곽묘 1기, 분묘 분포 가능지역에 대해서 2003년 3월 11 일부터 31일까지 총 20일간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지역인 군사분계선 인근 비무장지대는 대부분 지뢰가 집중적으로 매설되거나 공중 살포된 지역이기 때문에 지뢰제거 작업 이후 문화층이 거의 훼손되어 지표면에 유물이 발견되었더라도 유 적이 온전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나 최초의 비무장지대 발굴조사라는 의의 를 가지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사결과 예상 밖으로 구릉지역의 경사면에 서 일부 유구가 잔존하고 있었다. 시굴조사는 5개 지점 1700여평을 대상으로 실시 하였으며, 조사의 시급성을 감안하여 유구가 확인된 지점은 바로 확장조사가 진행 되었다. 유구는 2지점과 4지점의 확장Tr. 에서 대부분 노출되었는데, 이곳은 군사 분계선 남쪽의 남방한계선에서 약 500m 떨어진 낮은 구릉지대의 남동사면이다. 잔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23 존유구는 회곽묘 1기, 추정건물지, 기와가마, 석렬, 저장구덩, 수혈 등이었다. 조사 전 지뢰제거 작업 시 육군건설단에 의해 회곽묘의 인골이 이장되었는데, 작업시 포 클레인으로 봉분과 회곽을 제거하고 관의 상판이 뜯겨진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상 석과 망주석을 비롯한 석물과 부장된 수의 등은 주변 토사에 묻히거나 방치되어 있 었다. 따라서 흩어진 수의와 관재를 수습하고 석물을 모으는 작업이 선행되었으며, 이후 묘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회곽묘의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경사면의 암반을 굴착한 후 묘광을 두었으며, 묘 광 내에 목곽과 목관을 마련한 후 시신을 안치시키고 그 위로 횡대와 회곽덮개를 덮 고 봉분을 조성한 형태이다. 회곽덮개는 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섞어 만들었는데, 목관 상판과 잇닿은 면에 홈을 내어 안쪽에 횡대를 부착하였으며, 길이 220, 폭 95 규모로 거대하게 제작되었다. 묘의 구조는 합장묘로 합장순서는 남자묘가 먼저 조 성된 이후 남자시신의 우측에 여자묘가 덧붙여진 형태이다. 묘광의 전체 규모는 가 로 200×세로 225이다. 묘광의 깊이는 남자묘가 56, 여자묘가 63이며 회곽의 두께 는 남자묘가 20~30, 여자묘가 16~25 정도로 남자묘가 더 크며 요갱이나 지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목관의 천판에는 각각 “學生安東權氏之(柩)...”(남자묘), “孺人韓山李氏(柩)”(여자 묘)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목곽과 목관은 상협하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목곽의 크기는 남자묘의 경우 머리 쪽의 너비는 64, 다리 쪽의 너비 53이고 길이는 204이 다. 여자묘는 머리 쪽의 너비는 58, 다리 쪽의 너비는 52이며 길이는 184로 남자묘 에 비해 작다. 관재(棺材)는 모두 못을 사용하지 않고, 요철(凹凸) 형태의 홈과 나비 장 등으로 결구하였으며, 한쪽방향으로만 분리되어 매우 견고하게 제작되었다.20) 가장 상태가 양호한 여자묘의 목관은 단축 4매, 장축 4매, 바닥 2매 등 총 10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께는 8에 이른다. 목관은 바닥에 숯을 깔고 칠성판을 마련한 후 시 신을 안치하였으며, 목관에는 소나무재로 제작하고 겉면은 옻칠이 되어 있다. 남자 묘 바닥에는 없는 회곽이 여자묘 바닥에 설치되어 목관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훼손된 상태로 발견된 석물은 상석, 상석받침, 향로석, 북석, 망주석, 기타 기단석 등이 확인되었으며, 제 3땅굴 주변 빈터에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회곽묘 구조는 2001년 민통선 조사 시 합장묘 1호분21)과 유사한데, 목곽을 쓰고 남·여묘의 위치가 바뀐 점이 다르다. 이러한 양상은 벼슬을 하지 않았 던 선비도 재산능력에 따라 화려한 분묘를 조성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 한 것으로 조선후기 매장방식의 변화와 개성지역 양반의 매장풍습을 알 수 있는 자 료이다. 조사결과를 고려한 회곽묘의 조성연대는 수의의 형식이나 회곽묘 주변 석 렬에서 출토된 상평통보 당이전(常平通寶 當二錢, 1679~1731)으로 미루어 1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가장 수량이 많은 출토복식은 조사가 완료된 후 보존처리와 분석, 복원 등의 작업 20) 김익주, 「비무장지대 한산이씨 목관 수종 분석」, 『비무장지대 도 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로 비무 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박물관· 서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386쪽. 21) 1호분 덮개에 “嘉善大夫鄭世雲 之(墓)”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 다.(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의 보고서, 2001, 106~111쪽)

부 록 124 을 세밀하게 진행하였다. 지표조사 시 회곽묘 주변에서는 큰 직물덩어리 1개와 훼 손이 심한 수(繡)베개 등이 수습되었으며, 시굴조사에서는 명정과 다래 그리고 안 동권씨 묘 아래에서 복식류가 추가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복식유물은 세척과정22) 을 거쳐 복식분석(실측 등),23) 직물분석24)과 염료분석,25) 그리고 저고리 유물 복원26) 등을 실시하였다. 분석결과 복식은 모두 부인인 한산이씨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밝 혀졌으며, 수량은 11건 33점이다. 복식의 종류는 저고리, 당의, 장옷 등 3종 10점이 며, 치관제구(治棺諸具)로는 편의 15점, 낙발랑(落髮囊), 이불, 베개 각 1점과 다래 (가체) 1꼭지가 나왔다. 그 외 치마와 편의 조각도 추가로 확인되었다. [표 1] 회곽묘(한산이씨) 출토 복식 목록 복식 명칭 장 옷 당 의 저고리 낙발랑 베 개 편 의 이 불 현 훈 명 정 직물편 다 래 합 계 수량 1점 1점 8점 1점 1점 15점 1점 1점 1점 2점 1점 33점 도라산전망대에서 본 비무장지대 조사지역 원경27) 조사지역 전경28) 2지점 회곽묘 파괴모습29) 2지점 회곽묘 수습조사 후 모습30) 2지점 발굴 조사 후 모습31) 3지점 조사모습32) 22) 이미식, 「비무장지대 한산이씨 묘 출토복식 보존처리」, 『비무장지 대 도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 로 비무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 고서-』, 경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369~378쪽. 23) 송미경, 「비무장지대 한산이 씨 묘 출토복식 고찰」, 『비무장지 대 도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 로 비무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 고서-』, 경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318~351쪽. 24) 조효숙, 「비무장지대 한산이 씨 묘 출토직물 연구」, 『비무장지 대 도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 로 비무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 고서-』, 경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353~368쪽. 25) 이영은, 「비무장지대 한산이씨 묘 출토복식 염료분석」, 『비무장지 대 도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 로 비무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 고서-』, 경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379~385쪽. 26) 복식의 분석결과를 참고하여 전통한복전문가 김혜순에 의해 3 점의 저고리가 복원되었다. 27)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 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3. 28)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 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3. 29) 백종오·김병희·한준영 외, 앞의 보고서 2003, 48쪽 사진 15. 30)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 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4. 31)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8. 32)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의 보고서, 2001, 원색사진 10.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25 이 가운데 저고리와 당의는 묘주의 생몰연대와 신분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었는 데, 한산이씨의 몰년은 18세기 중·후반인 영·정조대로 밝혀졌다. 한산이씨 출토복 식은 세주(細紬)·주(紬)·단(緞)·초(綃) 등 견직물로 제작하였으며, 다른 예와 비교하 여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급 평견직물인 세주와 초를 주로 사용하여 세련된 품격이 복원된 복식35) 복식노출 모습33) 저고리 보존처리 후34) <그림 22> 한산이씨 저고리 (No.27) <그림 23> 한산이씨 저고리 (No.27) 안깃 33) 백종오·김병희·한준영 외, 앞의 보고서, 2003, 49쪽 사진 17. 34)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 의 보고서, 2001, 329쪽. 35)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앞 의 보고서, 2001, 351쪽.

부 록 126 느껴진다. 아울러 복식 4점에 대한 염료분석(염료성분 및 매염제) 결과, 편의 1점은 쪽과 자초로 복합염색하였고 나머지 3점(편의, 곁마기, 베개 각 1점)은 자초염이었 으며, 차자색(茶紫色)이었던 베개에서 철(Fe)매염된 것이 밝혀졌다. 이는 조선후기 풍속화에서 삼회장저고리의 곁마기가 자주색으로 그려지는 예가 많은데 이를 확인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결과이다. 한편 저고리 8점 가운데 ‘거들지 달린 저 고리’, ‘삼회장 저고리’, ‘누비 삼회장 저고리’ 등 3점은 복원되었다. 기와가마는 장축방향이 등고선을 따라 평행하게 조성되었다. 구조는 아궁이가 깊 고 바닥에 작은 할석재가 있으며 소성실에는 기와가 ‘+’형으로 깔려있다. 가마의 좌 측벽에는 1단의 석렬이 3m 길이로 남아있으며 우측벽과 배기구는 온전하지 않다. 이처럼 가마의 구조가 등고선과 평행한 것은 바람이 심한 평야지대의 단독 구릉에 소성한 지역적 특징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가마 윗부분의 폐기구덩에서 출토된 소토와 기와의 양이 적은 것으로 미루어 일시적으로 운영된 가마로 판단되 었다. 기와가마와 추정건물지 등 유구는 회곽묘가 설치되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구조와 입지면에서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형태를 갖고 있어 장단지역 조선시대 생활사 연구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유물은 기와류, 토기류, 자기류, 금속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먼저 기와류는 귀목 문 막새기와와 평기와류, ‘士’명 기와 등이다. 막새 평기와의 배면 문양은 무문, 어 골문, 파도문, 집선문, 직선문, 복합문 등 73점이다. 이들 기와류의 제작시기는 고 려시대 중기에 유행한 귀목문 막새편과 파도문 평기와의 양식이 조선시대 중기로 파악되며, 파도문 평기와는 기와가마의 조성시기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류는 총 130점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파편이다. 확인되는 기종은 호, 시루, 연통 등 생활용기가 주류를 이루며 내외면에 유약이 시유된 시유도기편도 출토되 었다. 토기 구연부의 형태와 내면에 중원문+십자문+횡침선문이 타날된 시유도기 편, 시루와 연통 등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토기류로 판단된다. 자기류는 청자, 분청 사기, 백자 등이 있는데, 청자는 완, 발, 접시, 병 등으로 제작시기는 11~14세기 후 반으로 추정되며, 분청사기는 발과 접시 등이 15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된 다. 백자는 발, 접시, 잔, 호, 제기, 청화백자 등이 있는데 구연부와 굽의 형태로 보 아 17~18세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금속유물은 철제교구와 상평통보가 각 1점씩 출 토되었으며, 뒷면에 ‘黃壽昌’을 새긴 명문벼루 1점도 수습되었다. ■ 도라산봉수(都羅山烽燧)36) ○ 소 재 지 :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산 14번지 도라산봉수는 경기북부지역 봉수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강 북쪽에 위치하며, 개성 36) 김주홍, 「경기북부지역 봉수 의 고찰-도라산봉수를 중심으 로-」, 『남북연결도로(통일대교~장 단간)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육군박물관, 2001, 229~231쪽.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27 과는 가장 가까운 최북단 봉수이다. 위치는 경의선 남북연결도로(국도1호선)와 도 라산역 인근의 북쪽에 자리한 도라산전망대의 우측 봉우리에 소재한다. 이 봉수와 대응노선 봉수 중 하나인 城山(조선시대에는 大山)봉수와는 동남쪽으로 12㎞ 떨어 져 있다. 봉수노선과 성격에 의해 제 3거 육로 직봉의 봉수로 분류된다. 유적이 위치한 도라산은 이 일대에서 제일 높은 해발고도(해발 167m)이며 동남 쪽으로 3㎞ 떨어진 곳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 직선거리 6㎞ 떨어진 곳 에는 임진강의 주요 전략요충지인 초평도를 제어하는 덕진산성이 위치한다. 신라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해서 도라산(都羅山)이라는 전설도 있다. 유적 주변은 현재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는데 관측소가 있었던 정상 일부를 제외하 고 우회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사천강을 넘어 개성 송악산이 정면에서 멀리 마주 보이고 있다. 동남쪽에는 봉수대의 축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석 석재로 축대를 쌓아 놓았다. 현재까지 군사시설로 인해 도라산봉수의 현황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문헌기록에 의해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이 봉수는 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에 ‘도라산봉수’명으로 처음 나타나며, 이 후 조선 전 시기의 각종 읍지에 빠짐없이 기록된 중요한 봉수이다. 여기에는 경기 (京畿) 임진현(臨陣縣)에 속해 “烽燧一處 都羅山 在縣西 北准臨江天水山 東准原平 城山”이라 하여 현의 서쪽에 소재하며 북쪽으로 임강 천수산, 동쪽으로 원평 성산 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장단도호부(長湍都護 府)의 산천 조에서 “봉수가 위치하는 도라산이 임진 남쪽 25리에 있다” 하였고, 봉 수조에는 종래 임진현에 소속되었던 천수산봉수가 이때 장단도호부에 편입된 것이 언급되면서 “都羅山烽燧 北應天壽山 東應坡州大山” 이라 하여 북쪽으로 장단도호 부의 천수산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종래의 원평 성산봉수에 대신하여 새로 신 설된 파주 대산에 응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 산천조에 서는 “都羅山 在府西南十五里 高麗忠烈王 數敗于此山”이라 하여 도라산이 부의 서 남쪽 15리에 위치하며 고려 충렬왕이 이 산에서 여러 차례 패전한 것을 기록하였 다. 『경기읍지(京畿邑誌)』 장단지(長湍誌)에는 “都羅山烽燧 西應開城府松嶽 東準坡 州牧大山”이라 하여 “南의 豊德 德物山→西의 開城府 松嶽, 東의 坡州 馬山→坡州 牧 大山”으로 대응봉수노선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을 통해 도라산봉수의 다음과 같은 변화과정을 알 수 있다. 첫째 도라산봉수의 설치시기는 도라산이 개성(松嶽)과 가깝고 고려 충열왕과의 관련성으 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충렬왕은 간혹 공주와 함께 도라산에 행차하거나37) 또는 이곳에서 수렵을 하기도 하였다38)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둘째, 도라산봉수는 18세기 중엽에 한 차례 한자음의 변화는 있었지만 줄곧 동일명을 유 지하였다. 셋째, 도라산봉수는 대응봉수의 노선이 있어 파주 대산봉수에 응하는 동 쪽노선은 변화가 없었지만, 시대에 따라 북쪽 천수산봉화→서쪽 송악산봉수→남쪽 37) 王及公主 幸都羅山(高麗史 世 家 卷28, 忠烈王1年 4月 癸酉條) 38) 王及公主 獵于都羅山(高麗史 世家 卷28, 忠烈王16年 9月 丁未 條).

부 록 128 덕물산봉수→서쪽 송악봉수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하였다. [표 2] 파주 도라산봉수 주변 봉수 현황 ■ 서종태(徐宗泰) 묘40) ○ 소 재 지 :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남방한계선에서 비무장지대로 진입하면 경의선 철도와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도 라산유적 발굴조사 표지석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300m지점의 도라산 아래 평야에는 달성 서씨의 산소 6기가 육안으로 식별된다. 이곳은 서종태와 그의 9대 39) 김주홍, 앞 논문, 2001, 222쪽. 40) 강신엽, 「경기지역 비무장지대 의 유교문화 -서종태의 사상과 도 라산유적을 중심으로-」, 『비무장 지대 도라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 로 비무장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 고서-』, 경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430~449쪽. 구 분 명 칭 위 치 해발(m) 시 대 노 선 대응봉수 및 거리(㎞) 비 고 육로 봉수 도라산 장단면 도라산리 167 고려 제3거 직봉 천수산(북) ? 파주 성산(동) 12 멸실 성산 파주읍 봉서리 215.5 고려 파주 도라산(서) 12 고양 소달산(남) 14.75 봉서산성 내 대산 파주읍 봉암리 82.4 조선 중기 파주 도라산(북) 12 고양 소달산(남) 13.5 멸실 해로 봉수 검단산 탄현면 성동리 151.8 조선 중기 제4거 직봉 풍덕 덕적산(서) 16 고양 고봉성산(남) 12.5 원형, 방형 유구 형제봉 탄현면 성동리 124 조선 후기 풍덕 덕적산(서) 15.75 고양 고봉(남) 12.5 멸실 경기북부지역 봉수 및 산성분포도39)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29 조, 증조부, 부친, 아들, 손자 등 직계 선조와 후손이 영면한 곳으로 추정되지만, 현 재는 지뢰매설과 인공시설물 설치 등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서종태는 조선시대 효종조에서 숙종조까지 활동한 문신으로서 서인이 노론과 소 론으로 분기될 때 소론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1652년(효종 3)에 태어나 1675년(숙종 1)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680년(숙종 6)에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면 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후에 아들 명균과 손자 지수가 함께 영의정을 역임함 으로써 3대가 영의정에 오르는 역사상 보기 드문 선례를 남겼다. 그는 오랜 관직생 활을 통해 국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며 군주로 하여금 만기(萬機)에 소홀 함이 없도록 성심을 다하였다. 늘 인재를 추천하여 국사를 도모하는 데도 부지런하 였으며, 신하들에 대한 지나친 예우를 삼가고 각박한 법제정을 반대하였다. 국사에 임해서 관용을 베푸는 방향에서 사건을 처리하고자 하였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위법 자를 단호하게 처리하였다. 일본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국익차원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주체적인 업무처리를 중시하였다. 도성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산 성을 축성하여 남한산성과 기각(崎角)의 형세를 형성하면 외적 방어에 유리함을 주 장하였다. 북한산성이 축성장소가 많지 않아 수구(水口)를 높이 쌓는다면 견고하게 수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국가의 부족한 재력과 부족한 물, 큰 규모의 역사(役事)를 우려하여 부작용을 염려하기도 하였다. 1703년경 동지(冬至) 정사(正 使)의 자격으로 중국에 다녀올 즈음 도라산을 왕래하면서 8수의 시를 남겼으며, 그 의 문집으로는 『만정당집(晩靜堂集)』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서종태 묘 외에도 장단에 여러 역사적 인물의 묘소가 있다. 성종 때는 세자의 길흉을 위하여 최호원과 서거정을 시켜서 장단에 위치한 폐비 윤씨 의 묘소를 살펴보기도 하였다.41) 1746년(영조 22)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릉이 처음 발견되었다.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 등은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 비가 발견된 전말을 밝히고서, 왕릉에 대한 일이 사삿집의 무덤과는 다른 사례를 적 용해서 벌목을 금지하는 절차와 석물을 세우고 수호자를 두어, 위로는 전대(前代)를 추념하는 성주의 뜻을 드러내고, 아래로는 추원보본(追遠報本)하려는 신하들의 정성 을 위로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42) 영조는 승지를 보내어 신라 경순왕의 묘에 치제 (致祭)하였다. 묘의 소재를 몰랐었는데, 후예(後裔) 김효대(金孝大) 등이 장단에서 찾 아 개봉(改封)하였기 때문에 영조가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취한 조치였다.43) 고종 때에는 신라 경순왕릉을 보수하고 갑오년 이후 폐지되었던 제사(영조 정묘년부터 실 시)를 회복하기도 하였다.44) 이외에도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문경공(文敬公) 김 안국(金安國), 서경덕, 주계군의 묘 등이 장단에 위치하는 것으로 전해진다.45) 41) 『성종실록』 권215, 19년 4월 경술. 42) 『영조실록』 권64, 22년 10월 병자. 43) 『영조실록』 권90, 33년 7월 신해. 44) 『고종실록』 권43, 40년 11월 14일(양력). 45) 『선조실록』 권166, 35년 9월 임술.

부 록 130 46) 경기도박물관, 『비망록1950 -6.25전쟁 60주년 특별전 도 록-』, 2001, 66~68쪽. 47) 백종오·김병희·한준영 외 , 『경 의선 연결도로 비무장지대구간 문 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 박물관, 2003, 52쪽. 48) 하문식 외, 앞의 보고서, 2003, 213쪽 표지. 49) 경기도박물관, 앞의 책, 2001, 74쪽. 50) 경기도박물관, 앞의 책, 2001, 74쪽. ■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46) ○ 소 재 지 :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400-5 임진각 내 ○ 지정사항 :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78호 이 증기기관차는 6.25전쟁 당시 연합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개성역에서 황해도 한포역까지 올라갔다가 전세가 악화되어 1950년 12월31일 밤 늦게 경의선 장단역 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중국군의 대공세로 후퇴하던 연합군은 이 열차가 적군에게 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폭탄을 설치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이후 60여 년간 군사분계 선 인근의 장단역(장단면 동장리)에 멈춰서 있었으나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 된 후 2005년부터 2년간의 보존처리를 거쳐 2009년부터 임진각 자유의 다리 입구 에 전시되고 있다. 증기기관차의 제원은 길이 15m, 폭 3.5m, 높이 4m이며 무게는 80톤 가량 이다. 일본 가와사키사에서 제작되었으며, 모델명은 마터 2형이다. 기관차 몸체에 는 1,020여 개의 총탄자국이 있으며 바퀴는 휘어져 있다. ■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49) ○ 소 재 지 :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894 ○ 지정사항 :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407호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장단역 부근의 철길을 동서로 연결하는 다리이다. 길이 7.2m, 폭 5.5m, 지상 8m 높이로 일제 표준설계도서에 의해 설계된 역사건물이다. ‘죽음의 다리’라는 명칭은 이곳에서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피살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단역사 주변 기차화통 조사 모습47)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48)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31 51) 하문식 외, 앞의 보고서, 2003, 145쪽 표지사진. ■ 파주 구(舊) 장단면사무소50) ○ 소 재 지 :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515 ○ 지정사항 :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76호 장단역에서 서쪽 능선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는 철근 콘크리트조 1층 건축 물로 건축면적은 216㎡이다. 6.25전쟁 전까지 행정업무를 담당했으나 지금은 곳곳 에 총탄 흔적이 남은 뼈대만 남아있다. 3. 정리하며 파주시의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군사보호구역은 3곳의 마을 외에는 경작지, 산림 지대, 미확인 지뢰지대만이 존재한다. 특히 미확인 지뢰지대에서는 지뢰제거 전에 는 조사가 불가능하며, 제거 후에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지뢰가 있을 수 있기 때 문에 발굴조사에 위험이 따르는 곳이다. 민간인통제구역에 민간인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게 변화하면서 최근에는 덕진산성을 비롯하여 파주 북부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조사도 점차 활기를 띠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가 기대되는 상황이다. 올해 정전 60주년의 해를 맞아 6.25전쟁 정전협정의 결과로 탄생된 ‘비무장지대’ 는 유적 보존 상태는 좋을지 모르나, 역설적으로 한반도에서 유적 조사하기 가장 까 장단면사무소 내부51)

부 록 132 52) 경기도박물관, 『경기도 3대 하 천유역 종합학술조사Ⅰ 임진강』, 2001.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경기 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 서』, 1994. 한양대학교박물관·문화인류학과,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 *이하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53) 김병희, 「경기지역 비무장지대 의 유물과 유적」, 『비무장지대 도라 산 유적 -경의선 연결도로 비무장 지대 구간 시굴조사 보고서-』, 경 기도박물관·세종대학교 박물관·서 울지방국토관리청, 2003, 397~398 쪽 표4) 수정 게재. 다로운 곳이다. 2002년 진행된 비무장지대 시굴조사에서 표토는 폭파작업을 거친 후 중장비를 이용하여 생토층까지 굴토하기 때문에 대부분 문화층은 훼손되었음에 도, 경사가 급한 지형에는 예외적으로 일부 유구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 서 이 지역 문화유적 조사는 안전문제 해결과 동시에 일반지역과는 다른 기술적인 조사 방법 개발이 필요하다. 나아가 효율적인 조사를 위해 남북 공동의 협조체계 구 축과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은 선결 과제로 판단된다.52) [표 3] 파주 비무장지대 주변 문화유적 현황53) 유적명 위 치 종 류 시 대 지 정 비고 1 읍내리 유물산포지 군내면 읍내리 와야두골 유물 조선 2 와야두골 유물산포지 군내면 읍내리 와야두골 유물 조선 3 통일촌 유물산포지 군내면 읍내리 통일촌 유물 조선 4 향교동 유물산포지 군내면 읍내리 향교동 유물 조선 5 서문중묘역 군내면 읍내리 묘 조선 6 해평윤씨 묘역 군내면 읍내리 산117 묘 조선 7 김건식 묘·묘갈 군내면 읍내리 와야두골 묘 조선 8 동래정씨 묘역 군내면 읍내리 묘 조선 9 오목대신 낙향지 군내면 읍내리 382 건물지 조선 10 장단향교터 군내면 읍내리 향교터 조선 11 덕진산성 군내면 정자리 산13 관방 삼국 도기념물 218호 12 정자리 유물산포지 1 군내면 정자리 유물 통신-조선 13 정자리 유물산포지 2 군내면 정자리 유물 조선 14 정자리 유물산포지 3 군내면 정자리 유물 삼국 15 김용성 묘·묘갈 군내면 정자리 묘 근대 16 전우찬 묘 군내면 정자리 묘 조선 17 덕진단 군내면 정자리 산1∼2 사묘 조선 18 이서 선정비 군내면 정자리 선정비 조선 19 정자리 태봉 군내면 정자리 태봉 조선 20 청주경씨 묘역 군내면 방목리 묘 고려-조선 21 강릉최씨 묘역 군내면 백련리 묘 조선 22 순천박씨 묘역 군내면 점원리 묘 조선 23 점원리 고려석실분 군내면 점원리 고분 고려 24 흥낙성 묘역 군내면 점원리 묘 조선 25 홍상한 묘역·함종어씨 묘역 군내면 점원리 묘 조선 26 홍인모·대구서씨 묘갈 군내면 점원리 묘 조선 27 박석명·박계선 묘 군내면 점원리 묘 조선 28 제3땅굴 군내면 점원리 산169-1 땅굴 현대 29 도라산역 장단면 노상리 556 역사 현대 30 노상리 유물산포지 1 장단면 노상리 유물 청동기 31 노상리 유물산포지 2 장단면 노상리 유물 구석기 32 노상리 유물산포지 3 장단면 노상리 유물 구석기-조선 33 노상리 회곽묘 장단면 노상리 묘 조선 34 조랑진 보루 장단면 노하리 조랑진 관방 삼국 35 노하리 유물산포지 1 장단면 노하리 응곡 유물 삼국 36 노하리 유물산포지 2 장단면 노하리 유물 삼국 37 삼거리 유물산포지 장단면 노하리 유물 조선 38 서명빈 묘·묘갈 장단면 노하리 묘 조선 39 한수동 유물산포지 장단면 석곶리 한수동 유물 조선

파주 비무장지대(DMZ) 주변 지역 문화유적 현황 133 유적명 위 치 종 류 시 대 지 정 비고 40 능성구씨 묘역 장단면 석곶리 묘 조선 41 거곡리 유물산포지 장단면 거곡리 유물 조선 42 도라산봉수 장단면 도라산리 산14 관방 고려-조선 43 도라산전망대 장단면 도라산리 14-2 전망대 현대 44 장단면사무소터 장단면 도라산리 건물터 근대 45 서일수 묘 장단면 도라산리 묘 조선 46 서종태 묘 장단면 도라산리 묘 조선 47 도라산리 유물산포지 장단면 도라산리 유물 고려-조선 48 창화사터 장단면 도라산리 절터 조선 49 기차화통 장단면 도라산리 839·889 유물 현대 50 죽음의 다리 장단면 도라산리 894 교각 현대 51 장단역사 장단면 동장리 198 건물지 현대 52 동파리 구석기유적 진동면 동파리 88·89 유물 구석기 53 동파리 유물산포지 1 진동면 동파리 426·463 유물 조선 54 서명선 묘역 진동면 동파리 16 묘 조선 55 오룡동 유물산포지 진동면 동파리 오룡동 유물 조선 56 전진교 유물산포지 진동면 동파리 산2 유물 조선 57 동파리 유물산포지 2 진동면 동파리 유물 구석기 58 동파리 마애사면석불 진동면 동파리 산31-1 불상 고려 도유형문화재 156호 59 권복 묘 진동면 동파리 묘 조선 60 이균 묘 및 묘갈 진동면 동파리 묘 조선 61 한숙 묘 진동면 동파리 묘 조선 62 동파역터 진동면 동파리 건물지 조선 63 서곡리 고려석실고분군 진동면 서곡리 산104 고분 고려 64 서곡리 벽화고분 진동면 서곡리 산112 고분 고려 65 임광 묘 및 신도비 진동면 서곡리 아곡동 묘 조선 66 전주이씨 묘역 진동면 서곡리 묘 조선 67 청주한씨 묘역 진동면 서곡리 장화동 묘 조선 68 한상질 묘 진동면 서곡리 산112 묘 조선 69 두루봉 보루 진동면 용산리 산7 관방 삼국 70 김관 묘 진동면 용산리 묘 조선 71 용산리 선사유물산포지 진동면 용산리 유물 선사 72 용산리 태봉 진동면 용산리 모녀봉 태봉 조선 73 김사직 묘 진동면 용산리 비룡동 묘 조선 74 조경 묘 진동면 용산리 묘 조선 75 김정국 묘역 진동면 하포리 중동 묘 조선 76 정곤수 묘역 진동면 하포리 묘 조선 77 조석문 묘역 진동면 하포리 아곡동 묘 조선 78 하포리 안동권씨 묘역 진동면 하포리 묘 조선 79 허준 묘역 진동면 하포리 산129 묘 조선 도기념물 128호 80 하포리 고인돌 진동면 하포리 고인돌 청동기 81 귀인권씨 묘 진동면 하포리 묘 조선 82 하포리 유물산포지 진동면 하포리 유물 조선

■ History of Tongilchon Eco Museum, Paju, Gyeonggi-do - Project : DMZ Globalization Brand Village Promotion Project - Period : July 2012 ~ Aug. 2013 - Host : Ministry of Security and Public Administration, Gyeonggi-do, Paju - Organizer :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 Participants : Tongilchon residents, Village Steering Committee, Jangdang Office ■ 경기도 파주시 통일촌에코뮤지엄 조성내력 - 사업명 : 지방브랜드세계화 시범사업 - DMZ 브랜드마을 육성 - 주 최 : 안전행정부, 경기도, 파주시 - 주 관 : 경기문화재단 - 참 여 : 마을주민, 주민추진위원회, 장단출장소 ■ 京畿道 坡州市 統一村エコミュジアム造成の内容 - 事業名 : DMZ世界化ブランド村育成事業 - 期 間 : 2012. 7. ~ 2013. 8. - 主 催 : 安全行政部、京畿道、坡州市 - 主 管 : 京畿文化財団 - 参 加 : 村の住民、住民推進委員会、長湍出張所 ■ 京幾道坡州市统一村生态博物馆建造历史 - 项目名称 : DMZ全球化品牌村扶植项目 - 时 间 : 2012年 7月 ~ 2013年 8月 - 主 办 : 安全行政部、京幾道、坡州市 - 主 管 : 京畿文化财团 - 参 与 : 村民、居民推进委员会、长湍办事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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